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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
요 1: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13 /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 아무 것도 존재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분은 2)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3)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이 만드시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모든 인류에게 빛을 주신다. 5) 그분의 생명은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이시며 어둠이 결코 그 빛을 끌 수가 없다. 6-7) 하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증인으로 보내 예수 그리스도가 참빛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8) 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다만 그 빛을 증거하러 왔을 따름이었다. 9) 그가 온 후에 참빛이 세상에 들어왔다. 이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10)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도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12)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3)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존재의 위대함,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위대하신 말씀(1-4) 본 단락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초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헬라의 철학적 용어인 ‘로고스’(말씀)를 차용합니다. 로고스는 헬라의 철학자들이 만물의 생성원리라고 생각했던 철학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학적 개념상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셨다’는 단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영원 전부터 언제나 존재해 오신 예수님의 선재성을 설명하면, ‘함께’(프로스; 향하여)라는 전치사는 예수님께서 성부와 영원 전부터 교제하여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만물이 예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사도 요한은 증언함으로써 창세기 1장에서 기술한 창조사역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보여줍니다(히 1:2). 또한 사도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이후에 요한복음에서 저술 된 생명을 살리는 표적들의 근거가 바로 예수님 자신 속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증언을 거절한 세상(5-11)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총칭합니다. 세상은 어둠 속에 있어서 참된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타락함으로 영적 지각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일찍 세상에 와서 예수님을 증언하였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거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이 모여 이룬 세상은 죄로 인해 절망적이고 어두워졌습니다. 그 어둠의 무지는 세상의 창조주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영접하는 자(12-13) 그런 어두운 세상에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혈통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를 비롯한 무식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제자들이 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적용: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말해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의 핵심이며, 심장입니다. 바로 생명이며 빛입니다. 예수님께 관심과 시선을 모으십시오. 우리의 심장이 뛰게 될 것입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골 1:16-20).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사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빛과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어두운 죄로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이 아닌 죽음의 길로 내 자신이 달려갈지라도 언제나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 설 교 >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요 1:1-5 / 임덕순 목사
얼마 전에 끝이 난 출애굽기강해를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구약시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길인 율법을 통해서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이제 구약에서 예고하고 예시하였던 그 실체에 대하여 배울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보여주는 모든 율법과 제도와 모양과 의식들은 모두 장차 우리의 구주로 오실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예고하기 위해서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요5:39에서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니라.” 라고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은 신약에 오실 그리스도를 알려주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보여주신 유월절 양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나, 사막에서 물을 낸 반석이나,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지은 성막이나, 성막의 자재나 모양이나 색깔 등 구약의 모든 것은 다 신약에 오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고, 어떤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인가를 미리 알려주고 준비하고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공부했으면 이제 신약을 공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직접 소개하는 책들이 넷이 있는데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네 사람의 제자가 각자 예수를 보고 듣고 느낀 대로 기록으로 남긴 것이 사복음서입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입장이 달랐고 수준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그러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별명은 왕 복음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제물로 죽는 송아지처럼 우리의 죄 짐을 지고 죽으셨다는 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마가복음의 별명은 송아지복음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유대민족만을 구하러 오신분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을 구원하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누가복음의 별명은 인자복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은 예수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장본인이시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그래서 요한복음의 별명은 독수리 복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자기의 과거를 통째로 다 잊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누구이고 부모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간절히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삼촌이나 이모가 자기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면 얼굴이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관심을 기울입니다. 자기 어린 시절을 자기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나 어린아이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자신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하여 들려주어야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가 상대해 주어야만 의미를 지니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친구가 있어야 하고, 살아가는 환경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이 모양, 이런 존재로 만드시고 우리 안에 지성과 감정과 영혼을 넣으시고, 우리에게 삶의 목표를 주시고 도우시는 그리스도를 알지 않고서는 인류학자라 할지라도 인간을 바로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나 자신만을 알려고 해서는 풀리지 않습니다. 나를 당신께 의존하는 존재로 창조하신 그분을 알아야 나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내 부모를 알아야 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보다 사실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바로 알게 되기까지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가치와 존재이유를 바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자 하여 애를 썼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이유도, 목적도, 나아갈 바른 길도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비싼 옷으로 치장한다 해도 자기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라고 요한복음에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장 30절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행하셨다고 우리의 궁금한 점을 해소시켜주려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분을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절)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진리를 사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살면서도 빛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되면, 그동안 살아오던 죄스러운 삶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인데, 그러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죄스러운 삶을 청산해야만 하고, 그러기가 싫어서 주님을 더 알려고 하지도 않고,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지려고도 하지 않아서 영생이라는 선물마저 포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예수 믿는 것이 좋은 줄은 아는데 술 담배 못하게 하고 지금처럼 내 마음대로 살지 못 할테니까 그래서 못 믿는다고 말합니다. 불신자만 그런 게 아니라 믿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 때문에 주님께 철저히 드리지 못합니다. 그 사실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묘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는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하고, 3절은 이분과 이 세상의 만물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4-5절에서는 어리석은 우리 인생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1. 그리스도의 본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2)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말씀이시고,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라고 일컫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절에 보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분 안에 생명의 근원이 있었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그분이 자기가 만든 세상에 오셨지만 자기가 만든 백성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라고 일컫는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말씀이시고,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라는 설명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사도는 예수님을 왜 말씀이라고 소개했을까요? 요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소식을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찾아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고, 다른 종교가 만들어낸 신들처럼 말도 못하고 서만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의 길과 영원한 생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복음 진리는 어떤 현인이 오랫동안 묵상 하다가 깨달은 진리가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직접 말씀해 주심으로 밝혀진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이 진리이고 우리에게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분을 말씀이라고 묘사했고 생명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태초란 이 세상 만물이 지어지기 이전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계셨다는 말은 그분이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고, 1절 후반에서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말은 이분도 하나님이시지만, 또 다른 하나님이 계셨다는 말로서, 이분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삼위일체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는데, 성부가 따로 계시고, 그리스도는 제2위인 성자이십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이 계십니다. 사진기를 세우는 삼각대는 다리가 세 개로만 만들어 졌듯이, 하나님은 삼위일체로만 존재하십니다.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우리가 세상에서 유사함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으므로 천국에 가서 확실히 알고, 오늘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이 우리한테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 한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독선적이시고 자비가 없는 분일 것입니다. 4대독자로 자란 사람은 양보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양보해 본적이 없어서 남을 배려하는 면이 약합니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사람에게는 독선적인 성격이 만들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로 함께 공존하시기 때문에, 이분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대화가 있고, 존경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모슬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은혜와 용서가 성경에는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기기 때문에 자비 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학생 셋이 함께 자취를 잘 해냈다면 그들은 서로 배려하고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깊은 학생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한 마음과 한 능력과 한 영광을 가지신채 영원히 공존하시는 분들로서 그분들은 서로간에 대화와 의논과 존경과 배려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간에 논의를 거쳐 우리를 당신 닮은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자, 우리가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셨지요? 그래서 사람도 대화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삼위가 아니고 유일하신 분이었다면, 우리 인간들도 애초부터 이해와 사랑과 용서가 없는 독불장군들 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성부와 동등한 영광과 권능을 가졌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자청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본문에서 요한이 말하는 것은, 예수는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성자이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사 우리들의 구주가 되셨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셔야 하는가?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분이 하신 말씀들도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의 결정권을 가자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말에 불과할 것이니 믿을 말씀이 못될 것이고, 그분이 죽으셨다고 해도 그 생명 값이 죄지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데 역부족이어서 구주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또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과거의 죄만 씻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새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동거하면서 우리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합니다. 겔 36:26-27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영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결코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은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만 보내 주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였으며(롬 8:9), 예수의 영(행16:7)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수 없고, 그럴 경우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나의 구주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고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만물과 그리스도의 관계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만들지 아니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어째서 나쁜 것들이 있지요?” 하는 질문입니다. 몹쓸 암이나 벌레나 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나 못된 인간들도 그리스도가 지으셨단 말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접촉하는 현재의 만물은 하나님이 처음 지으실 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쉰밥이나 썩은 음식은 어머니가 처음부터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 지으실 때의 만물은 아무 흠이 없었고 서로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풀과 나무와 동물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함께 도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요 피조물의 중심인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등지자 인간의 마음이 악해졌고, 그 형벌로 세상의 자연계도 오염되고 망가진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은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만물을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그것들을 만드신 목적이분명했습니다. 인간과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연 만물을 관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목적이 없이 만드는 물건은 하나도 없고, 목적을 잃어버리고도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도 없습니다. 생일 케이크는 생일을 맞은 주인공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생일을 맞이한 주인공이 없는 생일 케이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형은 그것을 가지고 놀 아이가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인형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사고로 죽고 인형만 남았다면 그 인형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부모나 이웃은 그 인형을 볼 때마다 가슴만 아플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목적을 가지고 만드신 주님입니다. 주님이 없는 세상은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공은 누구이십니까? 목적을 가지고 나를 만드신 아들 하나님인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모든 세계가 의미를 가지려면 단 한분이 계셔야 합니다. 이분이 계셔야만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원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분이 없는 종교는 죽은 것이고, 이분이 없는 학문은 소경이 문고리 잡는 것이고, 이분이 없는 음악은 음산할 뿐이고, 이분이 없는 사회는 피차에 물고 뜯는 아수라장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없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을 제대로 알고 그분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회복되고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고 우리 사회가 회복됩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중심이시고 의미이십니다. 의미를 잃은 존재는 생명을 잃은 것이고 빛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빛이라,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빛이 의미와 생명을 잃어버린 세상에 찾아오셨습니다. 빛과 생명을 되찾아 주어, 밝고 행복한 삶을 다시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과 생명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빛을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않았고 그의 말씀을 믿지도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4. 인간의 모습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4-5)
요즘 sbs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 이라는 프로를 방송해서 기독교계에서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에 의하면 기독교는 신화에 근거하고 있고 오히려 이슬람이 종교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식으로 방송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그런 프로들이 하도 많고, 성경 몇 줄 읽어본 짧은 생각으로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헛소리는 역사 이래 계속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신이 아니고 인간인지 모른다는 말은 무식하고 진리에 어두운 사람들이 늘 해온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슈바이처 마저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것이 아니라 모범적인 인간으로 믿고 따랐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과학자들은 겨우 몇 뼘 밝혀낸 자연현상을 전부라고 맹신하고 과학적으로 신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거나, 이 세상 만물이 조물주 없이 스스로 진화되어 형성되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그런 주장이 날마다 National Geographic Cannel 등을 통해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진리가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 오늘의 현상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친히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처럼, 오늘도 수많은 교회에서 날마다 진리가 선포되고 있음에도 듣지 않고 돌아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게하시의 눈을 여셨듯이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그가 만물을 창조하신분이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이십니다. 말씀대로 믿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로 빛나게 살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요 1:1-5 / 이필재 목사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같은 관점에서 기록했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별도로 제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다른 복음은 예수님의 행적 중심의 기록인데 비해서 요한복음은 복음의 성격을 해석하는 특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1절부터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삼단 논법식의 해석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중요하게 취급한 예수님의 행적 기록, 예수님의 탄생, 세례 받으신 일, 겟세마네기도, 승천하신 기록, 광야 40일 금식기도가 다른 복음서에는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복음서의 기록은 갈릴리 중심의 행적 기록인데,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중심의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주변 인물이 가난한 자, 병든 자들 중심으로 나타나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주변에 다가왔던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같은 부요했던 인물들과 헬라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렇게 시각을 달리해서 기록한 것이 확실히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보시면 상징적으로 네 가지 살아있는 존재들이 나타납니다. 사람의 모양, 소의 모양, 사자, 독수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말해주는데, 4복음서의 성격이 거기에 반영되었음을 암시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소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는 일평생 인간을 위해서 봉사하며 헌신적으로 수고합니다. 또한 마지막에는 죽어서 인간의 식량이 되는 것으로 생애가 끝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모습을 수난의 종으로 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정한 이웃이 되어주시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표현했습니다. 탄생 때부터 나타납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죠?”라고 물어봅니다. 예수는 왕이라고, 동물 중에 사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독수리 상징으로, 높고 높은 데 거하며 온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시다는 하나님과 주님의 속성을 표현했습니다.
또, 복음서마다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데, 마가는 어떻게 봤느냐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복음전파가 제일 중요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중요하지 않고 복음 전파가 중요하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 1절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여기서부터 예수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그것보다도 예수는 이 땅에 탄생했다는 그 자체가 복음이다.” 탄생 때부터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 2장에 예수의 탄생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마태는 어떠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적이다. 조상적부터 생각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된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거기서부터 따져야 이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을 봤다는 것입니다. 오늘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은 “태초부터 예수님이 계셔서 그가 계신 다음 그의 창조 사역으로 만물이 있게 되고 우리도 있는 것이다.”라고 해석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 혹은 속성이 무엇인가? 오늘은 신성 부분을 말하고자 합니다. 누가 말한 것을 제가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청년 인구가 하늘나라에서는 얼마나 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1명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 그러면 세상에서 돈이 100억이면 천국에서 얼마나 됩니까?” “100원이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 그러면 100원만 주세요.” “아! 그래라. 그러면 1분만 기다려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설명이 불가능한 신비적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합니다. ‘계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닫힌 뚜껑을 열어주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만큼만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자연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자연적인 사건이 생길 때 그것은 신비의 사건입니다.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는 인간이 초이성적 사건을 만날 때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에 초이성적 사건이 기록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된 성경으로 성서학자들의 의견을 보면 바울 서신 보다 더 늦게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이미 기독교 복음이 세상에 널리 전해진 때요, 복음에 대한 찬성파, 반대파들이 많이 생긴 때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 사상 가운데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학파가 있었습니다. 노스틱 사상을 따르는 학파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몸은 육체같이 보이는 영적 존재이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은 아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피 흘리고 돌아가셔도 고통을 이기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학파였습니다.
제가 오늘은 예수님의 신성을, 다음 주일은 인성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종교와 철학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만약 종교가 철학화 되면 성경에 합리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제거하게 됩니다.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다.” “나사로가 죽어 썩어 냄새가 나서 무덤에 있다가 살아서 건강하게 되었다.” 이런 기록들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또한 철학이 종교가 되면 영생이나 구원의 문제를 철학 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노스틱 사상은 헬라 철학의 한 분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학화 하려고해서 기독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학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에게 다가왔던 많은 사람들의 갈등도 성경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예수님의 신성 부분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사실 그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밝히 말하라!” “이미 말했느니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 즉, 신성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지 못했습니다. 인성은 인정했지만 신성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부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게 되었습니다.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살아나신 예수가 정말 인간 예수인가?”라는 의문으로 반대로 인성을 믿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에 못자국이나 옆구리에 창자국을 감각적으로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왜? 인성 확인 작업을 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그다. 여기 먹을 것이 있느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며 잡수시더라.” “나를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내 육체가 이대로 살아나지 않았느냐?” “그러나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이런 갈등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시는 것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가장 확실한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것을 특별계시라고 하며, 그 계시가 말씀으로 나타난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계시된 말씀의 특징은 무엇인가? 성경은 패러독스 진리입니다. 역리적 교훈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말은 일반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이것이 일반성이 있는 말입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이것을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신성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 증거는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예수 자신에게 나타난 신적인 사건입니다. 먼저 출생부터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출생 과정은 자연 과학적입니다. 예수는 그 과정이 동정녀 탄생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예언을 남긴 이사야서를 보면 두 가지가 분명합니다. 하나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였으며, 이사야 9장 6절에 “그 이름은 기묘자라” 하였습니다. ‘기묘자’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이 말을 풀이하면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예수는 출생부터가 불가사의하다.” 세계 역사에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7대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불가사의한 일이 되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불가사의는 아닙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이라는 사건은 절대 불가사의한 일로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기묘자, 불가사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나타난 신적 사건은 부활의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몇 사람의 부활의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진정한 부활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었던 사람들이 부활하면 그 사람들이 진짜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첫 열매가 되셨다.” 성경에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습니까? 어느 역사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사건이 세 가지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출생하신 것!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처럼 큰 사건이 어디 있는가?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의해 죽으셨다는 것! 세 번째는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이 세 가지다.” 예수께서 아무도 모르게 골방 속에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다면 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유대 역사에 사람이 한 곳에 가장 많이 모였던 사건이 예수님 때까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 ‘포레스트 로운(Forest Lawn)’이라고 하는 건물이 있습니다. 거기 가보면 인간이 손으로 그린 그림 중에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이 큰 성전에도 전시하지 못할 정도로 큽니다. 길이가 거의 100m 정도로 세계에서 제일 큰 그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예루살렘 군중이 모인 광경을 그린 것이 그 그림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현장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줍니다.
그 다음에 승천사건이 나옵니다. 대기권 안에서는 모든 물체가 지구 표면으로 떨어진다는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승천은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5000년, 6000년이 된 고대의 사건이 아닙니다. 2000년 전 사건입니다.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에 기록하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 승천 당시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이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500여 성도가 봤는데 그 중에 태반이나 살아있어서 우리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5000년 전 역사가 생생하게 남아서 TV 연속극으로 계속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인류 역사 가운데 최근 사건입니다. 2000년 전 밖에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하늘로 올리워가시니” 예수 밖에 할 수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이 확실하게 나타나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 계시된 메시아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사건의 증거는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신적인 능력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가끔 가다가 우리 인간이 이루어낸 모든 일이 위대하고 장엄할 때 “아! 기적을 이루었다!”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나일강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이런 말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순수 기적이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기적과 비슷하게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아닙니다. 인간은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것은 다 기적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신성 부분을 증거해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는 사건,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종류를 분류해 보면, 불가능성의 회복, 환자 치유 사건, 생명 소생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우리가 지금은 조금 걱정스럽게 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달했다는 현대 과학도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을 하나도 못하고 있습니다. 의학이 그렇게 발달했는데도 예수님이 말씀으로 고쳐주었던 병을 하나도 못 고치고 있습니다. 제가 소록도 계시는 목사님을 많이 도와드렸습니다. 그 분께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지난 10~15년 동안 여기에 있는 환자들 가운데 단 한사람도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어서 나간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말로는 고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없습니다. 정말 손 마른 자나, 혈루증이나 간질병, 문둥병이나 시각 장애인들에게 행하셨던 예수님의 기적을 현대 과학이 일으키고 있느냐 말입니다. 못합니다. 그래서 기적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21세기 의학과 과학으로도 도저히 가능치 아니한 일들이 2000년 전에 예수님이 현장에서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불치의 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것은 치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예수만이 지니고 있는 신적 능력의 힘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그것을 다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초능력적 사건들로 오병이어 사건,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니,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지고 제자 12명이 나누어 먹었다면 모르지만 5000명이 어떻게 나누어 먹습니까? 아마 거기 현장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만 있었다면 거짓말입니다. “남자만 5000명이 먹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현장에서 얻어먹은 사람은 최소한 거짓말은 못합니다. 평생 두고두고 그 사건이 그들의 마음에 “어떻게 해서 그렇게 했지? 우리가 배불리 먹었잖아? 그런데 보리떡 5개밖에 없었잖아?” 이것이 기적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든 사건에 대해서 성경의 기록은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이나 포도주 사건이 거짓말로 꾸며낸 이야기로 믿던가 아니면 그 사건의 주인공 되신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하면 됩니다.
천재지변의 순종! 갈릴리 바다의 기후 변화에 따라 일어난 광풍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바다여 잠잠하라!” 예수의 명령에 바다가 조용해졌을 때 제자들도 의심했다고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이는 누구이기에 자연 과학을 순종시키는가? 지금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이가 뉘기에” 바로 ‘메시아 하나님의 독생자이기에’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없었던 일들이 예수로 인하여 현실화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성경의 마지막장 마지막절인 21장 25절의 말씀은 이런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데,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라고 믿던가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끌고 갔으니까 ‘아! 그때 사람들의 생각이 맞다! 예수는 미친 사람이다! 허구적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죽여야 된다.’라고 믿던가, 아니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다.”라고 믿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왜? 그에게 나타난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사람들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웠고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신앙 고백은 무엇인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했을 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는 미친놈이던가 아니면 메시아던가” 이 고백이 구원의 영생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며 다같이 “아멘”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이 우리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준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요 그 로고스가 계시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나타난 하나님, 우리 중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신앙 고백이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이 되게 하시고 우리 삶이 풍성케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육신과 임마누엘의 은총
요 1:4 / 김홍도 목사
옛날에 한 이슬람 국가의 군대가 스페인의 수도를 오랫동안 포위하고 항복을 강요했으나 항복하지 않자 스페인의 왕, 알폰소(Alphonso)의 아들을 몰래 체포해다가 온 시내에서 잘 보이는 곳에 교수대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 알폰소 왕의 아들을 세워놓은 뒤에 “알폰소, 그 도성을 내놓겠느냐, 아들을 죽게 하겠느냐?”하고 위협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왕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들을 죽게 할 것인지, 적군이 들어와 많은 사람을 죽게 할 것인지 초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알폰소 왕은 오래 기다리지도 않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 백성을 살리기 위해 내 아들을 죽여라” 하고 큰 소리로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타락하고 범죄하여 죄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하나님의 외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게 하시고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절이 되는 것은 바로 그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인데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은 가장 큰 사랑이며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하늘에는 이상한 별이 나타나 페르시아의 점성학자들이 찾아와 경배를 했고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서 셀 수 없는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결혼관계를 통하여 잉태되신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분입니다. 이 구주 성탄의 사건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므로 탄생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시지 않았다면 그 피가 우리 죄를 대속하실 수도 없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도 없습니다.
이 구세주 탄생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며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사건이므로 역사의 시간을 주전(B.C.)와 주후(A.D.)로 나누게 된 것입니다. 무신론 공산국가나 이슬람 국가도 다 이 달력을 씁니다.
1. 성육신의 사랑(incarnation)
스페인의 왕, 알폰소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준 것과 같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육신을 입고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랑이며 가장 신비의 사건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도 없고 이보다 더 큰 신비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육신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atonement)의 제물이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9장 22절 말씀대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레17:11).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②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에 요한복음 14장 9절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공기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육신의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데 예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③ 또한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처음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죄 없는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④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성육신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의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하신 말씀대로 죽음에서 해방시키려고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를 믿는 우리들도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2. 임마누엘의 은총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사상 최대의 사랑인데 두 번째로는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천사가 가르쳐 준대로 “임마누엘”인데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함께 하시던 하나님은 떠나버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는 실낙원의 별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한 말씀이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므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셨고,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값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역사는 “임마누엘”의 회복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멀리 떠난 하나님께서는 ① 산꼭대기의 빽빽한 연기 가운데 우뢰와 번개 소리와 함께 강림하셨습니다(출19:16~). ② 그 다음에는 더 가까이 평지에 찾아오셨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말씀하신 대로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내려오셨습니다. ③ 그 다음에는 더 가까이 선지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라고 한 말씀에서 하나님은 더 가까이 찾아오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④ 그 다음에는 더 가까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1장 2절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더 가까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찾아오셔서 영원한 진리, 천국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⑤ 그 다음 더 가까이 오셨는데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까지 찾아와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임마누엘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가 가까워오자 제자들이 근심에 쌓여있을 때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20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와 함께한다고 해도 엄청난 은혜요, 자랑거리일텐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고 늘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기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을 받게 되고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창세기에 벌써 이 진리가 예언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한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남자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 남자의 후손인데 여자의 후손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여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목하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까지 들어오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1957년에 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이란 사람이 흑인들이 어떤 고생을 하며 어떻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지 몸소 체험하려고 흑인과 같은 모습으로 변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피부가 검게 되는 약을 먹고 햇빛에 태워서 검게도 하고 약을 발라서 흑인과 같이 되어가지고 여행을 하는데 전에는 상상치 못했던 멸시와 고통을 받았습니다. 승차거부를 당하고 어떤 식당에서는 들어오지 못하게 거부를 당했고, 어떤 호텔에서는 숙박을 거절당하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 고난과 멸시를 당한 뒤에 “나와 같은 흑인”(Black Like Me)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짊어지시려고 성육신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 이사야 53장 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예언했는데 예수님은 그대로 고난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 공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죄 사함 받고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습니다. Merry X-mas, 할렐루야!
빛으로 오신 예수
요 1:4 / 문기태 목사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영접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보내어진 빛이기에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면 그 빛을 소유하게 됩니다.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4).
빛은 생명의 시작이고 생명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설령 생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빛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명 순환에 있어서 기초 양식이 되는 식물은 빛이 없으면 광합성을 할 수 없습니다. 식물이 없으면 초식동물이 살아남을 수 없고 초식동물이 없으면 육식동물도 없을 것입니다. 잡식동물인 인간이 아무리 먹이를 여러 경로로 취할 수 있다해도 식물과 동물이 없다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예수님 또한 태양의 빛과는 다른 영혼의 생명을 가져다 주는 빛이십니다. 이 세상은 사단의 흑암의 권세아래 놓여 있습니다. 어둠속에 갇혀 육적인 생명은 있으나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 채 있습니다. 시들은 풀처럼 생명력이 사라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비추십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생명의 빛을 소유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안에 생명의 빛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 주신 생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으로 살아 숨쉬며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안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존재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생명이 있는 식물은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믿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날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동물은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활발한 영적인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식물은 열매를 맺고 생명이 있는 동물은 새끼를 낳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맺고 여러분안에 있는 생명력을 밖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의 가정안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의 학교로, 직장으로 흘러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이 사회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확산되며 이 사회를 움직일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증거가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거나 여러분안에 생명이 있어도 영적으로 심각한 질병에 눌려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믿음이 계속해서 자라며 거룩하고 행복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확신이 없다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살기를 원하시면 지금 곧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 주고 여러분의 심령을 밝게 빛나게 할 것입니다.
어느날 에드워드 킴볼이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구두가게에서 일하는 소년인 무디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의 마음에 심어 주었습니다. 무디는 이 때의 경험을 자주 떠 올렸습니다. "저는 새로운 세계에 있었어요. 다음날 아침 태양은 더 밝게 빛났고 새들은 더 즐겁게 지저귀고... 저에게 있어 최고로 기쁜 날이었죠." 정규적인 교육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고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평신도였던 무디는 19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안에 있으면 여러분도 어두움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안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으로 오랫동안 지배해 오던 옛습관에서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죄의 유혹과 세상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가정을 행복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에 유익한 인물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여러분의 삶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새생명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계시의 빛이기에 영접한 사람은 계시를 얻습니다(5).
캄캄한 밤에는 사물을 잘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캄캄한 방문을 열고 더듬거리고 들어오다가 신발들을 밟기도 하고 벽에 걸어 놓은 물건을 치기도 하고 소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물건들의 차이도 알 수 없고, 높낮이도 알 수 없고, 찾고자 하는 물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먹고 싶은 음식이나 물도 마실 수 없습니다. 어둠은 두려움을 주고 어둠은 모든 일을 마비시킵니다. 사탄은 어둠 속에서 드디어 자기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무서운 마음을 주고 좌절을주고 슬픔을 주고 포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이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더듬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한 눈에 모든 것을 식별할 수 잇습니다.
빛이 얼마나 좋은가? 빛을 찾은 사람, 빛을 따라가며 사는 사람은 모든 부정적인 것에서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흑암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로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상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어 지금 그 영원한 세상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죄가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고 비참하게 파괴시키는지를 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두움을 몰아내고자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각주에 보세요. 이기지 못하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자 어둠이 패배하고 쫓겨 간다는 말슴입니다.
아주 캄캄한 방안에 조그마한 촛불을 켜도 어두움이 물러가고 환해집니다. 그런데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빛을 비추시려고 오셨습니다. 어둠의 권세인 사단을 이기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면 죄의 실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면 천국과 지옥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보면 하나님나라가 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느날 로마 황제가 정원에 들어오는 유대의 랍비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게만 해 주면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랍비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왕께서 태양을 한동안 쳐다보면 하나님을 보여드리겠노라고 응답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어찌 태양을 볼 수 있겠는가 한참 쳐다보면 내 눈이 멀지 않겠느냐"하고 꾸짖었습니다. 이에 랍비는 "왕이여, 태양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으로 어찌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십니까"하고 대답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그런 제한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태양을 보려면 특수하게 처리된 까만 안경으로 보아야 하듯이 하나님은 오직 계시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여러분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여 답답합니까? 여러분 미래를 알 수 없어 안타깝고 불안합니까? 여러분의 앞 길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지 못해 초조합니까? 하나님께서 계시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면 성경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읽기와 성경공부가 재미있어집니다. 설교가 졸리지 않고 재미있어 지고 은혜로와집니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고 가슴이 부풀어 올라오고 마음이 마구 뜨거워집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성령님께 붙들렸을 때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눈이 확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전에는 수면제처럼 생각되던 성경이 시편기자의 표현처럼 송이꿀보다 더 달게 느껴졌습니다. 누구의 설교를 듣든지 설교자가 설교를 잘하든지 못하든지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혜가 뛰어나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의 영성이 뚜어나서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안에서 눈을 열어주시고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주님께서 이처럼 계시의 영을 부어 주셔서 눈이 열리고 말슴의 진리를 어렵게 느끼지 않고 쉽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부어주시는 은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계시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심령에 모시고 살면 주님께서 계시하십니다. 그 사람의 눈을 열어서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고 지식이 많아도 여러분의 머리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능력으로 말씀을 해석하려 하면 혼란만 옵니다.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 열어서 보여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셔도 하나님의 방법인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신의 지혜로 알려고 하기때문에 실패합니다. 여러분 이제 실패한 그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영적인 세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에 모시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성경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보일 것입니다. 참된 사랑과 생명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은혜가 보이고 행복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의 실체가 보이고 그것을 풀 수 있는 최선의 방법도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거절하고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어두움에서 더듬거리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영원한 어두움에 던져 고통을 겪고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속히 빛가운데로 나아 오십시오.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지 말고 영접하십시오.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을 함께 누리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는 빛으로 밝히 바라보고 위험한 사망길에서 나와 생명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성탄의 빛
요 1:4-131 / 홍문수 목사
성탄절 아침 주 앞에 모인 여러분과 가정 위에 성탄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였습니다. 여관방 한 칸도 얻지 못해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요때기 하나 없어 누더기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뉘어졌습니다. 누가 이 아기를 보고 위대한 인물이라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기는 바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의 탄생은 인류 역사 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인류 역사는 그를 중심으로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탄생을 거룩한 탄생 ‘성탄’(聖誕, Nativity)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탄에 관한 기록은 성경 전체에 나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언의 형태로, 신약에서는 성취된 사건의 기록으로 등장합니다. 그 중에 신약의 첫 부분인 복음서에 가장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성탄에 관한 기록이 거의 언급이 없고, 공생애부터 기록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사실적인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설명으로 언급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성탄을 가리켜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5절. ꡒ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ꡓ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성탄은 어두운 세상에 빛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본문 외에도 성탄을 빛으로 묘사한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4:16(사9:1~2 인용) 보면ꡒ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ꡓ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2:8~9 보면 베들레헴 지경의 목자들이 밤중에 양떼를 지키다가 천사들로부터 성탄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주의 영광이 빛으로 나타나 비춥니다.
눅2:8~9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마2:1~11 보면 멀리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성탄 사실을 알고 찾아옵니다. 그때 어떻게 찾아왔습니까? 밤하늘에 이상한 별빛을 보고 아기 예수 계신 곳을 찾아갑니다.
우리도 성탄절 아침 이 시간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성탄의 빛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탄의 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의 빛 : 생명의 빛, 영적인 빛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고 했는데, 그 빛은 과연 어떤 빛일까요? 물론 우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빛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빛은 ‘영적인 빛’입니다. 이 빛은 우리 인간의 영혼에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물리적인 빛도 생물체에 육적인 생명을 줍니다. 만일 태양빛이 없다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창조 기사를 보면 맨 첫날 하나님께서 무엇부터 창조하셨습니까? 빛입니다! 물리적인 빛이 없으면 생명체가 죽어버리는 것처럼,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영적인 빛이 없으면 인간의 영혼은 죽습니다. 멸망하고 맙니다. 인간은 육체로만 되어 있지 않고 영혼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2] 생명의 빛의 다양한 모습 : 구원의 빛, 소망의 빛, 치유의 빛, 사랑의 빛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빛은 우리에게 어떤 빛으로 나타납니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물리적인 빛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빛은 때로는 밝은 조명으로, 때로는 뜨거운 열기로, 때로는 동력을 일으키는 에너지 등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 영적인 빛도 마찬가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① 구원의 빛 :
성경 보면 인간의 죄와 사망을 가리켜 ‘어둠’으로 비유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육신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에 두려움과 허무가 밀려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혼 가운데 영접하면 이 어둠이 사라집니다.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빛입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즉시 사라집니다. 두려움과 허무는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예수님이 어둠을 이긴 빛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성탄 당시 빛이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한낮인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그것은 죄와 영원한 사망,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죄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아침 어둠이 사라지고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막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 ” 부활의 빛은 인간을 구원하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성경 보면 지옥은 영원한 사망의 장소로 어둠이 가득한 곳입니다.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유 1: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반면 천국은 영생의 장소로 빛이 가득한 곳입니다.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의 어둠에서 구원해서 천국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참 빛’이십니다.
② 소망의 빛 :
악한 원수 마귀는 인간에게 자꾸 절망하게 만듭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에 빠져들게 합니다. “나는 안 돼!” “이젠 끝장이야!” “다 틀렸어!” “힘들어서 죽겠어.” 등등.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절망이 없습니다. 항상 긍정이요 소망입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나는 승리할 수 있어!”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과 소망을 말하게 해 줍니다.
어둠은 절망입니다. 빛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 영혼에, 우리 삶의 현장에 비춰지면 절망은 사라집니다. 사60: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미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우리가 태양을 바라보면 마음이 환해지듯이 예수님의 빛을 바라보면 소망이 넘칩니다. 그러나 태양을 등지면 어두운 그림자가 내 앞을 가로막듯이 예수님을 멀리 떠나 등지고 살면 낙심과 절망으로 침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빛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삽시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오직 소망이란 단어만 있습니다.
여러분, A. 링컨을 잘 아시죠.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많이 존경 받는 분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도 많이 못하고 많은 고난을 겼으며 자랐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업 실패, 주 의회 선거 낙선, 신경 쇠약, 의회의장직 낙선, 대통령 선거위원 낙선, 국회의원 낙선, 또 낙선, 부통령 낙선, ... 하도 실패하니까 그도 사람인지라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살 충동을 느꼈고, 가족이나 친구들이 그 주위에 칼이나 면도날이 보이면 치워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지도 않았고, 폐인이 되지도 않고 화려하게 재기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고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대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소망의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캄캄한 어둠이 사방에 깔려 있었지만 그 가운데 분명히 내리 비취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 끝까지 붙잡았기에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여러분, 혹시 여러 가지 고통으로 힘들어하십니까? 이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의 빛이 되시는 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확신으로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치유의 빛 :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에는 온갖 질병과 고통이 만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오면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치유됩니다. 물리적인 빛도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죠. 태양빛이 비춰지면 각종 병원균이 죽고 소독이 됩니다. 요즘엔 레이저로 치료하고 수술까지 합니다. 빛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빛에는 더욱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상처와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이 치유되면 육체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말라기 선지자는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내다보면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말라기는 예수님의 성탄을 가리켜 ‘떠오르는 태양’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치료하는 광선을 발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몸과 마음에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까? 이 성탄절 아침 예수님의 빛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회복되고 치유되어 강건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④ 사랑의 빛 :
죄는 인간을 불화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불화하고, 인간과 불화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이 미움, 갈등, 불화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사회도 ... 인간이 모인 것마다 그렇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서로 미워하고 불화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그렇습니다. 가정을 봐도 사랑해서 만난 부부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인데 다투고 싸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회사를 봐도 그렇죠. 동일한 목표를 갖고 모여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 불화와 갈등이 만연해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와 욕심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온 세상은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임하면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이 가득해집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무엇이 행복입니까? 소유입니까? 물질입니까? 권세입니까? 잠17:1을 보십시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렇죠. 비록 초가삼간에서 보리떡을 먹어도 가족들이 화목하면 진수성찬을 먹으며 다투는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한 것입니다.
옛날 의가 좋기로 소문난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이 길을 가고 있는데, 발에 뭐가 걸립니다. 동생이 주어보니까 금덩어리입니다. 너무 기뻐합니다. 형도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자꾸 흑심이 생깁니다. 동생은 형이 빼앗을까봐 경계합니다. 형은 동생이 혼자서 가질까봐 견제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사라지면, 형은 동생이 사라지면 혼자서 금덩어리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상대방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강변에 도착해서 나룻배를 타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형이 금덩어리를 낚아채더니 강물에 풍덩 던져 버립니다. 영문을 모르는 동생이 버럭 화를 냅니다. 그러자 형이 자기 마음속을 털어놓습니다. 의좋은 형제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동생도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이전보다 더 의좋은 형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물질이나 세상의 소유가 오히려 사람들을 불화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우화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원수가 됩니다. 형의 장자권을 속여서 빼앗은 후 멀리 쫓겨 갑니다. 그런데 20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도 에서의 원한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러 다가옵니다. 겁에 질린 야곱, 그러나 그가 밤을 새워 기도했을 때 서로 얼싸안고 재회하는 관계로 회복됩니다. 야곱은 기도하는 가운데 사랑의 빛을 가득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명심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아무리 찬란하게 비추인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이 빛을 누리는 게 아닙니다. 11절~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빛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영접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빛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교회 처음 나오신 분 계십니까? 이미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예수님을 정식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빛을 받으시고, 그 빛으로 인해 구원과 소망, 치유와 사랑이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명심합시다. 이미 영접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빛이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겨울철에 창문을 닫아놓고 있으면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열면 찬란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얼마만큼 빛이 들어옵니까? 창문을 ‘연 만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욱 더 마음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빛의 역사를 충만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빛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요즘 산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산타 마을을 만들어 놓고 돈을 엄청 번다고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 바뀐 느낌입니다. 산타클로스는 3세기 소아시아(터키)의 한 마을에 살던 니콜라스라는 실재 인물입니다. 그는 은밀하게 많은 선행과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 귀한 신앙을 기리고자 그 이름 앞에 세인트(성스러운)이란 말을 붙이게 된 겁니다. 그 이름이 유럽에 전해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름도 산타클로스로 바뀌고 엉뚱한 모습으로 전 세계에 퍼져 성탄절의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맥도 모르고 선물을 받고자 산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산타는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내가 신앙의 실천자로서의 산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을 증거하는 산타! 빛의 산타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거룩한 성탄절 아침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성탄의 빛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빛을 전하는 거룩한 산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요 1:4-13 / 민경설 목사
세계적인 과학자 에디슨을 통하여 인류는 캄캄한 밤거리가 밝은 불빛으로 밝혀지는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도 많은 과학발전으로 더욱 밝고 편한 문명의 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작 불행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원인은 물리적 어둠이 아니라 영적인 어두움, 우리의 심령의 어두움, 죄악의 어두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훈으로 말씀하시길 너의 마음, 심령이 어둡지 않은가 점검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두움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빛이 어둡지 아니하면 온 몸이 건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눅11:35-36) 그래서 인생의 문제는 세상의 어두움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어둡고 영적 어두움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문제인 심령의 어두움, 영적인 어두움에서 어떤 인간도 예외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데 인간의 한계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1:9)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그래서 우리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려면 어둠의 특성을 바로 깨달아 빛의 세계로 나아가야 됩니다. 어떻게 어둠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우선 어둠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어둠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합니다.
우리가 어둠에 빠진 것조차 모르게 합니다. 어둠을 분별 못하게 합니다. 잘못을 해도, 죄를 지어도 잘못된 것을 모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세상 사람들은 어둠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둠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는 어둠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둠이 어둠을 내쫓을 수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어둠을 내쫓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인 눈이 떠집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두 번째, 어둠은 악하고 더럽습니다.
시기, 분쟁, 질투, 살인, 전쟁 모두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롬13:12-13) 성경에서는 귀신을 더러운 영이라 합니다. 죄짓고 타락하는 영은 모두 어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야 거룩해집니다. 더러운 영이 떠나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악한 자리에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악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납니다.
세 번째, 어둠은 속임입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전2:11)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다 속은 것입니다. 빛으로 나와야 속지 않습니다. 속는 것은 이 땅에서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을 때 죽음은 닥치게 될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어둠에서 나오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어둠이 무엇을 속이는가
요 1:4-5 / 민경설 목사
인류의 근대역사 천년을 뒤돌아보면서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가장 큰 유익과 편리함을 주었는가를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세계적인 발명가 미국의 에디슨이라고 합니다. 그는 1847년~1931년 동안 살았으며 정식으로 공부하지 못하고 교육자인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에디슨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가지씩 발명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30여 개의 발명특허를 낸 사람이었습니다. 1879년에는 40시간을 밝힐 수 있는 전등을 발견하였고 1877년에는 축음기와 영사기를 발명, 1882년에는 전력발전의 시초인 화력발전소를 설계, 전화기, 라디오, 등사기, 전기소켓, 전기난로, 전기다리미를 발명, 1900년도에는 밧데리를 발명하였습니다. 이렇듯 한사람의 발명으로 수많은 사람이 문명의 이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에디슨 발명의 컨셉은'빛'이었습니다. 그의 창의적인 생각으로 우리를 밝은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그가 빛을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으로 어둠을 밝혀냈지만 이분이 밝혀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어둠, 즉 영적 어둠이었습니다.
세상의 물리적인 것으로 빛을 어둠을 거둘 수 있지만 진정 문제가 되는 마음의 어둠은 밝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 어둠을 밝혀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고통입니다. 우리에게 고민과 고통이 깊어지는 마음의 어둠을 물리칠 길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빛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참 빛인 진리를 붙잡을 때만이 우리의 어둠이 떠나는 것입니다.
[요1:4~5]"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주님 안에 비취는 빛이어야 어둠은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 말씀, 기도, 주의 종 가까이 하지 않으면 어둠을 무리 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빛을 가까이 할 때 승리합니다. 이세상사람들은 누가 누구를 속이는지 모르고 속고 있습니다.
인류는 가정도 개인도 역사도 모두가 속아서 이 세상에는 빛이 없기에 밝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속이는 사단의 어둠의 세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그 어느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속이 빛인가 어둠인가 살펴야 합니다.
[요9: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 [요8:12]"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후2:11]"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 로라"
[요3:19~20]"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지금이라도 하나님 가까이 가는 것이 속지 않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복되고 잘되려면 그리고 속는 인생을 살지 안으려면 빛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어둠이 무엇을 속이는가를 알아 보겠습니다.
1. 죄짓는 것이 속는 것입니다.
[요일3: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은 죄짓고 안들키는 것이 능력이 줄압니다.
그러나 죄짓는 것에 대한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기에 죄짓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짓지 않을 능력이 없습니다. 죄짓지 않는 비결은 빛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빛을 멀리하는 것또한 속은 것입니다.
2. 보이는 것을 기준하는 것도 속은것입니다.
[벧전1: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간은 모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보이는 것을 유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속았다는 것은 보이는 부분에 너무 기준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영원하므로 그 말씀만 붙잡으면 속지않는 인생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기준할 때 속지않습니다.
3.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속은 것입니다.
[요15: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단의 노예가 되지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이 우리죄를 보시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땅에서는 70~80년살지만 천국에서는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질서에 익숙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사람을 사랑할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속는 것입니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주십니다.
그분만이 나의 구세주이시므로 주님을 믿는 삶이 성공이며 승리인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밝히는 빛을 소유하게 됩니다. 지금의 고통과 갈등, 인생의 방황은 빛으로 나와서 영원한 세계를 향할 때 사라지게 됩니다. 빛이신 주님을 가까이 하여 승리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제4의 빛
요 1:4-5 / 이동아 목사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원리는 심오하고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은 맨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태양 빛도 아닌 달빛이나 별빛이 아닌 말씀의 빛 성령의 빛을 발한 것입니다. 그 빛은 진리와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진리와 생명의 빛이 비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시작도, 빛이 있음으로 해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빛에는 종류도 다양합니다. 옛날에는 빛하면 '태양빛'이나 '달빛' '별빛' 등 하나의 빛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자 어렸을 때만 해도 전기 불이 없는 시골에서 자랐으니까 기껏해야 호롱불을 대하면서 살았었지요. 요즈음은 과학의 발달로 이런 자연의 빛 외에 '제2의 빛'이라 해서 전기를 통하여 전깃불이 있고 또 '제3의 빛'이라고 해서 원자력 발전을 통하여 원자력의 빛도 존재합니다. 그런가하면 '제 4의 빛이라고 하는 성령의 불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불이요 주님의 빛인 것입니다. 전기 불로 불을 밝힐 수는 있습니다. 또한 열에너지로 공기를 따뜻하게 할 수 있지만 이런 빛으론 식물을 자라게는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낳는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빛이신 창조의 빛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고 교회가 탄생되었고 주의 백성들이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신비와 계시성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제2의 창세기라고 부릅니다. 창세기에서는 빛을 생명의 근원으로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성되었습니다. 생명의 시작은 말씀이며 그 말씀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비유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생명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에 오십니다.
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는 창조이전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세상에 말씀의 옷을 입고 생명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제2의 창조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고 비유한 사실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요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천지를 만드신 것처럼 로고스인 말씀으로 계신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생명. 빛 이렇게 대유법을 통하여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에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이 오늘 나에게 어떤 분이신 가를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1.생명의 빛은 흑암을 물리칩니다.
빛은 흑암을 물리칩니다.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빛이 없는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서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세상을 헤매면서 살게 됩니다.
창조이전의 땅이 혼돈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질서하고 혼돈상태에 있습니다. 마치 실타래가 얽혀 있는 것처럼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면 그 사람의 삶 속에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됩니다. 천지가 창조될 때 혼돈 되어 있던 땅이 잘 정돈되고 질서를 가졌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은 균형이 잡히게 됩니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태초의 우주가 공허했던 것처럼, 공허한 삶을 삽니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는 삶, 늘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굶주려 있는 삶을 삽니다. 그런 사람은 '삶'이라는 것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방향 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불교가 자기를 '비우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채우는 종교'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도 중요하고 유익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빈 것을 무엇으로 채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빈 상태는 공허합니다. 허전합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에서 4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을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처럼 빈집은 위험합니다. 생명이 없고 빛이 없어서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주장합니다. 흑암의 세력이 왕노릇합니다. 이 빈집은 사단이 우거합니다. 망상이 지배합니다. 탐욕이 지배합니다.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태초에 우주가 흑암 속에 있었던 것처럼, 캄캄함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캄캄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끔 민방공 훈련이라고 해서 밤에 전기를 끄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기를 끄고 있으면 할 것이 없습니다. 어두움은 모든 것을 정지합니다. 성전 미문앞에 앉은뱅이처럼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이때 예수의 생명선에 접선하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게 됩니다.
동굴 속에서는 큰 육상동물이나 사람의 시체가 미이라 상태로, 혹은 유골의 형태로 발견되곤 합니다. 멋도 모르고 동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어둠 속에서 결국은 입구를 찾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죽은 증거물입니다.
그런데 동굴보다도, 바다 속의 해구보다도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어두운 곳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심령'입니다. 사람의 심령은 타락한 세월의 길이만큼 깊고,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은 그 두께만큼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령의 눈이 어두워져 분별할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혼동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짓에 속고 마침내는 껍질만 남는 삶을 살다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속의 죄악의 어두움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출구를 모르고 멸망당하는 수많은 시체들을 봅니다. 바닷속 깊은 곳의 고기는 눈이 퇴화됩니다.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습한 곳에는 벌레도 생기고 곰팡이도 생기게 됩니다. 햇볕이 내리 쬐는 동안에는 벌레들이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어두움은 죄와 타락을 말하며 죽음을 말하며 부끄러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빛되신 예수를 만나면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예수의 생명의 빛을 깨닫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흑암의 권세에서 공허한 혼돈에서 구원받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쪼이지 않는 인생은 혼돈한 가운데 공허한 허무를 그리고 흑암에서 영적인 감각 무뎌지고 눈이 퇴화하여 어둠의 일을 하면서 분별 없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생명의 빛은 삶의 가치를 창조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사물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아름답고 예쁜 꽃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을 어둠 속에 가져다 놓으면 이 화려한 색깔들은 그 빛을 잃고 무채색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빛은 이렇게 형태와 함께 고유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해 줍니다. 빛이 없다면 아름다운 것과 거짓 된 것도 구분이 없습니다. 미인대회 같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미도 멋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가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람은 마음에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인생 전체가 어둡게 됩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목적이 있고 주신 사명과 꿈이 있습니다. 또한 나에게만 주어진 개성이 있고, 재능이 있고, 성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일컬어 창조의 에너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창조의 에너지는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이 놀라운 창조의 에너지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일생을 통해 어떤 일을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다른 이들의 모습만을 바라봅니다. 다른 이들의 이런 저런 좋게 보이는 모습들을 보며 모방만 하다가 실패만 거듭합니다. 그러다가는 결국 자신에게 스스로 실망을 하고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자신만의 색깔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색깔은 나를 만드신 분만이 아십니다. 그 분의 빛이 내게 비추어질 때에만 내 고유의 색깔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조명 받을 때 비로소 창조의 자원으로 의미와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지으신 그 분만이 나의 색깔을 찾아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분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나만의 창조의 에너지를 올바로 깨닫게 되고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만물이 그 분의 손에 지어졌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 또한 그 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앞에 나아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나의 신분이 나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무능한 자 같으나 유능한 자요 없는 자가 같으나 부유한 자요 천한 자 같으나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창조 목적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주바라기 입니다. 모든 열등의식 피해의식 다 떨쳐버리고 왕같은 제사장이요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생명의 빛은 생명의 에너지입니다.
빛이란 살아있는 것에는 더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지만 죽는 것에는 햇빛이 쪼일수록 더 말라지게 됩니다. 그 말은 예수의 생명의 빛은 심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선조 들은 일찍이 이런 햇빛의 중요성을 알고 양지 바른 곳을 골라 집을 짓거나 묏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고층 빌딩과 고층 아파트가 늘게 되고 그늘진 곳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정신병을 비롯한 많은 질병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루 종일 지하 상가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진다고 합니다. 과거 우리의 생활은 자연 친화적인 것이었는데, 도시 생활은 점점 더 그 자연에서 멀어지면서 사람들을 병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어두움에서 질병이 발생하고, 지구에 어두움만이 있다면 동물과 식물 군이 모두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어두움도 생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지구촌 생물들의 에너지 근원입니다. 햇빛 조사량(照射量)이 줄면 모든 동식물들의 활동량도 덩달아 줄어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빛을 2주 이상 못 보면 사람은 활동 에너지가 감소하고 몸이 무거워져 별 일 아닌 것도 힘들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일을 하려고 해도 주어진 정보처리 능력이 떨어져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지 못하면 죽음이요 심판입니다.
지난주 이영희 집사님 친정 어머님이 예수의 생명을 얻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부모 자식간에 살면서도 죽음의 문턱에서는 모두가 손을 들고 맙니다.
약도 사주고 간호도 하고 먹을 것은 제공할 수 있으나 생명은 공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 그 생명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다가 예수 생명 없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처럼 큰 비극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한번 죽은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사님 어머님, 유현례 할머니가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보람되고 사역에 대하여 감사하게 된 때는 영원히 멸망 받을 영혼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것도 죽음을 눈앞에 둔 사경을 헤매는 절박한 시간에 영생을 얻게된 것은 주님이 베푸신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병든 몸이 고침 받아 세상을 더살다가 가는 것이나 덜 살고 죽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순간 그리스도의 복음의 생명선과 접선을 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옥 불입니다. 그대로 멸망인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순간에 주님의 복음과 한번만 접속을 하면 생명과 통합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래서 복음은 능력입니다.
이영희 집사님 모친은 83세 노환으로 먹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딸들의 간호를 받으며 수일째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고 있는 분입니다. 이집사님과 임재국(이영란집사남편)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복음을 전하고 세례식까지 거행할 준비를 갖추고 영적인 전투를 하기 위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올케 언니가 전에는 예수를 믿었는데 시집올 당시에 시어머니가 반대하여 불교에 심취해 보살이 된 이후는 시어머니가 교회 나가는 것, 기도하는 것, 예수의 예자도 못 꺼내게 하면서 핍박을 한 장본인입니다. 그 언니가 목사가 심방을 간다고 하니 영적으로 거부하고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배고 뭐고 그곳에 오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무장을 하고 적진에 뛰어든 병사처럼 이집사님과 다짐을 하고 현장을 찾아간 것입니다. 부천에 사는 이집사님의 남동생과 이영근 집사 모두가 모여 임종 예배를 드리는 기분으로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노인에게 글없는 책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심으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며느리에게 성령께서 역사 하심으로 시어머니가 예수를 믿도록 시인하도록 허락을 하여 눈치만 보던 시어머니가 예수를 영접하고 즉석에서 세례식을 거행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할렐루야,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승리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우리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면서 영적인 새로운 탄생을 축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예배가 끝나고 올케를 향하여 울먹이면서 감사하면서 "언니 고마워요..". 언니의 반대로 미루고 힘들었던 지난날이 눈 녹듯이 녹으면서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올케도 오빠도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예수 믿기로 결단을 하였다니 이 가정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진 것이 확실합니다.
이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머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구원받고 천국가시니 일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습니까? 이젠 나머지 삶을 잘 정리하고 온전한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승리하도록 기도해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평안히 주님의 품안에 안기시도록... 그리고 온 가정이 장례식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받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아무도 죽어 가는 생명 앞에서 생명을 부여할 존재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 나인성 과부의 어머니도 손 쓸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빛되신 주님이 그 죽은 아들의 생명을 돌아오게 합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가에서 생명의 빛된 되신 주님이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매 생명이 돌아옵니다. 이 생명을 받아야 삽니다. 이 생명이 우리의 죽은 행실에서 나를 살려냅니다.
어떤 청년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습니다. 왜 자살하려고 했느냐 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던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가서 그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돈벌이를 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과 가족에게서 배신당한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여인도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약 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잃어버린 삶의 의욕을 다시 일으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살려 했습니다. 그는 친구를 원망하면서 "나는 티끌만큼도 삶의 의욕이 없다. 그러니까 제발 내게 죽음이라는 안식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의욕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혼탁한 죽음 속을 그는 그대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인간의 말과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을 살려 낼 길은 없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 길이 이 생명을 터치해야 되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하자고 말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기쁨이 없었던 사람에게 기쁨을 주시고, 죽음에 처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영접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그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그 동안 멈추었던 거문고의 모든 줄이 울리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꺼져 버렸던 등불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생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삶의 의욕을 찾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생명의 주의 손길이 그를 터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그 영혼을 살렸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 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받아 생명을 얻게되고 자라게 되고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수용성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 능력이 내 안에 창조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혼돈하고 복잡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갑니다. 거듭남의 새로운 생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창조적인 새로운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사람은 미래의 소망이 있습니다. 열차를 타는데 특급열차 3등열차 입석을 탈 때 상황이 다릅니다. 일등 대합실의 손님들은 좌석이 지정되어 내좌석이 있어서 천천히 가도 내 자리가 있지만 3등칸은 빨리 타지 않으면 먼 거리를 서서 가야하는 상황이기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래가 불확실하면 불안하고 초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생이 모든 의문과 질문에 대한 해답이십니다. 이 가운데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걱정하며 답답해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의 실타래를 껴안고 몸부림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께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고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이 생명의 빛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가 있으면 생명이 있고 예수가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빛을 받게 되고 참된 복을 받게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생명력과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화(禍)가 복이 되고, 절망이 희망이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며, 저주가 축복이 되며, 지옥이 천국으로 변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빛 되신 주님,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약속된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빛의 증인
요 1:4-8 / 임덕순 목사
저는 먼데 것은 잘 못 보지만 가까운데 것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내가 바느질을 할 때는 바늘에 실을 꿰는 일은 내가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휴가 때 다시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하니까 아 이놈의 바늘구멍이 전혀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순간 당황이 되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가까운 것은 잘 볼 수 있었는데 왜 이러지?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쓰던 돋보기를 달라고 해서 그것으로 보니까 조금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꿰어주었습니다. 그날 제 마음속에는 “아, 나도 이제 별 볼일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불씨가 사그라든다는 느낌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 생명이 이렇게 꺼져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한계를 체험해야 생각이 깊어지고, 죽음을 앞에 두어야 비로소 자신의 생명이 시한부라는 것과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배우기 시작한 요한복음은 이 생명에 관하여 말씀하는 성경입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기록한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빛이요 생명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원천이 있었는데, 그분이 생명을 주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깜깜한 절망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 별명이 우레의 아들입니다. 벼락이라는 뜻입니다. 왜 요한의 별명이 벼락일까요? 요한복음 안에 이것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죄악의 낙을 누리며 태평하게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벼락처럼 나타나서, ‘네 생명에는 문제가 없느냐, 네 생명이 시들어가지 않느냐, 그리스도가 네 빛이요 생명이신데, 그가 없이 사는 네 앞에 절망이 다가오는데 너는 그대로 살다 망할 것이냐, 어서 빛과 생명을 맞아들이라고 소리치는 말씀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던진 이 말씀이 우리에게 벼락같은 내용이라서 요한이 벼락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한 유년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왜 ‘나사로아 나오라’ 고 하셨는지 아니?” 그러자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들이 다 살아났을 테니까요.”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영국의 유명한 목사님인 로이드존스 라는 분이 어릴 때 그렇게 대답했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될성부른 나물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맞는 말입니다. 주님은 원하신다면 모든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실 수 있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때 빛을 통해서 주십니다.
무슨 약을 먹여서 주시는 것도 아니고, 마술을 부려서 주시는 것도 아니고, 피를 수혈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빛을 쪼여서 생명을 주십니다.
남극대륙에는 이끼류만 서식하는데 북반구의 봄, 여름, 가을 동안 남극은 영하60도 이하의 동토가 됩니다. 그러다가 태양이 비치는 시간이 늘어가면 얼음이 녹고 바닥의 이끼류가 드러나고, 거기서 살던 진드기가 보인답니다. 혹독한 겨울동안 죽은 것 같았던 진드기의 등딱지에 태양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진드기가 다시 움직이며 살아난답니다. 생명의 신비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태양 빛만 비추어도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생명의 빛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빛을 쪼이시면 우리가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빛을 쪼여 주실까요? 사람들의 영혼을 깨워 진리를 깨닫게 하고, 성령을 주어 주님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죄인을 찾아와서 만나주시는 행동이 절망의 어둠에 있던 사람들에게 빛을 쪼여 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생명은 욕된 생명이 아니라 영광된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명은 욕된 생명입니다. 죄짓는데 능숙한 생명이고, 병들고 깨지고 추해지는 생명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생깁니다. 자신이 욕되게 살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자식이나 며느리가 구박하고 생활능력이 없어서 비참하고 외롭게 죽게 될까봐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병들어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 없이 외롭게 죽어간다면, 그렇게 사는 생명은 영광된 것이 아니라 욕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즘 노인들은 끝까지 경제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영광된 생명입니다. 착하고 의로운 감각이 살아나고, 죄를 끊고 의를 행하는 용기가 솟으며, 날마다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나이가 들어도 당당하고 희망차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찬송을 부르며 천사에게 인도 받아 주님 품으로 가서 영원히 빛나게 사는 생명입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이고 영광된 생명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주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영혼의 햇빛 되시는 주님이 어둠속에 있는 우리를 찾아와 비추어주실 때 얻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을 꼭 닮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두려움과 질투와 악이 보일 뿐입니다. 요즘 사회 현상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가 다 보입니다. 모두가 뿔을 곤두세우고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끝까지 보복하려는 무서운 모습만 보입니다. 지난 주 일본 동경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극이 벌어져서 일곱 명이 살해당했답니다. 이번 주 강원도 동해시에서 시청을 찾아가서 공무원을 이유없이 살해한 사람이 잡혔습니다. 인간에게서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만드신 하나님이 이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탄식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아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갖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다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회복되고 빛이 살아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금이나 티타늄 등 고급 소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티끌과 진흙같이 가장 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티끌을 가지고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높이며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을 배척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많은 심판을 목격하면서도 기회가 있는 대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수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때만 지나면 다시 고개가 쳐들어집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본적도 없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인간들 앞에 아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망한 인간들을 대신해서 죄 없이 못 박히셨습니다.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이시면서도 겸손하게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도리와 행복의 비결을 환하게 보여주시는 빛이 되셨습니다. 인간은 그 주님을 보고 깨달아야만 비로소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자신의 교만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 때 성령이 우리의 거칠고 완악한 마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내 안에 생명의 빛이 비추어진 것이고, 새 생명이 시작된 결과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비추어져서 내가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마음이 바뀌어야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은 빛 안에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빛이요 생명의 근원이신데,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5)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는 단어 속에는 ‘어두움이 이기지 못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어두움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에게 갑자기 밝은 빛이 비추니까 앞이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빛은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이 빛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어떤 랍비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놀라운 말씀을 하시기에 처음에는 회당에서 가르치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회당에서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였고, 결국에는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두움은 왜 빛에 대항하는지 아십니까? 빛이 비추면 추한 것, 더러운 것이 다 드러나고 맙니다. 그래서 어두움은 빛을 싫어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더러운 것도 드러나지 않고, 죄를 지어도 누가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죄에 익숙한 사람은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바퀴벌레, 귀뚜라미, 쥐 같은 것들은 깜깜하던 창고에 불을 켜는 순간에 쏜살같이 도망쳐 어두운 곳으로 숨어버립니다. 밝은 데서는 그것들이 활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도 빛을 피하고 어두컴컴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몇몇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결국 어두움의 애호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 속에 젖어 살다보면 너무 바르고 분명한 설교가 싫어집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가서 죽을 수도 없는 고생을 영원히 하게 된다고 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당신도 완전하지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느냐면서 십자가와 심판에 대한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어두움으로 빛을 가려보려는 자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어두움이 왕이지만, 일단 빛이 비추어지면 어둠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아직 빛 안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거나 두렵다고 느껴집니까? 계속 자신을 감추고 남의 이목을 피하여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빛의 자녀의 생활이 아닙니다. 계속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도 없고 풍성한 삶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숨어서 죄를 짓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기거나 감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치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었고 빛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두움에 익숙해서 그 어둠을 애호하며 욕된 생명을 이어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사람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주저 없이 책망했습니다. 너희는 겉만 번지르르 한 회칠한 무덤 같고, 독만 가득히 품은 독사의 새끼 같으며, 열매 맺지 않는 나무이므로 찍어버리려고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다고 사정없이 책망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워 자기성찰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을 들여다보니 자신들은 정말 더러웠고 비겁했고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았습니다. 혈통만 아브라함의 후손이지 하나님을 닮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물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참으로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놀라웠든지 그를 만나러 요단 들판으로 몰려드는 인파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그를 메시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는 하였지만 그는 빛이 아니라 단지 빛을 증거 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말씀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말씀이 아니고 단지 말씀을 전하는 자요 빛을 증거 하는 자였습니다.
수 천 미터 심해에는 빛이 없어 아주 깜깜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사는 물고기들은 눈이 퇴화되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답니다. 인간이 죄악의 어두움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영적인 눈이 퇴화되었다는 지적입니다. 선과 의와 진리에 대하여 완전히 무감각하고 빛이 무엇이고 어두움이 무엇인지 감각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에 대하여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서 미리 세례요한을 보내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할때,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야이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신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서 그분이 오셔서 일하시도록 길을 안내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 풀고 묶는 역할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훌륭한 분이 신발을 신겨드리는 그분은 대체 어떤 분일까? 그러나 그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보통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말씀을 전달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요한을 보내신 바로 그분, 말씀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본문은 그가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말씀합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여 수만명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단 한사람의 죄도 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주님뿐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는 분은 일부러 이 어두운 세상에 찾아오신 아들하나님이신데 그는 빛이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사도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성령을 보내주시고, 빛과 생명을 넣어주신 분은 오직 주님이셨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영광스럽습니다. 교회 중에도 인재들이 넘쳐 나고 규모가 큰 교회는 더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교회, 위대한 목사님만 붙들고 있다고 영생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와 그 목사님이 전하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만나고 붙들어야 합니다. 교회만 자랑하고 교회가 전하는 주님을 만나 그 은혜의 빛에 쪼이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요한이 증거 한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 되신 주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요, 목사님은 생명이신 주님을 전파하고 가르쳐,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목사님은 모두 빛과 생명의 증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신 주님만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만 빛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높은 산위에서 주님이 변화되시고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하던지,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을 다 함께 모시고 싶습니다.” 자기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함께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구름이 그 모습을 가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시면서 구름이 싹 가시는데, 그때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보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엘리야 모세는 내가 사용한 종이고 예수님만 내 아들이고 너희 구주니, 너희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그분만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빛이요 생명이심을 알려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안내자 세례요한도 온 것입니다.
빛은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환하게 비추기 때문에 빛인 줄을 다 압니다. 누가 ‘저게 빛이다.’ 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그게 빛인 줄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사람이 필요할까요? 고후4: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유일하고 영원한 참 빛이요 그 빛 안에 우리에게 주실 생명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의 영혼의 눈을 가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빛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어 저들의 눈에 가려진 것을 풀어내고 눈을 떠서 빛을 보도록, 찾아가서 소리치고 안대를 벗겨서 사람들이 빛을 주목하도록 하는 사람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성경이 서점마다 팔리고 있고 TV를 틀면 목사님들의 설교가 방송되고 있으며, 교회가 동네마다 우뚝우뚝 서있지만,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빛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돈으로 가려져있고 자기 주관과 무지로 막혀있으며, 거짓된 사상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참 빛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빛을 증거 할 사람들을 단지 몇 명 하나님이 지명하여 보내셨습니다. 시대마다 나타났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뒤인 복음의 시대에는 상황이 변했습니다. 요엘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는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고 그들은 예언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라도 능히 빛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게 성령을 부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도 같은 내용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빛과 생명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시대에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함께 복음을 증거 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역할이 사람들에게 가책을 주고 말았던 세례요한의 사역보다 훨씬 큰 사역이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단지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했지만 이 시대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과 함께 하는 주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성령을 받아 변화된 신약시대 성도들이 변화된 삶과 확신 있는 말씀을 통하여 빛 되신 예수님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한가람 성도 모두가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한 빛의 증인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과 확신 있게 전하는 말씀으로 빛의 증인들이 됩시다. 한가람 성도 모두가 가장 성실하고 진실하고 능력 있는 빛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빛의 증거자
요 1:6-14 / 이규왕 목사
불의 사고나 질병을 갑자기 시력을 잃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것은 다시 눈이 밝아져서 예전처럼 사물을 보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 사람에게 다시 보지 못하는 것 외에는 세상에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것으로 다시 보지 못하는 답답함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인류가 가장 절실하게 가져야 할 소원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과연 갈수록 더 높아지는 경제 성장과 첨단 과학의 발달이 인류가 바라는 최대의 소망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절실한 다른 소원이 인간에게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인간에게 보다 절실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구하고 그것을 더 많이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정말 인간에 절실한 것을 소유하지 못하게 될 때 마치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부자처럼 더 아쉽고 더 답답하기만 할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며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갈수록 더 잘살고 더 편리해지는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나 미움과 시기와 불평과 폭력과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 원인이 무엇이며 과연 그 해결책과 대안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광대한 우주는 물론 겨울에 내리는 눈꽃 송이 하나조차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졌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살펴보면 너무나 오묘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만물은 그 세상을 창조하신 이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창조계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그러나 아무리 만물이 아름답고 오묘할 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그 아름다움은 빛 아래서만 드러난다는 것과 또 아무리 밝은 빛이 비춰질지라도 건강한 시력을 가질 때만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흑암과 혼돈과 공허함뿐인 세상을 맨 처음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 아래 드러난 엿새 동안의 창조는 매일 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아름다운 세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첫날 빛을 창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고 하면 아무리 아름답게 창조하셨다고 할지라도 마치 깊은 바닷 속의 물고기와 산호 숲처럼 아쉽고 답답하기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은 모든 창조의 근본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 아래 드러난 아름다움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이지 그것을 아름답게 드러나게 하는 빛의 가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다가 밤이 오게 되면 비로소 빛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과오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만물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반드시 빛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은 영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또 하나의 빛이 필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육신의 세계에만 빛과 어두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도 빛과 어두움이 있으며 그것을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들만이 감각할 수 있는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인해 인간은 어두움의 죄악 가운데 빠져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밝은 태양 빛 아래서 풍요와 건강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어두움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갈수록 잘먹고 잘사는데도 원망과 불평은 그치지 않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어두움이 바로 불신앙이요, 불순종의 죄이며 그 결과가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불평과 고통과 죽음이며, 그 어두움의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바로 사단이요, 마귀의 권세인 것입니다.
(사 59:9)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 무엇을 가지고 그 어두움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두움에 속해 있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흑암과 혼돈과 공허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이 맨 첫날 빛을 창조하시고 빛은 빛대로 어두움은 어두움대로 갈라놓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창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2.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인간 세계에 어두움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요, 빛되신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인간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암과 혼돈과 공허한 세상에 빛을 창조하셨던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 어두움에서 구원하여 내시기로 작정하시고 약속하여주셨습니다.
(사 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지금으로부터 이천여 년 전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첫 째날 빛을 창조하신 참 빛이십니다.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의 그늘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밝은 빛 아래서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영적인 시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빛을 창조하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이 세상에 오셨으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채 그 빛되신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와 같은 인간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증인으로 세례 요한을 육 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그를 통하여 참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요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세례 요한의 아버지는 약속하신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성실하게 수종드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눅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그 아버지를 따라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 것인가 하는 육신의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빛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광야로 나갔으며, 화려한 제사장의 법복대신 남루한 낙타 털옷을 입고, 기름진 제물 대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외쳤습니다.
(눅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그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참 빛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왔으며, 세례 요한은 어떻게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회개의 삶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눅 3:11-13)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눅 3: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눅3::14) ---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
사람들은 그 같은 세례 요한의 경건한 삶을 보고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을 때마다, 자기의 존재와 사명을 망각하지 않고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옳고 바른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따랐습니다.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은 큰 종파를 하나 창시해도 될 만한 인물이었으나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자 주저함이 없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참빛되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조차 예수님께 다 넘겨 주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인 것입니다.
(요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세례 요한의 삶은 그처럼 빛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다가 결국 헤롯에게 목베임을 당했으나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고 간 세례 요한을 불행한 사람으로 동정하거나, 실패자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위대한 삶을 살다가 간 성공적인 인물로 흠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간 세례 요한은 삶은 매우 짧았고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참 빛되신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들이 바로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은 오늘 우리들에게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인가 하는 것을 본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3. 이 시대의 증거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바로 이스라엘 땅이지만 그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핍박하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였습니다. 빛 되신 주님이 태어나신 이스라엘 땅은 거룩한 땅 불려지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생에 한번은 다녀오고 싶은 영광스런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 땅에 태어나 그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빛을 잃은 사람들처럼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외세의 침략과 내전과 폭탄 테러로 얼룩진 어두움의 땅이요, 공포의 땅이 되어버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이제 그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은 이스라엘 땅처럼 보이는 땅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우리 마음의 땅에 임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밝은 태양 빛 아래서도 진정 어두운 땅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옛날 보다 잘먹고 잘사는 것 같은데 그 인간이 사는 세상은 갈수록 미움과 시기와 폭력과 전쟁과 질병과 고통과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죄로 인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요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인간이 잘살고 못살고를 막론하고 미움과 욕심으로 어두워진 그 마음에 참 빛이요 참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한다면 그 마음은 빛과 사랑이 임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곳에는 참된 평화와 행복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 것을 이루는 제일 첫 걸음이 바로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땅에 영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게 할 때 참 빛되신 주님이 내 마음에 함께 하셔서 나의 마음과 생각과 나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에 그 때부터 그 마음이 밝아지고 평안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나 내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므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구원이요 행복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육신은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때로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를 믿고 나만의 행복을 위해 얼마든지 편하게 예수를 믿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의 세례 요한처럼 빛의 증거자들로 이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사명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정의롭고 정결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할 사회적인 책임이요, 도덕이요, 윤리의식인 것입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성공적인 삶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1) 밝은 대낮에도 어두운 밤에나 일어날 법한 살인 사건이 횡행하고 세계 도처에 폭탄 테러와 피의 보복이 거듭되는 갈수록 짙어만 가는 세상을 어떻게하면 밝은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참 빛되신 예수님을 전파하여 온 세상이 복음화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참 빛을 증거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인줄 알고 그 일을 위해 부귀 권세도 젊음도 생명까지도 다 드렸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이 시대에도 요구됩니다.
2) 우리도 과거에는 어두움에 속해 살던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주안에서 빛의 자녀가 된 것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행복은 자녀의 능력이 아니라 그의 부모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늘 우리들이 정작 그와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불신자와 같은 부귀 권세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얼마든지 부귀 권세를 누리며 살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빛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그것을 포기하는 삶을 살 때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행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이 행복한 삶이요 성공적인 삶인 것입니다. 해마다 12 월이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12월이 왔는데도 마음에 성탄의 감격과 기쁨이 솟아나지 않고 덤덤하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성탄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에 은혜에 대한 감격은 사실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에 대한 감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래 동안 무관심하게 지냈던 성탄에 대한 감격을 온 교우와 가족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사람들에게 성탄의 주님을 자랑하거 증거하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의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비록 밤에 가로등을 대낮처럼 밝히는 세상이지만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두움이 짙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참된 빛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으로 그 어두움의 세상을 밝힐 수 있을까요? 누가 그 일을 해야만 할까요? 그것은 먼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빛 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여 작은 빛이 되어 빛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신 까닭은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빛의 증거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생을 세례 요한처럼 빛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 드리기로 다짐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금번 성탄절이 잃었던 성탄의 감격과 성탄의 소식을 증거하는 사명감을 회복하여 마치 동방박사들의 길을 인도하던 빛처럼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참 빛되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이 시대의 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요 1:9-14 / 조용기 목사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우리는 그냥 빛이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어두움 안에 있던 정체들이 밝게 드러난다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지 않고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 되셔서 그가 비취는 곳마다 생명과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가득한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세력을 철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빛이 비추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오시면 모든 어두움을 이기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 서론>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최근 발표된 2017 대한민국 중산층 보고서에 의하면 중산층 10명 중에 6명은 자신을 빈곤층이라고 생각하고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고민을 했습니다. 청년들은 취업난 때문에 미래가 보이지 않아 앞이 캄캄하다고 말합니다. 가장들은 식구들을 먹이고 살리기 위해 앞이 막막하고 캄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이 어두워도 예수님을 우리 삶에 깊이 모시면 어두움을 이기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어둠을 멸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어두움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종교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무슨 학문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그 마귀와 일판 싸워서 그를 내쫓고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마귀는 죄와 허물을 갖다 덮어씌우고 질병과 고통을 몸에 매어 달며, 저주와 궁핍의 수렁에 빠지게 하고 죽음과 멸망을 여러분 삶에 가져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들어와서 우리 생활을 도둑질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요한복음 10장 10절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귀가 우리를 마음속에 부정적으로 말을 하도록 행동을 꾑니다. “너는 안 된다. 너는 못된다. 너는 패배자가 된다. 너는 얼마 안 지나서 죽는다. 너는 무서운 병에 걸릴 것이다.” 뭐 이런 것, 밤에 잠이 안와서 깨면 곁에 와서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 여러분은 안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자꾸 와서 해요. 그러면 여러분 진짜로 옆에 와서 말을 하는 것으로 마음이 움츠러지고 공포감이 생겨나와 소름이 끼칩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형편없이 절망되게 만듭니다. 저는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흘리신 보혈로 인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니 물러가라! 물러가라!” 내 옆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물러가라. 그러면 귀신이 “쓸데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 두고 보자.” “ 내가 두고 볼 테니 너는 내 곁에 있어봤자 소용없다. 물러가라!” 마귀는 항상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여기에 와가지고서 자꾸 끌어내리는데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생활적으로 끌어내려서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을 끄집어 내리는 것 같이 자꾸 괴롭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은 참 빛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빛이란 것은 어두움을 멀리 해주는 것이 빛인데, 빛이 있으면 우리 마음속에 생명의 빛을 따라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어둠에 속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로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어둠은 마귀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일인데 예수님이 오시면 파괴적인 일을 멀리하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이 세상에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주님은 이기게 하신다. 십자가를 통해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주심으로 세상 통치자들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 1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기독교 역사에서 유명한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고통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우리의 온몸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죄를 다 씻어내기 위함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와 의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굉장히 아팠던 때가 있습니다. 가족들은 다 자는데 저는 몹시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고 또 마귀가 와가지고서 “이제 우리 한 건 했다. 너 요번에는 우리 손에 들어왔다. 죽을 줄 알아라.” 그럼 마음에 긴장도 되고, 제가 응접실에 나와서 걸상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저는 걸상에서 잘 자기로 유명합니다. 매일 저녁 2/3는 잠자리에서 자지만 1/3은 걸상에서 잡니다. 왜냐면, 옛날에 새벽기도를 일찍이 나올 때 잠자리 옷을 입고 새벽기도에 나온 적이 있어서. 그 다음에는 안심이 안돼요. 2/3는 편안히 자고, 1/3은 아예 넥타이 까지 다 묶고 자리에 누웠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그냥 뛰어나가면 되거든. 오늘 아침도 깨보니까 넥타이 다 매고, 완전한 옷 입고 나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날도 아파서 방 안에서 기도하는 것 보다도 응접실에 나와서 걸상에서 기도를 하는데, 새벽 2시쯤 됐는데, 성령께서 마음에 가득히 임하시더니 내가 성령님 바라보고, “성령님, 좀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성령께서 제 마음속에 “이 사람아, 십자가를 보라. 전쟁은 끝났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우리가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는 이미 이긴 사람의 땅에서 살고 있는데, 무엇을 도와 달라는 말이냐?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니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성령께서 “어떻게 할 게 있느냐? 들어가서 자라.” 아니 너무 태연하게 말씀한 것 같아요. 그래서 “아 그렇습니까? 그럼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싸움이 끝났으니 더 고통당할 것도 없겠군요.” “용기야, 너 잘못 알았다. 들어가 자자.” 그래서 이부자리 덮고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병은 온데 간데 없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이겨놓은 전쟁을 싸우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깨우쳐 주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좀처럼 깨우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야 이 사람아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싸웠는지 아느냐?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했지 않느냐? 그런데 또 뭘 이루려는 것이냐?” “아이 주님 그런가요? 잘 몰랐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조금 지나면 또 잘 모른 그것을 행하고 있어요. 물질적인 생활 문제도 농사를 짓든지, 사업을 하든지, 여러분에게 늘 말해야 될 것은 “너에겐 아브라함의 복이 임해 있다. 아브라함의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네가 하는 일에는 복이 솟아오른다. 그러므로 자꾸 너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을 해라.” 그래 들어가며 나오며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말을 하면 그 말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처럼 말로써 우리 스스로 축복하지 아니하고 “나는 축복 못 받은 사람이다. 고통 받는 사람이다. 복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무의식중에 자꾸 해요. 그래서 우리가 고통을 많이 당하는 것입니다.
2. 생명을 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마귀의 일을 다 멸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로 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흑암의 권세는 우리에게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괴로운 세상에 던져 넣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자꾸 건져내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서 “내 아들아, 내 딸아, 좀 평안을 느끼고 기뻐하고 웃어봐라. 내가 다 이루어놓았다.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건져 놓았으니까 담대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초행길입니다. 모두가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알지 못한 채 좌충우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오시면, 주님께서 우리의 갈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에 낯선 인생길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면밀히 연구하고 공부하면 그 주의 말씀이 내 발에 길이 되고 등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주님께서 죄 사함과 축복과 영생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났다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장 9절~13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은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죄가 한 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청결하게 해주시고,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의인들입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가 의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보혈로 씻어서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 충만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을 때는 하늘나라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여러분과 같이 하늘나라에 진리를 따라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치료와 건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지가지 병으로 고생을 하는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병을 짊어지시고 건강을 주셨다는 것을 말씀에 거듭거듭 말씀해 주고 있지만, 우리가 누리질 못하고 있습니다. 축복과 형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제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어 놓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형통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을 내려다보니 여러분은 모두 다 형통한 사람들이예요. 더구나 2017년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형통하셔서 집에 심방을 오라고 좀 요청을 해주십시오. 제가 서대문에 있을 때는 점심과 저녁은 다 성도들 집에 심방 가서 때웠는데, 요사이는 그렇게 오라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축복과 형통 받는 사람인 것으로 가르쳐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부활과 영생, 천국을 누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중복음은 참 굉장히 귀중한 복음입니다. 용서와 의를 주시고, 거룩함과 성령 충만을 주시고, 치료와 건강을 주시고, 축복과 형통을 주시고 부활과 영생 천국을 주시는데 이것을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댓가를 지불하고 주신 것이므로 아무도 여러분에게서 뺏어가지 못합니다.
3. 우리의 갈 길을 비추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라다니면 어두운 데에 빠지지 아니하고 밝은데 살겠다고 말하셨습니다. 밝은 데라는 것은 어두운 데가 아니고 밝은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과 약속을 얻은 것을 누리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밤길에 웅덩이에 빠지는 사람, 나무 가지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담벼락에 부딪혀 코가 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새벽에도 가로등이 있어서 어둡지 않습니다. 신문 돌리는 아저씨도 가로등이 있어서 잘 걸어지고, 우유 배달하는 아주머니도 그 빛 때문에 안전하며, 밤새 야근하고 돌아가는 직장인도 그 빛 때문에 짐을 잘 짊어지고 집을 잘 찾아갑니다. 어두운 밤길에 빛이 있어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갈 길을 비춰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를 때 예수님은 자기가 가지고 온 축복을 나누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불확실하며 우리는 내일 일어날 일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바른 길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사망으로 인도하는 나쁜 길이라는 것입니다. 길조심 하라는 것이지요.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시편 119편 165절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길이요. 등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장 8절~9절)’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살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 결론 >
주님께서는 일생동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갈 길을 환히 비춰 주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젠 어두움에 거하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합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위 처에 살고 아래 처에 농부들이 살았는데, 그 아래 처에 농부의 애들이 우리와 같이 초등학교에 나가는데, 그래서 우리가 일찍이 밥을 먼저 먹고 막 아침밥을 먹는 집에 언젠가 들어가서 밥 먹는데 그 머리에 앉아가지고서 독촉을 합니다. “빨리 먹어, 늦어지지 않게.” 그런데 매일 보면 아침밥에 멀건 죽도 아니고 아주 밥도 아니고 음식이라고 볼 수 없어요. 미음같이 됐는데, 그것을 그 어머니가 보급을 해주면 애들은 징징거리고, 큰 사람들은 훌떡 마셔버리면 그만 이예요. 그런데 그 방에 안채에 구석에 보면 쌀가마니가 있어요. 두 가마니, 세 가마니, 쌀가마니를 쌓아놓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개 아버지요. 아 여기 쌀가마니를 쌓아놓고 저렇게 죽도 아닌 것을 먹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거는 왜 안 먹습니까?” 하니까 하~ 그렇게 성을 내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야 이놈의 자식, 너희는 잘 사니까 그런 소리 하는지 몰라도 저거는 우리 생명이야. 저것은 양식이 생길 때까지 생명을 보장해주는 생명이야. 이것을 먹으면 안 돼. 이것이 있어야 저런 미음이라도 쑤게 되는 것이다.” 시골에서는 참 그때 잘 못살았습니다. 그 말에 내가 가난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게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쌀이 너무 거둬져서 어떻게 처치할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릴 때 저주를 받았다고 말했었습니다. 아담이 우리 대신 저주를 받아서 우리가 아담 안에서 다 저주 받은 사람이 됐는데 예수님이 저주를 청산해버리고 말았다. 예수 이름 있는 곳에는 축복이 따른다. 예수 믿은 생활이 달라져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셔서 몸 찢고 피 흘려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이 되셨는데 아무 일도 안 생기고 그냥 왔다 가셨다면 우리가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놓고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복을 주어서 그래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일도 범사에도 삶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주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우리 만든 보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여러분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뒤로 물러갈 수가 없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앞으로 나가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지 않고 앞으로만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은 믿음, 소망, 사랑, 의, 평안, 희락, 행복을 누리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또 성령님과의 교제 속에서 꿈과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러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어야 우리 마음이 힘을 얻고 튼튼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골짜기에 마른 뼈다귀가 가득한데,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다 서로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겨나서 큰 군대가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늘 읽고, 듣고, 기도하는 그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속에 많이 간직하고 의지하고 살면 삶의 힘이 있어요.
제가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면 느낍니다. 내 포켓에 달러가 가득하면 겁이 안 나요. 길을 잃어버리면 택시를 탈 수도 있고, 집을 잃어버리면 호텔을 찾아서 잠을 자고 거기서 연락을 할 수도 있고, 좌우간 여비가 있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여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비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죄를 사하시고 불의를 사하시고 병을 청산하시고 저주를 물리치시고 죽음을 정복하신 이 크나큰 축복이 여러분에게 보배로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두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새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서 새사람이 되어서 두려워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고 다 함께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무슨 구원을 받았습니까? 죄와 허물에서 사함을 받았습니다.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저주와 가난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사망과 음부에서 영생복락을 얻었습니다.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성령님과 함께 생각을 긍정적으로 가지고 살고, 성령님과 더불어 꿈을 꿉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는데 꿈을 꿉니다. 나는 믿음을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창조적인 선언을 하면서 삽니다.” 새해에는 이와 같은 마음의 변화를 가지고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우리가 운전을 하고 갈 때가 많습니다. 남이 와서 말해주기 전에 자기가 자기 운명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