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백석
북관(北關)에 계집은 튼튼하다
북관(北關)에 계집은 아름답다
아픔답고 튼튼한 계집은있어서
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아
검정치마에 받쳐 입은 것은
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었드니
어느 아침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퍼러운 언덕길을
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어휘풀이]
-길동 : 깃동, 저고리나 웃옷의 목둘레에 둘러대는 다른 색동
-가퍼러운 : 가파른
[작품해설]
이 시는 백석이 함흥에서 거주하면서 현지의 한 여신을 통해 느낀 감상을 간단히 묘사한 소품이다. 그러나 짧은 시행 속에 적지 않은 시상이 함축되어 있어 백석의 시재(詩才)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전체 12행을 전후 각 6행씩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북관의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에 대한 시적 화자의 관심의 표현이다. 객지 생활의 고적함 속에서 ‘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고 ‘검정치마 받쳐 입은’ 여인을 보는 것은 화자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다. 화자는 여인에 대한 관심을 꿈으로 간직할 뿐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전달해 보지도 못하고 있다.
후반부는 이러한 여인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한번 발을 건네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는데, 화자는 어느 날 그녀가 이미 결혼하여 어린 아이까지 딸려 있는 유부녀임을 깨닫는다. 전반부의 단아한 차림과는 달리 여인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 손에 어린 것의 손을 끌고 / 가퍼러운 언덕길을 / 숨이 차서’ 올라 간다. 이러한 생활고에 찌든 듯한 여인의 모습을 본 화자는 자신의 기대감이 무너지는 것을 깨닫고 서러움을 느낀다.
이처럼 이 시는 한 여인을 보고 느끼는 시적 화자의 감정의 변화를 차분하게 드러낸다. 감정의 직접적인 토로 없이 화자의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는 아쉬움의 표현이 산문적 진술 속에서 평이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객관적 거리 속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 여인의 뒷모습과 객수(客愁)에 젖은 화자의 슬픈 모습이 적절히 오바랩(overlap)되고 있다.
[작가소개]
백석(白石)
본명 :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보고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1995년 사망
시집 : 『사슴』(1936), 『백석시전집』(1987), 『가즈랑집 할머니』(1988),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멧새소리』(1991), 『내가 생각하는 것은』(199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97), 『집게네 네 형제』(1997), 『백석전집』(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