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금) 이사야 28:1-6 찬송 485장
1.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개역 개정)
- 사마리아의 교만에 대한 심판 경고와 남은 자에 대한 축복 약속 -
제13-27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평화가 가득한 메시야 왕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들을 멸하시고
오직 여호와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구원의 성으로 불러 모으실 것에 대해 다각적인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이제 28장에서 35장까지는 이같은 주제를 보다 더욱 심화시켜서 보여주되
앞에서는 이방 10개국과 선민 이스라엘을 서로 대조시킨 반면
이 부분에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백성들 가운데
악한 자들과 남은 자들을 서로 대조시켜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런 문맥하에 있는 28장의 첫 단락인 오늘 말씀에서는
교만한 에브라임 곧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 경고(1-4절)와
남은 자에 대한 축복 약속(5-6절)을 기록하고 있다.
이 예언이 선포되던 때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 곧 B.C.722년 직전으로서
북방의 신흥 제국 앗수르가 한창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해 오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북이스라엘은 이미 이사야보다 20여년 앞서 활동하던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수 차례 거듭 심판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암3:15; 5:23; 6:4-6)
끝내 회개치 않고 술취함과 사치와 방종으로 일관하였다.
한편 이사야는 여기서 ‘교만한 면류관’, ‘쇠잔해가는 꽃’
북이스라엘의 도성 사마리아를 향해서는 단호하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면서도
그 가운데 의로운 남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영화로운 면류관을 쓰게 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는 이사야 전반에 걸쳐 거듭 강조하는 바,
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죄에 대해서만 심판하시는 철저히 공의로우신 분이심과
② 신실한 남은 자의 구원은 이런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에 근거하여
그 확실성을 보장받게 됨을 보여 준다.
그렇다. 이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광분하여 날뛴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지키는 신실한 남은 자들의
구원은 결코 흔들림 없이 확고히 보장되는 것인 바,
이에 우리들은 환난 중에도 결코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롬5:3-5; 벧전1:7)
1절)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의 왕도인 사마리아를 가리켜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라 부르고
그것을 가리켜 ‘쇠잔해 가는 꽃’에 비유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의 시조인 오므리가 건설하여
왕궁으로 삼은 성으로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비옥한 분지에 위치한 언덕에 매우 화려하게 건설되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성은 그 모습이 마치 영화로운 관과 같았다.
1절은 이러한 사마리아 성에 대하여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사마리아를 ‘면류관’으로 표현한 것은 우선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성이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마리아가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의 중심이 되는 최고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가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마리아가 이렇게 불린 것은 물질적 풍요로 인하여
방종과 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부터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로보암 사후(死後) 정치적으로는 많은 혼란을 겪었지만
경제적인 번영은 그들이 앗수르의 침공을 받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치와 방탕을 누리며 살았다.
아모스서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발랐으며 그러한 물질적 풍요에 도취되어
앗수르의 침공이 임박하였는데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자신들의 안전은 자신들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암6:6, 13)
실로 사마리아는 술과 영적 교만으로 취해 있었다.
이사야는 바로 이처럼 방종과 영적 교만에 빠져 있던
사마리아에 대하여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
특별히 이사야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멸망할 사마리아를 ‘쇠잔해 가는 꽃’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사마리아가 현재는 영화로운 관과 같이 화려하지만
곧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문학적 표현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꽃은 그 붉기가 십 일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처럼 모든 꽃은 피면 시들게 되어 있고, 그 기간도 오래 가지 않는다.
사마리아가 ‘쇠잔해 가는 꽃’에 비유된 것은
그 영화가 오래가지 못하고 곧 망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사마리아는 자신들의 영화가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방종하며 영적 교만에 빠져 있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가 나오는데
그는 많은 소출로 인하여 매일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더 큰 즐거움, 더 지속적인 쾌락을 위해 자기 나름의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영화의 허무하고도 덧없고 비참한 결과이다.
하나님이 없는 영화는 잠시 있다 추하게 시들고 말 꽃의 영화와 같다.
그 영화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오늘 영화를 누리다가 내일 망할 수 있으며 꿈을 꾸다 깨어나면
꿈 속에 누린 모든 것이 허무한 것임을 깨닫는 것처럼 일장춘몽(-場春夢)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세상 영화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처럼 허탄한 것만 추구하고, 생각하고,
또 세상의 것들을 소유하였다 하여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물질보다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돈보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세상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장차 천국에서 받아 누릴
영광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참으로 가치 있는 삶, 의미있는 삶,
후회 없는 온전한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