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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어떤 단체인가?
프리메이슨리(영어: freemasonry, masonry)는 16세기 말에서 21세기에 발생한 인도주의적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우애단체 혹은 취미 클럽이다.
이 단체에 소속된 일원을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고 부른다.
프리메이슨은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 여러 형태로 존재하며, 스코틀랜드 그랜드 롯지와아일랜드 그랜드 롯지 관할하에 약 15만명, 영국 연합 그랜드 롯지 관할하에 약 25만명 등 영국과 아일랜드에 약 40만 명이 있고, 미국에 약 200만 명이 있는 등, 전 세계적으로 약 600만 명의 회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회원들은 각 그랜드 롯지의 헌장에 입각한 선언을 포함해서 여러방식으로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믿음을 나눈다.
대부분의 그랜드 롯지들은 최상의 존재(至高者 :Supreme Being)를 믿는다는 선언을 회원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로 삼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그랜드 롯지도 있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그랜드 롯지(Grand Lodge)를 중심으로 하위 롯지, 즉 단위 롯지 (Constituent Lodge)들을 편성해 각 그랜드 롯지별로 독자적 관할권을 가지고 자치적으로 운영한다.
따라서 전 세계의 프리메이슨을 통괄하여 관할하는 프리메이슨 총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랜드 롯지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커다란 집 또는 집회소"로 "본부"를 뜻하며, 대롯지라고도 한다.
그랜드 롯지는 또한 그랜드 오리엔트(Grand Orient: 프랑스어 발음으로 "그랑토리앙"이라고도 하며, 문자그대로의 의미는 "커다란 서광")라고도 한다.
-> 여기서 Orient는 동방 또는 동쪽으로 라는 말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艮方인 이 땅을 가르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위 롯지는 메이스닉 롯지(Masonic Lodge)라고도 하며, 흔히 간단히 롯지라고도 한다.
각 그랜드 롯지의 관할구는 지역적 개념이 아니며, 단위 롯지들의 총합이 곧 해당 그랜드 롯지의 관할구이다.
마찬가지로, 롯지, 즉 단위 롯지도 건물 또는 지역의 개념이 아니며 프리메이슨들이 모여 하나의 그룹을 이루면 그것이 곧 단위 롯지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회원들이 "롯지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롯지로서 모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흔히, 각 그룹의 모임 장소이자 운영 센터로 사용되는 건물을 롯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각 그랜드 롯지는 단위 롯지들을 편성하여 자신의 관할구를 만들고, 두 그랜드 롯지가
서로가 프리메이슨의 성격에 합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 서로를 우호 관계(in Amity)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우호 관계에 있는 그랜드 롯지간에는 회원들이 상대의 관할구를 방문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은 채석공의 연장과 용구를 상징으로 사용한다.
역사적 행적
멕시코 혁명
프리메이슨은 석공 길드로 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1600년대 중반 또는 그 이전부터는 노동자의 비밀 단체에 철학적 성격이 더해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600년대 말에 영국에서 프리메이슨 반대운동이 일어나 '악마적인 반그리스도교 집단'으로 비난받기 시작한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717년 런던의 4개 로지(지부)는 총 로지(총 지부)로 연합하기로
결정하고 총 지부장을 선출했다.
1723년에는 '프리메이슨 역사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는 제임스 앤더슨이 프리메이슨의 철학, 역사, 법률, 의무, 활동을 집대성하여 프리메이슨 규약을 발표하였는데, 규약에는 시민의 권리나 노동윤리와 같은 '진보적' 개념도 포함되었다.
이후 영국 프리메이슨은 크게 성장하고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지부를 확대한다.
이후 1700년대 초에 영국에서 계몽주의적 경향에 비밀결사 등의 개념이 더해지고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성격이 부여된 근대적 프리메이슨이 나타났다.
프리메이슨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비밀결사였다.
(여기서 비밀성이란 운영이나 규율보다는 입당식 등의 절차와 과정의 비밀을 뜻한다고 한다.)
프리메이슨에는 원래 신비주의에만 기초한 전통적 프리메이슨이 있었으나 1717년 런던에서 철학적이고 사색적 성격의 근대적 프리메이슨이 창설되자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700년대 초반 유럽과 스페인에서 프리메이슨은 사회를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국가와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는 대상이었다.
특히 가톨릭에선 프리메이슨은 신앙의 순수성을 위험하게 하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계몽사상과
함께 정치적 도덕적으로 재앙을 부르는 악으로 규정하고, 개신교와 결부시켜 공격하였으며, 종교재판에서 프리메이슨을 처벌하였다. 이점은 식민지인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프리메이슨은 프랑스 혁명에도 참여하여 '활약'을 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프리메이슨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프랑스의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혁명(1789-1794)을 지지했다고 설명할 수 없다.
신비주의적 전통을 중시하는 프리메이슨(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프리메이슨)은 혁명에 관심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활동하던 프랑스 프리메이슨들은 전반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강했고, 많은
프리메이슨이 프랑스의 정치를 비판했고 대혁명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이들중 일부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친위대 활동을 하였다.
그 이후 프리메이슨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군주에게도 특별하게 경계할 대상이 되었다.
프리메이슨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교회뿐 아니라 스페이슨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를 포함하여 식민지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우선적으로
감시 대상이었다.
이들이 프랑스 혁명 사상을 식미지에 전파시킬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스페인 왕의 퇴위 사건 이후 당시 나폴레옹은 프리메이슨은
자신의 권력과 혁명 사상을 확산하는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프리메이슨을 군주제와 종교재판에
맞서는 존재로 삼으려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의 계획은 먹히지 않았다.
프랑스의 침공에 저항하는 스페인 국민들의 투쟁이 예상과 달리 굳세었고 나폴레옹과
프리메이슨에 대한 반감도 오히려 커졌다.
이런 분위기가 대서양을 건너 누에바 에스파냐에도 전해졌다[7]
멕시코 최초의 로지는 1806년 멕시코시티에서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라스라타스(Las Ratas,즉 볼리바르Bolivar)가 5번지의 주택에서 멕시코
최초의 로지가 결성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논란이 되는 것은 멕시코 독립의 선구자인 이달고 신부(Miguel Hidalgoy Costilla)의 가입여부이다
. 여러 정황에 따르면 이달고 신부가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프리메이슨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분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멕시코만의 현상이 아니라 남미 독립과정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당시 프리메이슨 로지는 독립운동의 수단 또는 거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적 전례에 따르면 "프리메이슨과 비밀결사는 혁명이나 독립과 같은 정치적 투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근대 프리메이슨인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프리메이슨은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정치나종교에 대해 어떤 특정한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이다.하지만 프리메이슨의 개념은 확장됐고 성향도 다양해야지며 현실사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성향이 커지게 되었다.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프리메이슨과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밀결사간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멕시코의 초기 프리메이슨은 '정치적'이었다.
1800년대 초 멕시코에 온 스페인 출신 군인과 정치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프리메이슨은 스코틀랜드 의례파가 다수였고, 이들은 입헌군주제와 교회개혁을 지지하는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프리메이슨을 결성했다가 식민지가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프리메이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달고 신부가 프리메이슨에 관심이 있었다는 건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산타 안나는 확실히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그리고 훗날에 멕시코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과달루페와 뒤를 이은 게레로 대통령 모두 프리메이슨 로지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독립에 관여한 중요한 인물들이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다만 모든 프리메이슨들이 멕시코의 독립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프리메이슨은 독립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독립을 지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식민지가 독립하는 현상이 실제가 되자 자신들의 이해를 보전하려 하였고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독립을 받아들였다. 독립을 자발적을 지지했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프리메이슨과 마지못해 받아들인 프리메이슨으로 나뉘었고,훗날 프리메이슨이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리메이슨은 분명 멕시코 독립운동과 관련은 있었다.
다만 독립군에 우호적인 활동을 전개한 조직들은 대개, 프리메이슨의 형식을
가졌으나 영국이나 미국의 프리메이슨과는 연관이 없고
대신 정치적 애국주의 단체란 성격이 더 강한 준 프리메이슨 단체이거나 프리메이슨 의식도 없고,
프리메이슨과 같은 조직 내 위계구조도 없는 정치적 비밀결사 조직들이었다.
다시 말해 멕시코 독립 과정에서 활약하였던 조직은 프리메이슨과 프리메이슨에 준하는 단체,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독립운동 단체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프리메이슨'이다.
독립혁명 참여에 대한 멕시코 프리메이슨의 참여는 과장된 점이 있는데
이것은 반혁명세력의 전력과도 관계가 있다.
멕시코에서 프리메이슨은 "왕실(본국 왕실)과 제단(가톨릭)에 대항하는 이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였고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본국과 식민지 당국은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의 확산을 저지하며
독립 세력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기위해 프리메이슨의 독립혁명 참여를
실제보다 과장한 점이 있다고 한다.
실제 멕시코 독립에서 역동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프리메이슨 단독이 아닌 프리메이슨과
준프리메이슨까지를 포함한 독립운동 결사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프리메이슨이 멕시코의 독립을 주도하였다"는 설명은 당시 '넓은 의미의
프리메이슨'의 다양하고 중첩적인 성격을 놓치게 만들 수 있는 설명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식민지에선 실제로 독립이 되려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상황이 전개됐고
군인들과 정치인들은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로지(프리메이슨 지부)를
조직하였다.
명백하게 멕시코이 독립을 지지하는 로지(프리메이슨지부)도 증가하였다.
1823년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는 할라파에서 쿠바출신 시몬데 차베스와 함께 '검은 독수리 군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은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스페인인들을 추방하는데 동의해야만 가입할 수 있었다.
1825년 비센테 게레로 (Vicente Guerrero)도 '멕시코의 장미' 로지를 세웠다.
독립 직후에 멕시코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 때 멕시코 프리메이슨은 국가 정치를 새롭게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주체가 되었다.
독립을 하며 주도권을 잡은건 이투르비데였다.
이투르비데는 1821년 2월에 이괄라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군주제로의 독립, 가톨릭의 인정, 모든 사회계급의 통합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 계획 발표에 따라 멕시코 독립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1822년 5월이 되자 이투르비데는 스스로를 아구스틴 1세로 선언하고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헌 의회를 해산하였다.
안토니오 로페스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는 이투르비데 왕정에
반대하였고 12월 2일에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투르비데는 반란진압을 위해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은 산타 안나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1823년
2월 1일에 카사 마타 계획을 발표하였다:
카사 마타 계획은 새로운 의회의 구성과 지방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당시에 이투르비데는 중앙집권주의로 기울었고 지방에 강제로 재정을 강요하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도 산타 안나를 지지하였다.
1823년 3월이 되자 아구스틴 1세는 왕좌에서 물러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의회는 다시 소집되고 11월에 공화정을 선포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제정된 1824년 헌법에 따르면 가톨릭은 국교였다
이투르비데가 축출되기 전부터 의회에는 다수의 프리메이슨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투르비데와 군주제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카사 마타 계획에서 주동세력이 되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Miguel Ramos Arizpe)와 세르반도 테레사
데미에르(Servando Teresa de Mier) 등이
그런
프리메이슨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 이들은
멕시코 독립의 영웅들이기도 하였고 자유주의를
선호하였고 북부출신이었다.
로렌소 데 사발라
(Lorenzo de Zavala)도 자유주의자였으며 1825년
요크 의례파 프리메이슨의 창설 멤버였다.
반면 루카스 알라만
(Lucas Alamán)은 기업가이자 정치가였으며
보수파의 리더였다.
이투르비데 축출의
일면은 프리메이스 투쟁의 승리라는
성격이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패배했고 군주제를 상대로 공화주의가
승리하였다.
그 후
멕시코 정치는 중앙주의와 연방주의가
대립하며 혼란이 계속됐다.
이트루비데의
군주제가 무너지자 초대 대통령으로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당선되었고 니콜라스 브라보가 부통령이 되었다.
과달루페 대통령이
재임한 4년(1824-1828)은 두 프리메이슨 분파 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의례파(스코틀랜드파)와 요크 의례파(요크파)
라는 두 프리메이슨 분파 간의 대립이었다.
당시 정치인의
다수는 프리메이슨에 속해있었으므로 당시 프리메이슨은
정치클럽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엔
아직 정당이란 것이 없었고 대신 프리메이슨이
정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은 스페인에서 백인상류층
사이에 퍼졌던 분파였다.
다수의 크리오요
(식민지 태생 백인)는 이투르비데 세력과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였는데 이들은
스코틀랜드파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주의적 정치세력으로 형성하였다
요크파 프리메이슨은
미국 대사 포인셋(Joel Roberts Poinsett)의 지지를 받으며 메스티조와
중산층을 규합하여 연방주의적 정당의 기초를 만들고자 했다.
빅토리아 대통령은
연방제와 반스페인주의를 주장하는 요크파
프리메이슨을 지지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
로렌소 데 사발라와 그 외에도 호세 마리아 알푸체, 비센테 게레로 등의
자유파 인사들이 그런 요크파 프리메이슨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멕시코에서
요크파 프리메이슨이 성립하는데는 미국 대사
포인셋의 활동도 중요했다.
이것은
미국 외교 전략에 의해 생겨난
현상이기도 했다.
포인셋이
대사로 부임해 왔을 때만 해도 멕시코의 외교는 유럽 계몽주의에
정통한 보수주의자 루카스 알라만이 주도하고 있었다.
루카스 알라만은
미국보다는 영국과 중남미 국가들과의 외교관계에
더 집중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멕시키 북부의 국경지역으로 노리던
미국을 크게 경계하였다.
그리고 알라만은
미국의 요청을 뿌리치고 영국과 먼저 우호, 통상,
항행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포인셋은 알라민이 버티고 있는
행정부보다는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많이 포진해있는 의회를 상대로
관계를 강화하는데 주력하기로 하였다.
포인셋은 대통령과
의회의 협력을 얻어내며 멕시코 보수파를 견제했으면서
멕시코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포인셋의 개입에 따라
요크파 로지는 뉴욕 총 로지(그랜드 로지, 총 지부)에게
인정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조직되었다.
요크파 프리메이슨들은
급진주의자, 연방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스코틀랜드파를 상대했다.
보수적인 프리메이슨들은
'오래되고 인정된 스코틀랜드 의례파'로지로
결집하였다.
마누엘 코도르니우(Manuel Codorniu)는
이중 중요한 인물이었다.[18](마누엘 코도르니우는 1821년 당시
마지막 부왕 후안 오도노후가 부임했을 때
그의 주치의였고
'엘 솔'이란 로지를 조직하고 같은 이름의 신문을 발간했는데 목적은
이괄라 계획을 지지하고 가톨릭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요크파에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프리메이슨이 모였고 반대편에는 스페인
자유주의를 계승하는 보수적 정치인들이 스코틀랜드파 로지로 결집하였다.
두 세력 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제 3의 대안을 세웠다.
그들은
1825년에 민족주의적 로지인 멕시코 의례파(RNM)
프리메이슨을 세웠다.
RNM은 자유주의 원칙을
주장하였고 외세가 아닌 멕시코 고유의 정치
시스템을 추구하였다.
멕시코 의례파는
1826년에 요크파나 스코틀랜드파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아나우악의 자오선',
'평등', '폭군의 공포', '인디오의 무심', '멕시코의 비'과
같은 로지들이 결성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나중에
RNM은 요크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과달루페 정부에게
당시에 중요했던 과제 중 하나는 국가 개정으로
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가 재정은 부도 직전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권과 재산을 사용하는 문제가
새롭게 나타났다.
요크파는
그것을 지지하였고 스코틀랜드파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스페인인들의
신변과 관련된 문제도 논란거리였다.
이런 시기에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 사건이
벌어졌다:
아레나스 신부는
멕시코의 혼란이 자유주의 때문이라 주장하며
1827년 1월에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의
왕정 복귀를
주장하며 이에 동조하는 사제들과 반란을 계획했다.
계획은
사전이 발각됐고 신부는 처형됐다. 당시 멕시코 사람들은
스페인의 재정복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사건은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댕겼다. 가읕 해 5월에 스페인인은 공직과 사제직 취임을
금지하는 령이 내려졌고 12월에는 스페인인 추방령이 내려졌다.
브라보 부통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파는 즉각 반발하였다.
이들은 1827년 12월
몬타뇨 계획(멕시코주의 오툼바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오툼바
계획이라고도 한다)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요구했다:
요크파 프리메이슨을
포함하여 비밀 결사를 금지하고, 요크파 정치인을 축출하기
위해 내각을 재구성하고,
요크파의 최대
후원자인 포인셋 대사를 추방하고, 카톨릭을 국교로 정한
1824년 연방 헌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 베라크루스 주와
산 루이스 포토시 주 등 일부 지역이 몬타뇨 계획에 가담했고
양측의 충돌은 격화되었다.
결국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의 정부군이
승리하였다.
요크파 프리메이슨
은 다시 세력을 인정받았고 스코틀랜드파의 위세는
축소되었다.[
다음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고 요크파와 RNM은 게레로를, 스코틀랜드파는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
(Manuel Gómez Pedraza y Rodríguez)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하였다.
선거에서는
마누엘 고메스가 승리했다.
그러나 요크파와
게레로가 불복했다. 결국 마누엘 고메스는 사임하고 게레로가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요크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에 멕시코는
국가재정이 계속 부족하였고, 농업, 광업, 제조업의 생산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도로 등의
사회기반도 엉망이었고 교회와의 마찰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재침공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거의 전무했다.
결국 스페인은
1829년 멕시코를 재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탐피코를 점령하였다.
게레로 대통령은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Anastasio Bustamante) 부
통령을 탐피코로 파견했다.
그러나 오히려
부스타만테는 반란을 일으켜 1830년에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부스타만테를
상대로 게레로가 다시 봉기하였다 부스타만테의
계략에 당해 1831년에 암살당하였다.
부스타만테에
반대하여 산타 안나 장군이 봉기하여
부스타만테를 몰아냈다.
이후 고메스 페르라사가
대통령 자리를 맡게 됐고 그는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였다.
산타 안나 후보는
요크파의 지지를 받으며 RNM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정치 개혁 계획을 발표하였다:
여론과 언론의
자유보장, 군대와 교회의 특권 폐지, 수도원의 철폐 등이
정치 개혁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1833년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은 모두 멕시코의 평화와 발전을 기원했지만
종합적인 계획을 서로 달랐다.
자유주의 세력은
연방공화국을 희마하였고 보수파는 군주제를 지지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중앙집권주의적 모델을 지지하였다.
자유주의는
요크파 프리메이슨으로 모이다가 나중에는 RNM
프리메이슨으로 모였고,
보수주의는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으로 결집하고 정치세력은 양분되고 19세기 멕시코 정치
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으로 자리 잡게되었다.
멕시코 독립을
완전히 해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멕시코 정치조직들이
새로 생겨난다는 것은 뜻했다.
당시에 정당의
탄생은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정당이 생기기 전이었고 대신 프리메이슨이
정당에 준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에 따른 활동이 훗날 멕시코 정당정치에서
기초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프리메이슨 단은
비밀결사 단체로 반차르운동을 전개하다
러시아 혁명 겪었다.
프리메이슨
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는
1917년 2월 혁명전후였다.
니콜라이
비사리오노비치 네크라소프의 증언에 따르면 2월 혁명
시기 단원들의 수는 약 300~350명 사이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다양한 정당이나
정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인민주의세력:알렉산더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알렉산더 알렉세비치
데미아노프, 파벨 니콜라예비치 페레베제프 게오르기 드미트리예비치 시다몬-에리스토프, 세르게이 드미트리예비치 므스티슬랍스키 등이 있었고,
멘셰비키적 성향의 인물: 니콜라이 세모노비치 치헤이제, 예브게니아 페트로비치 게게치코리, 아카키 이바노비치 치헨켈리,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프로코포비치,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쿠스코바 등이 있었다.
입헌민주당(카데트) 소속: 니콜라이 비사리오노비치 네크라소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콜류바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스테파노프,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볼코프 등이 있었다.
진보당 소속: 이반 니콜라예비치 예프레모프,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 알렉세이
아나톨예비치 오를로프-다비도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코롭카 등이 있다.
프리메이슨 조직이 강했던 우크라이나: 표도르 루돌포비치 슈타인겔, 이반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로비치-바르스키, 니콜라이 프로코피에비치 바실렌코, 레브 블라디미로비치 피사르젭스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루솁스키 등이 있다.
볼셰비키 소속은 별로 없었다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멜구노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정치적 프리메이슨 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건 네크라소프, 케렌스키, 미하일 이바노비치 테레셴코 3인방이었고,
1916년에
코노발로프와 예프레모프가 더해져
5인방이 되었다.
프리메이슨 운동
참여자들의 정치적 소속은 다양했지만 포괄적인
정치적 목적은 동일하였다.
정파와
무관하게 차르 전제정에 반대하였다.
그레고리
야코블레비치 아론손 은 당시 러시아 프리메이슨단의
특징을 두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단체의
비밀적 성격, 다른 하나는 소속된 인물들의 "잡다함,
다채로움, 다양성"이었다.
아론손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정치적 프리메이슨단은 정당이 아니라
초정당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의 중심을 갖고자 했던 사람들이
연합한 단체였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의 정치적 프리메이슨 운동에는 입헌민주당과 진보당과 같은 자유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인민주의자들은 참여하였지만 극우 세력은 배제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자신들이 다양한 정파에 속했다는데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가입식에 약속한
비밀준수에 따라 프리메이슨들은 자신들이 그런 조직에 속했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소속 정당이나 정파에 알리지 않았다.
치헤이제 같은
사람들은 그런 프리메이슨 활동이 자신들이 소속된 당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도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1917년
초에 볼셰비키가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때
프리메이슨단의 최고협의회는
혁명세력이
시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교섭을
결정했었다.
그런 목적으로
선출된 대표로 케렌스키, 네크라소프, 소콜로프, 알렉산더
야코블레비치 갈페른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다른 정치 세력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프리메이슨들은
1917년 2월 하순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사태와 2월 혁명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페른은 말한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혁명을 맞이했다.
혁명 초기에
우리가 가진 당혹감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 우리는 심지어
2월의 사건들이 아주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할 때에도,
그 사건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2월 혁명 이후
타브리드 궁에서는 크레스티 감옥에서 해당된 멘셰비키
, 4대 국가두마의 사회민주주의 당원들,
언론인들 그리고
몇명의 볼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 좌파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임시집회위원를 구성하기도 결정됐다.
이 결정에
따라 임시집행위원회, 그 다음에 상임집행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프리메이슨들인
스코벨레프, 소콜로프,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수하노프, 케렌스키가 포함됐다.
소비에트 의장에는
'러시아민족들의 위대한 동방’(프리메이슨)의 최고협의회
위원인 치헤이제가 선출됐다.
성립된 두마의
임시위원회 속에는 네크라소프, 코노발로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카라울로프,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르젭스키, 케렌스키, 치헤이제 같은 프리메이슨단원들이 포함되었다.
그에 따라
프리메이슨 조직은 국가두마와 소비에트 양쪽에 자신들
파벌의 주요 인물들을 포진시켰다.
1917년 3월 1일
저녁에 임시정부의 구성이 결정되었고, 2일 밤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국가두마 임시위원회 합동 대표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임시정부
장관 11명중에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몇 명인지
학계에서 논란이 되어왔다.
비탈리 이바노비치 스타르체프(Виталий Иванович Старцев) Archived 2021년 8월 7일 - 웨이백 머신 역사학 박사는 임시정부 초대 내각에서 프리메이슨 단원은 네크라소프가 증언한 3명(네크라소프, 케렌스키, 코로발로프)이라 설명했다.
빅터 스테파노비치
브라체프(Виктор Степанович Брачев)역사학 박사는
11명의 장관중 프리메이슨 단원은 최소 6명,
프리메이슨단과
관련을 맺은 경우도 포함하면 파벨 니콜라예비치
밀류코프를 제외한 최대 10명이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안드레예프( Дмит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дреев)
역사학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임시정부 1차
내각에서는 11명 중 7명, 제1차 연립정부에서는 15명 중
10명이 프리메이슨 단원들이었고
, 제2차
연립정부에서는 16명 중에 10명, 제3차 연립정부에서는
17명 중 6명이 프리메이슨이었다.
임시정부
내각에서 프리메이슨 단원의 비중에 대해 스타르체프는
비교적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런 스타르체프도
10월 혁명 발생전까지 장관들중 프리메이슨 단원은
15명이라고 설명했다.
임시정부 각료 중
프리메이슨 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초기 임시정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건 프리메이슨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3명설을 지지하는 스타르체프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세 사람은 연약한 성격의 게오르기 르보프 총리,
신성종무원장인 르보프(В. Н. Львов),
이전에 프랑스 의전의
프리메이슨이었던 토지장관인 신가료프(А. И. Шингарев)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초대 임시정부 내각에서 강력한 급진경향의
핵을 형성하였고,
임시정부는
국방장관인 10월동맹당의 구치코프와 외무장관인
밀류코프의 정치노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초대 각료 구성에서 프리메이슨단의 영향력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가 테레셴코 임명문제였다.
요젭 블라디미로비치
게센은 밀류코프에게 질문했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백만장자의 아들이었던 테레셴코가 어떻게
임시정부 초대내각에서 재무장관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밀류코프는
이 때는 "러시아 남쪽에서 어떤 유명한 인물을 정부
구성에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고 답변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밀류코프가 쓴 회고록에 따르면 사실을 달랐다.
밀류코프는 다음과 같이 속마음을 증언한다:
“우리 중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새사람, 즉 우리 가운데 유일하게
‘자본가-장관’인 테레셴코를 추천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어떤 ‘명단’에서
그가 재무장관으로 ‘슬쩍 들어왔는가?’ 그 때 나는
근원이 바로 우리(즉 카데트)의 네크라소프와
예프레모프의 공화주의가
유래되었으며 케렌스키가 엮여있는 바로 그것이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 근원에
대해 나는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다른 회고록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나는 케렌스키와
네크라소프, 그리고 아직 언급하지 않았던 각료 두 사람, 즉 테레셴코와
코노발로프 사이의 유대를 또한 강조하고 싶다.
이들 네사람은
성격, 과거, 그리고 정치적인 역할면에서
매우 달랐다.
그렇지만
그들을 결합시킨 것은 단지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만이 아니었다.
이것 외에도,
그들은 순수하게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 정치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모종의 개인적인 유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것과 동일한 근원에서 유래되는 상호적인 의무감
같은 것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밀류코프가 말한
‘정치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모종의 개인적인 유대’란 프리메이슨
조직인 ‘러시아민족들의 위대한 동방’이다.
밀류코프는
프리메이슨단의 존재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고 있다가 임시정부가
성립된 이후에야 그 영향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프리메이슨의
입김은 임시정부 초기에 강하게
드러났다.
프리메이슨이
아니었던 밀류코프와 구치코프와는 달리, 프리메이슨 장관들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에 대해서도 밀류코프는 소비에트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하면
프리메이슨‘
러시아민족들의 위대한 동방’에 소속된 장관들은
소비에트와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임시정부
초대 내각을 대표하던 인물은 외무장관인
밀류코프였다.
그렇지만
그는 불과 2개월여만에 실각하고 말았다.
물론 이건
당연히 프리메이슨 때문만이라 2월 혁명 이후
복잡한 국내외 정세 때문이다.
1917년의
러시아의 전반적인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됐고, 볼셰비키
지도자인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여
이른바 "4월 테제"를
발표했고, 경제적인 혼란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밀류코프가
실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쟁 지속 문제였다.
그러나 이면에는
프리메이슨단에 속한 인물들의 압력이
있었다.
케렌스키,
네크라소프, 코노발로프는 임시정부 내각에서 보다
급진적인 경향을 보여주었고,
국방장관인
10월동맹당의 구치코프와 외무장관인 밀류코프 같은
온건파 정치노선 제압에 성공했다.
밀류코프는 케렌스키에게 "7명의 정부 각료들"이
밀류코프를 외무장관직에서 경질하고
인민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밀류코프 경질을
결정한 7명 중 그 핵심에는 프리메이슨 3인방인 케렌스키,
네크라소프, 테레셴코가 있었다.
나머지 4명은
우파 장관인 블라디미르 르보프, 고드네프, 케렌스키의
정치적 친구인 코노발로프와 르보프 공이었다.
밀류코프를
뒤이어 외무장관이 된 살마은 테레셴코였다.
임시정부
시기 프리메이슨단의 활동은 주로 최고협의회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당시 최고협의회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었던 부분은 좌파정당들을 연합 노선 속에
붙잡아두기 위해 좌파 정당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 일에서 큰 역할을 맡은 살마은 멘셰비키에
속한 갈페른이었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에 있던 치헤이제는 비록 프리메이슨으로서의 활동은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갈페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리메이슨들의
중심 조직인 최고협의회가 지지하고 있던 것은 민주주의적
연대였고, 이점은 2월 혁명 이후에도 여전하였다.
이 시기에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막후에서 정치상황에 대해 논의하였고,
중앙정부 및 지방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케렌스키가
1917년 7월 초에 임시정부 총리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다수의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정부의 각종 직책에 임명되었다.
스타르체프에
따르자면 1917년에 중요한 행정직에 임명된
단원들은 도합 148명이었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지방행정직의 인사 문제에도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갈페른이
말한 바에 따르면, “주지사 자리에 누구를
임명할 것인지,
그리고 다른 중요한
행정직에 누구를 임명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무엇보다도 해당 지방의 로지의 단원들이 고려대상이 되었다.
만약
그들 가 운데 적임자가 있다면,
그 사람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프리메이슨 단의 영향력으로 점차
축소되어가고있었다.
2월 혁명
직전에 로지는 약 40개였으나 10월 무렵엔
28개로 줄어들었다.
1917년 당시
프리메이슨 단원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러시아 전체를
통들어도 300~350명(최대 추정치도
500명)이었다.
혁명 이전에도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혁명적 상황속에서 활동
여건이 크게 변하였다.
스타르체프에 따르면
혁명 이전에 차르정부에 의하여 정치적인 활동이
억압되던 시기에는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많지 않는 반정부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했었다.
반면에 혁명으로
갑작스럽게 자유가 허용되자 불과 수백명인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흡사 바다 속의 물 한방울과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2월 혁명
이후에는 정치가와 전문가들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대중이
정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대중은 냉정한
정치적 판단력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감정이나 집단적 이해에
영향을 받는 겨양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에게 이해되는 구호를
내걸 수 있는 정치세력이 유리했다.
따라서
도덕적인 자기완성이나 진보, 자유, 민주주의라는 프리메이슨의 기보
원칙들은 혁명적 상황에서는 별다른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중 속에
조직을 가지고 있던 혁명 정당들의 영향력
은 점점 확대되었다.
2월 혁명으로
차르 정부가 붕괴된 이후에 유형 및 망명 생활을 하던
일급 혁명가들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로 귀환하였다.
이로써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인민주의자들은
역할이 축소되었다.
1917년
3월 중순에 카메네프, 스탈린, 4월 초에
레닌과 지노비예프 등
저명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각각 유형지 및 망명지로부터 귀국하자
프리메이슨들은 더욱 위축되었다.
볼셰비키는
프리메이슨단과 연결을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조호연 박사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추가하고 있다:
2월 혁명 이후엔
프리메이슨 단원들 내부에서도 적대감이 너무 강하여
모임을 소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리메이슨단의
정치적 목표는 전제정의 철폐였다.
그런데 2월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붕괴되어 정치적 목표가가 달성되자 자유주의자들
내에서 상대적으로 급진적 성향이었던
네크라소프같은
입헌민주당 좌파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비교하여
오히려 온건한 세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프리메이슨들은 혁명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정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실 원래부터
정보획득 및 혁명이 한 방편으로서 가입했던 것이나
2월 혁명
이후에는 더 이상 프리메이슨단 활동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치헤이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해주었다:
“혁명이 발발한
이후에 나는 로지나 최고협의회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떻게 하여
관계가 즉각 단절되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곳에서
나를 부르지도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떤 활동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갈페른의 증언에 따르자면
치헤이제는 혁명이 발발한 이후에 갈페른에게 프리메이슨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면서
프리메이슨단의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프리메이슨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조직의 틀 내에 묶어두려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10월 혁명 이후 프리메이슨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프리메이슨 운동은 소련 해체된 1991년에야
다시 등장한다.
프리메이슨들은
볼셰비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만 10월 혁명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조호연은
"엘리트 중심의 프리메이슨 운동이 지닌 한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라 결론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