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5일
사순
제4주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3,14-21)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hat the world might be saved through
him.
말씀의 초대
역대기의 마지막
단락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귀환을 허락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
멸망을 겪었어도, 그 파멸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역대기는 앞날의 희망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죄로 죽었던 우리를
은총으로 구원하시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준비하셨다(제2독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을 때에는 빛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빛을 피해 숨는 이들도 있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들어 올려진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의 특징적인 용어입니다. 요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때를
예수님께서 현양되시는 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이 드러나는 때라고 표현합니다. 요한 복음서 전반부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심지어 그분께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시기마저도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시기, 표징을 보여 주시는 시기로 이해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야말로 비로소 현양의 때, 영광의 때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극악무도한
흉악범이 비참하게 처형되는 순간에 불과하고, 좀 더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무죄한 의인이 이 세상의 권력에 불의하게 희생되는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당신 외아드님이 가장 무력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기에 하느님의 아드님, 창조 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 신성을 지니신 그분께서 불의한 힘에 의하여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힘의 행사가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구원을 주십니다. 세상을 위하여 이렇게 생명을 바치시는 그 사랑이, 이 세상의 권세보다 강한
예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구원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전능, 예수님의 현양은 그 전능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氣대로
살아야 구원
-이기정신부-
여당은 야당을
심판하려고, 대통령을 심판하려고 의원된 분도 있네요. 남편이 부인을 심판하려고, 부인도 남편을, 자녀가 부모님을 이게 뭡니까. 이렇게 사니 식은
땀 나네요. 만물들은 서로 어울리지 심판들 안하거든요?
남녀노소, 전라도와
경상도가, 대 중 소 기업들, 모두가 자연처럼만 삽시다. 하느님의 기(氣)님이신 예수님을 믿어 모두가 자연스레 어우러져 삽시다. 예수님은 자연의
힘(하느님의 氣)대로 살아서 모두가 구원되라 하셨잖아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단절을 통한 새로운
시작'
-박재식신부-
오늘
시편(화답송)을 보니 카리브해 출신 흑인 혼성 그룹 ‘보니 엠’(Boney M)이 생각납니다. 1978년 발표한 ‘바빌론의 강’(Rivers
of Babylon)은 레게음악, 흑인 특유의 리듬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흥겹게 했습니다. 하지만 노래의 가사는 흥겨운 리듬과는 다르게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 배어있습니다.
‘바빌론의 강’의
내용과 비슷한 처지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 합창 ‘가라, 내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타고’를
들으면서 한 주간을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 합니다. 주변 상황이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더라도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하느님 자비를 기억하면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은 정말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에
몰래 찾아온, 당대 유명한 바리사이 니코데모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하신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위로부터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영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의 여러 말씀과
신학적 설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는 말씀에 대한 묵상과 해설을 통해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뱀인지 나와 있지 않지만 민수기 21장
4-9절에 죽음의 원인과 새로운 생명이 설명돼있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뱀같이 슬기롭고”(마태 10,16)라는 구절 외에는 뱀은 간사하고 사람에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 본질과는 대립적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뱀은 당시 사회에서 지혜의 상징이자 치료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뱀은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생명’과 관련이 있는 사상이자 학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주님 말씀을 따라 ‘구리 뱀’을 만듭니다(민수 21,9).
구리는 이집트가 히타이트 국가와의 전쟁으로 철기문명을 접한 후 이집트인들의 자존심이 됐습니다.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도구이자 버려야 하는 폐물이 되었습니다. 즉 구시대의 가치와 우상을 높이 매달아 단절시키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생명을 살게 된 것입니다.
구리 뱀 사건으로
아담 이후 단절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모세와 그의 동료들은 노예로 살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폐습을 높이 매달았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들어올린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들어올려짐’은 단절과 외면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죄수를 높이
매달고 온갖 욕설과 폭행을 하는 인류의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희생과 봉사를 통한 영광과 명예의 의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극히 존경하는 경우 어깨 위에 들어올립니다. 또 군중 앞에 올려서 환호와 갈채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에 지니고 있는 욕심과 편협한 사고방식을 매달고 철저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한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본받아 매일
매일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고통받던 이집트 시대에 하느님과의 소중한 만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그릇된 즐거움에 철저히 순응하는 삶으로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처절한 치욕과 아픔을 체험하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됐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우리에게도 또 다른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구시대 유산과의 단절을 통해 위에서부터 새로이 태어납시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안형준
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도록 한 이유가 인류에 대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하느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고, 바로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구원을 결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셨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빛(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빛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고, 빛의 비추임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곧 옳은 것을 행하고,
옳지 않은 것을 멀리하는 삶,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열심히 하려는 사람을 본받으려는 삶.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는
삶. 그 삶이 바로 빛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반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의 요구에 따라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스스럼없이 남을 짓밟고 갑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죄의식도, 죄책감도,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숨어 살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 어두움을 털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길 바라십니다. 빛이신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내 삶이 그 어떠한
흠도 티도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부족하여 매번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족한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관심과 무관심한
태도
-채동호신부-
오늘 제1독서는 주
하느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것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던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처참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그 무관심한 태도의 결과는 왕국의 멸망과
죽음, 그리고 타국에서의 유배생활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인간들은
주님의 말씀과 경고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늘
취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의 증언대로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 인 간들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욱
크고 깊은 관심을 보이시며 인 간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외 없이 주님께는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 관심을 오히려
지극한 관심으로 되갚으시는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각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있으나 마나 한 무관심의 관계가
아니라 더욱 긴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우리와
맺기 바라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동안 일상
안에서 주님을 잊고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면, 이제 우리도 주님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맺기 위하여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고쳐야 하 겠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최우선적인 관심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께 우리의 참된 평화가있고 참된 생명과
구원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일상
안에서 늘 주님을 잊고 살면서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와 고통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계속 고집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전혀 알 길 없고 주 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으로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증언입 니다. 참된
믿음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우리는 죄인으로 판결받은 것입니다. 그런
죄인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 로 특히 이
은혜로운 사순 시기에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불행을
이용하여 행복을 배우는 사람
-박영식신부-
어느
날 나는 버스 안에서 한 소녀를 보았다. 그는 무척 쾌활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가 부러웠다. 그때 이 소녀는 버스에서 내리려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것이었다. 소녀는 내 옆을 지나가며 살며시 웃음을 입가에 띠며 “고마워요.” 하며 지나가게 자리를 만들어준
것에 감사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이러게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제가 투덜거리거나 불평하면 용서해 주세요. 제게는 다리가 두개나
있어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답니다. 저 아름다운 소녀처럼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이웃에게 고마워할 줄 알게 해주소서.” 나도
버스에서 내렸다. 껌을 파는 소년을 보았다. 껌을 하나 살려고 다가갔다. 그는 미남에다 매력적이었다. 껌을 사려하자 소년이 무척 기뻐했다. 내가
껌을 받아들고 돌아가려는데 소년이 “고마워요. 친절하게 제 말을 들어주셔서.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볼 수가 없답니다.” 그때 나는 다시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제가 투덜거리거든 용서하세요. 제게는 눈이 두개나 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잖아요. 저 앞을 못 보는 소년처럼
늘 고마워할 줄 알게 해주소서.” 또 나는 길을 계속 가다가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 가까이 아이 하나가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아이에게 물었다. “애야, 너도 가서 아이들과 놀지 그래.”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이는 앞만 뚫어지데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아예 듣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을 짐작했다. 자기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내가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알고 얼른 자리를 비키는 것이 아닌가? 또 나는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제가 불평하면
용서하세요. 제게는 귀가 두개나 있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잖아요. 저 앞을 못 보는 소년처럼 남을 배려할 줄 알게 해주소서.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고,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하느님, 제가
불평하거든 용서하세요.”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이르셨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물은 니코데모에게 이 재생이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가져다주는 열매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힘으로 모든 죄의 뿌리인 이기심을 버리고 거룩한 마음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했다. 천주교 신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신자가 된 목적은 불행을 모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행과 온갖 고난을 겪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함이다. 특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겪는 고통은 예수님의
운명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어차피 받는 불행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불행을
모면할 길은 없다.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행을 밟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이 있다.
불행은 때때로 유일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불행을 이용할 수 있다. 불행 앞에 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행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오노레
더 발자크)
사람은
불행에 빠져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이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행복은 훌륭한 선생이다. 그러나 역경은 그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다. 불우한
사람들, 병자들, 정박아들, 불구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음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래서
불만이 많은 자들을 자기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불우시설로 데려가 현장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고마워하는 사람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어김없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면
자기의 행복은 갑절로 커진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모든
불행과 고통과 죽음은 인류가 죄를 짓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불행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은 인류가 받아야 하는 고난을 대신해서 당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고통 덕분에 자기가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은 없다. 남들이 나를 비추어 주기 때문에 나에게서 빛이 나온다.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때문에 행복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행한 사람의 침묵이 없었던들
행복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안톤
체호프)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는 그 소녀, 앞을 못 보는 그 껌팔이 소년, 들을 수 없어 친구들과 함께 놀지 못 하는 그 소년은 고통 속에 매여 있지 않고 고통을
이겨냈다. 그래서 미소를 잊지 않고 고마워할 줄 알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가르친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성령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니코데모와 대화하면서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인물이며,
유대
최고회의 의원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저명 인사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가 유대아의 지도급 인사로서는 드물게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그 대화의 내용은 속기록이나 녹취록을 옮겨 적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수십
년이 흐른 다음,
요한복음서를
집필한 신앙공동체가 제자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를 상기하면서,
그들이
믿던 바를 그들 방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인 양 알리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내용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공동체는
십자가를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하였습니다.
구리
뱀의 이야기는 구약성서 민수기(21,4-9)가
전해주는 고사(故事)입니다.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고 있을 때,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었고,
물린
사람들은 죽어갔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높이 달았더니,
그
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복음서는
그 고사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날 광야의 구리뱀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징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결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결과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할 때,
구원에
이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시지 않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외면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며 어둠 안에 머물면,
심판을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의 진리를 읽어내어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빛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이십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미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빛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4-5).
같은
말이 오늘의 복음에도 반복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보여준 하느님의 생명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그
빛 안에서 그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실천하며 가르친,
하느님의
사랑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어둠 안에 있으면,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빛 안에 삽니다.
구원은
우리의 자유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어떤 혜택,
즉
요사이 말로 ‘대박’이
아닙니다.
구원은
무조건 믿어서 얻어내는 보상도 아니고,
인간의
신심(信心)행위에
대한 포상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빛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사는 길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이 보여주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비굴한 순종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일신(一身)의
영달을 위해 하느님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
재물이나
지위(地位)
하나를
얻어,
뽐내며
살기 위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도 사랑합니다.
복음서는
그 사랑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正體性)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은
하느님 자녀의 당당한 몸짓입니다.
흔히
신앙은 우리의 사고를 초월하는 교리를 믿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모순된 말을 믿고,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지킬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금육(禁肉)과
금식(禁食)을
비롯해서 주일 미사참례 의무와 고해성사 의무 등 교회가 만든 법규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은총을
얻는 방법을 강구하고.
전대사와
한대사를 얻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며,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살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세들은 신앙의 빛을 잃고,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게 하는 어둠입니다.
신앙은
합리적 사고를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합리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켜야 할 것을 강요하는 율사들을 비난하였습니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루가
11,52).
신앙은
은총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빛으로 살아계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오.”(요한
12,26).
예수는
우리가 경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는 곳에 하느님은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어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제도와 법규들도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것들이
과연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몽매하던 유럽 중세에 만들어져,
교회
안에 자리 잡은 제도(制度)와
관행(慣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는 복장(服裝)과
존칭(尊稱)들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적 어둠의 산물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둠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감춰버리는 어둠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둠 안에는 인간의 허세(虛勢)와
비굴(卑屈)함은
보여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빛과 예수님이 실천하신 진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의
첫 번째 편지는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8)
◆
시험만 합격한다면,
취업만 된다면, 로또 복권에 당첨만 되면.... 등등의 조건을 들어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될까요? 정말로 장밋빛 인생이 자기 앞에 펼쳐질까요? 아닙니다. 아마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서
‘이것만 해결된다면’이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힘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동영상 하나가 생각납니다.
눈이 너무 많이 온
어느 날이었습니다. 출근을 위해 집밖에 나오니 자신의 차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운전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차에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합니다. 미끄러져서 뒤로 벌러덩 자빠지면서까지 말이지요. 아무튼 한참을 치워서 어느 정도 운전할 정도가 되었다 싶었을 때,
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문을 열기 위해 자동차 리모컨 버튼을 누릅니다. 그런데 글쎄 앞 차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도 역시 마찬가지로 앞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차라고 생각했던 차는 남의 차였고, 엉뚱한 차의 눈을 신나게 치웠던 것이지요. 이처럼 목표를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힘만 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목표로,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세의 구리 뱀은 십자가의 예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해서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지요. 하지만 뱀에 물린 사람이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 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구리 뱀을 통해 살아날 수
있던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살 수 있습니다. 즉, 죄라는 독사에 물린 사람은 누구나 주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죄가 용서되는
치유가 있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멸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죄로 기울어져 있을
때, 오로지 매달릴 분은 주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신앙생활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지극함을 기억하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살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이상한 인종들, 나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에밀리 헨리 고브로)
좋은 쪽으로 닮기.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다가 영국 리버풀 대학에서의 한 실험의 흥미로운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남녀 각 11명에게 부부 160쌍의 사진을 뒤섞은 뒤 인상이
닮은 남녀들을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닮았다고 지목된 남녀를 보니 대부분이 실제 부부더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외모까지도 서로 닮아간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 미세한 얼굴 표정이나 감정 표현, 대화상의 어투 같은 것을 자기도 모르게 서로 배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살아가면서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가치관을 맞추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닮는 것이 외모만이 아니라 가치관이나
성격까지도 닮게 됩니다.
이렇게 닮아가는
것은 좋지만 문제는 어떤 쪽으로 닮아 가느냐는 것이지요. 좋은 쪽으로 닮아 가야 하는데, 나쁜 쪽으로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부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놀부와 놀부 마누라의 심보를 보십시오. 나쁜 쪽에서 똑같습니다. 처음부터 과연 그랬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누가 먼저 나빴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이 나쁜 쪽을 닮아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야기일 뿐이라고 간단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그런 부부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결혼 전에는 봉사나 나눔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결혼 후 부부가 함께 사회봉사를 하고 기부를 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닮아가는 것을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보게 됩니다. 이는 좋은 쪽으로
닮아 가는 모습입니다.
닮아가는 것은 부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쁜 쪽을 닮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좋은 쪽을
닮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 나쁜 점을 크게 만들지 말고, 대신 좋은 점을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점을 가지고 있는 이웃을
스승으로 삼고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래야 서로 좋은 쪽으로 닮아갈 수가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 같습니다. 즉, 먹고 산다는 이유를 들어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를 없애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 많은 악들이 판을 치고, 점점 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쪽으로
닮아가는 우리가 될 때 이 세상을 더욱 더 살기 좋고 사랑 가득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나’한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은 순명을
낳는다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아들을 믿는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제의색은
장미색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희생과 보속, 극기의 삶을 잘 살아오셨습니다. 지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한 고비를 넘겼으니 좀 더 노력 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의지가 약해 실천하지 못하였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입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미 새와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가 귀여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아기 새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도 어미 새는 계속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미 새는 늙었습니다. 늙은 어미 새는 이제 더 이상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자 어른이 된 아기 새는 어미 새의 머리를 콕콕 쪼았습니다. 배고프다고 화를 내면서 콕콕 머리를
쪼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면
큰 사랑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데, 받는 데만 익숙해 졌지 사랑을 할 줄 몰랐습니다.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다고 했거늘 그
사랑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깨우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고저 한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방법은 생각지 않고 주어진 고기에 묶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말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이요, 발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기보다 내 이익을 더
챙깁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총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도 제 실속을 위해 정신없이 삽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부르면서도 그저 부를 뿐 그분의
뜻을 찾고 행하기보다 내 뜻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고는 내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내 원의대로 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댑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영락없이 어미 새의 머리를 쪼는 아기 새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어 광야의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리면 그 구리 뱀을 바라보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민수21,6-9).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보라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순명이라고 합니다. 순명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고, 그러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살게 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쳐다봐서 산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숨겨있는 그분의 사랑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 콘라도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를! 자동차에 십자가를 매달고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위로 받지 말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십시오.
기도해야 한다는
것,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 미사참례를 하고 그분의 손발이 되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 차원을 넘어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이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몸소 씨를 뿌리십시오.
나중에 죽으면
신부는 입만 천당 간다고 하잖아요. 말만하고 행함이 없으니까, 수녀님들은 귀만 간대요.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거든요, 여러분은 발만 간대요.
열심히 성당에 오셨으니까요. 다 알아요. 알면 뭐합니까? 알면 바뀌어야죠. 내 삶을 바꾸어야지요. 어둠을 빛으로 바꾸지 않는 한 안다고 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삶을 빛의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실 매일 매순간 거듭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어느
한 부분의 구원이 아닙니다. ‘아무개’ 한 인간의
구원이지요. 그러므로 균형 잡힌 신앙생활로 우리 모두가 구원 받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꼭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믿음에 따르는 행동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심판을 원하지 않 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3,18).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죽는다는 것입니다. 구리 뱀을 보지 않은 사람이 죽었고, 소돔이 멸망할 때 구원에 부름
받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결국 높이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혜택을 주어도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만나면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부활의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최양업 토마스 신부).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저녁을 먹고 가끔씩
명동거리 산책을 하곤 합니다.
명동성당에서
롯데백화점 앞까지의 200미터 정도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
사람보다는 외국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길거리의
먹거리를 사먹기도 하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길거리 노점에서
물건을 파시는 분들도 중국어,
일본어,
영어는 기본적으로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한민국 수도의
명동 거리는 이렇게 늘 분주함으로 밝게 빛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동거리에서
중앙우체국 쪽으로 조금 걸으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높은 전광판 위에
사람이 올라가 있습니다.
아직은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데 전광판 위에서 사람은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에 ‘거리의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들과 교우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명동의
밝은 빛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공존의 그늘에서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해고될
위험에 있는 사람,
같은 일을 하고도
적은 급여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 그곳에
사람들이 있는데 신문과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양심을
속였으며,
자신들의 욕심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벌을 주십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시련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뉘우치기만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바로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들 구원을 위해 보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돈과
명예,
권력처럼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셨듯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맘과 정성을 다해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때 우리는 참된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채워지는 것이기에 사라지지도 않은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하느님처럼
사랑하며,
하느님처럼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나약함과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목표와 하느님의 꿈이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순시기의
기쁨
-참
좋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들-
-이수철신부-
사순시기
이렇게 기쁘게 지내기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도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생시인가
꿈인가 할 정도로 안식년을 끝내고 귀원한 후로의 나날이 행복합니다.
한
때는 '설렘'에, 또 한 때는 '아픔'에 새벽 잠을 깼지만, 지금은 '기쁨'에 새벽 잠을 깹니다.
하여
요즘 사순시기 면담고백성사중 가장 많이 쓴 보속 처방전 말씀은
다음
바오로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데살5,16-18).
아마
이보다 더 좋은 처방의 말씀도 드물 것입니다.
며칠전
수도형제들 앞에서 미사 강론 중 언급한 말이 떠오릅니다.
"안식년
중 내 강론 스타일이 변했습니다.
큰
특징이 하나 생겼습니다.
미담인
경우 대담하게 실명을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주저했지만 지금은 거침없이 아름다운 일화와 더불어 그 주인공들의 실명을 언급합니다.
이제
제 강론은 '가톨릭신문'처럼 되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울하고 어둡게 지내는 시기가 아니라,
주님
부활을 앞당겨 기쁘고 밝게 지내는 시기입니다.
분도성인
역시 성령의 기쁨으로,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부활 축일을 기다리라 합니다.
규칙서에
기쁨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장에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안식년을
통해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에페2,4-6).
큰
위로와 구원의 말씀입니다.
'우리'대신
'나'를,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대신 '안식년을 통해'를 넣어 그대로 내 고백으로 바꿔봤습니다.
비록
지상에 머물지만 행복하기가 주님이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아 사는 느낌입니다.
요즘
며칠도 기쁨에 넘쳤던 하루하루였습니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사십시오.“
시들어
가는 꽃들이지만 꽃병에서 한 송이를 뽑아 말씀 처방전과 함께
면담고백성사를
본 형제자매들에게사랑의
보속 선물로 드리니 '기쁨의 고백성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현
세라피나 자매는 음성이 좋아 성가 한곡 부를 것을 보속으로 하나 덧붙였습니다.
"아,
자매님은 성악을 전공하셨어도 좋을 뻔 했습니다.“
진정이었습니다.
보속으로
눈물지으며 정성을 다해 부르는 '마니피캇' 노래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성가를 통해 자매는 물론 나를 치유하셨음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3월
첫주 금요일(3.6일),
월피정중인
서울 베네딕도회 수녀님들에게 3시간에 걸쳐 고백성사를 줄 때
대부분
보속도 일치되었고 내심 흡족했습니다.
"보속은
오늘 피정 하루 오로지 하느님만 생각하고 사랑하며 거룩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보속을 선물했습니다.
제
동생 영희 엘리사벳이 보낸 카톡 편지도 나를 기쁘게 했습니다.
"요즘
강론은 전 같지가 않아요.
단맛이
나는 것 같아요.
물흐르듯
이어지는 체험의 숨소리가, 사랑이 배어있어 읽으면서 느껴져요.
새로
마련된 집무실이 있어 마음 든든하네요.
최
빠코미오 새 원장님께서 사랑으로 해주셔서 감사해요.
매사
감사의 마음으로 사시니 기쁨이 넘쳐나는 것 같아요.
강론을
보는 이들도 신부님이 안식년 전후가 다르다고 해요.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해요.
김진봉
말가리다 수녀님은 근래 보기 드문 성인사제라고 극찬을 하셨어요.“
마음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마침
새벽에 일어나 집무실로 나오려니 가지런히 놓여있는 두 켤레의 신발이 보기 좋아
즉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후배이자 원장인 빠코미오 수사의 신발과 내 신발입니다.
왼쪽은
내 슬리퍼이고 오른쪽 신발 콧머리에 태극기 스티커가 붙어있는
귀엽고
앙증스런 털신은 빠코미오 원장의 것입니다.
이런
사랑스런 장면 역시 사랑의 선물입니다.
어제의
행운목 선물도 소개합니다.
15년
이상 가족 미사를 드려준 가족 12명이 생전 처음 저를 찾았습니다.
가족을
대표하여 최경원 엘리사벳 자매가 미사를 신청했고
어제는
전 가족을 대동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를 찾았고,
행운목도
선물했으며 참으로 회기애애한 분위기 중에 대화도 나눴고
다섯
가족에게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재 책도 선물했습니다.
떠날
때는 형제자매들에게 강복도 듬뿍 드렸습니다.
도대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함께
사는 수도형제들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 사랑의 선물들입니다.
하느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 유배중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켜 자유인들이 되게 해준
1독서의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역시 하느님의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은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예나
이제나 세상 모든 나라 지도자들이, 모든 시간과 사건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은 '구원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아,
구원의 선물, 하느님의 선물을 깨달아 알 때 저절로 샘솟는 겸손과 기쁨, 감사의 삶입니다.
구원의
선물을 실감할 수 있는 참 좋은 선물 중 하나가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다음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거행되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속속들이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아드님과 그 아드님 대사제 예수님 친히 집전하시는 미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이자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 말씀이 고무적입니다.
믿는
이들의 긍지요 끊임없이 분발케하는 자극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자랑이 되고 하느님은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새삼
우리 인생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우리의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미완성의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선행의 노력이 함께 하는 가운데 완성되어가는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래타레',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제의도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기쁨이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주님
부활을 기다리는 기쁨이 사순시기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의
작품인 우리를 점차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완성시켜 가십니다.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66,10-11참조).
아멘.
<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 >
-전삼용신부-
2001년에 개봉했던
‘진주만’이란 영화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만이 아닌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전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테네시주에 사는 두
젊은이 레이프와 대니는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자란 죽마고우입니다.
이들은 둘 다
미공군 비행사가 되었고 레이프는 미해군 간호사 에벌린과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 레이프는 유럽으로 배치 받고 대니와 애벌린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으로 배치 받게 됩니다.
레이프는 독일군과
교전 중에 바다에 추락하여 사망처리 됩니다.
레이프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은 애벌린은 대니에게 의지하게 되고 대니 또한 애벌린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레이프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되고 이 셋은 애매한 삼각관계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애벌린은 이미
대니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레이프는 그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이 둘이 일본을
다시 공격하러 갈 때 대니의 대사는 이렇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되는 거야.”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지게 되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대니는 결국
전쟁에서 사망하게 되고 다시 레이프가 애벌린과 대니의 딸과 함께 가정을 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삼각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여자는 한 남자만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할 수도 없고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차지하며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주인이 한 집에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려고 하지만 그 경쟁자가 있습니다.
두 경쟁자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라질 수도 없는 일이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니 뱀이 죽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넣어준 뱀을 당신 스스로 제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발과
연관이 있습니다.
기어 다니면서
사람의 발을 물어 목숨을 빼앗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건널 때 모래 속에 숨어있는 뱀들에 의해서 많이도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뱀에게 물려죽을 때 그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이유를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뱀은 나의 자아라고
하는데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게 시스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고 따먹게 만듭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집엔 뱀이 살게 되고 하느님이 나가시게 됩니다.
뱀이 사는 집은
영원한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 외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중요한 나무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뱀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나무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주었던 다른 맛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불평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가졌던 마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지만
광야에는 ‘생명의
빵’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빵인
그리스도의 성체는 이제 신물이 나고 돈이나 명예나 쾌락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불뱀을 내려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들을 죽이는
것은 결국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자신인 자아,
즉
뱀이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후회하고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지만
하느님은 뱀을 없애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없다는 것은 자유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스스로 매달아 죽이지 않으면 결코 살아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높이 매달리심으로써 우리가 그 모범을 보고 따라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 또한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자아,
뱀,
당신 뜻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방법으로 믿고 따라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주는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주인을 하느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하느님 나라에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을 베인 사람들의 영혼”이
등장합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 자신의 목을 내어놓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명령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뱀은 마치
성모님께서 발로 밟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해야만 하지만 뱀이 머리가 돼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뱀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칼로
우리 목을 쳐서 잘라내야만 합니다.
누구든 자신의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머리로
오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우리 목이 잘려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한 살인범이 어떤
한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이 되는 사람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아주 많은 공로를 세워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주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주지사는 동생을
위하여 탄원하는 형의 잊혀질 수 없는 공로를 참작하여 그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었습니다.
양복 안주머니에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곧바로 감방 안에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동생을 만나본 형은
물어보았습니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살아 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니?”
그러자 동생은
안면을 찡그리더니 즉시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방을 나간다면,
첫째로,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를 찾아 그 놈을 죽이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 놈을 쏘아 죽이는 일이야!”
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습니다.
그래서 형무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뱀이 회개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면 미운 마음이 솟구칠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매번
내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물어 살해합니다.
그런데도 자아를
원수처럼 여기지 않고 타협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너는 어찌하여 그런
일을 하였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뱀은
본성상 하느님을 거역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회개되어질 수
없다면 십자가에 매달거나 감옥에 가두어 놓거나 목을 잘라버리거나 성모님처럼 발로 밟고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까꿍
-인영균신부-
사순
제4주일 오늘은 전통적으로 ‘래따레 주일’(Laetare)이라고 합니다. 그레고리오 성가 입당송이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Laetare
Jerusalem)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사순절 중간에 자리하기에 교회는 사순절 고된 나날을 보내는 신자들에게 기쁨을 상기시킵니다.
기쁨은 삶의 원천입니다. 기쁨은 우리를 살맛나게 합니다. 기쁨이 없다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기쁨이 있으면 깊이 살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 삶의 참 기쁨을 찾도록 합니다. 기쁨이 솟아나오는 원천을 찾아가는 시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데서 기쁨의 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재물에서, 오락에서, 건강에서, 인간에게서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서 오는 기쁨은 스쳐지나가는 것임을, 영원하지 못한 것임을 잘
압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즐겁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 우리를 깊은 슬픔과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우리 기쁨의 원천은 단 하나, 십자가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징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 바로 외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에게서 기쁨이
터져나옵니다. 기쁨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넘어져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웃을 수
있습니다.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삶에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이렇게 살 때 우리는 기쁨의 전파자, 기쁨의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까꿍’하고 웃읍시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에페 2,8-9)
사순
제4주일은 전통적으로 '기쁨의
주일'로 지냅니다. 사순절에 왠
기쁨이냐구요?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공로를 통해 구원의 선물을
받게된 것을 미리 경축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바로 이 구원의
선물에 대한 넘치는
기쁨을 성대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잘
살아서 우리가 많은 은총을
받고 또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선물을 아무런
댓가없이 무상으로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살든 못
살든 공로가 많든
적든 죄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공짜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와 죽고
나서조차도 모두 공짜
인생입니다.
그러니 그저 감사할
일뿐입니다. 공짜로 살아가는
인생인데 감사할 것
외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의 기쁨을
누립니다.
오늘 한껏
감사드리는 날 되소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눈길
-기경호신부-
봄의 기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상쾌한 공기, 대지로부터 생명이 꿈틀거리며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는 이 즈음은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해준다. 교회는 사순 제4주일을 ‘기쁨의 주일’(Dominica laetare)로 정하고 수난을 향한 여정이 고통과 시련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향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래서 오늘의 입당송은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의 위로가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참조) 하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면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남은 여정을 더욱 기쁘게 갈 수 있도록 재다짐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 세상에 빛 자체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째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은 결코 우울하고, 슬프고 지겹고 짐스럽기 만한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삶이 인간적으로 고달프고, 힘겹다 해도, 세례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상으로 맞춰 주신 신앙의 안경, 사랑의 안경으로 모든 사건과 모든 사람을 바라보고 그분이 비춰주시는 빛으로 삶을 바라볼 때 뚜렷한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여정은 하느님을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위하여 곧 영으로 볼 수 있는 안경을 찾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고 ‘영혼의 통로’이며, 믿음의 표현이다. 실제 사람이 밖에서 받아들이는 80% 이상의 정보가 눈을 거쳐 들어온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소리 이외의 거의 모든 정보가 눈을 통해 들어오고 눈으로 전달된다. 그렇다보니 무엇을 보며 어떤 마음과 지향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삶의 질을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 달라지고, 어디에 눈길이 가 있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오늘날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시선이 사람을 구해 준다는 것이다.”라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처럼
우리의 구원은 ‘눈길’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만인의 형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도 ‘눈길’은 매우
중요했다. 눈길에는 무관심한 눈길, 반대만을 바라보는 대상화의 눈길, 적대자만을 바라보는 심문적인 눈길, 위험만을 바라보는 겁에 질린 눈길,
물건만을 바라보는 소유적인 눈길이 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는 다른 존재들에 열려진 포용성 있는 눈길,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는 친교의 눈길, 그리고 다른 이와 전적으로 합치하는 애정 어린
눈길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주시하였으며 특별히 각 개인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경치와
자연, 세계에 눈길을 돌렸다. 그는 형제나 다른 존재들을 한 번도 비웃지 않았고, 부끄러움을 주지 않았으며, 조롱하거나 빈정대지 않았고,
분노하거나 면박을 주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열렬한 사랑과 친절에 넘치는 열정으로 다른 존재들을 깊이 있게 바라볼 줄을 알았다. 그의 이러한
눈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수난의 사랑’에 대한 회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나무 위에 들어 올려진 것은 상처를 입고 타락의 밑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 수없이 많은 볼거리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십자나무 위의
예수님에게서 눈길을 떼지 말아야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바로 그 순간 예수님과의 관계 단절이 시작된다. 관계단절은 의미 없는 삶,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사업을 벌이는 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요 무의미이며 스스로에 대한
단죄이다.
세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탐욕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순수한 눈길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면 영원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나의 애정어린 눈길 안에 둠으로써 ‘은총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된다.’(에페 2,4) 따라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먼저’, ‘자주’ 바라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신 사랑이신 그분을 바라보지 않는 ‘주소 없는 눈길’은
죽음을 부를 뿐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어떤 눈길을 지니고 있으며, 나의 눈길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나의 눈길은 과연 믿음의 표현이
되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 되고 있는가? 이 사순절에는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나의 눈길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믿음 안에서 포용하는 눈길과 친교의 눈길, 애정어린 눈길을 지니도록....
-한상우신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진리는
봄처럼 겨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라.'는 진리의 기쁨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내면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의 실천에
있음을 다시 깨닫는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진리이신
주님께서는 좁힐 수 없는
우리와
거리를 십자가의
빛으로 다시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십니다.
모든 어둠과
모순의 시작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교만에서
출발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빛에 순명합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진리의
무게이며 십자가의
기도로 하느님의
뜻이 가장
분명해지는 빛이
되게하십니다.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십자가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빛나는
빛임을 어둠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어둠과
빛을 아우를 수 있는
건 십자가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빛은 피 흘리는 십자가를
통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저마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고유한 우리의
길을 걸어가고 느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서 진리의 빛을
향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실천으로 우리의 삶을
성숙시킵니다.
사랑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자신과
이웃을 제대로 볼
것입니다.
빛은 모든
것을 제대로 사랑하게
합니다.
|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