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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 꿈을 키우는 교육
교육평론 칼럼
안재오 씀
제목 : 꿈을 키우는 교육
1. 서론 : 나의 독일 제자들의 성공
최근 필자는 신문에서 성공한 한국인 디자이너의 소식을 듣고 놀랐었다. 그는 필자가 독일에서 체류할 때, 만난 나의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한국어로 임상균인데 “시키 임”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에 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지구촌 리포트] 특파원이 만난사람 - 시키 임 패션 디자이너분야의 벽을 넘나들다건축학도 출신 디자이너, 현대차 컨셉트카 참여문화의 충돌에 흥미치마를 남성복으로 만들어…중동의 긴 도포는 양복으로사회학이 창작의 토양해체이론·포스트모더니즘, 비평적 사고 패션으로 소화
“사상가, 그리고 재단사.”지난 2월 뉴욕타임스(NYT)는 한국계 패션 디자이너 시키 임(34·한국명 임상균)을 다룬 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기사는 임씨에 대해 “재단(테일러)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했다”며 “그는 매우 이상해 보이는 남성복을 정교하게 디자인했는데, 그 이상함은 상업주의가 판치는 뉴욕 패션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썼다. 시키 임의 디자인은 전통적인 패션 디자인의 틀을 깬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성의 전유물인 치마를 남성복에 사용했고 중동 사람들이 입는 긴 도포를 독특한 재단을 통해 서양식 현대복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글로벌화에 대한 나만의 철학, 장 보드리야르 등 사회학자들로부터 배운 비평적 사고가 내 디자인의 토양이 됐다”고 말했다. 뉴욕의 스타 디자이너로 떠오른 시키 임을 소호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일 화학회사 바이엘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이후 서울을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건축가로 일하다 2001년 뉴욕으로 건너가 패션 업계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던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헬무트 랭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랭과 칼 라거펠드 밑에서 선임 디자이너로 일하며 생산, 마케팅, 영업 등 패션 비즈니스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던 창의적인 일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 2009년 독립했다. (한국경제 신문 6월 1일)
위의 신문 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시키임은 최근 뉴욕에서 각광받는 스타 디자이너이다. 그런데 위의 약력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는 독일의 쾰른 출신인 한국 사람이다. 그는 필자가 가르친 제자이기도 하다. 학교가 아니라 교회, 자세히 말하면 쾰른 한국인교회 청소년 연합 모임에서 필자의 지도를 받은 교포2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즉 당시(1991-1999) 독일 쾰른에는 한국인 교회가 4-5 개 정도 있었는데 다 규모가 적어서 교회운영도 쉽지 않았는데 서로 뭉치지를 못하고 있었다.
한국인 교회도 원래는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 전체에 하나가 있다가 점차 교파적으로 분열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성인들보다는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소위 문화 정체성 문제로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단적으로 그들은 한국어를 들을 줄은 알지만 말할 줄은 잘 몰랐었다. 아이들은 교회가 분열되어 친구들과 헤어질 때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다른 한국인 교회들 - 참고로 필자가 다닌 교회 이름은 “한인교회” 였고 다른 교회들은 “중앙교회”, “감리교회” 등이었고 또 순복음 교회가 있다는 말도 있었다. - 과 연합으로 청소년들을 모아 한 달에 한번 연함으로 집회를 열었고 또 여름방학에는 쾰른시가 속한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지역의 한국인 2세들을 모아 공동으로 수련회를 가졌었다. 당시 같이 일한 유학생들로는 현재 부산대학교 교수인, 당시의 주광순 전도사, 그리고 현재 목사인, 당시의 백응석 전도사 등이 있었다.
위에서 소개한 임상균씨는 쾰른 “감리교회” 소속의 교포 2세였다. 1995-1996 년들의 연합집회들 중의 하나는 복음성가 공연이 있었는데 위에서 말한 임상균이가 곡목을 모으고 전체의 순서를 조직했다. 그리고 다른 한 아이를 소개하면 우리 교회, 즉 “한인교회”의 학생 회장 조지인 이었다. 이 사람도 나중에 유명한 가수가 되어 독일을 주름잡았다. 필자는 오늘 조지인의 연주를 보았는데 대단한 실력이었다.
獨 출신 한국인 2세 가수 모국무대
위의 조지인은 필자가 봉사한 한인교회의 학생으로 학생회장을 맡아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필자는 위의 두 꿈을 이룬 제자들을 아쉽게도 아직 만나거나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아직 필자의 살림살이가 어렵고 또 바빠서 여가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연합집회에서 상균이가 제작을 맡고 또 기타도 치고 지인이도 공연을 함께 이끌었다. 조지인은 필자가 주도한 독일 한국인 청소년 연합 수련회에 같이 갔고 거기서 밤중에 갑자기 배가 아파 필자가 차에 태워 모르는 산길을 달려 큰 병원을 발견했고 거기서 치료를 받게 했었다.
위의 두 신문 기사에서 잘 나타난 것처럼 그들의 부모들은 박정희 정권 당시 모두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일하러 이민간 세대였다. 필자는 9년간의 독일 체류를 통해서 독일의 한국인 노동자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다들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1960년 경 독일로 이민간 사람들의 고난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가 파독 광부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에서 험한 노동을 한 적이 없는 일반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학력도 낮지가 않았다.
독일이 구하려는 사람들은 몇 십 미터 땅 아래서도 일하고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가진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독일로 가고 싶어 한 사람들은 거의가 고등학교를 졸업자들이었고 때로 대학 재학 중인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독일 신문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왔다” 라고 한국에서 온 광산 구직자들의 처지를 풍자했었다. 파독 광부들은 파독 간호사들과 자연히 연결이 되었고 이들이 재독 교포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위에서 소개된 임상균씨와 조지인씨 등의 부모들도 그런 파독 한국인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하고 자라난 것이다.
2. 본론 :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 꿈을 이룬 독일의 한국인 2세들
위의 필자의 두 제자들의 경우, 필자가 특별히 그들을 잘 가르쳤다기 보다는 독일의 교육 시스템이 좋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현재의 위치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놀라운 것은 그들은 독일에서도 소수인종으로 외국인으로 살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의 시민권이나 영주권은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차별과 제한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임상균의 경우 놀라운 것은 그가 독일 정부의 지원으로 영국에 유학을 가서 옥스퍼드 대학까지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는 학비가 없다. 그리고 독일 출신 학생들이 학비가 많이 드는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가더라도 그 학비를 독일 정부에서 대어 준다. 이것이 반드시 그런지는 좀 더 알아보아야 하겠으나 한국의 국비 유학생 같은 제도를 독일이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필자의 기억에 의하면 상균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기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유학 간다고 자랑을 했었다.
이런 경우 독일은 가히 교육의 천국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의 현실을 한번 보자. 한국에 사는 소수민족 학생들이 한국 내에서 출세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한국 정부가 그 학생들을 미국이나 일본에 국비로 유학을 보내 준다는 생각은 우리는 꿈에서도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한국은 같은 한국인들에게도 “개천에서 용난다” 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하물며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에게는 말해 뭐하랴? 한국에 사는 조선족 아이나 필리핀 아이들이 한국의 가요계에서 1위를 하거나 혹은 그들이 미국의 패션계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라기는 극히 불가능하다.
3. 결론 : 독일의 법과 제도 그리고 교육 시스템을 본받아
위에서 필자는 필자가 독일 유학 체류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이 독일과 국제 사회에서 출세하는 것을 소개했다. 그렇게 된 원인을 몇 가지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독일의 법 제도와 법의 정신이 철저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외국인이라도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면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정의와 공평을 지키는 것이 독일이다. 두 번째는 무상교육 시스템이다. 100% 완전 무상 교육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독일의 경우 보육부터 성인교육까지 전부 무상이다. 각인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교육을 원하는 때에 받을 수 있다. 다른 신문을 보면 조지인의 아버지는 50이 넘어서도 대학을 입학 그리고 졸업하고 현재 바이어 제약의 연구원으로 일한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조영수인데 필자도 잘 아는 분이다. 필자의 유학시절 그 분은 바이어 회사의 근로자였다. 그러나 언제나 진학내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독일의 교육 시스템 덕분에 조영수씨는 60이 다되어 대학을 졸업하고 높은 직위에 재취업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또 그런 분을 알고 있다. 부양할 가정이 있는 아버지도 현재의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진학을 할 수 있다. 그 경우 전 직장의 월급의 80% 인지 비율은 다소 부정확하지만 어쨌든 공부를 마칠 때까지 부양비가 나온다. 그래서 필자는 저서 “교육공화국”에서 독일을 교육공화국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우리 교육 개혁의 모델로 삼았었다.
조지인 그리고 임상균과 독일의 쾰른에서 만나 같이 삶을 나눈 지가 20년이 되었다. 20년후 그 어린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그 뿐 아니라 훌륭하게 자라서 세계를 주름잡는 인물들이 되어 있다. 필자가 한국에 온지도 13년이 되어 간다. 한국에서도 필자는 교육계에 투신했었다. 즉 대학의 시간강사를 했었고 신림동 모 국가고시 학원에서도 일했고 이제는 보습학원에서 가르친다. 그들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낙관적이지 않다. 필자가 가르친 수많은 대학생들은 그 때 벌써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큰 좌절을 가지고 있었다. 학원에서는 믿음으로 신앙으로 가르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밝지 않다. 지나친 성적 경쟁과 시험지옥은 청소년들을 우울하게 한다. 애들의 입에서 “학교가기 싫다”. “공부하기 싫다”, “노는 날이 없다” 등등의 탄식이 나오는 경우 그런 아이들의 미래는 어둡다. 필자가 20년전 본 독일 태생의 한국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독일에서 만났던 그 아이들은 외국인이지만 그로인한 아무런 손해를 모르는 듯했고 자신들의 장래에 낙관적이었다. 그리고 학교생활을 즐겼다. 노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생활에 부담이 별로 없었다. 또 교회에서는 신앙을 배웠다. 독일의 종교교육이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어서 개인 신앙을 약화시켰지만 한국인 교회들은 비교적 순수한 신앙을 유지했다.
4. 추가 - 한국의 현실 - 꿈 대신 성적
우리 나라 아이들은 꿈이 별로 없다. 오직 성적 뿐이다. 부모도 교사도 아이들도 오직 성적, 공부 뿐이다. 꿈이 있으면 뭐할 것인가, 공부를 못하는데 하는 것이 필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꿈과 이상 등은 모두 개나 줘버리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가진다. 그리고 기도한다. 그리고 꿈꾼다, 교육의 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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