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물었다.
"여보, 감자탕 끓여 놓고 갈까?"
"좋지"
제법 큰 사이즈의 스텐레스 들통에 아내는 맛깔스럽게 감자탕을 끓였다.
그렇게 앞으로 5일간 남편과 아들, 두 남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자탕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가스레인지 위로 큰 들통을 얹어놓는 순간, 우리 두 남자들의 식사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렇게 落着되었다.
먹거리와 밑반찬을 다양하게 챙겨둔 다음 아내는 배낭을 메고 멀리 떠났다.
인천공항에서 5시간 30분 정도를 날아가야하는 머나먼 이국땅으로.
여행 성수기가 아니라서 한층 여유롭고 한가로운 힐링투어가 될 것이라 믿었다.
두 남자는 밥만 해서 감자탕과 함께 먹었다.
반찬은 아내가 준비해 놓고 간 그 상태 그대로 냉장고에서 꺼내 먹었다.
종류별로 다 꺼내지도 않았다.
거의 김치만 내놓고 먹었다.
남자들의 한계였다.
식사 후엔 다시 찬통을 그대로 넣어두었다.
그런 방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패턴을 고수했다.
안타깝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처음 두세 끼는 맛도 좋고 단출한 식탁에 서로 키들거리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잘도 먹었다.
식사 준비는 아들이, 설거지및 뒷정리는 아빠가, 역할분담에 서로가 충실했다.
요리엔 젬병이었지만 식사 후 설거지및 청소기 돌리기 등은 平常時에도 나의 몫이었기에 매우 익숙한 몸짓으로 할 수 있었다.
짐짓 여유있는 미소에 콧노래도 흘러나왔다.
나는 업무나 모임 때문에 집에서 식사를 하지 못할 때가 몇번 있었다.
그러나 낮에 알바를 하는 아들은 매일 조식과 석식을 집에서 해결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며칠간 계속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느 누구의 味覺이라도 끝내 지치고 말리라.
심각하게 물렸을 게 뻔했다.
마침 주말이 되었다.
수리산 임도를 따라 함께 트레킹 하자고 제안했다.
아들도 단박에 오케이.
두 명이든, 세 명이든, 가족 모두가 동참하는 네 명의 트레킹이든,
시간만 나면 함께 걸으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몸에 뱄기 때문인지 아들과도 죽이 잘 맞았다.
운동도 하고, 오순도순 둘만의 얘기꽃도 피우며 산을 넘어가 맛있는 식사도 같이 하고 싶었다.
군대까지 전역한 장성한 아들.
父子之間 둘만의 데이트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즐겁고 가뿐하게 산을 넘었다.
배가 고파왔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도 생각났다.
산을 넘자 알록달록한 만추의 風光과 짙은 敍情이 잔잔한 호숫가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자주 접했던 산하였건만 아들과의 둘만의 시간이라 그런지 그날따라 불타는 단풍의 운치가 더 깊고 풍성하게 느껴졌다.
다채로운 秋色은 더욱 선명하고 완연했다.
호수 주변엔 여러 식당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들이 선택한 음식은 의외였다.
'털레기 수제비'였다.
나에겐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과거 언젠가 엄마와 누나랑 함께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 맛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고 했다.
역시 음식맛은 追憶이 반이란 말이 새삼 떠올랐다.
아들의 선택은 적중했다.
과연 일미였다.
큰 대접에 가득 따른 막걸리도 그날따라 더욱 구뜰한 풍미였다.
시원했다.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귀갓길, 아까와는 다른 코스를 선택했다.
호젓한 임도엔 수많은 낙엽들이 떨어져 뒹글고 있었다.
늦가을 고유의 촉촉한 감성들이 작은 물결처럼 산길을 따라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색다른 낭만이었다.
사내들만의 대화라서 그런지 家門의 歷史性에 기초한 다양한 스토리텔링들이 진솔하게 오갔다.
한국전쟁 직후 금강하구에서 한겨울 여객선이 전복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증조모님의 갑작스런 별세와 가문의 위기,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고교 1학년 때, 두 살 연상의 여인과 집안 어르신들의 결정에 의해 혼인할 수 밖에 없었던
조부모님의 운명같은 상황과 척박한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또한 열일곱 살 나이에 가장이 되고, 가문에 대한 무거운 責任과 다양한 役割들을 하나하나 챙기고 해결해 나가며,
올곧은 삶과 헌신적인 인생을 엮어오신 두 분의 人生歷程에 대해 참 많은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溫故知新이라 했던가.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앞으로 이어나갈 미래의 소명과 좌표들에 대해서도 진정성있게 나누고 교류했다.
유익했다.
고마운 시간이었다.
집안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아들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조용한 산속길을 부자가 싸목싸목 함께 걸었던 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없이 정겹고 훈훈했다.
둘이서 컵라면도 끓여 먹고 호빵도 쪄 먹었다.
컵라면에 김치 한 종지일지라도 와그작 와그작 야식으로 함께 먹는 맛은 정말로 기가 막혔다.
아내 歸家前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퇴근했다.
집에 들어와 보니,
"오! 주여".
어느새 아들은 밥을 해놓고, 닭갈비 2인분을 사와서 프라이팬에 다시 한번 데치며 볶고 있었다.
집안정리도 깔끔했다.
"닭갈비 저녁식사, 좋죠?"
"그럼, 훌륭하지"
양복을 벗고 손을 씻는데 나도 모르게 뭔가 뭉클한 것이 가슴 속에서 올라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간의 잔잔한 배려 그리고 겸양과 감사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그대로 읽혀졌다.
맛있게 식사하면서 또다시 서로의 일상과 다양한 대화의 소재들이 주저리 주저리 그렇게 영글어 갔다.
다음 날.
아내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왔다.
여제의 귀환이었다.
사내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아내의 옷깃에선 때묻지 않은 南國의 자연바람이 싱그럽게 묻어났다.
또한 유서깊은 유적들과 다채로운 문화의 편린들이 별똥별처럼 그렇게 떨어져 내렸다.
오일만인데도 참 살갑고 반가웠다.
아들도 동일한 눈빛이었다.
난 마음속으로 정지용 선생님의 싯구절 한 대목을 혼자서 읊조리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과연 鄕愁는 선생님의 드넓은 정신세계와 깊은 사상을 아름다운 詩語들로 마법처럼 다듬에 낸 최고의 걸작이었다.
아내는 배낭을 벗어놓자마자 짧은 시간내에 뚝딱뚝딱 정갈한 식탁을 준비했다.
"과연 이 맛이야"
아들과 나의 입은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일상속에서 매일 접했던, 아내가 준비해 주는 평범한 한 끼의 식사가 이렇게 소중하고 갈급할 수 있는지를,
부자는 히죽히죽 웃으면서도 새삼 깊이감있게 깨닫고 절감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런 아내에게 음악 한 곡을 선사하고 싶었다.
컴을 켜고 한 곡을 띄웠다.
Jim Brickman의 Hear Me(Feat, Michael Bolton)였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의 눈물과 서원이 언젠가는 더욱 향긋하고 깊은 風味의 포도주로 변화되기를,
식사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내내 그리 기도했다.
감사와 사랑이 충만한 晩秋의 밤이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임재와 은총이 늘 함께 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