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31]‘개가죽 공출’ 견혼비(犬魂碑)라니...
일제강점기에 조선 백성들이 당한 숱한 고통은 나라를 잃은 설움보다 창지(創地) 개명(1914년)을 비롯하여 징병, 징용, 갖은 군사물자 공출, 창씨개명, 종군위안부 등 정말 ‘장난’이 아니었으나, 이들은 예사로 부잣집 종 부리듯, 탄압과 억압을 해댔다. 3.1독립만세운동의 거센 반발에 잠시잠깐 유화적인 문화정책을 쓴답시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창간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숱한 정간에 이어 폐간까지 시켰으니, 천인공노를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 1937년 <매일신보> 1938년 4월 23일자 사진까지 곁들인 낡은 기사를 보고 실소를 넘어 또다른 분노에 혀를 내둘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 등 혹한의 전선에 투입할 군인들이 방한복 방한모, 비행사 작업복 등을 만들기 위해 조선 전역에서 개가죽(犬皮)을 대대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했다. 군마다 공출 목표를 정한 수탈이 극에 달했는데, 1938년초 임실군민들이 공출한 개가죽이 목표량의 두 배를 초과한 1700여장에 달했다 한다. 개가죽의 품질이 가장 좋다며 ‘全鮮의 第一’(조선 전체에서 제일)이라고 보도했으니, 참 기가 막힐 따름이다. 더욱 가소로운 일은 임실군과 임실경찰서에서 주인의 손에 끌려가 ‘모피 보국’(毛皮報國)이라는 미명 아래 임실시장 앞(현 임실향교 입구 도로변)에 ‘견혼비’(犬魂碑)를 세우고 대대적인 제막식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무고하게 희생된‘개의 영혼을 위로한다'며 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짖만, 인도주의 차원은커녕 속셈은 따로 있었다. 가족처럼 키우던 반려견을 강제로 빼앗겨 슬퍼하고 분노하는 조선인들의 민심을 달래고, 향후 더 많은 전쟁 물자 공출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독려하기 위한 전형적인 식민지 선전·선동 수단이 아니면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니 해방 직후 분노한 군민들이 이 견혼비를 가장 먼저 파괴하여 땅에 묻었을 것이다. 유실된 것이 아님은 분명할 터. 신문의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아이러니한 사실(史實) 앞에 대문호 조정래 작가의 엄중한 민족적 경고가 떠올랐다. 대하소설 <아리랑>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글에 “일본인들의 죄는 용서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자”고 하지 않았던가.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들었다. 밥을 먹어야 하는 놋그릇도 빼앗아 가다니. 초근목피, 얼마나 힘든 세상을 우리 할머니세대와 부도세대는 겪어오신 것일까? 100세된 아버지는 일본 말만 나오면 “참으로 흉악한 놈(민족)들”이라며 지금도 몸서리를 친다.
‘오수개 설화’를 빗대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13세기 중반 진양공 최이가 무신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려 오수개 이야기를 널리 퍼트렸다는 속설처럼, 일제는 "너희 고장은 예로부터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견의 고장 아니냐. 그러니 천황폐하와 일본(주인)을 위해 개 가죽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군국주의 찬양과 수탈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삼았다는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그때까지 임실과 오수 지역에 ‘1천 년 전의 의로운 오수개’가 많이 있었다는 것도 낭설에 불과한 것일 터.
견혼비관련 글을 쓰려니 ‘천재 개그맨’ 전유성 님이 삼복지절에 전국의 삼계탕 요식업자들에게 닭의 영혼을 위하여 ‘계혼비’(鷄魂碑)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나 이뤄지지 못한 일화가 떠올랐다. 아무튼 ‘오수리 의견비'는 개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지만, 일제가 세운 ‘견혼비'는 침략 역사의 흔적일 뿐이다. 견혼비가 현존하고 있다면, 임실지역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현장이 될 뻔했다. 90년이 다 되어가는 신문의 낡은 사진과 기사를 보고 마냥 씁쓸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