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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 중앙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전과웅
충신(忠臣) 전민준(全敏俊)과 나팔굴(喇叭窟)
정선군향토사연구위원 전 정
Ⅰ. 시대적 상황 Ⅱ. 충신(忠臣) 전민준(全敏俊) Ⅲ. 나팔굴(喇叭窟) Ⅳ. 나팔굴(喇叭窟)을 찾는 과정 Ⅴ. 나팔굴(喇叭窟)에 대한 올바는 이해 |
Ⅰ. 시대적 상황
남한에서 발견된 200여 개의 석회동굴 중 40%(80여 개소) 이상이 강원도지역에 집중하여 분포하고 있으며 이중 동강유역에는 이미 알려진 석회암 동굴이 약 30여 개가 발견되었다. 나팔봉(수리봉)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는 나팔굴(喇叭窟)을 포함하여 4개의 동굴이 있다. 그중에서 정상 바로 아래에 절벽굴이 2개, 나팔굴과 좌측 옆에 좌측동굴이 있다. 나팔굴(喇叭窟)은 단양의 고수동굴(古數洞窟)과 마찬가지로 약 200만년 전에 석회암(石灰巖) 동굴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 4월 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만 8천7백 명의 군사를 제9번대로 나누어 조선을 침략하였다. 왜군은 침입한 지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했고 이어 6월 16일 평양을 점령하였으며 강원도 경락의 부대는 제4군인 모리 요시나리(手利吉成)군 2,500 여명의 규모였으며 동두천으로 올라와서 철원, 평강, 김화, 회양을 점령한 후 철령을 넘어 함경남도 안변으로 들어가서 다시 강원도 영동지역으로 남하하여 삼척(三陟)을 거쳐 백봉령(白鳳嶺)을 넘어 정선과 평창, 영월을 휩쓸고 원주지역으로 지나간 것은 그 해 8월경이었다.
Ⅱ. 충신(忠臣) 전민준(全敏俊)
충신(忠臣) 백포(柏浦) 전민준(全敏俊)은 고려말 72현 중 1인인 전오륜(全五倫) 선생의 현손(玄孫)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정선군(旌善郡)의 향임좌수 (鄕任坐首)로 있었다.
이때 왜적은 백복령(白伏嶺)을 넘어 강릉에서 정선지방(旌善地方)으로 향해 노략질과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정선 지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왜병의 한 떼가 정선에 이르렀다.
인심좋고 평화롭기만 한 정선고을에 왜병이 침략하니 방비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당시의 형편으로는 적군의 총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 군수(郡守) 정사급(鄭思伋)에게 고하여 일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도모 하기를 강력히 권하여 현재 정선읍 귤암리(旌善邑 橘岩里)에 소재해 있는 나팔공굴(喇叭孔窟)에 관·민을 피신시키고 전민준(全敏俊) 공(公)이 홀로 관아(官衙)를 지키다가 왜군을 만났다.
왜병은 온 마을 주민들이 피난했음을 알고 공에게 군수(郡守)의 거처와 양곡창고의 소재를 강요하므로 전민준 공은 스스로 나서서 내가 지방관(地方官)이라 자처하였다. 왜병들은 그러면 어서 양곡이 있는 곳을 말하라고 협박하였다.
이때 전민준공은 한마디로 『우리 고을에는 한 톨의 양곡도 저장된 것이 없다.』고 소리친 뒤 『설사 양곡이 저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너희 왜놈들에게 줄 양곡은 한 톨도 없으니 썩 물러가라.』하고 호령하며 꾸짖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왜병은 전(全) 공(公)을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고문을 하였으나 끝내 대답지 않자 왜병은 쇠사슬에 손바닥을 꿰고 한쪽 팔과 다리를 잘랐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왜병을 꾸짖으니 왜병은 전(全)공(公)을 살해하고 말았다.
왜적은 그 충의(忠義)에 감동하여 그 자리에 조선충신(朝鮮忠臣)이라 표목(標木)을 세우고 퇴각(退却)하였다.
이는 전민준공이 많은 주민이 희생될 것을 걱정하여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사망되었기에 모든 군민은 그의 행적과 충절(忠節)을 높이 추앙하기 위해 뒤에 정려각(旌閭閣)을 세우니 처음에 의풍정가(倚風亭街)에 건립하였는데 영조(英祖) 7년(1731년) 군수 송필환(宋必煥)이 객사의 3문(三門) 밖 동편에 이전 건립하고 1778년에 군수 서명서가 제문(祭文)을 지어 충신묘에 치제 하였고 1915년 전충신 후손의 주선으로 광하리 망하(望河)에 옮겨졌다가 1942년 충신사(忠臣詞)는 광하리(廣河里) 광석(廣石)에 세워졌으며 1976년 10월에 군수 박수균(朴壽均)공이 충신묘 비문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정선군민은 전민준 공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정선군의 고유 문화행사인 정선 아리랑제 1회∼10회까지 전야제(前夜祭)로 충신 전민준(全敏俊) 공(公)의 추모제(追慕祭)를 지냈었다.
Ⅲ. 나팔굴(喇叭窟)
수리봉을 나팔봉(喇叭峰)이라고도 하며 정선읍 귤암리(橘岩里)와 광하리(廣河里) 사이를 흐르는 동강(東江)변에 여덟 폭 병풍처럼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고 있는 산이다.
나팔봉은 정선읍 귤암리(橘岩里) 서(西)쪽, 망하(望河) 남(南)쪽에 있는 해발 693.4m의 봉우리다. 귤암리에서 강 건너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높은 봉우리를 말하며 산 모양이 나팔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 봉우리 꼭대기에 수리가 서식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순우리말인 “수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머리 윗부분을 정수리라고 하듯이 “수리”란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수미메” 또는 “수리봉”으로 불렀다. 실제로 정선군 곳곳에서 마을 앞뒤로 뾰족 솟은 산을 수리봉으로 부르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수리봉(나팔봉)은 옷바우나 망하 쪽에서 오르면 귤암리 일대와 망하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팔굴은 나팔봉 바로 아래 있는 절벽에 있는 동굴이 아니고 나팔봉 능선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귤암리 마을 입구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13시 방향의 8부 능선상에 있고 좌측에 소나무가 한그루가 보이는데 소나무에서 후방으로 10m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선조25) 왜병들이 침입하자 향임좌수 전민준이 정선군수(旌善郡守) 정사급(鄭思伋)을 재촉해 정선주민들을 병방치(해발 819m)에 있는 뱅뱅이재를 넘어 나팔굴에 피신시켰던 곳이다.
전쟁이 끝난 뒤 군수와 주민들이 굴에서 나오면서 나팔을 불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 굴을 나팔동굴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모평에서 배를 돌려 돌아오면서 그 마을을 뒤돌아보니 마을 뒤에는 석벽(石壁)이 천 길이나 깎아 세운 듯하고 좌우의 끝에도 모두 낭떠러지여서 그야말로 원숭이도 한숨을 쉬고 학도 날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 그 아래에 여섯 채의 민가가 있었다.
또 강물은 동쪽의 절벽 아래에서 나와서 약간 멀리 굽이 돌아 마을 전면에 이르러 다시 구부러져 서쪽 절벽 아래로 들어간 뒤에 쏟아지듯 흘러간다. 수행한 사람이 강변 절벽의 총석(叢石)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저것이 나팔봉(喇叭峯)이고 나팔봉 뒤에는 석혈(石穴)이 있다고 하였다. 일로는 의당 달려가 보아야 하지만 석벽이 매우 험하고 높아 10리를 걷는 힘을 소비해야만 하겠고 그렇게 되면 당일에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므로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위의 내용은 1887년 5월 14일에 정선군수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黙)이 기록한 일기 내용이다. 이 동굴(절벽굴)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고 보기와는 달리 깊이도 3m 정도로 깊지 않고 급경사 이어서 접근 자체가 어렵고 들어가 본 사람이 없다.
Ⅳ. 나팔굴을 찾기 과정
한국전쟁(韓國戰爭)이후에는 거의 나팔굴에 가본 사람을 찾을 수도 없고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2021년부터 찾기로 결심을 하였다.
물론 필자가 인접 동네인 망하(望河)에 살고 있어서 부친(父親)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만 있었고 평소 지역 향토사에 대한 관심이 많고 젊어서 산을 비교적 많이 오르내려서 자신감도 있었고 더 늦으면 나이도 있고 용기도 나지 않을 것 같고 해서 탐사 시기는 2021년 녹음이 우거지기 전 봄철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2020년 11월에 서울에서 살다가 고향인 정선(旌善)으로 내려와 향토사연구위원으로 제일 먼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나팔굴에 대해서 당시 향토사연구소장(박임용)에게 찾아보자고 건의를 하여 나팔굴을 찾기 위한 탐사(探査)를 시작하였다.
탐사를 하기 전 귤암리 방향 먼발치에서 정확한 위치도 확정할 수 없는 손가락 답사로 대신하고 구전(口傳)에 의존하고 마을 사람들은 장비 없이는 힘들고 헛디디거나 미끄러지면 강바닥에 떨어져 죽는다고 겁을 주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귤암리 마을 사람들 나팔굴을 안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가보지는 못했기에 알고 있는 위치가 저마다 달랐다. 그래서 실제로 2021년 3월 초에는 낙엽 속에 얼음이 남아 있어 위험하고 너무늦어 녹음(綠陰)이 더 우거지면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되어 첫 탐사일을 3월 18일로 하였다.
물론 필자는 3월 10일과 3월 13일에 두 차례에 걸쳐서 현지답사를 하였으며 아주 어릴 때의 기억에 의존하여 모마루 앞 옛 배터거리 쪽으로 갔으나 지형이 너무나 험하고 급경사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탐사과정]
가. 1차(2021년 3월 18일)
향토사 연구소장 박임용, 부소장 임응규, 사무국장 최원희, 위원 김영윤, 전정 등 동반 탐사를 하였다.
장비는 로프 50m, 금속탐지기였으며 탐사로는 옛 광하지서 앞 광석교에서 약 300m 정도 걸어가서 수리봉(=나팔봉) 오르는 등산로를 택했다.
표지판을 따라 700∼800m 오르면 동강(東江)과 함께 귤암리가 보인다. 산능선 에서 좌측으로 100m에서 굵은 참나무에 로프를 단단히 묶고 세 사람이 적당한 간격으로 로프에 의지하여 시계추처럼 좌우로 이동하며 꼼꼼히 탐색하였다. 마침 수직 동굴을 찾기는 했지만, 입구는 좁으나 깊이가 5∼6m 정도 되고 가지고 있던 로프로 다리걸이를 만든 임시 줄사다리를 만들어 내려가 보니 동굴안은 10∼15명 정도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우리가 목표로 찾는 동굴은 아 니어서 다음 일정을 기약하고 하산을 하였다.
나. 2차(2021년 4월 21일)
향토사 연구소장 박임용, 위원 전정 둘이서 모마루 강건너 편 옛 배터거리 에서 옛 소로길을 따라 이동을 하려 했으나 50여 년 이상 다닌 사람들이 없어 길 흔적자체가 없고 급경사에 밧줄을 걸고 올라갔고 전날 약간의 비가 와서 너무 미끄러워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탐사를 하였으나 찾지는 못했고 땀 흘린 만큼 소득은 없지만 보람은 있었다.
다. 3차(2021년 4월 26일)
정선군 향토사 전회원이 정식으로 다 같이 답사(踏査)를 하는 날이다. 주문한 줄사다리와 안전모, 고성능 랜턴, 보조로프에 주문한 도시락을 지참하 고 1차 탐색지에 도착하여 한 명씩 동굴에 내려가 보았다.
허공에 떠있는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게 쉬운 게 아니었지만 오늘 탐사한 동굴 또한 우리가 목표로 찾는 동굴이 아님을 확인하고 빠른 시일안에 옆 골짜기 탐 색을 약속하고 당일 일정을 마쳤다.
라. 4차(2021년 4월 28일)
엊그제 답사를 하고 왔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서 오늘 다시 한번 도전해 보기로 늦은 봄이라 녹음이 우거져 올해는 어려울 거 같아서 답사 준비와 장비를 준비해서 지난번에 갔던 코스로 다시 이동해서 더 절벽 쪽을 택했다. 물론 귤암리 전망대에서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했지만, 막상 현지에서 보니 위치확인이 어려워서 로프를 몸에 묶고 하강을 하여 탐사를 하여 현지 지형으로 보아 굴이 있을 만한 지점에 나팔굴 모양의 굴이 있어서 직감으로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굴 앞에는 방벽처럼 벽이 있었지만, 굴의 깊이가 깊지 않아서 안전 관계상 들어가지는 않고 나중을 위해 필자의 런닝셔츠를 벗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답사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다. 비록 올해는 나팔굴을 찾지는 못했지만, 내년에는 반드시 찾을 것을 약속하며 하산(下山)하였다.
마. 5차(2022년 4월 12일)
작년에 나팔굴을 찾지 못했지만, 올해는 반드시 찾겠다는 일념으로 4월9 일과 4월 10일에 걸쳐서 주민증언과 역사자료, 작년의 경험과 지형분석 등을 통해 4월 12일 오전 7시에 정선군 향토사연구소장(임응규), 위원 김영윤, 전정(필자) 등 3명이 확신을 가지고 탐사에 나섰다.
작년처럼 나팔봉 정상 능선에서 밧줄을 이용해서 내려오면서 찾는 형식이 아니라 강을 건너 밑에서부터 산 절벽을 오르는 경로를 선택했다.
귤암리 전망대에서 팀원들에게 나팔굴에 대한 위치와 이동 경로, 경사도, 낙석예상 지역 등을 공유하고 귤암리 전망대(展望臺) 앞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예상외로 강 깊이와 물이 너무 차가워 건너지 못하고 옛 광하 파출소 앞을 지나 모마루 뱃터 나루길 강물(東江)과 뼝대 사이로 걸어서 밤나무 숲길(약 40∼50년 전에는 6가구가 살았었음)을 지나가니 절벽으로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두 갈래길 의 강물 중 산쪽의 강을 건너서 걷다가 우리가 최초로 올라가려고 했던 지역에서 상류 쪽 약 500m 지점에서 강을 다시 건너야 했다.
강 깊이는 허리 위 높이까지 왔고 물살이 있었지만 서로 의지하고 건넜다. 강을 건널 때는 등산화 대신 운동화를 신는 게 낫다는 것도 느꼈다. 막상 올라가야 할 계곡의 경사도를 보니 급경사이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던 터라 여간 위험한 지역이 아니었다.
해빙기라 낙석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고, 의지하면서 잡아야 할 바위나 돌도 없고 있는 돌은 금방 빠질 것만 같았고 잡고 올라갈 나무도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곳까지 와서 또 포기를 해야만 하나 하고 고민을 하였으나 금세 결심을 했다. 올라가는 것으로(필자의 오랜 군생활이 결심의 작용이 되었음)
필자가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급경사의 계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깨에는 밧줄을 걸치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배를 경사면에 붙이고.........
약 50m 힘들게 올라갔는데 첫 번째 난관에 부딪혔다. 큰 바위가 튀어나와서 손으로 잡을 곳이 없고 주변에 나무도 없고 있는 것은 작년에 피었다 진 풀잎 몇 포기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보이는 돌 들···· 또 한 번 망설였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해서 목숨을 걸고 기었다. 그리고 10m 앞에 있는 나무에 드디어 밧줄을 매고 계곡 밑에 있는 동료들에게 밧줄을 던져 주었다. 이렇게 해서 1차 험난한 지역을 통과하고 2차 걸음을 내디뎠다.
바위 절벽 아래 까지. 거기서 다시 밧줄을 걸고 동료들이 올라왔고 약 40m 앞쪽 절벽과 흙이 마주치는 곳에 한 개의 동굴을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그곳이 나팔굴인 줄 알았다. 사람이 머문 흔적도 있고 오래된 병 조각도 발견되고 동굴 크기도 제법 컸으나 뒤가 막혀있는 순간 아니라는 직감이 들어서 주변을 더 확인하면서 절벽을 타고 기어 올라와서 소나무 한그루를 지나는 순간 조그마한 구멍을 발견했다. 입구가 하도 작아서 처음에는 아닌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한사람 정도 들어갈 입구이고 내부를 후레쉬로 비춰보는 순간 소름이 쫙 돋은 순간이었다.
잠시 그동안의 찾으려고 했던 노력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아래쪽에 있는 동료들을 불렀다. 큰 소리로 드디어 “나팔굴을 찾았다”라고........
[나팔굴(喇叭窟) 제원(규모)]
나팔굴의 입구는 옆으로 누워진 타원형 형태로 높이가 40㎝, 넓이가 80㎝이며 나팔굴 입구를 한 명씩 후레쉬를 들고 들어갔다. 입구는 절벽에 가깝고 고개를
숙여 들어가면서 약간의 경사가 있고 깊이는 입구로부터 약1.5m 정도이고 직사각형 형태로 넓고 길게 뚫려 있었다. 지금도 입구(入口)만 막으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구조이다.
동굴 높이는 높은 곳은 약 6m, 낮은 곳은 1.5m, 넓이는 3m∼5m이며 동굴 입구에는 넓게 정사각형에 가깝게 약 50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이며 동굴을 따라 들어가면서 완만한 S자형으로 약간의 오르막 경사로 유지가 되었고 바닥은 평평하였고 입구에서 약 50m 되는 동굴 2갈래길 좌측에는 돌로 방처럼 꾸민 장소도 있었고 좌우로 조그만 동굴들도 여러 개 있었다.
동굴은 후레쉬가 없으면 한치도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암흑(暗黑)이었고 천장 과 벽에는 박쥐가 시커멓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시커먼 박쥐 배설물이 흠뻑 했고 냄새 또한 매캐했다.
동굴 중간중간 구멍 난 곳에는 어김없이 박쥐가 있었고 사람들이 불을 피운 흔적과 동물뼈 흔적, 동굴 입구 우측벽에는 사람 이름들이 돌에 새긴 흔적들이 선명하게 있었다. 또한 동굴에서 일정 기간 거주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기그릇 조각과 화덕 처럼 만들어 놓고 불을 지펴서 음식을 데워 먹었던 흔적도 보였다.
이 동굴 속에서 430년 전 임진왜란과 72년 전 6‧25 피란민이 잠시나마 피신을 했던 장소라는 것을 뇌리에 새겨 보았다. 동굴은 90m쯤 지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돌로 막은 흔적과 굴이 작아서 더는 탐사가 어려웠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120m 정도가 되고 동굴의 끝을 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동굴 입구 넓은 좌·우측 벽돌에는 4∼5여 명의 이름이 돌을 뚫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피난을 하면서 이름을 새기면서 추위와 배고픔 고향을 잃은 서러움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서였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당시에는 관솔에 불을 켜서 동굴을 관찰했을 것이고 타는 시간, 밝 기, 등을 고려해서 완전한 답사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동굴의 가치 가 있고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전(口傳)으로는 동굴 안에서 개나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찾지는 못했지만, 끝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출구 방향으로 광석 셋집맹이(동네이름)가 있었고 현재는 빈집만 한 채 남아 있다. 나팔 동굴에 관련하여 내려오는 구전(口傳)으로는 인접 마을에 사는 사람이 동 굴에 관련하여 유심히 관심이 많아 나팔굴을 찾아 들어갔는데 들어가면서 문주 방(방문턱)을 일정한 간격으로 타고 넘고 지나갔고 한동안 들어가다가 되돌아 나오면서 보니 문주방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을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천년 묵은 이무기가 나팔굴에 살다가 나올 때는 길을 비켜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하나는 나팔굴은 출구가 2개가 있는데 한쪽은 동굴을 돌아 귤암리 방향과 반대 방향인 광하리 방향에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제로 보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을 했다. 왜냐하면 나팔굴 좌측 아래 30미터 거리에 동굴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나팔굴은 해발고도 350m 지점에 위치하고 동굴의 입구 방향은 북동(N70°E), 발달 방향은 북동(N30°E) 방향이다. 나팔 동굴로 이르는 길로는 첫째 귤암리 전망대 앞에서 강을 건너서 계곡으로 올라와 암벽 앞에서 우측으로 이르는 방향이고 둘째는 모마루 강 건너편 옛 배터거리에서 잘록한 계곡 능선 옛길 우측으로 비스듬히 심마니나 약초꾼들이 다니던 좁은 소로가 있었는데 그 길로 이동을 했다고 하며 배터거리에서 우측으로 첫번째 봉우리는 급경사이므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갈 수가 없으며 귤암리 전망대에서 보면 Y자 계곡으로 지나다녔다고 하며 나팔굴은 소로길 좌측 옆 1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나팔굴에 대한 특징으로는 산능선 8부 능선에 동굴이 있고 동굴의 지면이 평편하고 경사도 거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피난처로 쓸 경우에는 약 150명도 가능한 크기이며 절벽이지만 아래에 동강이 흐르고 입구가 작아 노출을 피할 수 있고 시야가 좋아 귤암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입구가 작아 입구만 막으면 천혜의 피난지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Ⅴ. 나팔굴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가. 나팔굴의 실체
일반적인 사람들은 나팔굴은 나팔봉(해발 693.4m) 정상에서 약 9부 능선 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동굴이 보이기 때문이며 각종 지도상 에도 정상의 9부 능선상에 나팔굴의 표시가 되어있다.
실제로 나팔봉을 오르다 보면 뼝대에 동굴이 보인다. 크기 원형으로 지름이 약 3m, 깊이는 3m 정도이며 옛날 사람들 이 동굴을 큰굴(절벽굴)이라 불렀으며 큰굴 위쪽으로 10m 위치에 작은굴이 있었고 거기에는 동네 사람들이 심(산삼)을 캐러 가려면 작은굴을 지나야 하는데 칡이나 다래덩굴 등을 잡고 건넌 적이 있다 고 하며 작은굴 안에는 깊이가 약5m 정도는 되는데 5∼7명 정도는 대피를 할 수 있는 규모이며 약 60년 전 필자의 팔촌쯤 되는 할아버지 아들이 작은 굴을 건 너다가 추락(墜落)해서 사망한 적이 있는 동굴로 우리 집안과는 아픈 특별한 관계가 있기도 하다.
9부 능선에 표기되어 있는 나팔굴은 위에서 설명했지만 큰굴(절벽굴), 작은굴 모 두 임진왜란 때 피란했다는 것은 규모나 위치 등으로 보아 근거가 없다.
나. 올바르게 기록하고 보존할 가치의 동굴
나팔굴에 대한 아래 열거한 모든 역사자료에 의하면 모두가 나팔굴에 대한 위치가 어디인지 잘 기록되어 있다.
한국 효문화진흥원 자료번호 KDT- 01216 정선읍 임진왜란 충신 전민준의 충신사, 정선군지 2004, 관동지 2007, 정선읍 지명유래, 정선군지, 정선전씨 종친회 자료, 정선향사, 네이버 블러그 등 거의 모든 문서나 자료에 임진왜란때 정선군수 정사급이 피란한 동굴, 임진왜란때 군수가 피난한 동굴, 전쟁이 끝난뒤 군수와 주민들이 나오면서 나팔을 불렀다고 해서 그 굴을 나팔굴이라 불렀다는 기록은 이번 나팔굴을 찾으면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특히, 정선읍 지명유래(정선읍장, 2012.6.30. 페이지334쪽) 나팔동굴은 “나팔봉 절벽에 있는 동굴이다” 내용과 정선군 지명지(정선군청, 2019.12.30.페이지 180) 와 정선군지(상, 1978.12.30.)에 기록된 나팔동(공)굴은 나팔봉의 절벽에 있다라 는 내용도 수정이 필요하다.
정선군지(상, 2004.3.23. 페이지666)의 기록에 “양지재에 나팔굴이 있으니 임진왜란 때 군수 정사급이 피신한 굴이다”라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 또한 수정이필요하며 양지재는 수리봉 서쪽에 있는 능선으로 귤암리에서 보면 나팔봉 정상에서 북쪽 약 1km, 망하(望河)마을에서 보면 나팔봉 우측에 있는 능선이기에 나팔굴과는 반대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나팔굴에 대해서 정리를 하면 수리봉(나팔봉) 바로 아래에 있는 큰굴(절벽굴), 작 은굴, 군수와 군민이 피신했던 나팔굴을 동일하게 나팔굴로 표시하고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이후에는 명칭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