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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3국 탐방-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일시: 2014년 5월 27일 회요일~6월 5일 목요일 9박 10일
탐방국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3.코카서스 3국 탐방-아르메니아
*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국경
조지아의 시골 아담한 국경마을에 진입했다. 학교, 경찰서, 주택 등이 있다. 푸른 들녘을 조금 더 달려 조지아 국경 사무소에 도착했다.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기 위해서다. 두 나라를 왕래하는 차량이 그리 많진 않다. 조지아 국경 사무소에서 출국심사를 마치고 출국했다. 국경 내의 거리를 각자의 짐을 가지고 걸어서 아르메니아 국경 사무소로 향했다. 이제 아르메니아로 들어간다. 구소련 연방국가들로 근엄할 것 같은데 이웃한 나라로 쉽게 넘어가는 절차가 그리 까다롭지 않다. 참으로 부러운 국경선이다.
* 조지아에서 넘어온 아르메니아 국경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 국경을 넘어 입국했다. 한국 말을 잘 하는 아르메니아 현지 여자 가이드가 마중나와서 입국을 도와준다. 우리 일행 중 한 부부가 아르메니아 입국심사 과정에서 직원으로부터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왔냐고 물어 그렇다고 하니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현지 가이드가 직원과 얘기하여 해결해 주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시작된 분쟁이 국가와 국가 간의 분쟁으로 확대되어 현재까지도 서로 왕래하지 않고 국경은 아예 폐쇄해 버렸다. 소련연방 해체 후 아제르바이잔 내의 영토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머문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들이 그들의 자치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인 아제르바이잔은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군사가 충돌하여 아르메니아인의 승리로 끝났지만 여전히 분쟁은 남아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여행은 신중해야 한다. 아르메니아에서 나고르도카라바흐 공화국에 갈 때는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 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비자가 여권에 있으면 아제르바이잔의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입국 스탬프가 있으면 이슬람 국가를 여행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으로 살고 아제르바이잔과 대부분의 세계 나라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도 조지아를 거쳐서 들어온 것이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반드시 터키나 조지아 같은 이웃 나라를 거쳐서야만 출입이 가능한 국가다. 우리들의 현지 여자 가이드는 아르메니아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고 서강대학교에서 1년간 연수 받았단다. 현재 아르메니아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재직 중이란다. 한국말을 잘 하는 편이다. 아르메니아 학제는 초등에서 고등까지 12년으로 이어진다. 따로 분리가 안 되어 있다.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대학을 졸업한다. 이제 아르메니아에 왔으니 아르메니아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것이다.
* 아르메니아 산길 수로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오니 산이 우람하게 겹겹이 싸여 있다. 산길 도로를 달린다. 산길 도로변에 수로가 있다. 산에서 물 폭포가 세차게 흘러내린다. 아르메니아는 물이 없고 지금 더운 날씨다. 한국과 비슷하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온다. 스키 선수들이 이 나라로 많이 온다. 99%의 물은 먹어도 된다. 호텔에서 수돗물을 먹어도 된다. 계속 산길 도로를 타고 달린다. 높은 산 아래 물길 수로가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수리시설을 설치한 풍경도 보인다. 모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인공적인 산길 수로다.
* 아르메니아 산마을
조지아에서 넘어와 아르메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곧바로 우람한 산길 도로을 타고 간다. 산은 갈수록 더욱 깊어진다.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높은 산중 도로를 타고 간다. 옛날 학창시절 고향 대천에서 공주사대부고와 공주교육대학교 학업을 위해 우리나라의 청양 칠갑산 가파른 산 고갯길을 넘던 회억이 떠오른다. 강원도 어느 깊은 산중에 온 것 같기도 하다. 아르메니아는 남한의 1/3 크기로 경상남북도를 합한 면적의 아주 작은 나라다. 국토가 대부분 고지대에 있다.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약 300만 명 정도란다. 정확하지는 않단다. 이동하며 산단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정확한 인구는 1천 1백만 명으로 본단다. 감자, 밀, 포도를 각 가정에서 재배하여 먹는다. 가스관이 지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고장시 수리하기 편리해서 그렇게 설치한단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더 위험하고 불편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르메니아 산마을을 지나며 이색 풍경을 많이 본다.
*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 하그파트 수도원
아르메니아 북쪽 조지아 접경지역 하그파트라는 오래된 마을에 있는 수도원이다. 알라베르디 마을이 산악지대인데 하그파트 수도원은 높은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산과 계곡, 산마을 등이 한눈에 들어와 고풍스런 수도원 건물과 함께 비경을 선사한다. 하그파트 수도원은 12세기에 지은 건축물이다.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교회가 많아야 나라가 오래 유지 된다고 믿는 나라다. 아르메니 어떤 지역에 가도 교회가 많다. 수도원을 산 위나 바위 밑에 많이 지었다. 적이 찾아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전쟁시에는 그곳에서 탄생하여 그곳에서 생활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수도원 뜨락에 석관 무덤이 많다. 귀족 무덤도 있고, 가족들 무덤도 있다. 건물 벽면에는 수도원을 건립할 때 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대단히 웅장한 규모다. 벽면 구석에는 제비집도 있고, 실제로 제비가 새끼를 키우며 먹이를 물고 드나든다. 아르메니아는 고유의 아르메니아 문자가 있는 나라다. 하그파트 수도원을 비롯하여 역사가 상당히 깊은 나라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수도원 주변에는 야생화도 곱게 피어 이방인을 반긴다.
*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 마을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우리나라의 강원도를 연상케 하는 산골 마을이다. 조지아의 국경을 넘어 계속 이런 산중으로 달려 왔다. 아르메니아 북부의 산악지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계곡물이 마을을 휘감아 흐른다. 구 소련시절 큰 단지의 공장이 있다. 이곳 알라베르디는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그때 세운 공장 건물로 소련 잔재다. 지금은 소련이 떠나고 그대로 방치하여 폐허가 된 공장들이다. 한때는 저 공장들로 알레바르디 사람들이 풍요로웠을 텐데, 텅 빈 공장들, 흉물스런 건물들만 앙상하게 서 있어 허허로운 풍경이다. 산길 도로와 나란히 산길 철도도 있다. 산속에는 늑대가 산다. 동물을 잡아 먹고 산다. 위험한 지역이어서 알라배르디에서는 저녁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곳 사람들은 계곡 시냇물을 따라 집을 짓고 살거나, 산 중턱 평평한 곳에 집을 지어 민가를 이루며 산다. 산줄기를 타고 늘어선 주택들이 아름답다. 산길 도로변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양고기를 구워서 푸짐한 식단을 차려준다. 후식으로 딸기와 아이스크림까지 맛있게 먹었다. 아르메니아 여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모자란 메뉴는 충분히 보충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앉아있다. 시간을 좀 기다려 지루했지만 아르메니아 전통의 음식들로 행복한 중식이었다.
* 아르메니아 지진 지역 마을
이곳은 큰 지진이 났던 지역 마을이다. 지금은 평온해 보이는 마을이지만 가끔씩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에서도 폐허가 된 건물이 보인다.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아서다. 정확히 1988년 12월 7일 현지시간으로 오전 11시 41분 터키 북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스피타크, 레니나칸, 키로바칸, 이 세 지역에서 강도 7.0의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체감 지진 강도는 9.0 정도였다. 이 지방은 아라비아 판과 유라시아 판이 만나는 곳으로 강도 5.0∼7.0의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진지대다.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어서 사상자가 9만 명 정도이고, 사망자는 2만 5천 명 이상이었다. 스피타크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고 인구 2만 명 중 약 80%가 사망하였다. 아르메니아에서 두 번째 큰 도시인 인구 29만 명의 레니나칸에서는 건물이 200동쯤 붕괴되었다. 고층 아파트와 사무실에 수백 명씩 갇히고, 수천 명이 붕괴 건물에 깔려 생매장 된 엄청난 비극의 현장이었다. 피해가 적었던 인구 약 17만 명의 키로바칸에서도 10동 이상의 건물이 붕괴되었다. 전체 사망자의 대부분이 붕괴된 건물에 깔려 압사하였다. 마침 지진이 발생한 그해인 1988년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로인해 지진 복구가 지연되고, 또한 이곳은 산악지역으로 산길도로가 붕괴 되고, 구조 비행기도 쉽게 내리지 못하여 피해가 더욱 컸다. 그 당시 구소련의 고르바쵸프 대통령도 미국 뉴욕 방문 중 지진 보도를 듣고 일정을 축소하고 지진 지역으로 돌아왔다. 아르메니아 지진연구소 건물도, 오랜 역사의 성당 돔 건물도 산산이 무너져내렸다. 지진 직후 국제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구조활동이 벌어졌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곳곳에서 보인다. 지금 지나가는 마을도 아름다운 마을이었는데 그때의 지진으로 많이 망가졌다. 건물뿐만 아니라 도로에도 파인 구멍이 그대로 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힘겹게 지나간다. 마을 입구를 지나가는 철길이 옛 상처를 치유하듯 산길도로와 나란히 놓여 있다. 아르메[니아 기차는 조지아까지만 운행되고 있다. 구 소련시절 철도길을 이용한다. 이곳 주변에서 붉은 돌이 생산 되어서 붉은 색 건물이 많다. 붉은 색 교회가 아름답다. 예레반도 붉은 건물이 많아서 장미의 도시로 부르기도 한다. 부조상들로 벽면을 장식한 우람한 현대식 건물도 있다. 비극을 딛고 일어선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며, 아르메니아의 처참했던 지진에 대하여 잠시나마 함께 아픔을 나누고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이었다. 지구상에서 더 이상 지진이 발생하지 않기를, 지진으로 인한 슬픔이 없기를 빈다.
* 아르메니아 들녘 야생화
조지아 들녘에서 참 많이도 보아온 야생화를 이곳 아르메니아에서도 본다. 코카서스의 여름은 나무와 울창한 숲, 그리고 평원의 들녘 야생화가 매우 아름답다. 하얀 색, 노란 색 등 천연의 고운 자태로 들녘을 가득 채운다. 이런 풍경도 이번 여행이 주는 큰 선물이다.
* 아르메니아 딜리잔 마을
딜리잔Dilijan은 아르메니아의 스위스로 불리는 산악 녹색 마을다. 현지 가이드는 딜리잔은 어머니라는 뜻이리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를 딜리잔이라 부르지 않는단다. 해발 1200m의 고지 마을로 추운 도시다. 울창한 나무가 많고, 건물도 벽돌과 나무로 고풍스럽게 지었다 .딜리잔 국립공원도 있다. 휴양지가 많은 도시로 리조트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자신의 조국에 투자하여 큰 호텔을 짓고 있다. 사람들이 와서 한 달씩 머물다 가기도 한다. 특히 병자들이 병 치유를 위해 그렇게 한다. 딜리잔 광장도 지난다. 하얀 타워가 있고 시민들도 있다. 구 딜리잔 마을에 잠시 내려서 화장실에 들리고, 딜리잔 마을의 오래 된 목조 건물과 마을을 살펴보았다. 목조 화장실은 천연의 향기가 가득하여 매우 상쾌한 분위기다. 목조 건물도 진한 나무의 천연 향기가 배어 있고 고풍스런 자태다. 목각 기념품을 파는 상인도 있다. 딜리잔 마을의 붉은 지붕의 주택이 우람한 산과 아름다운 조화다. 조그만 교회에도 들어가 보았다. 목사님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비가 내리다 그쳤다를 반복하며 운무서린 낭만의 날씨다. 여기서 세반까지는 40분 소요 된다. 다시 버스에 올라 세반으로 향했다. 내일은 코비랍에 가서 아라랏산을 조망한다. 예레반에서도 보인다. 에치미아진에 가면 노아의 방주 배 조각이 있다고 전한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와 세반 반도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에서 세반 호수가 있는 세반으로 왔다. 약 3시간 소요 되었다. 해발 1900m 고지에 있는 호수다. 그러나 아주 서서히 오른 고도여서 그리 높은 곳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서아시아에 있는 고원이다. 코카서스 고원과 코카서스 산맥의 일부를 포함한다. 대부분 터키가 해당되고, 아르메니아 동부 약간,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서부가 약간 해당된다. 남한의 1/3 정도인 아르메니아는 대부분 국토가 고지대에 속해 있다. 아르메니아 고지대에는 세반 호수, 반 호수, 우르미아 호수 등의 여러 호수가 있다. 여기서 아르메니아는 오늘날의 아르메니아 국가명이 아니고 예전 광활한 땅을 소유했던 드넓은 아르메니아를 뜻한다. 아르메니아 고원은 철기시대의 중심으로 불려왔으며 에덴동산의 위치 중의 하나로 믿어져 왔다. 세반 호수의 길이가 60km로 장대하다. 면적은 아르메니아 국토의 5%를 차지하며 제주도보다 조금 작다. 바다 같은 호수다. 버스가 세반 호수변 도로를 달릴 때 아주 육중하고 깊은 뚝심으로 다가온다. 세반 호수 가까이 오자 날이 어둑해지며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호수는 더욱 비장한 다짐을 하는 사내처럼 검푸른 빛으로 속살을 물들이고 있다. 세반 호수가 예전에는 수위가 지금보다 높았다. 호수 안으로 세반 반도의 땅이 길게 뻗어 있다. 소련시절 산악터널 공사로 물이 빠지면서 섬이던 땅이 육지와 이어진 것이다. 호수의 면적이 좁아지면서 성, 고택 등 문화유적이 많이 훼손 되었다. 세반 호수 위에 걸쳐있는 세반 반도 언덕 위에는 9세기에 지은 두 개의 세반 수도원이 아직도 남아있다. 세반 호수에는 전설이 있다. 이 섬에 처녀가 살았는데 섬에 사는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처녀가 밤마다 불을 지피고 육지의 남자가 오기를 기도했는데 그때 육지의 남자가 헤엄을 쳐서 섬에 왔다. 둘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후부터 밤마다 처녀는 섬에 불을 피우고, 육지의 남자는 그 불빛을 따라 헤엄쳐서 건너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섬의 청년이 처녀가 피운 불을 꺼버리고 처녀를 덮쳤다. 그떄 처녀는 '악'하고 소리 지르고 헤엄쳐 오던 육지의 남자는 불이 꺼지지 방향을 잃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이 호수를 처녀가 지른 비명의 '악'에서 유래한 '악타미르' 로 부르기도 했다. 악타미르는 '악, 호수여'라는 뜻이다. 세반의 정확한 뜻은 '여기가 반 호수'라는 의미다. 현재 반 호수는 터키에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아주 넓었던 시대에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반 호수도 아르메니의 영토 안에 있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에서는 반 호수를 그리워하며 이 호수를 세반 호수라 부른다고도 한다. 호수변 주차장에 내리자 세찬 바람과 고지대의 기후로 여름이 갑자기 증발한 초겨울 날씨다. 버스 바닥에 넣었던 대형가방을 꺼내어 모두 두터운 옷을 여러 겹 끼어 입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계단을 따라 세반 반도 언덕으로 올라갔다. 세반 호수와 세반 반도를 동시에 보는 소중한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에는 바람이 심하게 분다. 날씨도 상당히 춥다. 두터운 옷을 입고 쇼울을 둘렀는데도 한기가 파고든다. 세반 호수를 조망하기 위해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언덕 위에 오르니 세반 수도원으로 교회 두개가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세바나반크 반도는 역사지구로도 유명하다. 배를 타야 들어왔던 이곳 세반 호수에 버스를 타고 들어와 쉽게 조망 언덕에 오른 것이다. 언덕 계단을 오르며 본 세반 호수는 울창한 나무와 함께 비경이다. 빙 둘러 전개되는 호수가 바다로 보인다. 멀리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많은 물이 넘실거린다. 검은 구름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세반 호수는 검은 빛이 도는 푸른 물을 지상에 가득 채우고 있다. 세반 호수Lake Sevan는 아르메니아 최대이며 흑해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 수도원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는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호수 언덕 위에 세반 수도원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원래는 세반 호수 속 섬이었던 곳에 위치한 작은 수도원이다. 세반 호수에 유입되는 강물의 양이 줄오, 공사로 인해 물이 빠지면서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서 세반 반도라는 뭍에 있는 수도원으로 변해버렸다. 이 수도원은 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외 성, 집 등 여러가지 유적이 있었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발굴되어 예레반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계단을 따라 세반 호수 언덕 위에 올라가니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분다. 그 바람부는 언덕에 교회 두 개가 오롯하게 세워져 있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어 더욱 쓸쓸해 보인다. 아래에 있는 것은 성모마리아 교회이고, 위에 있는 것은 12사도 교회다. 벽도로 지은 두 개의 교회 모두 아담하고 고풍스럽다. 아래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 안에 들어가 보았다.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걸려있다.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정신이 이곳 세반 호수에까지 서려 엄숙한 풍경을 자아낸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변 현지식당 석식
세반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 구이 요리로 저녁식사를 했다.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호수 중의 하나인 세반 호수에서 자란 송어다. 이름은 세반 송어Salmo ischchan지만, 사실은 연어과에 속한다. 구운 송어를 접시 가득 담아온 정성스런 식단이다.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운 세반 호수가 키운 생선은 매우 크며 아주 맛있다. 분홍빛이 도는 살이 많고, 뼈가 별로 없다. 민물 물고기인데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고, 깊고 고상한 풍미의 독특한 맛이다. 우리나라에서 즐겨 먹는 구운 고등어 맛이 난다. 처음에는 고등어로 착각할 정도로 동일한 맛에 놀랐다. 아르메니아는 내륙 국가라서 바다가 없다. 그런 아르메니아에서 세반 송어는 생선의 왕자다. 머리에 왕관 같은 반점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세반 송어를 석쇠에 굽거나 끓여 먹는다. 호두 소스, 말린 자두나 살구 같은 과일을 넣어 오븐에서 굽는다. 오늘 날 세반 호수에 도나우 가재, 발트해 흰물고기 등이 유입되면서 세반 송어는 안타깝게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래서 세반 송어를 양식하기도 한다. 1970년대에 벌써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의 호수에도 이식되었다. 토마토, 오이, 호박, 완두콩 등과 함께 세반 송어 요리의 푸짐한 현지식당 석식으로 행복한 여정이다. 후식으로 나온 파이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아쉬움으로 아름다운 세반 호수 주변 마을을 다시 한번 더 둘러보고 예레반을 향해 떠나왔다.
* 아르메니아 세반 호수 주변 마을 풍경
세반 호수와 세반 수도원을 보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어느 바닷가 해변 마을을 연상케 한다. 아까 세반 호수 언덕에 오를 때는 험상궂은 날씨로 온통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저녁 무렵인 지금은 햇살이 화사하다. 세반 호수욕장도 있어 이곳은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기념품을 파는 상가도 있고, 외부 손님을 위한 깨끗한 식당도 있다. 이곳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세반 호수 주변 마을 풍경은 매우 아름답다.
* 아르메니아 들녘 풍경
구름이 많던 하늘이 서서히 벗겨지고 햇볕이 나서 경치가 좋다. 세반에서 예레반으로 가는 길이다. 세반 호수가 들녘 깊숙히 들어와 있다. 호수 주변에는 마을이 있어 가스관도 높고 낮게 설치되어 있다. 초지의 들녘이 지나가고 구릉진 산언덕이 보인다. 아르메니아의 들녘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종류의 풀들이 자라는 초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잔잔한 풀들의 구릉진 언덕은 저녁 햇살을 받으며 연둣빛 능선으로 독특한 풍경이다. 뉴질랜드 북섬에서 보았던 들녘 풍경과 유사하다. 아르메니아는 작은 나라인데 조지아에서 넘어올 때는 울창하고 우람한 산 풍경을 보았고, 지금은 그와는 많이 다른 들녘과 산언덕 풍경을 본다. 하늘의 구름도 우람하게 산언덕에 걸쳐 있다. 모두가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들녘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본 아라랏산 봉우리들 원경
아르메니아의 수도는 예레반이다. 예레반 시가지 외곽에 들어서자 예레반 여행에서 주요 명소인 아라랏산이 멀리 보인다. 4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장관이다. 큰 아라랏산과 작은 아라랏산 2개의 봉우리가 더욱 오롯하다. 주 봉우리는 대아라랏과 소아라랏 2개다. 그것도 잘 구분되어 보인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었지만 설봉은 그래도 선명하게 드러낸다. 터키령에 있어 원경이지만 비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도착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수도다. 계획된 도시다. 아르메니아는 지진이 많이 나는 땅이고 또 지반이 약해서 높은 건물은 안 짓는다. 예레반 시가지에 들어서자 아라랏산 원경도 보인다. 봉우리 두 개가 크고 작은 것이 구별되어 보인다. 아르메니아 시가지 건물의 가게 상호에 쓰인 아르메니아의 고유문자가 독특하다. 러시아의 알파벳과는 많이 다르다. 아르메니아도 우리나라처럼 그들만의 고유 문자가 있다. 국회의원이 살고 있는 노란 담장의 부잣집도 지난다. 입구에는 사자상까지 아주 드넓은 저택이다. 워터파크를 비롯한 고급 식당, 시계탑의 시청 건물, 검은 색 술 제조공장 등 예레반 시가지의 여러 건물들을 보며 호텔로 갔다. 생각보다 훨씬 세련되고 아름다운 도시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예레반 여행이 시작된다. 내일 아침 모닝콜은 6시 30분, 조식은 7시 30분부터, 출발은 8시 30분이다. 붉은 색 장식의 고풍스런 호텔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참으로 행복한 여정이다.
2014년 6월3일 화요일 아르메니아 예레반, 코비랍, 코타이크
* 아르메니아 예레반 호텔 주변 풍경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 밖을 산책하며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두 개의 큰 술 제조 공장 건물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성스러운 아라랏산의 이름을 딴 ARARAT이라는 상호를 크게 설치한 붉은 색 건물의 술 제조공장도 있고, 호텔 바로 건너편에는 회색 크고 긴 건물의 술 제조공장도 있다. 도로변 다리에는 지금 스위스 대통령이 방문 중이어서 환영하는 의미의 스위스 국기가 많이 걸려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은행이 다 들어온 곳이다. 그래서 스위스라고 불릴 정도다. 아르메니아는 해외거주자가 많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걸쳐 약 9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 공식적인 이민자는 대략 50만명 정도다. 아르메니아 본국에는 380만 명의 인구가 남아있다. 해외거주자가 더 많은 나라다. 터키 대학살과 독립 그리고 주변국의 전란으로 세계 각국으로 이주해서 그렇다. 미국과 러시아에 각각 100만 명 정도 거주하고, 조지아, 프랑스, 이란, 레바논, 시리아, 아르헨티나, 캐나다 등에 다수가 실고있다. 해외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해외거주자들이 송금하는 돈으로 아르메니아의 경제가 가동될 정도다. 총면적 29,800㎢로 한국의 경상남북도를 합친 남한의 1/3 정도 크기의 작은 나라다. 수도인 예레반은 라즈단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 120만 명의 도시다.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로 서남아시아의 역사 깊은 지역에 위치한 국가다. 국경선의 변화가 상당히 심했던 지역이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터키 북동부 지방에 넓게 걸쳐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자카프카지예) 지역의 3개 국가인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가운데 가장 좁은 면적 국가다. 터키령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와 달리 정치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령 아르메니아에는 소수만이 살고 있다. 고대 아르메니아는 한때 로마 제국에 대항할 정도로 강성했다. 많은 외세의 지배와 독립투쟁으로 혼란하기도 했다. 1916년 러시아에 지배당한 후에는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자카프카지예 동맹을 맺었으나 몇 달 후 해체되었다. 1920년 아르메니아 공화국으로 잠시 독립했지만, 여러 차례의 정치적 혼란 끝에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소비에트 공화국연방으로 재통합되어 1922년 소련에 흡수되었다. 1936년 소련 헌법에 따라 독자적인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다. 1980년대 말 아제르바이잔의 관할권인 산악지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정치적 지위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아직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문제는 미해결이며, 아제르바이잔 영토 속에 아르메니아가, 아르메니아 영토 속에 아제르바이잔이 부분적으로 속해 있어 분쟁이 일고 있다. 코카서스 3국은 주변과의 혼란한 관계로 난민들도 많이 있다. 조지아에서도 난민촌을 보았다. 조지아는 옛날의 국가명인 그루지아다. 2010년부터 세계 각국에 그루지아를 조지아로 부르도록 아르메니아 대통령이 요청했다. 자신의 국가명을 개명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루지아의 정식 국가명은 조지아로 불러야 한다.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국의 이해관계도 알게 되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는 소중한 여정이다. 아르메니아뿐만 아니라 조지아에서도 포도를 이용한 술이 많았는데 이곳 아르메니아에서도 포도를 이용한 많은 술 제조공장을 본다. 예레반 시가지는 붉은 지붕의 낮은 주택이 많고 파란 나무들이 도시를 채워 조화롭고 매우 아름다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내 무너진 건물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온다. 초여름인데 서늘한 날씨로 한기가 스민다. 오늘 일정은 예레반에서 코비랍 교회 아라랏산 전망대를 보고, 코비랍에서 다시 예레반을 거쳐 코타이크 게르하트 수도원 탐방 후, 예레반으로 다시 돌아와 시티 투어를 할 예정이다. 코비랍으로 이동 중이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 시내에서 무너진 건물을 보았다. 아르메니아는 소련 연방국이었기 때문에 독립 후 소련이 떠나면서 많은 건물을 남겼는데 지금은 거의 폐허로 남아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는 지진이 잘 일어나는 국가로 그 피해가 크다. 그리고 1988년부터는 수년간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으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 그런데 1988년 12월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아르메니아의 몇 군데 시가 파괴되었고 2만 5천여 명이 사망했다. 지금 바리보는 무너진 건물은 아마도 지진 피해거라 소련시절 남은 잔재의 폐허로 보인다. 어떤 이유든 처참하고 안타까운 광경이다.
* 아르메니아 아라랏 계곡 포도재배 지역
아르메니아 아라랏 계곡이라 부르는 포도재배 지역을 지나간다. 아라랏 계곡 아래 평원지대에 끝없는 포도재배 농장이 전개 된다. 포도는 일교차가 큰 곳에서 최상의 포도가 생산되는데 코카서스 산맥을 타고 있는 아르메니아나 조지아에서는 기후 조건이 잘 맞는 것이다. 특히 높은 아라랏산이 있는 이곳 계곡은 포도재배의 조건이 더욱 잘 맞아서 온통 들녘이 포도밭이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곳 포도로 술을 제조한다. 포도즙을 발효시켜 만든 포도주는 구약, 신약시대를 거쳐 교회의 중요한 음식물의 하나로 여겨왔다. 구약시대에는 제물과 함께 사용되었고, 중요한 식품이었다. 신약시대에는 치유제로 사용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포도주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흘리는 자신의 피라고 말한 후부터 포도주는 인류를 위한 예수의 극진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포도주를 나눠 마심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상징한다.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포도로 빚어 발효, 산화시킨 것으로 포도주와 물의 비율을 2대 1로 섞어 사용한다.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물과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인 포도주를 혼합함으로써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가슴으로 흐르는 피와 물로도 암시된다.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주장하는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포도주에 물을 섞지 않는다. 성서에서 포도밭은 하나님의 교회로, 포도나무는 그리스도로, 포도덩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비유되는 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국교를 기독교로 공인한 나라다. 나는 그 사실을 이곳에 와서 알았다. 소련 연방국이란 선입견으로 바라보았던 예상과는 매우 다른 종교국이다. 코카서스 산맥의 국가로 포도재배에 알맞은 조건도 있지만, 그런 종교적인 영향으로도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 것이 아닐싶은 생각이 든다. 먼 나라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고, 듣고, 배운다.
* 아르메니아 들녘 농토
아르메니아 들녘의 기름진 농토를 보며 코비랍을 향해 달린다. 포도와 밀 농사가 대부분이다. 파란 포도나무와 노랗게 익어가는 밀밭이 장관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저리도 푸르고 , 놀놀한 기름진 농토를 보지 못 했다. 조지아에서는 저런 농토를 보았다. 코카서스 3국은 서로 이웃해 있는데 들녘 풍경은 다르다. 아제르바이잔의 삭막한 산과 들녘과는 매우 상반된 풍경이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많아 풍요로운 들녘이다. 조지아는 울창한 산과 들녘의 목장 야생화, 그리고 약간의 농토가 있었다. 아르메니아도 조지아에서 넘어올 때는 아주 깊은 산이 많았다. 원래 아르메니아는 고원지대다. 지금 가는 코비랍 들녘에서 저토록 광활하게 전개되는 농토를 보게 된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조화로운 자연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 아르메니아 들녘 방목 동물들
코카서스 3국 여행에서 방목하는 동물들을 그리 많이 보진 않았다. 조지아 카즈베기 산에 갈 때, 산을 타고 다니며 풀을 뜯는 양떼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간간이 소나 염소, 당나귀, 양 등의 가축을 보아왔다. 오늘은 아르메니아 들녘에서 방목하는 소와 염소를 본다. 살찌고 기름진 동물들이다. 어린 시절 고향 들녘에서 방목하던 동물들이 떠오른다. 50여년 전 내 조국의 풍경을 보는 순간이다. 평화로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들녘 가스관
아르메니아는 가스를 러시아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지역분쟁 이후,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시절에 구축된 아르메니아로의 가스 수송망을 봉쇄해버렸다. 그래서 아르메니아로 들어오는 모든 수입 가스는 조지아를 경유하는 러시아산으로 바뀌었다. 조지아 여행에서 아르메니아로 수송하는 러시아의 가스관을 보았다. 조지아는 러시아 가스를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사용요금을 받고 러시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가스관 설치를 허락한 것이다. 이곳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는 모두 가스관이 지상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 바라보는 가스관도 아르메니아의 들녘 곳곳에 있다. 민가의 마을 근처에는 더욱 많은 가스관이 놓여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익숙치 않은 풍경이어서 조금 위헝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상 설치가 고장 났을 때 수리하기 편리하다고 하지만 국가의 재정상으로, 또는 지진이 많이 나는 지형의 영향이 더 큰 것 같다. 옆으로, 위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놓여진 들녘의 가스관은 세계여행에서 보는 독특한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들녘 풍경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코비랍에 왔다. 이란,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 흑해까지 연결된 도로다.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카프카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이란, 터키, 조지아(그루지야)와 접경하는 삼각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코비랍에 온 것은 코비랍 교회와 아라랏산을 조망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있는 산 언덕에 오르니 광활한 코비랍 들녘이 푸르게 전개된다. 코비랍은 포도재배 지역이다. 그래서 들녘 농토에 포도나무가 줄지어 심겨져 있다. 멀리 자리한 우람한 산과 함께 평화로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아르메니아 코비랍이라는 지역에 있는 교회에 왔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니 높은 산 언덕에 올라앉아 있다. 계단을 따라,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올라왔다. 저 아래로는 드넓은 코비랍 들녘이 전개된다. 교회는 높고 긴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는 기독교 상징의 십자가 돌비와 그레고리 부조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 코비랍 교회 안에는 그레고리 감옥이 있다.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이다. 코비랍은 깊은 감옥이라는 뜻이다. 또한 교회 건물 앞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매우 신성시 여기는 아라랏산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많은 것을 보는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아라랏산 전망대
코비랍 교회 전망대에서 아라랏산을 조망했다. 아라랏산의 이름이 지어진 것에 관해서는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성경 창세기 8장 4절에 나오는 산의 이름이라는 설, 아라Ara 왕의 이름에서 지었다는 설, 아르메니아의 아리라랏Ayrarat 지방을 아라랏으로 부른 것에서 나왔다는 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성경의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산으로 본다. 아라랏산은 5,137m의 대아라랏트산Greater Ararat 과 3,896m의 소아라랏트산Lesser Ararat으로 나뉘어져 있고, 11㎞ 정도의 거리에 두 봉우리가 우람하게 서 있다. 두 봉우리 모두 화산이 분출하면서 생긴 것이다. 아라랏 큰 산의 지름은 약 40km로 매우 장대하다. 산세가 높고 험준한 지형의 휴화산이다. 바사인들은 노아의 산을 뜻하는 ‘구이누’로, 터키인들은 험한 산을 뜻하는 ‘아리다기’ 산이라고 부른다. 산 정상의 30% 정도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오늘은 흰구름이 설산 고봉을 덮어 하나의 덩이로 이어진 긴 허리만 보여주고 있다. 산 전체가 화산암이고, 용암과 화산 조각들로 덮여 있다. 주변은 완만한 경사의 평원을 이룬 고원지대로 초원이 많아 유목민들이 목축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아라랏산에 노아방주 배 조각이 남아있다고 전해지며, 종교계와 고고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 부부도 아르메니아 여행에서는 저 산을 본다는 것에 큰 비중이 실려 있다. 아라랏산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 성경 속 어느 마디에 선듯 가슴 벅찬 감동이다. 저 장엄하고 우람한 아라랏산 앞에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구별되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홍수 이후 세상에 출현한 최초의 인종이라고 믿으며 아라랏산을 매우 신성시 여긴다. 아르메니아 신화에서는 아라랏 산이 하나님의 집으로 나온다. 원래 아라랏은 아르메니아지방에 있던 나라의 이름이다. 아르메니아가 독립한 1991년에는 아라랏산을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상징물로 지정했다. 페르시아 전설에서 이곳은 인류의 발상지로 나타낸다. 아라랏산 마을에 노아가 제단을 쌓고 포도원을 가꾸었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 마을의 노아방주를 찾아 아라랏산에 오르려 했으나 실패한 성야코브스를 기념하여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1840년 지진으로 성야코브스 수도원과 마을은 전체가 무너졌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방주는 아직 아라랏 산정에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대목에서는 하느님이 아무도 볼 수 없도록 했을 뿐이라고 전설처럼 전해진다. 아르메니아의 신처럼 여기는 저 거룩한 산을 보기 위해 우리 부부가 서 있는 이곳 코비랍은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국경이 아주 가까운 곳이다. 아라랏산은 터키 영토에 있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가까이 보인다. 아르메니아 여행 중 여러 곳에서 보았지만 여기서 보는 아라랏산이 가장 가까이 다가온다. 정확히는 아르메니아, 터키, 이란 이 세 나라의 국경에 위치한 산이다. 아라랏산으로 가는 길은 주로 터키의 호수도시 반Van을 통해 가거나,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Yerevan을 통해 가거나, 이란북부를 통해 가는 길이 있다. 1829년 9월 독일인 요한 야코프 폰 파로트가 최초로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아르메니아인도 등정했다. 차츰 여러 탐험가들이 등정하면서 노아방주의 조각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 노아방주 조각이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우리는 그곳도 방문하여 볼 예정이다. 오늘은 셩경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보며 노아방주의 정지된 시간과 마주하는 매우 뜻깊은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그레고리 감옥
코비랍 교회 안에 있는 감옥으로, 아르메니아 기독교를 전파한 그레고리가 13년간 갇혔던 감옥이다. 코비랍Khor Virap은 깊은 감옥이란 뜻이다. 겉 모양은 고운 황토색 벽돌로 지어져서 아름답다. 건물 외벽에는 기독교 상징 십자가 문양 등이 새겨져 있고, 건축 헌금자 명단도 적혀 있다. 감옥 건물 바로 곁에는 아라랏트산 전망대가 있다. 아라랏트산을 조망하고 그레고리 감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인데 입구와 안쪽으로 두 곳에 감옥으로 내려가는 철제 계단이 있다. 캄캄하고 아찔한 수직 계단으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모두 고개를 내젖고는 돌아서 나온다.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의 기독교를 최초로 전파하고 왕이 국교로 공인 선포하도록 기여한 성자다. 그는 아랍계 혈족의 귀족이었던 아버지에게서 탄생했다. 그의 부친은 이슬람 왕의 사주를 받아 아르메니아의 왕과 왕비를 죽였다. 그 사건으로 그레고리의 부친과 그의 가족 대부분은 아르메니아에서 처형 당했다. 그때 그레고리만 터키 카파도키아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 그레고리는 터키에서 착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결혼까지 하여, 후일 아르메니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당시의 아르메니아 왕은 부친이 암살했던 왕의 아들이었다. 선대 왕이었던 아버지를 암살한 원수의 아들 그레고리를 죽이려 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 당시 그레고리를 죽이려고 이곳 코비랍 교회 안의 6m 지하 감옥에 가둔 것이다. 아르메니아 왕은 음식은 물론 물도 주지 않은 채 땅 속 깊고 좁은 곳에 가두었으니, 그레고리가 죽었으리라 믿었다. 그후에도 아르메니아 왕은 계속 기독교인을 탄압했다. 그러던 중 아르메니아 왕은 시름시름 앓고, 그의 여동생은 그레고리가 살아있다는 꿈을 꾸었다. 왕은 그레고리를 가둔 이곳 코비랍 교회의 감옥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정말 13년 동안 갇혀 지낸 그레고리가 살아있음이 확인되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왕은 그레고리를 왕궁으로 불러 만났다. 그러자 기적 같이 병이 낫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왕은 301년 속죄의 심정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국교로 공인 선포했다.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다. 로마 기독교는 아르메니아보다 늦은 313년에 국교로 공인 선포했다. 코비랍 교회 입구 출입문에도 기독교가 공인된 지 1700년이 되던 해인, 2001년에 세운 그레고리 부조 돌비가 서 있다. 곁에는 그레고리의 예수에 대한 꿈을 듣고, 왕이 지은 에미치아진 성당도 새겨져 있다. 먼 나라에서, 그것도 소비에트 연방국이었던 나라에서 기독교가 세계 최초로 전피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죽음을 감수하며 지켜낸 그레고리의 독실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된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제는 잠잠히 평화가 서린 온유한 감옥 건물이다.
* 아르메니아 코비랍 교회 주변 풍경
코비랍 교회는 바위산 언덕 위에 높게 앉아 있다. 교회와 그레고리 감옥, 그리고 전망대에서 아라랏트산을 조망하고 하산하는 길이다. 빙그르 산길을 돌아 내려왔다. 오르내리는 자국민들이 사람들이 많다. 들녘에는 포도밭이 많다. 산자락 아래 코비랍 마을도 아름답게 전개된다. 주차장에는 눈물나무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의 버드나무 같은 나무도 있다. 하얀 비둘기를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코비랍에서 코타이크로 이동한다.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나는 세계여행에서 버스로 이동하며 보는 그 나라의 풍경도 아주 소중한 여정으로 여긴다. 아르메니아의 생생한 풍경을 보며 가슴에, 눈에, 두뇌에, 그리고 사진에 담아갈 것이다.
* 아르메니아 들녘 공동묘지
아르메니아 들녘 공동묘지가 아주 큰 자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까 예레반에서 코비랍으로 갈 때도 보았던 묘지다. 도로변에 크고 작은 무덤이 많다. 담장을 치고 아담한 십자가를 세워둔 묘지도 있고, 집처럼 커다란 묘지도 있다. 공동묘지는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을이나 들녘에 주로 있다. 주변에는 민가도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아름다운 공존이다.
* 아르메니아 푸른 들녘 위 아라랏산 원경
예레반에서 코비랍으로 이동하여 코비랍 교회 전망대에서 아라랏트산을 조망하고 돌아가는 길인데, 지금 또 아르메니아 푸른 들녘 위 아라랏트산 원경을 보고 있다. 푸른 초지와 농토 위로 뜨는 구름 속 해발 5,165m의 아라랏트산은 비경이다. 장대하고 웅장한 품사위로 앉았는데 만년설이 덮힌 설봉은 쉽게 드러내지 않는 도도한 자태다. 노아의 방주가 걸쳤던 아르메니아의 상징적인 산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산이다. 신성시 여기는 성지의 저 산을 보기 위해 이 나라를 찾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아르메니아에 오기 전, 아라랏트산에 대한 동경이 컸다. 예전에는 아르메니아의 영토가 광범위하여 아라랏트산이 아르메니아에 속해 있었지만 오스만 투르크 및 외세의 침략으로 아르메니아의 영토가 축소되어 현재는 터키령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그리고 수도인 예레반에서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다. 그것은 아라랏트산이 워낙 높아서 잘 보이는 영향도 있다. 오늘은 날씨가 쾌청하여, 구름이 감싸고 있어 설봉은 보이지 않지만 장엄한 아라랏트산을 보는 축복의 날이다.
* 아르메니아 푸른 들녘
아르메니아의 6월 초순 들녘이 매우 짙푸르다. 산지가 많아 고산기후 등 다양한 기후의 영향인 것 같다. 아르메니아의 날씨는 흑해와 카스피해 그리고 건조한 이란과 아나톨리아 고원의 영향을 받는다. 평야는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거치면서 다부진 모양새다. 7월 평균기온이 25도, 더운 날은 42℃까지 올라간다. 연강수량은 200∼400mm이며 봄철에 비가 많다. 초여름인 지금도 약간 덥기도 하고, 촉촉히 비가 내릴 때도 있다. 아르메니아의 식물군은 3,000종 이상 분포한다. 우리나라 들녘의 다양한 식물군처럼 다양한 식물들이 들녘을 채우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고도에 따라서 반사막, 스텝·삼림, 고산성초지, 고산툰드라 등의 5개의 식생지대가 있다. 저지에는 엉겅퀴 등의 식물이 자생하고, 1400m 고원지역에는 쑥 종류가, 산에는 가시덤불이 자란다. 삼림지대는 국토의 10 %이다.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올 때는 우람힌 산악지대였다. 그때도 다양한 식물들이 산을 채우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푸른 들녘이 아제르바이잔에서 보았던 건조한 들녘과는 매우 대조적인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소련연방 시절 공장
코비랍 교회 전망대에서 코타이크 게르하트 수도원으로 가는 길인데 다시 예레반 외곽지역을 거쳐서 가고 있다. 도로가 거칠어서 약간 덜컹거린다. 예레반 시가지에 접어들자 소련이 떠난 후 소련시절의 공장들이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 아르메니아가 소련의 연방국이던 때에는 소련에서 가스, 철광석 등의 공장을 세워 번창했던 건물들이다. 아르메니아가 1991년 소베에트 연방국에서 독립하면서 소련이 떠난 흔적이 저 건물 잔해 속에 쓸쓸히 묻혀 있다. 더러는 녹슬기도 하고, 더러는 무너지기도 하고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보아온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주택 포도나무 정원
이번 코카서스 3국 여행에서 인상 갚은 것 중의 하나는 포도나무를 많이 본 것이다. 들녘에서 재배하는 포도나무 뿐만 아니라, 시가지 주택 정원에서 기르는 포도나무까지 수없이 보아왔다. 시골 농가주택에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예레반 도심의 주택 정원에 심겨진 포도나무는 독특한 풍경이다. 아르메니아의 가정집 정원은 농촌과 도시 거의 모두가 포도나무로 단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채소를 가꾸듯, 아르메니아에서는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포도나무를 가꾼다. 포도나무가 꽃이고, 정원수이고, 주택마다 동일한 정원 풍경이다. 쇠막대기를 얼키설키 이어주어 포도나무 덩굴이 타고 오르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운 정경이다.
* 아르메니아 산녘 가스관
아르메니아 산녘에서 가스관을 본다. 산 언덕에 가스관이 놓여 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에서 수없이 보아온 가스관이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서 가스를 공급받아 쓴다. 그런데 러시아와 아르메니아 사이에는 조지아라는 나라가 있다. 조지아는 러시아의 가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의 편리를 위해서 일정 금액의 사용요금을 받고 러시아 가스관이 아르메니아로 가도록 허락하고 있다. 저 가스관은 러시아에서 수입해 오는 가스가 흐르는 관이다. 조지아 여행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는 가스관이라고 보고 들었던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이곳 아르메니아에서까지 참으로 많이 보아오는 지상의 가스관이다. 코카서스 국가들은 지반이 약하여 가스관을 떵에 묻지 않고 자상으로 연결하여 사용한다. 보수할 때도 지상의 가스관이 더 쉽게 수리할 수 있어서란다. 우리 한국과는 많이 다른 광경이다.
* 아르메니아 호두 재배 지역
아르메니아는 호두를 많이 재배하는 나라다. 코타이크 게하르트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호두 재배 지역을 지나간다. 비탈진 산 언덕에 많이 심겨져 있다. 이곳 마을은 지반이 약하여서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허물어진 건물이 그대로 방치된 것도 있고 보수하는 장면도 보인다. 들녘에는 색색의 야생화가 비경이다.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이 순간 참으로 행복하다.
*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게하르트 수도원
게하르트 수도원Monastery of Geghard은 아르메니아 중부에 위치한 예레반 외곽의 코타이크 주에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유일하게 외국 영토와 맞닿아 있지 않은 주다. 산길을 달려온 버스가 수도원에 다다르자 우람한 산자락이 비경이다. 산속 우뚝 솟은 바위에는 하얀 색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주차장 주변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다. 수도원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독특한 문양의 무덤 석관이 서 있다. 수도원은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아자트 계곡Azat Valley으로 둘러싸인 산허리에 넓은 자락으로 앉아있다. 아자트 계곡의 바위를 파서 깎아 만든 게하르트 수도원의 교회와 묘지는 중세 아르메니아 건축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아주 웅장하고 큰 규모의 기독교 수도원 성지다. 중세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게하르트 수도원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게그하드 수도원으로도 불린다. 게하르트, 또는 게그하드는 아르메니아어로 창이란 뜻이다. 설립 당시 이름은 동굴사원을 뜻하는 아이리방크Ayrivank였다. 후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찌른 창을 뜻하는 게하르트로 바꾸었다. 유대 사도였던 타데우스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로마병사의 창을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 그 창이 실제로 이곳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 현재 이 창은 예치미아진 교회 박물관으로 이전하여·보관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아이리방크 또는 게하르다방크Geghardavank로 불린다. 수도원의 입구와 외벽에는 아르메니아 전통 문양의 석조 십자가인 카츠카르Kachkar 십자가들이 세워져져 있다. 연꽃 문양과 아치 문양의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조각이 공존하여 종교의 화합을 상징한다. 수도원 전체 건물은 4세기경 그레고리Gregory가 신성한 샘이 있던 동굴을 파서 만들었다. 바위를 손으로 깎아 만든 첫 번째 아바잔 동굴 밀실이다. 안으로 들어가니아직도 내부의 건물에는 그날을 증명하듯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옛날의 바닥을 연상케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돌바닥과 돔 천정이 소슬하다. 교회 본당만 1215년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을 호위했던 병사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예배장소, 교육장소 및 회의장소로 사용되었다. 교회 기둥에는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으며, 돌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벽면에는 성화가 걸려있다. 기부자들의 이름을 기록문도 새겨져 있다. 일부 암석 교회는 절벽의 바위를 직접 파서 만들었거나, 동굴을 그대로 이용한 것도 있다. 전쟁시에는 은신처로 사용했다. 바위 벽을 사람이 겨우 들어갈만 구멍을 뚫어 놓은 동굴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는 생생한 체험도 했다. 수도원에는 여러 개의 홀이 있는데, 홀마다 중앙 천정에 환기와 채광을 위한 둥근 창이 있다. 최초의 모습은 9세기경 아랍인들의 침입으로 완전 파괴되었다. 이후 복구되었으나, 아랍 통치 때인 923년 사원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필사본, 고문서 등 주요 문화재들이 약탈당하거나 지진으로 일부 파괴되었다. 평탄하지 않은 역사을 거쳐 왔지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많이 살아 있어 중세종교의 어느 마당에 선듯한 환상이다. 전망 좋은 위치로 올라가니 초입에서 보았던 산 중턱의 하얀 십자가가 아주 가까이에서 성스럽게 보인다. 수도원 밖은 울창한 나무들이 많다. 아르메니아의 특산인 호두나무도 많다. 계곡물이 흐르는 아치형 조그만 다리가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바쁜 일정으로 분주히 움직일 때 이곳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아시아의 이방인인 나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함께 사진을 찍으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우리나라의 어느 깊은 사찰에 온 착각이 들 만큼 고즈넉한 절벽 언덕의 수도원은 오래도록 가슴에 저장될 것이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선홍빛 화사한 양귀비가 아르메니아의 고운 얼굴로 배웅한다.
*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게하르트 수도원 양귀비
게하르트 수도원 탐방을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 언덕에 양귀가 많다. 빨간 꽃이 파란 풀밭에 고운 자태로 피어 있다. 코카서스 3국 여행 중 곳곳에서 보아온 양귀비다. 들녘에서도 많이 보았는데 지금은 산녘에서 아름다운 양귀비를 본다.
*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가르니 신전
조금 전 탐방한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게그하드 수도원에서 15분 거리에 위치한 신전이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 남동쪽으로 32km 떨어져 있는 코타이크Kotayk 지방에 있는 신전이다. 성벽으로 이어진 신전 입장문을 통하여 들어갔다. 높은 지대라서 산이 눈앞에 전개되고 야생풀과 야생꽃들이 반겨준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 곳 끝에서 우람하게 선 신전을 만났다. 기원전 3세기에는 부족 왕들이 기지로 사용했던 요새로 건립되었다. 아르메니아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신전으로 건축했다.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영토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전략적으로 언덕 꼭대기에 재건축된 신전이다. 신전 안에는 로마 황제의 상도 세웠다.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성소로 지어졌다. 지중해 동부의 태양신인 미트라는 로마의 군사적으로 종교 숭배 신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신전보다는 훨씬 작지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럽 풍의 건물이다. 그리스·로마식 신전 디자인을 변형해 만들어서 그렇다. 그리스 로마 사원처럼 둥근 기둥으로 둘러싼 이오니아 양식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건축자재는 대리석이 아닌 현무암을 사용했다. 아르메니아의 학생들이 견학 와서 함께 호흡하며 관람했다. 헬레니즘 문화 유물과 신석기 시대 거주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다. 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공간이다. 우리를 환영하는듯 아르메니아 남자가 악기를 연주한다. 신전에서 기둥 사이로 바라본 아르메니아 코타이크 지방의 산능선 풍경은 비경이다. 아르메니아 왕조 시대에는 신전 근처에 2층 여름 궁전을 지어 별장으로 사용했다. 신전 바로 옆에는 아르메니아가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후에 지어진 교회터였던 자리도 있다. 다 허물어져 바닥의 흔적만 드러낸다. 건너편에는 양철 지붕의 긴 목욕탕 건물도 있다. 교회와 목욕탕이 추가로 건립되면서 거대한 단지가 되었다. 신전 부근은 극히 작은 그 일부일 뿐이다. 신전 아래 가르니 계곡은 뚝 끊어진 절벽의 주상절리 지역으로 장엄한 비경이다. 우리는 신전을 보고, 교회터를 보고 주상절리의 계곡을 본 후 목욕탕으로 갔다. 온돌로 만들어진 목욕탕이다. 바닥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과 바다의 신 등을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그리스어로 '우리는 무보수로 일했다'라는 문구도 있다. 그 당시 예술가들이 대가를 받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1679년 지진으로 거의 파괴되었다. 소련이 1970년대에 실행했던 재건축 실행으로 1975년까지 복원하여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쾌청한 날씨로 파란 하늘에 두둥실 뜬 하얀 구름이 신전과 함께 장관이다. 곳곳에 핀 야생화도 코카서스 국가의 향수를 그대로 선사한다. 고전 속의 아련한 낭만에 젖어 떠나기 싫은 명소였다.
* 아르메니아 가정집 정원의 포도나무
가르니 신전 관람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본 아르메니아의 가정집 포모나무다. 코카서스 3국 여행에서 참으로 많이 보아온 포도나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가정집 주택 정원에는 항상 포도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시골과 도시 모두 그렇다. 작은 땅만 있으면 집 안에, 집 주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옛날에 집 주변에 심던 감나무 격으로 보인다. 코카서스 산맥의 영향으로 일교차가 커서 포도재배가 잘 되고 당도가 높아서 우수한 포도가 생산 되기 때문이다. 중식식당에서도 입구에서부터 포도나무가 반긴다. 포도나무를 쇠막대기 틀에 올려 지붕을 만든 낭만적인 풍경이다.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본 포도나무는 정겨운 추억이 될 것이다.
* 아르메니아 전통식당 중식
아르메니아의 아담한 마을을 걸어가서 만난 식당이다. 식당 입구에서부터 포도나무를 올려 매우 낭만적인 식당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정원이 나온다. 한쪽 집에서 빵을 굽는 장면을 공개하고 있다. 두 여인이 밀가루를 반죽하여 늘여서 불화덕에 빵을 굽는다. 손님으로 온 우리 일행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전통식당의 식사용 빵이다. 조금씩 나누어 먹고 나왔다. 우리를 맞이하는 테이블에는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다. 계속 음식을 날라다 정성껏 대접해준다. 그 중에서 가장 주 메뉴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감자와 함께 구운 음식이다. 큰 접시에 한 가득 담아온 넉넉한 인심이다. 야채와 토마토, 빵과 함께 맛있게 잘 먹었다. 그리고 과일 체리를 많이 준다. 아르메니아에서 곳곳에서 보아온 체리다. 붉게 익은 싱싱한 체리를 사과와 함께 많이 갖다준다. 상큼한 체리를 실컷 먹었다. 정원에는 체리나무가 있고 붉은 체리가 주렁주렁 달렸다. 파란 하늘에 붉은 체리가 한폭의 수채화로 뜬다.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오려는데 식당 주인인듯한 아르메니아 여인은 내게 정원의 장미꽃 앞에 서라고 하더니 사진을 찍어준다. 먼 후일 따스한 인정이 서린 식당의 추억 한 장면으로 저장될 것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동상들
아르메니아는 구 소련 연방 국가 중 하나다. 그래서 소련의 영향을 받은 잔재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 부부가 이곳 코카서스 3국 여행을 택한 것 중 일부는 구 소련의 역사와 문화를 보기 위해서다. 그 동안 여행한 소비에트 연방국이었던 국가에서 육중한 구 소련의 역사와 문화를 본 것이 아주 큰 소득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동상이다. 예레반 도심에 시가지에 기마상이 높이 솟구쳐 오르는 동상이 보인다. 아르메니아를 지킨 자의 동상이다. 또 도심 시가지 로터리 꽃밭 중앙에 서 있는 동상도 보았다. 그는 아라랏산에 최초로 올라간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행방을 모른다. 아라랏산을 등정은 했으나 하산 여부는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국기가 꽂힌 예레반 의과대학 건물도 지나간다. 나는 세계여행에서 명소뿐만 아니라 이러한 풍경을 보는 것도 아주 뜻깊은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 아르메니아 마테나다란 고문서 박물관
아르메니아 예레반 도심에 있는 마테나다란 고문서 박물관 앞에는 이곳을 방문한 차량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그 만큼 이곳 고문서 박물관은 아르메니아에서 꼭 보아야 하는 주요 명소임을 입증하고 있다. 박물관 건물 바로 앞에는 커다란 동상이 앉아있다. 405년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창제하고 아르메니아 학교를 창립한 메스로프 마슈토츠 Mesrop Mashtots의 동상이다. 박물관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마슈토츠 마테나다란Mashtots Matenadaran 고문서 박물관이다. 고문서에 관한 학술연구기관이다. 동상 주변 벽면에는 아르메니아 알파벳들이 쓰여 있다. 아르메니아 알파벳은 원래는 36개였는데 오늘날은 3개를 추가하여 39개다. 아르메니는 고유한 자신들만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국가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지금까지 고유한 한글을 사용한다는 자부심과 동일한 것이다. 고문서 박물관은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Yerevan 북서부에 있는 아름다운 경관의 높은 구릉 지역에 있다. 이곳에는 약 17,000점의 필사본이 있다. 아르메니아 고대에서 중세의 문학, 수학, 과학, 역사, 지리, 문화, 의학, 문법, 철학, 법률, 채식화 등 거의 모든 영역의 필사본이 있다.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 에티오피아어, 페르시아어, 인도어, 시리아어, 일본어 등으로 쓰여진 필사본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의 필사본은 '무슈의 설교집Homilies of Mush'으로 가로 55.3cm, 세로 70.5cm의 책이다. 책의 무게는 27.5kg다. 이곳 고문서 박물관에서 외관은 사진 촬영이 가능한데 고문서가 진열된 실내 전시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 되어 있다. 전시실에 입장하여 맨 처음 본 책이 바로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문서다. 사진으로 저장하여 가지 못하고 눈으로만 담아가야 하는 여건이 안타깝다. 이것은 1200년~1202년에 수도원에서 필사되었다. 필경사는 바르단, 삽화가는 스테파노스다. 603장의 양피지로 되어 있고 반씩 나뉘어 따로 보관되어 있다. 그 반의 분량만 전시하여 보여준다. 아르메니아의 해설사 여직원이 설명해 주었다. 전쟁 중에 어떤 여인이 품어 와서 보관이 가능했던 아주 소중한 책이다. 내용은 성경 역사가 담겨 있다. 한장, 한장 모두가 양피 가죽이어서 오늘날까지 상하지 않고 지탱해온 책이다. 나는 그 책 앞에서 놀라운 시선을 떼지 못했다. 크기도 장대하고, 무게도 육중하고, 재질까지 가죽이었다니 그 옛날 아르메니인의 지혜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아르메니아의 필사본 중 가장 작은 것은 1434년의 교회 달력으로 가로 3cm, 세로 4cm, 무게는 19g다. 이 필사본은 104장의 양피지로 되어 있다. 아주 작은 기막힌 고문서다.
이 귀중한 필사 기록물들은 에치미아진의 대교구 마테나다란 Matenadaran에 의해 필사본의 핵심들이 구성되었다. 필경 역사가 100년에 이른다.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5세기부터 있었고, 17세기에는 에치미아진의 수도원에서 수백 점의 필사본 작업이 시작되었다.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많은 필사본을 소장한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다. 18세기에 에치미아진은 외부 세력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그로 인해 일부 필사본만 남았다. 1828년에 동아르메니아가 러시아에 합병된 후 새로운 필사본들을 정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4,060점을 확보했다. 1929년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국유재산으로 선포되었다. 안전한 보관을 위해 1915년 모스크바로 옮겼던 4,060점의 필사본들은 1922년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으로 반환되었다. 1939년 에치미아진 마테나다란은 필사본의 안전과 차후의 연구를 위해서 예레반으로 이전되었다. 1959년 마테나다란은 학술연구소로 재조직되었으며, 여러 부서가 설립되었다. 끈질긴 노력 끝에 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필사본의 목록도 발간했다. 고대 문화의 귀중한 보물을 지키고, 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복원 및 제본 부서를 만들었다. 현지와 외국의 활용 방안도 마련되었다. 이곳의 고문서 및 필사본은 역사가, 학자,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들이 중세 문화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로 된 초기 기독교의 저술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초기 기독교 역사 등 세계적 고유성, 대체 불가능성의 중요성을 간직한 고문서 박물관이다. 1959년 이후 마테나다란의 전문가들은 과학 정기간행물, 마테나다란의 소식지, 아르메니아의 작품 등이다 200여 권의 서적을 출판했다. 지난 20년 동안 마테나다란은 아르메니아의 기념비적인 옛 문헌들을 수없이 많이 출판하였다. 먼 나라 아르메니아에서 전설 같은 고문서의 훈훈한 향수에 젖어본 소중한 여정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도심 거리 풍경
예레반 도심 거리에는 나무가 많다. 울창한 가로수들이 건물과 함께 솟구쳐 올라 걸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중후한 유럽풍의 건물이 나오면 더욱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많다. 그 사이에 전철로 다닌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전철이라서 신비로운 풍경이다. 도로변 가로수 나무 아래 벤치에서 휴식하는 시민들도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이방인인 우리를 바라본다. 그들에게는 낯선 여행객이고, 우리에게는 낯선 외국인이다. 그래도 인간의 정은 소통되어서 서로의 눈빛이 곱다. 가로수 나무에 기대어 놓은 사람을 형상화한 듯한 철제 조각품도 있다. 그 사이로 우리는 걸어간다. 모두가 예레반 도심 거리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캐스케이드
예레반 도심에서 만난 캐스케이드다. 캐스케이드Cascade는 작은 폭포, 계단폭포, 인공폭포로 해석되며 계단으로 흘러내리는 폭포를 뜻한다. 이곳 캐스케이드 언덕 계단은 6개의 폭포 형상으로 길고 높게 뻗어 있지만 물은 흐르지 않는다. 캐스케이드는 소비에트 연방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다. 아르메니아의 경제적 어려운 상황으로, 해외 이주민들의 성금으로 거의 조성되었다. 아름다운 공원과 함께 계단형 구조로 만들어진 미술, 문화 공간이다. 광장 주변에는 주상복합 건물이 오붓하게 둘러싸여 있다. 캐스케이드 광장 입구에는 건축가이며 도시계획가였던 알렉산드르 타마니안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다. 원래는 예레반 북쪽의 언덕과 도심을 연결하고자 계획했는데, 타마니안은 착공도 하지 못하고 구상한 계단형 구조물로 1936년 사망했다. 설계도만 남아있는 미완의 유작이 되었다. 한참 후에서야 타마니안의 유작을 부활시켜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 연결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 광장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예술품들로 장식한 정원이 추가되었다. 물이 흐르는 분수 정원에 설치된 조형물들이 수려하다. 아직도 그는 바닥에 새겨진 자신의 예레반 설계도면을 내려다보는 동상으로 서서 캐스케이드를 지키고 있다. 타미니안은 예레반을 조성한 예레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러시아 출신 건축가인 그는 45세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하여 반생을 보냈고 또 예레반에서 생을 마감하여 아르메니아의 건축가로 기록되고 있다. 오페라하우스, 공화국 광장과 주변의 건물 등 아르메니아 예레반 도시 설계 건축에 기여했다. 캐스케이드는 아르메니아 현대 조형예술, 문화적 자부심의 완결판이다. 5층 높이의 계단식 건물의 외부에 층마다 분수와 조형물, 정원들을 조성해 전망대 역할을 한다. 각 층의 계단 아래 실내 공간은 갤러리와 공연장이다. 위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어 예레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착공되었지만 1988년 대지진과 1991년 독립, 전쟁 등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2002년 아르메니아 출신 미국의 사업가가 재산을 기부하여 2009년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캐스케이드 광장과 계단 아래 실내공간의 미술전시품 그리고 전망대에 올라가 예레반 시가지까지 아르메니아의 많은 것을 보았다. 아르메니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지만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역사 깊은 나라다. 또한 4세기에 만들어진 문자와 언어를 지금껏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뿌리 깊은 나라다. 그들의 자랑스런 역사와 문화가 캐스캐이드에 서려있다. 한때는 소련 연방국이었고, 남한의 1/3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에서 다부진 내면의 충실함을 보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 아르메니아 캐스케이드 전망대에서 본 예레반 시가지
* 아르메니아 예레반 대사관 거리
예레반 도심 한 복판에서 만난 대사관 리는 울창한 나무들로 싱그럽다. 높은 담벽의 각국 대사관 앞에는 국기가 펄럭이고 경비원이 곳곳에 서 있다. 도로에는 많은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며, 정류장에는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복잡하다. 한국과의 관계는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자적인 외교권을 갖게 된 아르메니아는 이듬해인 1992년 2월 21일 우리나라와 수교에 합의했다. 북한과는 이보다 며칠 앞선 2월 13일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주 아르메니아 한국 공관장은 러시아 대사가 겸임한다. 예레반에 거주하는 한국교민은 1997년 기준으로 30명이었으나 현재는 5명 밖에 없다. 예레반에서뿐만 아니라 코카서스 3국 여행 중 한번도 교민을 만나지 못했다. 먼 나라에서 걸어보는 대사관 거리는 긴장되면서도 뜻깊은 체험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건물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내를 여행하며 본 건물 중에는 고풍스런 것도 있고, 현대적인 우람한 건물도 있다. 구 소련 잔재로 남은 건물은 도심 건물이 진한 벽돌 색상으로 육중한 느낌이다. 아치형 창문은 고전미를 자아낸다. 우리가 유숙한 호텔 바로 곁을 지나간다. 지금은 스위스 대통령이 이 나라에 와 있어서 다리 난간을 비롯한 곳곳에 스위스 국기가 나부낀다. 예레반 시가지 외곽의 건물 중에는 우람하고 아주 큰 현대풍의 아파트와 세련된 모양의 백화점 쇼핑몰이 인상적이다. 이곳은 부자 동네다. 예레반 학살 기념관으로 가면서 본 풍경이다.
*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기념관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기념관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시내의 야트막한 산에 세워져 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추모공원 길 양편에는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 국가 등에서 심은 기념식수가 많다. 기념관 입구에 다다르자 대학살 위령탑이 높게 세워져 있어 바라보는 시선이 소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은 소련 연방 시절이지만 아르메니아를 상징한다. 100여년 전의 아픈 역사를 드러내는 학살 추모 공원은 라잔 강 건너 서쪽 언덕 위의 기념공원은 아라랏산이 있는 남쪽을 향해 있다. 이곳은 터키 무슬림에 의해 학살당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추모 기념관이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인 러시아를 도울 것 같은 기미를 보이자 오스만 제국의 강제 이주와 집단 학살이 실행되었다. 그 때 삶의 터전을 잃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던 아르메니아 난민들이 아직도 외국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1965년 4월 24일 학살 50주년을 맞아 예레반에서 10만 명의 시민이 모여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의 공식적 인정과 위령탑 건설을 요구하여 세워졌다. 추모 공원의 위령탑은 1966년 착공되어 1967년 완공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두 차례에 걸쳐 오스만 제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을 대규모 학살했다. 터키의 다수파인 무슬림에 의해 터키 변두리 지역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당했다. 한밤중에 조직적으로 터키 군대가 아르메니아인을 집단 학살했다. 이 사건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라고 부른다. 첫번째 학살은 1894년에서 1896년에 행해졌다. 오스만 제국에 있던 아르메니아인은 농민들과 상인들 구성체를 결성했는데 상인들은 무역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해 부유한 상인층이다. 건축가나 조폐관 등 중앙행정에 근무하는 사람도 많았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아르메니아 기독교인과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인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아르메니아 일부 부유층은 외국과 교류하며 서구화 되어 갔기 때문이다. 1877년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대를 점령하면서 아르메니아인게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위한 개혁을 약속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안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운동이 시작되었고,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이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을 목표로 정당이 결성되었다. 일부는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노린 폭탄테러 활동을 했다.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이 한창일 때 러시아 점령지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무슬림 난민들로부터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이 러시아 군대와 협력하면서 무슬림을 몰아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 사이에서 적개심이 높아졌다.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이 아르메니아인을 외국과 내통하고 테러를 벌이는 위험 분자로 여겼다. 1870년대의 러시아와 터키의 전쟁으로 터키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결국 민족말살 정책으로 수십만 명이 학살 당한 것이다. 두번째 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제1차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발생한 1894년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과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면서 터키는 아르메니아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오스만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충돌을 진압했고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 정당은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스만 제국의 대응을 비판했다. 1895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은 공동으로 행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그 이행을 오스만 제국에 통보했다. 1896년 아르메니아인 혁명 조직이 이스탄불의 은행을 습격했다. 결국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의 충돌이 다시 재연되었고, 제2차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점령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은 러시아군으로 참가하거나, 게릴라 활동을 했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로 인해 무슬림 마을이 습격당했었다. 아르메니아인 게릴라의 행동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아르메니아인 감정을 일으켰다. 혼란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주했고, 오스만 제국 동부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런 박해에 의해 사망한 아르메니아인의 수는 가장 적게 추산하는 터키 측 집계로 20만 명이고, 제일 많게 추산하는 아르메니아 측의 집계로 200만 명으로 추정한다.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 동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약 150만 명이라고 하는 통계가 있으며, 20년 후에 제1차 세계 대전 때 인구도 거의 같은 수로 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20세기 최초 현대의 첫 조직적 집단 학살사건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터키 정부에서는 강제 이주에 따른 희생이라고 주장할 뿐, 집단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망자 수도 두 나라가 다르게 말한다. 터키 측에서는 50만 명으로 주장하고, 아르메니아 측에서는 150만 명으로 주장한다. 통일과 진보위원회 통일파, 즉 청년 투르크당 정권이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150만 명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특히 두번째 학살 사건에서는 조직적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라고 하면 대개 두번째를 말한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성립한 터키 정부에서는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을 전쟁 중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즉 살해된 사람은 아르메니아 과격파의 테러로 전투원이나 러시아와 내통한 스파이뿐이라는 것이다. 반아르메니아 감정의 결과로서 발생한 현대적 민족문제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대전 중에 오스만 제국 전체에서 희생된 사람들 중에서 아르메니아 민족도 일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집단 학살이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집시들을 탄압한 것과 같은 조직적 학살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터키 국가가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터키의 대학살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기념관이 설립된 것이다. 4월 24일은 1915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일이어서, 매년 터키를 비판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행해지고 있다. 미주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을 동정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프랑스 등 유럽 각국에서도 비난 결의를 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터키령으로 되어 있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은 영토 문제를 포함한 정치 문제로 번졌다. 2012년 프랑스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인 금지법을 통과시키켰다. 이 법은 공개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 1년의 실형과 4만5000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아르메니아에 대한 정치 군사 문제를 중단했다. 우리 부부가 방문한 그날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더욱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바람도 심히 불어 모자와 옷깃이 펄럭인다. 긴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길 옆에는 무덤도 있다. 독립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1988년 아제르바이잔에서 살해된 아르메니아인들, 전쟁 중 학살된 양민을 추모하는 묘비다. 묘비이기도 한 12개의 석판이 원형으로 둘러싼 둥근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12개 석판은 지금은 터키 영토지만 예전 아르메니아의 12개 지방을 상징한다. 이곳을 탐방한 자국민과 외국인이 함께 서서 슬픈 영혼의 불꽃을 바라본다. 1991년 독립 후 만들어진 2층 박물관의 지하 전시실에는 그 참혹상이 잘 드러나 있는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을 증언하는 사진과 도서 등이다. 암매장 터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처절한 장면도 있다. 프랑스 가수가 노래로 아르메니아의 이 슬픈 역사를 알리기도 했다. 아르메니아는 그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아르메니아의 슬픈 역사 한 단면을 본 현장이다.
*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가지 풍경
학살 기념관에서 아르메니아 공화국 광장으로 이동하며 본 예레반 시가지 풍경이다. 저녁 무렵이어서일까. 하늘에 검은 구름이 걸쳐 있다. 도로변에 스위스 국기가 펄럭인다. 그것은 지금 스위스 대통령이 아르메니아 방문 중이어서 그렇다. 예레반Eerevan은 아르메니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다. 1981년 이래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아르메니아 역사상 열세 번째 수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인간이 살아온 도시 중 한 곳이기도 하다. 큰 아파트 건물 곁을 지난다. 깊은 역사의 도시라서 그런지 육중한 느낌이 드는 건물도 보인다. 예레반은 흐라즈단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이며, 아라쿠스 강의 지류가 시내를 흐른다. 계곡 절벽에 기대어 늘어선 건물도 있다.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다. 기계 제조나 금속업, 포도주, 브랜디 제조, 담배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2011년 년 통계로 예레반은 106만 0138명의 인구로 이는 아르메니아 공화국 인구의 35%에 해당하는 인구다. 우리가 유숙한 호텔 곁을 지난다. 호텔 앞에서는 다 보이지 않던 우람한 호텔 건물이 그 앞을 지나며 전경을 보여준다. 호텔 앞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분주히 왕래한다. 그 곁에는 술 생산 공장도 길게 자리하고 있다. 술 공장 앞에는 프랑스 대사관도 있다. 도심의 잔디 광장이 아름답다.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를 위해 공이 컸던 동상도 건장하게 세워져 있다. 세계여행에서 명소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의 시가지 풍경을 보는 것도 내게는 아주 유익한 여정이다.
아르메니아 예레반 공화국 광장Republic Square of Yerevan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있는 중앙 도심 광장이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넓다. 광장도 크고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이 웅장하다. 1924년 아르메니아의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설계하고 건축하여1929년에 완공되었다. 1952년까지 개발·확장되었다. 이 광장은 원래 구소련 지배 당시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레닌의 이름을 따서 레닌 광장으로 불렸다. 광장에는 레닌 동상도 세워져 있었다. 아르메니아 독립 이후 동상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큰 TV 모니터가 설치되었다. 오늘날은 아르메니아 예레반 시민들의 휴식처이며 또한 정치적인 집회, 기념행사, 문화행사 등이 개최되는 수도 예레반의 중심지다.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역사 박물관 및 국립 미술관 건물이다. 바로 앞에는 춤추는 분수가 있어 장엄한 비경이다. 박물관 오른쪽에는 시계탑이 세워진 오각형 모양의 정부청사 건물이 아르메니아 국기를 휘날리며 우람하게 세워져 있다. 청사 건물을 양분하고 있는 시계탑은 모스크바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1941년 7월 예레반으로 옮겨 왔다. 지름은 4m, 큰 바늘의 길이는 188cm, 작은 바늘의 길이는 170cm, 매우 커서 광장 어느 곳에서든지 시간을 볼 수 있다. 그외 박물관 왼쪽의 외무성 건물, 오른쪽의 국토관리부, 중앙우체국, 메리어트 호텔, 에너지 천연자원 공사 건물 등이 광장을 에워 싸고 있어 더욱 아름다운 조형을 그려낸다. 이 건물들은 모두 현무암으로 된 기반 위에 다공질 탄산석회 침전물인 붉은 색 아르메니아 석회화로 만들어져서 고운 색상이다. 광장은 타원형 모양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는 돌로 만든 타원형 모양의 무늬가 있다. 하늘 위에서 아르메니아 전통 융단이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이다. 고상한 문양과 색상이 아름답다. 광장을 중심으로 아보비안거리, 날반디안 거리, 티그란 메츠 거리, 바즈겐 자르샨 및 아미랸 거리가 뻗어 있다. 거리마다 노천 카페, 기념품 상가, 식당 등이 즐비하여 방문객을 맞이한다. 공화국 광장 주변의 유럽식 카페와 식당은 유럽의 향수를 자아낸다. 보는 것만으로도 낭만이 흐르는 거리 풍경이다. 우리 부부도 아름다운 광장 주변의 거리를 거닐었다. 아시아에서 온 우리는 이방인이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 보고, 우리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눈웃음으로 인사하며 때로는 영어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매우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다. 광장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어둔 밤 시간에 광장을 지나는데 우리의 버스 기사는 잠시 광장에서 멈추어 분수쇼를 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설치한 것인데 저 분수쇼를 보기 위해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화려한 조명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닌데 순박한 삶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저 분수쇼가 아주 신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역사 박물관을 배경으로 색색의 조명과 함께 물이 높이 솟구쳐 분무하며 춤춘다. 아르메니아 운전기사에게, 덤으로 보여준 풍경에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이국의 정겨운 밤 풍경이 가슴 깊이 훈훈하게 새겨지는 순간이다.
2014년 6월 4일 수요일 아르메니아 예레반, 에치미아진, 모스크바 공항
* 아르메니아 예레반 호텔에서 본 아라랏산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방 창문을 열고 밖에 나가보니 멀리 아라랏산이 보인다.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드러낸다. 아르메니아의 여행은 저 아라랏산을 보는 것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어느 곳에서든 아라랏산이 보일 때는 대단히 반갑고 기쁘다. 호텔 베란다에서 예레반 시가지 건물 사이로 터키령에 있는 5200여 미터의 고산 설봉을 본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오늘은 아르메니아 예레반 호텔을 떠나는 날이어서 이 아침 예레반 호텔이 주는 더욱 큰 선물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예레반을 떠나 에치미아진으로 향했다. 예레반 시가지를 달리는 동안에도 아라랏산이 보인다. 하늘 높이 솟구쳐 있어 비경이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시가지
아르메니아의 도시 에치미아진EchmiadzinEčmiadzin은 아르메니아에서 네 번째 큰 도시다. BC 7세기경 세워졌다. 2~4세기에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 140년경 파르티아의 왕 블로가세스 3세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바가르샤파트Vagarshapat로 이름 지었다. 1945년부터는 에치미아진으로 개명했다. 4세기에 창건한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보기 위해서 이곳 도시에 왔다. 예레반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져 있으며 아락스 강이 흐르는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예레반에서 멀리 아라랏산의 설봉 원경을 보며 에치미아진에 왔다. 아르메니아 교회 주교좌의 소재지다. 300년 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이곳은 아르메니아의 총대주교관구가 되었다. 344년 아르메니아의 수도는 바뀌었고 453년 대주교관구도 타지로 옮겨졌다가 1441년 총대주교 키라코스가 대주교좌를 에치미아진으로 되돌려 예전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관구로서의 지위를 이어왔다. 과수원과 포도밭으로 이루어진 풍요로운 지역의 중심지이며 플라스틱, 포도주·통조림 등을 생산한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본 에치미아진 주변 들녘에는포도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아라랏산의 설봉이 우뚝 솟아 도시를 빛내고 있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
에치미아진 성당Echmiadzin Cathedral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져 있는 에치미아진 시에 있다. 이 도시의 첫 교회 자리에 오늘날의 성당이 7세기에 세워졌으며 1441년 이후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예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의 바티칸으로 불리우며 2~4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 문서에 의하면, 성 그레고리Saint Gregory는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가 금 망치로 땅을 치는 환상을 본 신비로운 체험을 한 후 왕에게 알렸고 왕은 왕궁 옆인 그 자리에 성당을 설립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301~303년에 성 그레고리가 게시를 받은 것을 계기로 건립된 것이다.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에 그리스도를 전한 아르메니아 귀족의 후예다. 카파도치아에서 자라고 280년경 고국으로 돌아가고, 같은 무렵 아르메니아에 귀국한 국왕 티리다테스 3세의 개종에 성공하였다. 그레고리에 의해서 아르메니아는 4세기 초기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서 수용된 것이다. 아르메니아 성당 최초로 국가가 합법적으로 공인하여 세운 세계 최초의 성당이다. 성당 이름도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곳獨生子’을 뜻하는 에치미아진 성당으로 지었다. 1945년까지 바가르샤파트로 불렸던 이곳 도시 이름도 에치미아진 성당 이름을 따서 에치미아진으로 변경되었다. 아르메니아 그레고리 정교회의 본산이다. 6세기에 설립되어 10세기 이래로 에치미아진이라 불려온 수도원은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m 높이의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당은 입구에서부터 매우 웅장한 자태다. 입장문의 높은 벽면에 그레고리와 왕이 마주하여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부조상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넓은 자락이다. 지금은 이 수도원에 대학과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중앙 통로의 넓은 길 양편으로 곳곳에 부속 건물이 많다. 검은 의상의 성직자 신부도 보았다. 아침 햇살이 내려 더욱 성스러운 빛이 감도는 성역이다. 성당 건물 사이로 보이는 아라랏산 설봉이 장관이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덤으로 보는 비경이다. 지금까지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보았던 아라랏산의 그 어떤 경관보다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안으로 깊숙히 걸어들어 가니 성당 본당 건물이 있다. 고대 건축의 정수이자 기독교 건축양식의 원형으로 꼽히며, 성당 건축발달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성당이다. 종탑으로 우뚝 솟은 본당 건물은 공사 중이서 쇠막대기로 둘러싸여 있다. 성당 문 바로 옆에는 성작자들의 무덤 석관도 몇 개 있다. 최초 설립 당시 중앙부가 돔으로 되어 있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립되었으나, 480년 바실리카 양식의 건축물이 철거되고, 십자가형 모양의 성당으로 신축되었다. 618년에는 목조 돔이 석조 돔으로 개조되었다. 석조 돔은 4개의 거대한 기둥에 의해 떠받쳐져 있으며, 이 기둥들은 아케이드를 통해 외부 벽과 연결되어 있다. 17세기 중반 건립된 3단으로 된 성당 종탑이 있다. 성당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건물은 지붕이 둥글고 화려하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01년에는 아르메니아 건국 700주년을 기념하여 대성당에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성 그레고리 신부도 조각되어 있다. 지하실에는 역대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의 무덤이 있다. 성당 바로 서쪽에는 총대주교 사택 도입을 주도했던 성 티리다테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성 티리다테스 문이, 북동쪽에는 영성 아카데미가, 북쪽에는 아르메니아 특유의 돌 십자가상인 카츠카르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성당 박물관에는 아르메니아 중세시대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최근 예레반에 있는 고문서 박물관인 마테나다란Matenadaran으로 이전되었다. 노아방주 배 조각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의 사모창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해 왔는데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잠시 에치미아진 고고 유적지를 보고 다시 이곳 박물관으로 오기로 했다. 아르메니아 기독교 역사가 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알리는 위대한 성지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에서 본 아라랏산
에치미아진 성당 안에서 본당으로 가는 길에 본아라랏산Mountains of Ararat은 아주 장엄했다. 노아의 방주가 머문 산으로, 구체적으로 어느 산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이곳 아르메니아에서 저 산은 매우 성스러운 산이다. 그래서 저 산을 조망하는 것은 성경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터어키 반호의 북동 100km에 위치해 있다. 연중 눈을 덮고 있는 쌍봉의 사화산다. 대 아라랏은 5200여m, 소 아라랏은 3000여m로 두 봉우리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터어키인은 이 산을 아그리 다그, 즉 괴로운 산이라 하여 봉우리 정복이 어렵다고 한다. 사실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걸친 노아의 홍수 설화는 일관성 있는 이야기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배에 있던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들 생각이 나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땅 밑 큰 물줄기와 하늘 구멍이 막혀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멎었다. 그리하여 땅에서 물이 줄어들기 시작한지 150일이 되던 날인 7월17일 배는 마침내 아라랏산 등마루에 머물렀다. 방주에 실려진 짐승들 이야기도 홍수의 원인이나 기간 등도 중복과 모순이 있다. 구약성서가 전해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홍수 설화를 읽고 노아의 방주에 관심을 가졌다. 이 설화를 테마로 그린 화가도 많고 교회당의 장식으로 노아의 방주와 비둘기를 조각한 조각품도 많다. 노아의 방주가 최후로 도착했다고 하는 아라랏산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두 바다 사이에 아르메니아지방이라고 하는 고원지대에 있다는 것이다. 높은 봉우리가 많고, 이것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이 되어 이라크 평야를 적셔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어느 높은 산이 아라랏산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터키령에 있다. 그 최고봉은 5,156미터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주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겨 왔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아라랏산에 오르려 고 했다. 1929년에는 독일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을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오늘 에치미아진 성당을 보러 온 것인데, 성당 안에서 아라랏산의 설봉을 아주 뚜렷하게 본 것은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아르메니아에 와서 예레반을 비롯한 곳곳에서 아라랏산이 조망 되었지만 지금처럼 저렇게 잘 보이진 않았다. 구름을 깔고 앉은 높은 매우 설봉이 웅장하여, 성경에서의 노아방주가 머물렀다는 함성을 외치듯 거룩한 빛을 품고 있다.
* 아르메니아 즈바르트노츠 고고 유적지
즈바르트노츠Zvartnots의 고고 유적지는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수도원 건축은 7세기 중반 성 네르세스 3세가 시작했으나, 652년 동방교회의 지배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658년에 지배권을 회복한 네르세스 3세는 부속 건물과 성벽을 쌓아 662년에 수도원을 완공했다. 즈바르트노츠는 전사란 뜻이다. 10세기에 지진으로 붕괴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고 수도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즈바르트노츠의 고고 유적지는 아르메니아에 정착한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건축 당시부터 아르메니아의 교회정신과 예술작품의 혁신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뛰어난 건축 양식은 수백 년에 걸쳐 주변 지역의 교회 설계와 건축을 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건물 중앙에 돔이 있고, 십자형 홀이 나 있는 건축 양식은 에치미아진Echmiatsin의 성당과 교회와 함께 고고학적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세기 초 건축가 토로스 토라마니안이 발견하여 첫 번째 재건 작업을 시행했다.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어 함부로 복원을 하지는 못 한다. 앙상한 기둥 뼈대만 곳곳에 세워져 있다. 비록 허물어진 형상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미적 조형이다. 이곳에서 성 그레고리와 트리다테스 3세 왕이 만났다. 트리다테스 3세 때에는 성그레고리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죄목으로 그레고리가 15년 간 갇힌 지하 감옥도 있다. 캄캄하고 가파른 계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또한 고고 유적지에서는 아라랏산이 잘 보인다. 노아의 방주가 멈추었다는 산이다. 고산 설봉의 아라랏산과 함께 그윽한 풍경의 유적지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고고 유적지에서 아라랏산 조망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고고 유적지에서 본 아라랏산 조망이다. 아르메니아에 와서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저 산을 조망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아라랏산은 그 어느 곳에서 본 아라랏산보다 선명하고 자세히 조망된다. 아라랏산 유적지 입구에서부터 하늘 높이 솟구친 아라랏산 설봉이 장관이다. 큰 아라랏산Greater Ararat은 5,137m, 작은 아라랏산은 3,896m이고, 두 봉우리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대아라랏과 소아라랏 산정에서부터 흐르는 시냇물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강으로 흘러 들어 간다. 아라랏은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나라 이름인데, 성경에서는 아라랏을 아르메니아 땅The land of Armenia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산이라 하여 관심 받고 있는 산이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현재는 터키령에 있다. 터어키인은 이 산을 '아그리다' 즉 '험한 산'이라 부른다. 그 만큼 이 산에 오르기가 어려움을 암시한다. 연중 눈 속에 파묻힌 쌍봉의 사화산이다. 원래 산의 중앙에는 알굴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어 매몰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노아가 그 동리에서 살았고, 그 아래에 노아의 분묘가 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 주가 남아있다고 믿고 있으며,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산 아라랏에 오르려고 했지만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기고 있다. 1929년에는 독일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을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에서 보았던 노아의 방주가 저 산에 걸쳐 멈추었다고 하니 진실 여부를 떠나서 매우 가슴 벅찬 광경의 산이다. 고고 유적지 앞에서도 보고, 뒤뜰에서도 보며 성경역사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에치미아진 시가지를 달려 다시 에치미아진 성당으로 갔다. 이곳에서 조망한 아라랏산에 멈춘 노아 방주의 배 조각이 성당 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 속을 오가듯 오래 전의 시간 여행이다.
* 아르메니아 에치미아진 성당 박물관
조금 전에 이곳 성당에 왔을 때는 너무 이른 아침 시간이어서 박물관을 입장하지 못 했다. 그래서 고고 유적지를 둘러보고 지금은 박물관을 보기 위해 다시 이곳 성당에 온 것이다. 고고 유적지에서 아라랏산을 조망했다. 노아의 방주가 멈추었다는 그 산이다. 박물관에는 아라랏산에 걸쳐 있던 노아의 방주 배 조각과 예수님을 찌른 실제의 창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꼭 보아야 되어서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에치미아진 성당에 왔다. 아라랏산에 있는 노아의 방주에서 떼어온 배의 조각을 돌판 위에 붙여 놓은 십자가가 있다. 노아의 방주였던 배의 조각이 나무 화석이 되어 유리 안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로마 병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사모창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성직자들이 행사 때 착용하는 모자, 의상, 지팡이, 액세서리 등이 진열된 보관실도 있다.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레고리의 성해 가운데 손 부분이 조각되어 보관한 것도 있다. 지하실에는 역대 아르메니아 성직자들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또 아르메니아 중세시대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최근 예레반에 있는 고문서 박물관인 마테나다란Matenadaran으로 이전되었다. 나는 여기 오기 전 마테나다란 고문서 박물관에서 그런 것들을 실제로 보았다. 이곳에도 오래된 성경과 성경그림책이 약간 남아 있어서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사진을 못 찍게 하더니 나중에는 박물관 담당자가 와서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다. 아시아 먼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큰 배려를 해준 것이다. 눈으로 보고, 가슴에 새기고, 사진에까지 담아온 노아의 방주 뱃조각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까지 하던 잔인한 창은 성경 역사의 산 증거물로, 내게는 훌륭한 소장자료가 될 것이다.
* 아르메니아 현지 중식
아르메니아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다. 식당 앞에 체리나무가 몇 그루 있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붉게 맺힌 체리가 시선을 끈다. 이곳 여행 중 참 많이 먹은 과일이다. 우리부부는 포도주를 주문하여 일행과 함께 마지막 이별 건배를 했다. 이 식당은 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어서 모든 것을 손수 만들어 사용한다. 포도주도 직접 담근 것이란다. 지금까지 먹어 본 그 어느 포도주보다 향이 진하고 맛이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아르메니아 국기가 걸린 정원을 바라보며 맛있는 아르메니아 현지 식사를 했다. 장애인들이 만들어 장식해 놓은 정원의 작품들도 아름답다. 코카서스 3국 여행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이지만 우람한 자연과 순박한 들녘, 그리고 아낌없이 정성껏 베풀어주는 인정으로 훈훈한 여정이다. 마음 깊이 품고 가리라. 공항으로 가는 길에 본 마지막 아르메니아의 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우람한 코카서스 산맥 위에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올라 먼 나라에 온 아시아의 이방인에게 뜨거운 풍경을 선사한다. 먼 후일 우람한 산이 그리울 때, 소박한 들녘이 그리울 때, 인정 많은 사람들이 그리울 때, 나는 오늘을 회억하며 행복하리라.
* 아르메니아 예레반 공항 출발
아르메니아 예레반 공항 외형이 참 아름답다. 곡선 조형과 색상이 곱다. 1961년 처음 건설된 즈바르트노츠 국제공항이다. 공항 앞에는 푸른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어 싱그럽다. 예레반 시가지가 훤히 보이고 상공에는 하얀 구름이 비경이다. 예레반 공항은 아담하고 예쁘다. 한국어를 전공했다는, 예레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한다는 아르메니아 현지 여인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했다. 정성껏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친절하게 운전해주던 남자 현지인 기사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가슴 훈훈한 정이 서려 고운 추억으로 남을 사람들이다. 공항 창가에 앉아서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낮 2시 50분 SU 1861, 러시아 항공을 탑승할 것이다. 장엄한 코카서스 산맥 능선에 흰구름이 길게 드러누워 있다. 이것이 코카서스 산맥이라고 외치듯 진풍경을 선사한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힘차게 솟구쳐 오를 때 아르메니아 예레반 상공은 나무와 푸른 들녘,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집들이 고운 풍경을 자아낸다.
*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에서 인천행 환승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오후 2시 50분에 탑승한 비행기가 모스크바 공항에 오후 5시 45분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와 아르메니아수도 예레반은 시차가 없다. 이곳 모스크바 공항에서 오후 9시 40분, Su 250 러시아 항공으로 인천행 비행기를 환승할 것이다. 날씨가 화창하다. 공항 주변은 울창한 숲이다. 낯익은 공항이다. 우리 부부는 6번 째 오는 모스크바 공항이다. 환승 대기로 공항 창가에서 이륙 풍경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짧은 간격으로 연이어 이륙하여 날아가는 비행기들이 진풍경이다. 자국기 러시아 항공 AEROFLOT 비행기가 많이 들어오고 나간다. 공항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오리는 D 터미널 25번 게이트에서 탑승한다. 여기는 북국이다. 저녁 9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고 있다. 석양이 약간 드리울 뿐이다. 겨우 노을만 하늘을 물들인다. 우리나라는 저녁 9시면 캄캄한 밤인데 말이다. 신비로운 이국의 풍경을 본다. 정시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저녁 9시 55분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로 이동할 때 모스크바의 일몰이 비경이다. 푸른 숲 위로 붉은 태양이 내려앉는 순간이다.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해가 떨어졌다. 비행기가 힘차가 날아서 창공으로 차오르고 하늘에는 길게 석양을 드리워 있다. 내 조국 인천공항으로 밤새 날아갈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인천까지 8시간 30분이라는 긴 비행시간이지만 길을 내어주는 하늘에게, 날아가는 비행기에게, 나를 기다리는 내 조국에게 감사하여서 행복한 시간이다.
2014년 6월 5일 목요일
* 인천공항 도착
비행기 모니터에 인천공항에 가까워짐을 알리는 항로가 뜬다. 둥근 지구의 한 도막을 길게 날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대한민국 인천공항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오전 11시 10분 비행기는 정시에 착륙했다. 서둘러 짐을 찾고 나왔다. 언제나 외국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때면 포근하게 반겨주는 내 조국이 참으로 고맙다. 코카서스 3국,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이지만 카스피해를 눈앞에서 본 것, 우람한 코카서스 산맥을 마주 서서 호흡한 것, 예수가 오기 전 기독교가 전파 되었다는 유적을 본 것 등은 세계여행이 주는 아주 보람되고 뜻깊은 선물이다. 순박하고 천진한 나라들, 아직 안정되지 못하여 더러는 힘들지만 열심히 일어서는 모습에서 찬연한 빛을 본 여정이다. 낯선 국가들이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잘 선택받지 못하는 여행국가들이다. 나는 문학기행 탐방록으로, 기행시로 써서 코카서스 3국을 알릴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행복한 사명이다. 두 아들에게 귀국을 알리고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