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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파오(旗袍)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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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파오를 입은 광저우 아시안 게임 시상식 도우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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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한복, 일본은 기모노가 있듯이, 중국은 치파오라는 전통의상이 있다.
선이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는 듯 하고, 모양이 우아한 치파오는 중국 여인들이 특히 즐겨입는 복장이다.
이 치파오는 16C 중엽, 만족의 민족의상이었다.이런 치파오를 누가 설계했으며, 어떻게 보급되었는지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징뽀후라는 동북부 지역에 만족 어민집 딸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같이 고기잡이를 했는데, 매일 햇볕에 그을리고 바닷물에 젖다 보니 얼굴이 까맣게 타서 사람들에게 '까만 여자애'라고 불렸다. 이 처녀는 얼굴도 예뻤지만 손재주가 뛰어나 대대로 물려 내려온 넓은 치마를 뜯어 고쳐 헝겊으로 단추고리를 댄 긴팔 원피스를 만들어 입었다. 옷감도 많이 절약할 수 있었고, 몸에도 딱 맞는 이 옷은 고기잡이 일하기도 편했다.
어느날, 당시 만족 왕의 꿈에 선왕이 나타나더니, 북국에 한 사람이 흙 용을 타고, 머리엔 평평한 검은 투구를 쓰고, 손에는 팔각 백옥도장을 들고, 몸에는 12열쇠가 달린 옷을 입은 황후가 황제를 도와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처녀들을 모았지만 마음에 드는 처녀를 고르지 못한 흠차 대신은 어느날 그곳에 놀러온 '까만 여자애'를 만나게 되었다.
때 마침, 이 처녀는 몸에 단추가 많이 달린 긴팔 원피스를 입고(12열쇠가 달린 옷), 머리에는 흙 대야(평평한 검은 투구)를 이고, 손에는 사각형 두부(팔각 백옥도장)을 쥐고, 토담장(흙 용)을 타고 앉아 번화한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차 대신이 보니 이 처녀야 말로 황제가 말하는 황후가 틀림 없었다. 그 '까만 여자애'를 궁중에 데리고 가 헤이황호후(黑皇后)로 봉했다.
하지만 궁중생활에 적응을 못하던 황후는 땅에 질질 끌리는 넓고 긴 치마를 입기가 불편하다고 단추가 많이 달린 긴팔 원피스로 고쳐 입고 다녔다. 이 일을 안 황제는 황후가 제멋대로 궁중복장을 고친 것은 죄가 있다고 여겨, 궁중에서 내쫓으면서 발로 찬 것이 급소를 때려 황후는 죽게 되었다.
관동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까만 처녀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삼일동안 울며,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생전에 그녀가 입던 긴팔 원피스를 만들어 입었다. 이상하게도 이 옷을 입은 처녀들은 모두 몸매가 예뻐졌는데, 이는 죽은 황후가 암암리에 그녀들을 위해 치장을 해준 것이란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초의 치파오 길이는 발목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만족 처녀들은 시집갈 때만 발목을 넘기는 결혼 예복인 치파오를 입었다. 일반적으로, 만족 귀족 여인들이나 궁중 여인들은 3㎝ 높이의 나팔형 하이힐을 신었는데, 신발을 덮기 위해 발목을 넘기는 치파오를 입었다.
순치 원년에 청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치파오는 중원 일대에 보급되었고, 나중에 만족과 한족들의 생활이 융합되면서 치파오도 한족 부녀들에게 점차 받아들여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치파오는 전국으로 펴졌고,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서방의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서 치파오의 길이도 따라서 짧아져 무릎을 약간 넘겼고, 옷소매도 짧아졌다.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치파오의 길이가 다시 길어져 땅에 닿았으며, 옆 트임이 점점 높아져 허벅지에 이르렀고, 허리선은 잘록하게 만들어 여인의 곡선미를 살렸다. 1940년대 와서는 치파오의 길이가 다시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옷소매가 완전히 없어졌다.
치파오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모양과 색상이 다양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게 되었다.
또 체형에 따라 그 아름다움도 달라, 마른 체형, 뚱뚱한 체형, 키 큰 체형, 키 작은 체형 모두가 입어도 아름답다.
심의와 파오
실제 치파오의 기원은 멀리 춘추전국시기의 심의(深衣)로 거슬러올라간다. 심의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던 옷이다. 후세의 파오(袍: 중국식의 긴옷)는 아마도 이 심의와 어느 정도 연원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사실 심의는
파오와는 다소 다르다. 심의는 투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한 듯한 효과를 나타내고, 파오는 원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의 구분이 전혀 없다. 후에 파오는 점진적으로 안정된 복식 스타일로 정착되어 발전하였다.
파오는 한대부터 관복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X자형 깃에 품이 넓고, 길이가 발등까지 닿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이 좁고, 팔꿈치 부분이 원호 형태였다.
파오의 스타일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품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에서 즐겨 입었다.
소수민족이나 유목민족 지구에서 유행한 파오는 일반적으로 말타기나 활쏘기 등 격렬한 활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몸에 꽉 끼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오는 대체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소매가 좁으며 품이 몸에 맞았다. 역사적으로 한족들도 이렇게 몸에 꽉 끼는 스타일의 파오를 여러 차례 수용한 적이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이 추진한 호복(胡服: 북방 유목민족 복장) 차림의 말타기와 활쏘기가 비교적 전형적인 사례이다.
당대(唐代)에도 호복은 일시에 유행하였는데, 개원(開元: 713~741) 천보(天寶: 742~755) 연간에 호복은 호장(胡粧: 유목민족 치장), 호기(胡騎: 유목민족의 말타기), 호악(胡樂: 유목민족의 음악)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遼) 금(金) 원(元)과 청(淸) 왕조 등 소수민족 정권의 통치시기에 몸에 꽉 끼는 파오는 복식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청대는 통치시기가 가장 길면서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파오는 전형적인 복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최초의 치파오
최초의 치파오 길이는 발목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만족 처녀들은 시집갈 때만 발목을 넘기는 결혼 예복인 치파오를 입었다. 일반적으로, 만족 귀족 여인들이나 궁중 여인들은 3㎝ 높이의 나팔형 하이힐을 신었는데, 신발을 덮기 위해 발목을 넘기는 치파오를 입었다.
파오는 한대부터 관복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X자형 깃에 품이 넓고, 길이가 발등까지 닿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이 좁고, 팔꿈치 부분이 원호 형태였다. 파오의 스타일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품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에서 즐겨 입었다.
청파오
청대 후기에 만주족 여인들이 입었던 창파오(長袍)는 품이 넓고, 선이 곧고 강하며, 길이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위앤바오링(元寶領)"은 아주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옷깃의 높이가 볼을 덮어 귓볼까지 이르렀으며 파오의 표면에는 형형색색의
무늬를 수놓았고, 옷깃, 소매, 옷섶, 옷자락에는 모두 여러겹의 넓은 단이 있다. 함풍(咸豊: 1851~1861) 동치(同治: 1862~1874) 연간에는 이러한 단을 넣는 것이 크게 유행하여 원래의 옷감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만주족 여인들의 파오에 치장한 다양한 장식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순치 원년에 청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치파오는 중원 일대에 보급되었고, 나중에 만족과 한족들의 생활이 융합되면서 치파오도 한족 부녀들에게 점차 받아들여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신해혁명을 거치면서 치파오는 전국으로 펴졌고,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서방의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서 치파오의 길이도 따라서 짧아져 무릎을 약간 넘겼고, 옷소매도 짧아졌다.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치파오의 길이가 다시 길어져 땅에 닿았으며, 옆 트임이 점점 높아져 허벅지에 이르렀고, 허리선은 잘록하게 만들어 여인의 곡선미를 살렸다. 1940년대 와서는 치파오의 길이가 다시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옷소매가 완전히 없어졌다.
이렇게 치파오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모양과 색상이 다양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내게 되었다. 또 체형에 따라 그 아름다움도 달라, 마른 체형, 뚱뚱한 체형, 키 큰 체형, 키 작은 체형 모두가 입어도 아름답다.
치파오의 종류
청(淸) 순치(順治) 원년(1644)에 세조(世祖)가 중원으로 쳐들어와 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전중국 통일하였다. 그후 정권이 점차 안정되면서 변발의 강요와 함께 의복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상의에 치마를 입던 투피스 형식의 복장은 한족 여인들이 집안에 있을 때만 입었고,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파오를 입어야만 했다. 그 결과 치파오의 종류도, '차오파오'(朝袍), '롱파오'(龍袍: 용포, 황제가 입던 용무늬를 수놓은 예복), '망파오'(?袍: 망포, 대신들이 입던 이무기 무늬를 수놓은 예복), '창푸파오'(常服袍: 평상복) 등으로 많이 늘어났다.
의미상에서 보면 치파오(旗袍)는 만주족들이(남녀 불문) 입던 창파오(長袍)이지만, 팔기(八旗)의 여성들이 평상시에 입던 창파오만이 후세의 치파오와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그림1) 예복으로 사용한 차오파오와 망파오 등은 통상적으로 치파오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치파오의 발전
많은 유학생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서양 문물을 배우도록 하고, 군대도 신식 군대로 개편하였다. 중국의 학생과 군인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학생 체육복, 모자와 서양식 군복, 모자, 양복을 수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서양 의상의 수입은 미의 가치 척도 평가에도 영향을 미쳐 일반사회의 복식 관념을 변화시켰다.
그후 치파오는 중국과 서양이 융화된 새로운 스타일로 발전하였으니, 치파오가 서양의 영향을 받아 개량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성공으로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가 붕괴되면서, 서양식 의상이 중국에 자유롭게 보급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전통적인 예교와 교화 관념이 희석되고 복제(服制)의 엄격한 등급도 사라졌다. 이로써 의상에 있어서 평민화 국제화 현상이 출현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으며, 치파오도 오랜 전통의 속박의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족 정권의 패망으로 당시에 치파오를 입는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서양식과 중국식이 혼용되면서 옛날 만주족 여인들의 전통적인 창파오는 사라지고 새로운 스타일의 치파오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패션 스타일은 청왕조 때의 화려하고 복잡한 양식에서 간결함을 지향하면서, 색상도 우아함을 추구하고 여성의 자연미 표현을 중시하였다.
치파오는 처음에는 마갑(馬甲)의 형식으로 출현하였다. 마갑은 길이가 발등까지 내려오는데 짧은 솜저고리 위에 걸쳐 입었다. 그후 마갑을 소매가 있는 양식으로 개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신식 치파오의 추형이다.(그림5) 이러한 신식 치파오를 유행시킨 이들은 상해 지역의 여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학생들은 지식여성의 대표로써 사회의 이상형이었다. 그녀들은 문명의 상징이자 유행의 선도자였기 때문에 사회 유명인사나 화류계 여인 등은 모두 여학생 차림을 하고 다녔다. 1930~40년대는 치파오 전성기로 그것의 기본적인 윤곽은 이미 성숙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북벌전쟁 시기에 유행한 신식 치파오는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와 달랐다. 1930년대 후기에 출현한 개량 치파오는 구성상에서 서양식 재단 방법을 흡수하여 품을 더욱 몸에 맞게 만들었다.
치파오는 청대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에서 탄생되어 나왔지만, 옛날 스타일을 훨씬 벗어나서 중국과 서양의 복식 특징을 융합한 근대 중국 여인의 표준 의상이 되었다.
중국 전통복장 치파오는 치파오는 왜 옆이 트였을까?
중국에 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식당이나 민속 거리에서 중국 전통복장 치파오(旗袍)를 입고 서 있는 여성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치파오는 허리 라인이 예쁘고 몸매를 살려 줌은 물론 약간은 섹시(?)해 보이기까지 해 많은 외국 여성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특히, 헐리우드 배우 니콜 키드만이 오리엔탈풍의 치파오를 즐겨 입으면서 서양인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아 졌으며 다양한 장르에서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인정 받고 있는 가수 샤데이가 콘서트에서 치파오를 입고 등장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치파오는 현재 중국 전통복장임은 물론 세계인이 즐겨 입는 옷으로 인정받고 있다.
치파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옆 트임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치파오에 옆 트임이 생긴 원인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약간씩 주장이 다르다. 한국과
는 달리 성적으로 비교적 개방적인 중국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운 허리 라인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몸에 달라붙는 형태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활동하기가 불편해 어쩔 수 없이 옆 트임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 중 하나는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실용적인 것을 중시해 왔는데 옷을 만들 때도 지나친 장식을 피하고 최소한 천을 적게 쓰려다 보니 현재의 치파오처럼 몸에 달라 붙는 모습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옆 트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약간 우스개 소리이긴 하지만 예전에 중국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았는데 남성들에게 ‘눈요기’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일부러 옆 트임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런 주장도 있다. 중국의 전통 복장 치파오는 원래 만주족(滿州族) 부녀가 입던 옷이었다. 만주족은 기마 민족으로 치파오를 입고 자주 말을 타야 했는데 자연스레 옷을 찢기 시작했고 그것이 기원이 돼 옆 트임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치파오는 1920년대 초부터 한족 여성이 입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인들은 ‘치파오’라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의 여성 복장은 원래 직선식 재단제작을 채용해 가슴, 어깨, 허리, 엉덩이가 일직선으로 만들어져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내지 못했다. 치파오도 처음에는 중국 여성 복장의 이런 특징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중국 여성들도 아름다운 곡선미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디자인도 수십 번의 개조를 통해 여성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그렇게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로인해 중국과 서양 문화의 충돌이 잦았던 것이다.
치파오가 처음 만들어 졌을 당시에는 왼쪽 옆 트임을 하지 않았다. 그 이후 치파오는 팔 소매를 올리는 동시에 천천히 왼쪽 양 옆을 트기 시작했다. 그 후 점점 더 높게 트게 됐으며 결국 무릎에서부터 나중에는 허벅지 높이까지 트게 됐다. 한때는 사람들의 반대로 다시 무릎 아래까지 트기도 했지만 여론의 압력이 감소되자 또다시 트임의 위치를 높이기 시작했다. 1933년 이후에는 허벅지까지 드러낸 치파오가 유행하기도 했다.
전통 치파오는 상하 일직선으로 재단을 제작하고 높은 칼라를 유지했다. 1930년대 초 허리라인을 점점 살리면서 1934년 이후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게 됐다. 높은 칼라도 점점 낮아졌으며 나중에는 칼라마저 없어졌다. 현대적 감각을 살려 선과 미를 추구하자는 측과 전통을 유지하자는 양자의 충돌로 치파오는 점점 시대, 생활에 맞춰갔다. 원래의 밋밋한 디자인에서 벗어나 경제적이고 편리하며 아름답고 몸에 달라 붙게 변화됐다.
50년대부터 개혁개방 전까지 치파오는 사구(四舊: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로 오해 받기도 했다. 폐렴으로 85세의 나이에 별세한 전 중국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가 외국 순방시 치파오를 입어 문화대
혁명 시기 큰 죄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상의 개방을 촉진했다. 단조롭던 검은색, 회색, 곤색도 오색영롱한 색으로 대체됐다. 소실된지 10년이 지난 후 치파오가 다시 미를 추구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시작했다.
치파오가 겪은 수난이대는 중국인들에게 있어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국의 전통 복장 치파오(旗袍)는 원래 만족 부녀의 복장이었다. 1920년대 초부터 한족 여성이 입기 시작했다. 중국 여성 복장은 직선식 재단 제작을 채용 가슴, 어깨, 허리, 엉덩이가 일직선이 돼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을 나타내지 못했다. 치파오도 처음에는 중국 여성 복장의 이런 특색을 유지했었다.
서양 문화의 영향으로 중국 여성들도 아름다운 곡선미를 느끼게 됐다. 치파오 디자인은 수십번의 개조를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표현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렇게 순조로운 것이 아니다.이로인한 중서 문화 충돌의 ‘시소게임’이 치파오에서도 나타났다.
예전에 치파오는 왼쪽 옆을 트지 않았다. 그 이후 치파오는 팔 소매를 올림과 동시에 천천히 왼쪽을 양 옆으로 트기 시작했다. 후에 점차 더 높게 트게 돼 점차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트이게 됐다. 한 때는 사람들의 반대로 다시 무릎 아래까지 트기는 했지만 여론의 압력이 감소되자 또 다시 높이기 시작했다. 1933년후에는 허벅지까지 트인 치파오가 유행했다.
전통 치파오는 상하 일직선으로 재단을 제작하고 높은 칼라를 유지했다. 1930년대 초허리라인을 점점 살리면서 1934년 이후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게 됐다. 높은 칼라도 점점 낮게 변했으며 나중에는 칼라마져 없는 치파오로 변형됐다.
현대적 감각과 전통을 유지하는 선과 미를 추구하는 사상조류의 충돌로 치파오는 점차 시대, 생활에 근접해 원래의 디자인에서 벗어나 경제적이고 편리하며 아름답고 몸에 달라 붙게 만들어 졌다.
50년대부터 개혁 개방 전 치파오는 사구(四旧), 봉건, 자본, 수정주의(封、资、修)로 오해 됐다. 당시의 국가주석 류사오치(刘少奇) 부인 왕광메이(王光美)가 외국 방문시 치파오를 입어 문화대혁명 시기 큰 죄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상의 개방을 촉진했다. 원래 단조롭던 검은색, 회색, 곤색도 오색영롱한 색으로 대체 됐다. 소실된지 10년이 지난 후 치파오가 다시 미를 추구하는 여성들로부터 유행되기 시작했다.
상하이시 역사문물관 판원하이(范文海) 부 연구원은 "중서 문화 교류에서 치파오는 일종의 중국과 서양의 장점을 취해 합해진 상하이 풍격을 띤 여성 복장으로 중국 여성의 국제복 장이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치파오(旗袍)의 원류]
치파오의 기원은 멀리 춘추전국시기의 심의(深衣)로 거슬러올라간다. 심의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던 옷이다. 후세의 파오(袍: 중국식의 긴옷)는 아마도 이 심의와 어느 정도 연원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사실 심의는 파오와는 다소 다르다. 심의는 투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한 듯한 효과를 나타내고, 파오는 원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의 구분이 전혀 없다. 후에 파오는 점진적으로 안정된 복식 스타일로 정착되어 발전하였다.
파오는 한대부터 관복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X자형 깃에 품이 넓고, 길이가 발등까지 닿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이 좁고, 팔꿈치 부분이 원호 형태였다.
파오의 스타일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품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에서 즐겨 입었다.
소수민족이나 유목민족 지구에서 유행한 파오는 일반적으로 말타기나 활쏘기 등 격렬한 활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몸에 꽉 끼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오는 대체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소매가 좁으며 품이 몸에 맞았다. 역사적으로 한족들도 이렇게 몸에 꽉 끼는 스타일의 파오를 여러 차례 수용한 적이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이 추진한 호복(胡服: 북방 유목민족 복장) 차림의 말타기와 활쏘기가 비교적 전형적인 사례이다.
당대(唐代)에도 호복은 일시에 유행하였는데, 개원(開元: 713~741) 천보(天寶: 742~755) 연간에 호복은 호장(胡粧: 유목민족 치장), 호기(胡騎: 유목민족의 말타기), 호악(胡樂: 유목민족의 음악)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遼) 금(金) 원(元)과 청(淸) 왕조 등 소수민족 정권의 통치시기에 몸에 꽉 끼는 파오는 복식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청대는 통치시기가 가장 길면서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파오는 전형적인 복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현대의 치파오(旗袍)]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패션 유행의 선도 그룹은 평민이었으며 그들은 소박하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의상에 있어서 사람들의 미적 추구는 거의 대부분 혁명사업에 대한 열기로 변화되었다. 치파오가 대표하는 유유자적한 숙녀형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존재할 공간을 상실함으로써 치파오는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의 의상은 단순함과 소박함을 중시하였는데, 남성복은 중산복(中山裝), 학생복(學生裝), 춘추삼(春秋衫), 작업복(工作服) 스타일의 자켓, 군용 외투(軍大衣), 파커가 위주였고, 여성복은 원피스 스타일의 리앤이췬(連衣裙)과 레닌복(列寧裝)이 유행하였다. 많은 여성들은 앞에서 말한 남성복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색상은 녹색, 남색, 검정색, 회색 등 단조로운 색상이 대부분이었다.
1956년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다소 호전되었다. 그 이유는 구소련의 고위급 인사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중국인의 의상이 사회주의 대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다고 지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1956년부터 중국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무늬가 있는 의상을 입도록 권유하였던 것이다.
1956년 상해시 부녀연합회와 미술가협회가 공동으로 패션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아름다운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다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로써 치파오도 다시 새로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0년대의 치파오는 구시대적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났다.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장식을 없애고, "실용성, 경제성, 심미성"의 추구를 의상과 나염을 포함한 공예미술계에 보편적으로 요구하였다. 치파오의 디자인은 간결하면서도 수수하고, 허리 품은 40년대보다 넓어졌으며, 자수와 테두리 등의 장식을 아주 적게 사용하고, 색상은 우아하면서도 조화로움을 추구하였다.
치파오를 입은 송혜교
치파오를 입은 송혜교
첫댓글 우리 한복이 많이 달라졌듯
차파오도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화려하면서도 기모노보다 간편하고
각선미 있는 여자들이 입으면
몸매 과시에도 딱이겠습니다~!~~^^
민족마다 고유한 전통 복장이 있는데
자기의 전통 복장을 입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게 느껴져요.
한복은 한국인, 기모노는 일본인이, 치파오는 중국인이, 아오자이는 월넘여인이 입었을 때 가장 예쁘게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