이냐시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이냐시오 주교는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끌려가
사자의 밥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로마의 신자들이 그를 위해
순교하지 않도록 손을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는 쇠사슬로 묶여 끌려가는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자에게 물려 순교하는 것을
하느님께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순교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냐시오 주교는 107년 로마에서 맹수의 밥으로 순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깊은 신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순교에 대한 열망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성인은 자기 이름(Ignatio)의 뜻 그대로 ‘불’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을 불태워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들과 그 조상들은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였다고 비판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기 시작한다
(루카 11,47-54)
「트집을 잡는 사람」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카11,47).
요즘 정치 현실을 보면, 할 말을 당당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고, 발뺌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자기만 살면 되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우리가 뽑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 불행을 발판 삼아 행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소설은 거짓을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전기는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말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실을 포장하려고 하다가 진실을 잃고 맙니다.
진실은 그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새 삶이 시작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