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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삶(생애) 및 업적
무언의 길 - 이순신 일본침략에 대비하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나,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 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이 정읍현감을 거쳐 1591년 2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 조선수군 일본의 발목을 잡다.
1592년 4월 13일(음력) 마침내 이순신이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수십만 대군의 일본군이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을 일시에 침략한 것이다.
전쟁발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만전의 준비를 한 후, 1592년 5월 4일 첫 출전을 한다. 이 출전에서 그는 옥포, 합포, 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왜선을 격파하며 승리하였다. 이어서 6월 당포. 당항포에서, 7월 한산도, 안골포에서, 9월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하였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는 조선 수군의 사기를 진작하였고, 결국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개전 이 후 거침없이 공격 해오던 일본군의 전략(수륙병진)에 큰 타격을 주어 전쟁의 방향을 전환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세계 4대 해전으로 손꼽히는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은 조선 총통과 전선의 우수성, 이순신 특유의 창의적 전술인 ‘학익진’을 사용한 전투로 해군 수장으로써 이순신의 뛰어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투이다. 1593년 8월 15일, 이순신은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조선 수군의 잇따른 해전 승리, 의병들의 출현, 명나라 군대의 참전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일본은 강화 교섭 자체를 반대하는 조선을 배제시킨 채, 전투에 소극적인 명나라와 약 3년 9개월 동안 지루한 강화협상을 전개해 나간다. 이순신은 이 기간 동안에도 군량 확보, 병력 충원, 전함 건조, 무기 제작 및 화약 비축, 군사 훈련 등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특히 전염병과 군량미 부족이라는 악조건과 싸우며 해상 작전을 수행해나갔는데, 1594년 3월 난중일기에는 장군도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고생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군량확보를 위해서 과거 둔전관의 경험을 살려 둔전을 경영했으며, 어로 작업과 소금제작으로 수만 석의 군량을 마련하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고난의 길 - 13 VS 133 명량해전 승리로 다시 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은 이러한 모든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위기에까지 몰린 이순신은 결국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방면되나, 두 번째 백의종군에 처하게 된다. 더욱이 이 기간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한편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1597년 7월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한다. 3년 9개월 동안 이순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룩해놓은 조선수군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패전 소식은 곧 이순신에게 전해졌고, 장군은 즉시 조선 수군 부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한 달에 걸친 해안지역 정찰에 나선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남해 지역을 직접 돌아보며 흩어졌던 장병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무기와 군량미를 모았다.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 제사로 재임명되는 교지를 받게 된다.
이순신에게는 13척의 판옥선만이 남아 있었다. 명량해전은 이러한 이순신의 함대가 수백 척의 적선과 맞서 싸운 해전이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형을 활용하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 함대를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결국 133척의 적선과 맞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조선수군은 칠전량해전의 승기를 타고 서해로 진출 하려는 일본을 막아내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이 해전으로 셋째 아들을 잃게 된다. 패배한 일본군이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쳐들어가 보복한 것이다.
이 후로 이순신은 고하도, 고금도로 차례로 진영을 옮기면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은 8000여명의 병력과 53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 일본은 철군을 서두르게 된다.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 진정한 영웅 이순신 길이 살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는 1598년 11월 노량 앞 바다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치열한 전장의 선상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가는 중에도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애국심과 우수성을 떨친 마지막 해전이었으며, 조선 수군이 주도 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이순신은 7년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최소 23전 이상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훌륭한 장수였다. 그러나 단지 싸움에만 능한 장수가 아니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바쳐 끝까지 백성과 나라를 사랑한 진정한 리더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오늘날에도 이순신을 가장 사랑하고 닮고 싶어 하는 영웅으로 꼽는다.
* 연표의 모든 날짜는 음력임.
년도 | 나이 | 이순신 | 임진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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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 | 1 | - 3월 8일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남 | |
1572 | 28 | - 8월 훈련원 별과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 *훈련원: 조선시대 군사들의 선발, 군사 교육 및 훈련을 담당하던 관청 *별과: 과거에서 본과 이외에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시험을 위해 따로 설치한 과 | |
1576 | 32 | - 2월 식년무과 병과에 합격 *식년무과: 3년마다 정기적으로 무관을 뽑기 위해 실시한 시험, 갑과.을과.병과로 나뉨 | |
1580 | 38 | - 1월 서익의 모함으로 수군만호에서 파직 | |
1587 | 43 | - 1월 조산보 만호가 됨 - 8월 조산보 근처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임(둔전경영 경험이 후에 수군경영에 도움이 됨) - 8월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1차) *둔전: 조선시대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 군졸, 서리, 평민, 관노비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여 경작하도록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물을 지방 관청의 경비나 군량 등으로 사용함. *백의종군: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감. | |
1589 | 45 | - 12월 전라도 정읍현감 *현감: 지방행정조직 중 가장 작은 단위인 ‘현’을 담당하는 지방관. 종5품 | |
1591 | 47 | -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 *수군절도사: 조선시대 각 도 수군을 총지휘하기 위해 두었던 외직 무관 벼슬 | |
1592 | 48 | - 4월 12일 거북선 완성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7일 옥포 해전, 합포 해전 - 5월 8일 적진포 해전 - 5월 29일 사천포 해전(거북선 첫 출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고 부상. 군관 나대용도 부상. - 6월 2일 당포 해전 -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 6월 7일 율포 해전 - 7월 8일 한산도 해전(학익진 사용) - 7월 10일 안골포 해전 - 8월 29일 장림포 해전9월 1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부산포 해전. 녹둔 만호 정운 전사 *수군절도사: 조선시대 각 도 수군을 총지휘하기 위해 두었던 외직 무관 벼슬 *학익진: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핀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전법으로, 반원 안에 적 함대를 가두고 일시집중타격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함대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해야 가능한 것이다. | -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4월 24일 이일, 상주에서 패함 - 4월 28일 신립, 충주에서 패함 - 4월 30일 선조, 서북지방으로 피난4월 곽재우 등 의병 일어남 - 5월 2일 일본군 한성 점령 - 6월 14일 평양 함락 - 6월 선조 의주로 피난 - 7월 의병 고경명 1차 금산전투. 고경명 전사 - 10월 6일 진주 목사 김시민 진주성 전투 승리 (1차 진주성 전투) - 12월 명나라 이여송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옴 *임진왜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1592-1598) *의병: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적을 물리치기 위해 백성들이 스스로 조직한 군대 |
1593 | 49 | - 2월 6일~3월 8일 웅천포 해전 - 5월 일본의 서진을 막기 위해 견내량 봉쇄 -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 8월 10일 정철총통 제조 - 8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10월 9일 임명 교지 받음 *정철총통: 이순신의 지휘아래 군관 정사준이 일본 조총과 조선 승자총을 절충하여 정철(正鐵)로 만든 조총 | - 1월 8일 평양성 전투 승리 - 1월 25일 벽제관 전투 패배 - 2월 12일 권율 행주산성 전투 승리 - 4월 일본군 한성에서 퇴각 - 6월 22일 2차 진주성 전투 패배 - 8월 일본군 철수 시작, 명군 철수 시작 - 10월 1일 선조 한성 귀환 입성 |
1594 | 50 | - 3월 4일 제2차 당항포해전 - 3월 6일 명나라 담종인의 금토패문에 항의 -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 10월4일 2차 장문포 해전 *금토패문: 명나라 선유도사 담종인이 보낸 왜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내용의 문서 | - 4월 명과 일본 서생포 회담 - 8월 일본 장수 고니시 등 수교 요청 - 12월 명나라 일본에 책봉사 파견 결정 |
1595 | 51 | - 2월 둔전 경영. 우수영 시찰 - 5월 수군 경영위해 소금 제조 | - 1월~2월 명과 일본 웅천 회담 - 4월 책봉사 한성 도착 - 12월 일본 조선 사신 파견 요청 |
1596 | 52 | - 2월 둔전 경영 - 5월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위해 여제를 지냄 | - 1월~2월 김해, 거제, 안골포 일본군 철수 -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의 책봉에 반발하여 강화파기 - 10월 일본 조선 재침 통보 |
1597 | 53 | - 2월26일 서울로 압송 - 3월4일 감옥에 들어감 - 4월1일 감옥에서 나옴. 백의종군(2차) - 4월13일 모친상을 당함 - 7월2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 8월3일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지 받음 - 8월28일 어란진 해전 - 9월7일 벽파진 해전 - 9월16일 명량해전 - 10월14일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들음 - 10월29일 고하도에 수군진영 설치 | - 1월 14일 약 20만의 일본군이 조선 재침 - 1월 27일 원균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 7월 원균의 삼도수군이 칠천량해전 대패. 원균 전사 - 8월 일본군 전라도에 침입하여 남원성 함락9월 명군 직산전투 승리 - 12월 23 ~ 1월 3일 명군 울산성 전투 패배 |
1598 | 54 | - 2월17일 고금도로 수군진영 옮김 - 7월16일 명나라 수군과 연합함대 편성 - 11월19일 노량해전. 이순신 적의 총탄에 맞아 선상에서 전사. 10명의 조선 장수 함께 전사 | - 8월18일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일본군 총 철수 명령 - 11월 25일 잔여 일본군 부산에서 총 철수 |
자료 출처
이순신 생애와 업적 - 이순신 포럼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 - 현충사안에
(아산시염치읍백암리 298-1, 041-539 - 4600,4650,5640)
@ 현충사 출입문을 지나면 왼쪽에 구름의잔디동산
@ 기념관입구
@ 기념관안에 여러자료가 전시되여있습니다
@ 지하1층 특별전시실
2011년 전시관과 교육관을 갖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이순신 장군 정신과 위업선양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현충사안내문에서 모셔왔습니다)
첫댓글 이순신 장군은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였지만, 임금을 위한 신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임금은 졸렬했고 리더쉽도 없었고 오히려 이순신 장군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온갖 핍박을 다했고,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장군이었지만, 나라와 동포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묵묵히 해나간 분입니다. 참된 사랑을 행동으로 하신 분입니다. 화려한 행사도 좋지만 그 정신을 더 크게 기려야 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이순신 장군님 !
소타님~! 뜻깊은 성웅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 항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늘~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