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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요 1:14-18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4-18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그분의 영광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에 대하여 군중들에게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분이 내가 있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외치며 증거하였다. 16)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혜를 입었으며 한없는 복을 받았다. 17) 모세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용서를 주셨다. 18) 사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외아들이신 그분께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본문의 사도 요한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신비를 설명합니다.
성육신(14) 유대인들은 신성과 인성을 철저하게 분리하였으나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증언하여 예수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독생자란 단어는 외아들이 아니라 유일한 한 분이란 뜻으로 예수님만이 세상을 구원할 오직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거하시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노센’은 천막을 치고 거한다는 뜻으로, 광야 시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성막 가운데 계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겸손 가운데서 예수님의 영광을 발견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초라함이 아니라 도리어 영광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15-16) 세례 요한은 자신보다 뒤에 오실 예수님의 선재성을 증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큰 인물(눅 7:28)이었으므로 그의 증언은 권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례 요한이라도 예수님과 견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 만물과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자신 안에 있는 충만한 생명을 우리 죄인들에게 베푸시고자 내려오셨으니 사도 요한은 이를 보고 은혜 위에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 곧 은혜의 중복은 끊임없이 채워지는 강물처럼 죄인을 향해 은혜를 끝없이 공급하시는 예수님의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은혜와 진리(17-18) 여기서 사도 요한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모세를 통해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는 은혜와 진리를 받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지만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하는 반면,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줍니다. 율법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하나님을 더듬게 하지만, 예수님의 진리는 하나님을 밝히 보게 합니다(요 14:9).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습니다(히 1:1-3).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밝히 보여주는 계시를 의미합니다.
적용: 성육신, 은혜, 진리의 개념을 설명해 봅시다(갈 4:4, 5).
기독교의 놀라운 주장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방문하심이며 그를 믿는 자마다 성령을 받음이며 또한 부활의 약속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가 성도들에게 안겨졌음을 찬양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외모나 지식이나 가문이나 외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마음과 정성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회칠한 무덤이며 헛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깨어진 심정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 설 교 >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18 / 김광일 목사
1949년도에 독일의 동서독을 분리하는 분립 장벽이 세워졌습니다. 동독에서 360여만 명이 서독으로 피난했습니다. 동독의 목사들도 서독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 후 1954년에 서독 루터교에 속한 젊은 목사 부부가 동독으로 향했습니다. 동독의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저들을 향한 선교적 마음을 품고 동독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호르스트 카스너(Horst Kasner)입니다. 그는 소련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 닫혀진 교회 문을 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동독 땅을 밟은 것입니다. 카스너 목사 부부는 생후 6주 된 딸을 데리고 동독으로 가서 브란덴브르크에서 목회하였습니다. 긴긴 세월, 감시와 탄압 가운데서도 독일 통일을 위해서 사역하였습니다. 1990년 10월 3일에 동독 6개 주가 국민 의사를 물었고 서독 연방 정부에 가입되기를 원했습니다. 동서독이 하나 되는 통일의 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카스너 목사의 가정을 잊고 지냈지만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독에 머물러 복음을 전파하던 호레스트 카스너 목사의 가정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당시 아버지 품에 안겨 동독으로 떠났던 어린 딸은 독일을 이끄는 위대한 총리가 되었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 총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영접한 인생을 주목하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들로 인해 변화되고 발전되어 갑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말씀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말씀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대한성서공회는 1895년 설립 이후 성서를 번역, 출판 그리고 반포해서 성경이 삶에 활용될 수 있도록 사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세계 147개국과 성서사업 전반에 걸쳐 상호협력을 하며,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각 나라 언어로 된 성경의 20%를 제작, 출판하여 수출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급하는 것을 사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예수에 관한 지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 곧 그 안에 감추인 신성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를 알게 되며 올바른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는 성육신에 관한 내용으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기의 ‘말씀’은 ‘로고스’인데 태초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거하시매'는 '에스케노센’으로 ‘천막에 살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성막에 거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요한은 ’우리가 보니‘라는 구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증거합니다. 로고스이신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육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의 육적 모습만이 아니라 예수 안에 내재된 신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목격하여야 합니다. 만일 예수를 보고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을 통해 어떠한 것이 보여야 합니까?
첫째로 영광이 나타납니다
노벨상 후보를 많이 배출한 시카고 대학, 세계 석학들이 연구하고 있는 하버드 대학과 보스톤 MIT 공대의 중심에 교회당이 서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은 학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배워야 이루어집니다. 최고의 배움은 예수의 정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가구치 다이로 박사는 항상 1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졸업 학기에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1등을 했습니다. 졸업식장에서 1등상을 받은 다이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상은 사실 부끄러운 상입니다. 시험에는 1등은 했지만 여러분 앞에 자랑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2등을 했던 영국의 스미스가 내가 병원에 있을 때 강의록을 기록해서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병상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감동을 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이 학교의 정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1등을 한 다이로에게 찬사를 보낸 것이 아니라 병상까지 찾아가 도와준 스미스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예수에게서 배우는 사람 속에서 진정한 힘이 나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영광이 말씀대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의 ‘영광’은 원어로 ‘독산’인데 ‘광채, 위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습니다.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성막 안에 제한적으로 머무셨던 영광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함께하는 영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안에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가득하였습니다. 단순한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까닭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는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은혜가 충만합니다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의 아버지는 남다른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약제사로 일하면서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었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소외된 자들을 사랑했고, 생계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는 손님들로부터 약값을 정당한 가격 이상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정직을 사업의 신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약값을 절반만 받거나 아예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도 거저 약을 지어 주셨는데요?” “우선 병이 나아야 하니까 그냥 가져가시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세요.” “그래도 죄송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계산서는 벌써 천국에 보내 놓았으니 거기 가서 갚으시면 됩니다. 약이 떨어지면 또 오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당신이 갚아야 할 약값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것을 늘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말씀대로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은혜 충만한 모습이 아닙니까?
본문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의 ‘은혜’는 원어로 ‘카리스’인데 ‘전혀 받기에 부족한 자에게 주어지는 분에 넘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죄 아래서 무능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반역하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은혜입니다. 구원은 말씀으로 오신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 은혜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고 싶다면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은혜의 원천은 말씀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가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은혜 충만한 사건이 넘쳐날 것입니다.
셋째로 진리가 충만합니다
8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수원의 대천덕 (Reuben Archer Torrey Ⅲ) 신부는 온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평생 청빈과 나눔의 삶을 실천한 대천덕 신부는 흑인 해방운동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펼치다 한국에 왔습니다. 성공회 대학의 전신인 성 미카엘 신학원을 재건한 후 다시 1965년 강원 태백시의 산골짜기 황무지를 택해 기독교 공동체 예수원을 세웠습니다. 예수원은 노동과 기도의 삶이 충만한 곳이었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무엇인가를 영적으로 채워주는 곳이었습니다. 대천덕 신부의 부인은 “남편이 심장 질환으로 고생할 때 의사는 1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남편의 대답은 ‘저는 벌써 준비가 됐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원에 있는 대천덕 신부의 묘비에는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성경 구절을 새겼습니다. 요한복음 7장 17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말씀으로 바로 잡혀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충만한 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의 ‘진리’는 원어로 ‘알레데이아’인데 ‘겉모양에 반대되는 실재’를 의미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본질이기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충만한 진리는 거짓된 위안을 주는 세상 것과 다른, 자유를 주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위인과도 견줄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고 삶의 방식이 올바르게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 되심을 믿는 진리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언약을 세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말씀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분석하지 않고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속에서 음미하십시오.” 성경을 읽다 보면 난해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보아야 할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인생의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보좌에 모셔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새롭게 열어주실 것입니다.
부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집니다.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그리고 진리가 충만하여짐으로 넉넉히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육신을 입고 오셨는가?
김홍도 목사
지난 수요일 메시지를 전해주신 전 주한 이스라엘 대사 아셔나임(Dr. Asher Naim) 박사는 한국-이스라엘 친선협의회 회장이시고, 이스라엘 국회에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연속이다”라고 통과시킨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는 분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지금도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지금도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고 예수님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분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이 될 수 없다” 하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간단히 왜 육신을 입고 오셨는지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왜 영(spirit)이신 하나님이 육신(flesh)을 입고 오셔야 했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속죄의 피를 흘리기 위하여
피가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속죄의 법칙인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피를 흘릴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고, 성경 전체에 “피”라는 단어가 700여 번 나옵니다. 피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피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4~25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되 죄인의 결혼관계를 통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1:20)고 알려주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영으로는 속죄의 피를 흘려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볼 수가 없고 하나님을 보면 그 영광의 빛이 강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이십니다. 제 생각과 사상이 머릿속이나 가슴속에 있는데 생각과 사상으로만 있으면 남이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말이나 글로 나타내야만 남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영이신데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하여 도성인신(incarnation)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창세전부터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계셨던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신 후 고백하기를,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My God.)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어느 날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좀 보여주시면 좋겠다고 말할 때, 요한복음 14장 9절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invisible God)을 보여주기 위하여(visible God)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3. 참 사람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뿐 아니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부터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라고 했습니다. 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4. 대신하여 죽음을 정복하시려고
인류의 최대, 최종의 원수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요사이 아시안 게임이 진행 중인데 한국 선수가 유도에 승리했다하면 곧 한국이 승리한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죄와 벌이 임했는데 예수님 한 분이 온 인류를 대표하여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므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부활을 얻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죽음의 종노릇하며 죽기를 무서워하는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켜 영생과 부활을 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고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몸소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 사람은 영생과 부활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5.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떠나셨고 사탄이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버리고 떠나셨던 하나님이 다시 인간 세상을 찾아오시는데, ◉ 제일 먼저 산꼭대기에 빽빽한 옹기점 연기와 같은 연기 속에 불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이 크게 진동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8절에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라고 했습니다. ◉ 그 다음에는 더 가까이 평지에 나타나셨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에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했습니다. 평지 성막에 임재하셨습니다. ◉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신 대로,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 그 다음에 더 가까이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찾아오셔서 그 때부터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인데,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 세상을 떠나셨던 하나님이 다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성령 즉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는데 그 보혜사 하나님이 우리 속에 함께 거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가 가시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몸 안에, 심령 속에까지 찾아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6. 마귀를 멸해주시려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세상의 임금 노릇하던 마귀를 우리를 위해 멸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혈육을 입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마귀를 멸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에게 눌리고 찢기고 상처 입은 인생을 구원하러 오실 뿐 아니라 마귀를 패배시키려고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사단에게 눌린 많은 사람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1절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하셨고, 16장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그 몸이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대속의 피를 다 쏟아주시므로 사단을 패배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어떤 사단 마귀의 공격도 다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영이신대 혈과 육을 입으신 것은,
① 속죄의 피를 흘려주시기 위함이요,
② 보이지 않던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요,
③타락하기 전 참 인간의 형상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요,
④ 우리 대신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함이요,
⑤ 우리를 멀리 떠나셨던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임마누엘로 오심이요,
⑥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마귀를 멸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찬송을 불렀고 이상한 별이 나타나 큰 징조를 보였고 먼 나라에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김명혁 목사
세상에서 최고로 가장 좋은 것은 돈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가장 좋고 가장 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이 행복이고 사랑이 기쁨이고 사랑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고 최고로 귀하고 최고로 아름다운 사랑은 부모의 사랑도 아니고 부부의 사랑도 아니고 친구의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His love endures forever.” “그의 사랑하심이 영원함이로다.” “His love endures forever.” “그의 사랑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두세 번 중얼거리다가 그치지 않았고 26번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중얼거렸습니다. “His love endures forever.” “그의 사랑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난 번에 다윗의 사랑 고백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다윗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웃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글을 쓰든지 설교를 하든지 손을 놀리든지 입을 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좇았던 제자였고 예수님을 제일 마지막까지 좇았던 제자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 요한 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이 최권능 목사님을 몽둥이로 때리면 최권능 목사님의 몸과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예수 천당”이었던 것처럼, 사도 요한의 몸과 손과 입을 건드리면 그에게서 튀어 나온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 준 사람도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는 말을 한 사람도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이란 말을 30번이나 계속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자주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곤 했습니다(요13:23). 그는 자기 이름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를 요한이라고 부르는 대신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왕자 병에 걸렸어도 대단히 큰 왕자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밧모섬에서 마지막에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면서 한 사랑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고 지난 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알지도 받지도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사랑에 감격해서 늘 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사랑을 느끼지도 알지도 받지도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한 번 흘려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회개의 눈물도 한 번 흘려보지 못하고 사랑의 눈물도 한번 흘려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눈물은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착하게 만드는데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메마르고 딱딱하고 비판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교가 눈물 흘리는 것을 막았다면 유교는 반 기독교적입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사랑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울며 애통하며 내게로 돌아오라”(요엘2:12)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눅6:21)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신기하고 놀라운 사랑을 세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1.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말씀’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 사람이 아프리카 사람을 사랑할 때 아프리카 사람이 됩니다. 영국 사람인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사람을 사랑해서 아프리카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일 사람인 슈바이쳐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랑해서 아프리카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사랑할 때 한국 사람이 됩니다. 존 린튼 박사의 증조 할아버지는 한국을 사랑해서 1895년 (109년 전에)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존 린튼 박사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한국 전라도에서 태어났고 존 린튼 박사도 1959년 한국 전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라도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 여자와 결혼을 했고 전라도 말을 한국 사람보다도 더 잘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셂이라는 신학자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제목이 “왜” (Cur) (Why)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 (Why God Man?) 이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불가해한 일이고 모순된 입니다. 천사가 잠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해할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철두철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엄청난 일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마리아의 몸 속에 들어가서 열 달 동안 계시다가 아기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모순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같이 연약해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연약에 쌓여있었다”고 했고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다”고 했습니다(히5:2,4:15). 가난해지셨다고도 했습니다. 피난살이도 했습니다. 인간의 배고픔과 인간의 아픔과 인간의 슬픔과 인간의 고통을 모두 짊어지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죄인이 되셨습니다.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는 모습을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요19:34,35).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마다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이삭 왔츠는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대구 주암산에서 열린 산상 부흥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찬송을 부르면서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찬송가 가사 한 줄에 가슴이 복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사는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였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우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피를 흘려 교회를 사셨다는 말에 감격해서 그저 계속해서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보면서도 눈물 한방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눈을 수술을 하든지 마음을 수술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처럼 태어나셨고 사람처럼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색깔이요 모습이었습니다.
2.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천막을 치고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입니다. 잠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영삼 선교사와 이희경 선교사는 그리스의 집시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이희경 선교사님이 이런 글을 방명록에 올렸습니다. “몇 주전 김목사님의 설교를 보게 되었습니다. 착한 자가 되라는 요지의 설교 였어요. 착한 사람이 되는 것 쉽지 않지요. 이곳 아덴에서 선교사로 살면서 착한 삶을 살고 싶어 얼마나 몸부림 쳤나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본성이 죄가 가득하기에 착한 삶을 살기란 쉽진 않더군요. 그러나 착함의 결과는 기쁨이었고, 행복이 였습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면서 착함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두루 다니시면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사도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행10:38).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해서 한국에서 4대째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전라도의 결핵 환자들과 함께 살았고 지금은 연세대학교의 의사로 날마다 환자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수 많은 결핵 환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착함과 사랑의 손길을 나타내 보이면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수년 전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존 린튼과 스티브 린튼 형제가 부시 대통령과 가까이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이 저하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두 사람이 부시 편이나 미국 편에 서기 보다는 한국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제가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통과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끼면서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틀 전에 존 린튼 박사님과 전화로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까 너무 즐겁고 기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연세 대학교가 최근에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서 큰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너무 즐겁고 기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살면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함께 울면서 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함께 슬퍼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절망 중에서 살아갈 때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가서 그와 대화하면서 그의 절망과 고통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기도 했습니다. 그는 통곡까지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히5:7).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불행과 고통에 참여하시면서 많이 우셨습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살면서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색깔이요 모습이었습니다.
3.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율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도 귀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 율법만 있었다면 구원을 얻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심판대신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의의 법을 수행하시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구원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이것이 은혜요 진리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법대로 하면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벌 대신 상을 주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감옥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감옥 대신 자기 집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지옥 대신 천국으로 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어야 하는 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살려 주셨습니다.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 여인을 법대로 하면 사회에서 매장을 시켜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동내에 들어가서 떳떳하게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강도는 법대로 하면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강도에게 저주 대신 축복을, 심판대신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사울을 법대로 하면 사회와 종교계에서 매장을 시켜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를 사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사랑은 율법대신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우주의 공의 대신, 구약의 율법 대신, 하늘의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이 세상의 윤리나 종교에 나타난 자비나 도덕이 아닙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불교적 자비나 유교적 도덕이 아닙니다. 십자군적 공의는 더군다나 아닙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오직 아들의 죽음에 나타난 은혜와 진리입니다. 오직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에 나타난 모순되고 역설적인 은혜와 진리입니다. 자기가 저주를 받으므로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은혜이고 자기가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키므로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보고 손으로 만진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과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므로, 성육하시므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므로,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우시므로, 나타났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므로, 십자가에 달려 대신 저주를 당하시므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주목하고 그리고 손으로 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여러분들도 이 사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랑을 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랑에 감격하여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심판도 이긴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도 이기고 죽음도 이긴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4:18).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요일4:17).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만지고 눈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김명혁 목사
요1:14, 빌2:6-8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1:28).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구주로 주셨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그리고 가장 귀한 것을 우리들에게 ‘주신’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더 진하고 더 신비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되는’ 사랑입니다. 가장 귀하고 가장 진하고 가장 신비한 사랑은 ‘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무나 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되는’ 사랑을 상상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사람은 ‘되는’ 사랑을 소원하며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나환자들을 사랑한 나머지 나환자가 되고 싶어한 사랑이 바로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지녔던 ‘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되는’ 사랑으로 나타난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날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깊이 알았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인간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사랑이고 극치의 사랑입니다.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시므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임마누엘이란 이름 속에 하나님이 숨어있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9:6).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라고도 불렀습니다. 아기 예수님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숨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족보를 따라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밀양 박씨로 안동 권씨로 김해 김씨로 인간의 족보를 따라서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도 인간의 족보를 따라서 태어나셨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족보를 길게 나열할 후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16).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급해서 올라간 후 이렇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3:38).
하나님께서 처녀 마리아의 아들로, 아기 예수로 태어나셨습니다. 구유에 알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신비한 광채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물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오직 동방 박사 세 사람들만 그 사실을 알았고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직 마리아와 요셉만 그 사실을 알았고 시므온과 안나만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심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기절할 일이고 감격할 일이고 엎드려 감사할 일입니다.
2.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사시므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잠깐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3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것이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해서 한국에서 4대째로 태어나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들보다도 더 분명한 한국 사람이 되었고 전라도 사람들보다 더 분명한 전라도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이민 가는 것을 좋아하고 사모하지만 존 린튼 박사는 자기더러 미국에 가서 살라고 할까 봐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야와 함께 우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사셨고 사람들처럼 피난살이도 했습니다. 인간의 배고픔과 인간의 아픔과 인간의 슬픔과 인간의 고통을 모두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사시므로 진정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기절할 일이고 감격할 일이고 엎드려 감사할 일입니다.
3.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죽으시므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은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9:27).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본질상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사람처럼 죽으셨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사도 요한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사람처럼 죽으시는 모습을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가리켜 ‘하나님의 피’ 라고 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들의 저주 받은 운명을 100% 짊어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으로 사셨고 사람으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고 기절할 일이고 감격할 일이고 엎드려 감사할 일입니다. 지극한 사랑은 대신 죽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 우연히 대신 죽은 어느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인 글을 읽었는데 그 글을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글을 두 번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이 수북이 쌓이도록 내린 어느 겨울날" 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눈이 수북이 쌓이도록 내린 어느 겨울날, 강원도 깊은 골짜기를 두 사람이 찾았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고, 젊은 청년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눈 속을 빠져나가며 한참 골짜기를 더듬어 들어간 두 사람이 마침내 한 무덤 앞에 섰습니다. ‘이곳이 네 어머니가 묻힌 곳이란다’ 나이 많은 미국인이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한 미국 병사가 강원도 깊은 골짜기로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아이 울음 소리였습니다. 울음 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소리는 눈 구덩이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눈에서 꺼내기 위해 눈을 치우던 미국 병사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습니다. 흰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어머니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입니다.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깊은 골짜기에 갇히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곤 허리를 꾸부려 아이를 끌어 않은 채 얼어 죽고만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미군 병사는 언 땅을 파 어머니를 묻고 어머니 품에서 울어대던 갓난아이를 데리고가 자기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자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하고, 그때 언 땅에 묻었던 청년의 어머니 산소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청년이 눈이 수북이 쌓인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무릎 아래 눈을 녹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만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알몸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무덤 위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정성스레 모두 치웠습니다. 그런 뒤 청년은 자기가 벗은 옷으로 무덤을 덮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께 옷을 입혀 드리듯 청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모두 자기 옷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곤 ‘어머니, 그 날 얼마나 추우셨어요.!’ 무덤 위에 쓰러져 한없이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대신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추운 겨울 날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서 통곡하여 울었고 1700여 년이 지난 후 아이삭 왔츠는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는 찬송시를 써서 부르며 울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으로 사셨고 사람으로 죽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알몸으로 죽으셨습니다. 이 사랑에 감복하여 울지 않은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체 받은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몸에 지니고 그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되는' 삶을 살고자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고전9:19-22).
진정한 사랑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경상도 사람이었던 손양원 목사님이 전라도에 가서 전라도 사람으로 살다가 전라도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었던 주기철 목사님이 평안도에 가서 평안도 사람으로 살다가 평안도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평안도 사람이었던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와 전라도에 가서 제주도와 전라도 사람으로 살다가 제주도와 전라도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기의 지방색과 자기의 기질을 끝까지 고집하며 지키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이방 사람들입니다. 성탄의 달 12월을 맞으면서 ‘주는’ 사랑과 함께 ‘되는’ 사랑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몸에 조금씩이라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을 조금씩이라도 몸으로 실천할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심판을 이기는 길이고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고 행복으로 다가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정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몸에 조금씩이라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선교적 삶과 사역
요 1:14, 막 10:45 / 김명혁 목사
오늘 2016년 1월 10일 주일 여기 화성 물댄 동산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신정식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물댄 동산교회가 단기 선교여행을 앞두고 선교와 헌신을 주제로 삼고 예배를 드리는 주일이기 때문에 “선교적 삶과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인생 칠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복음 삼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신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신앙 오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회개와 회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회복 칠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미언 오언” 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선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선교 칠도” 라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한 평생 목회와 교수와 선교 사역에 종사해왔는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부족한 사람이 “선교 칠도” 또는 “선교적 삶과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선교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서론적인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이시고 우주적이시고 선교적이시지만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인종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이고 반 선교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1:2) 라는 선교적인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오히려 이방을 멸시하고 정죄하는 반 선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애굽으로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여리고 성으로 마지막에는 골고다와 지옥으로까지 가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그런 곳으로 가는 것을 싫어하며 거부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보고 가이사랴로 가라고 했지만 베드로는 처음에는 가기를 싫어하며 거부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요나를 니느웨로 강제로 보내신 것처럼, 성자 예수님께서는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베드로를 가이사랴로 강제로 보내셨고 마지막에는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반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까지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볼 때 미국과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공산권이나 모슬렘권으로 가라고 하시는 말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지칭한 두 개의 “악의 축”이 오늘의 선교의 중요 대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니느웨와 로마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북한과 아프가니스탄 등 공산권과 모슬렘 권이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인데 저에게 이와 같은 세계적이고 우주적이고 선교적인 하나님의 관심과 비전을 깨우쳐주신 분들이 조동진 목사님과 랄프 윈터 박사님과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님들과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님과 독일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 등이었습니다. 저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조동진 목사님의 권유로 1974년 초 풀러 신학교에 가서 Research Associate의 자격으로 8개월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풀러 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윈터 교수님을 비롯한 그 당시 저명한 선교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의 안목을 넓혀갈 수가 있었습니다.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을 접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윈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그 분의 진취적인 입장을 다소 비판하며 질문도 했지만 많은 깨달음과 도전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선교 칠도” 또는 “선교적 삶과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선교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목회가 무엇이고 선교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목자이시고 선교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히 3장과 12장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눈을 오직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와 선교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요1:14과 막10:45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막10:45 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선교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선교는 “버리고”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여기 “자기를 비어” 라는 말씀은 박윤선 목사님이 지적하신 대로 “하늘 영광을 떠나셨다”는 뜻이고,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고후8:9) 이라는 말씀도 부요함을 “버리시고” 가난과 약함을 몸에 지니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섬기러 오신 주님 우리 위해 죽으셨네.”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시되” 구유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행적은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시되”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과 저주 받은 자들을 일일이 찾아오신 “버림”과 “떠남”과 “찾아감”의 행적이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버림”과 “떠남”과 “찾아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고향과 부모를 떠나 애굽에 가서 살았고 나중에는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결국 “버림”과 “떠남”과 “찾아감”의 길을 걸었는데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7-29).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는 웨일즈를 “버리고” “떠나” 조선 땅을 “찾아왔고,”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실라 선교사는 미국을 “버리고” “떠나” 조선땅을 “찾아왔습니다.”
3. 선교는 찾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찾아 간 곳의 사람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이셨고 말씀이셨는데 하늘 집을 버리고 떠나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The Word became flesh.”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8:3).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죄 있는 사람”이 되신 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물론 헬라 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이고 약한 일이고 멸시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 예수님의 선교의 방식이었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되신” 것이 예수님의 선교의 방식이었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즉 선교를 위하여 종이 “되었고"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되었고"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고" 약한 자와 같이 “되었고"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9:19-23).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 받아서 백인이 흑인이 “되는” 일이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는” 일이고,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일부러 병든 환자가 “되었고” 고통을 몸에 지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고 순교의 죽음을 죽기를 그렇게도 소원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부끄럽고 무가치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에 지친 그래서 목이 마른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 여인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여인처럼 행로에 피곤하여 주저 앉으셨다고 했고 여인처럼 목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6,7). 그 여자가 알아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 쉬운 말로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7).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취하신 선교적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선교는 “버리고”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부끄럽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3.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떠나 세상에 찾아오셔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선교는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는 dwelling together 입니다. 선교는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쳐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언더우드 선교사 4대 손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신홍식 선교사 3대처럼 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과 “함께 사셨고” 나중에는 제자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0-13). 선교는 선교지에 가서 대형 집회를 잠깐 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명한 선교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올바른 선교는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콘비벤츠 라는 말은 브라질의 도시나 농촌에 있는 소집단들이 이웃 돕기 운동에서 유래한 말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며, 함께 축하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갖는 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준더마이어 박사는 서로 돕고, 배우고 함께 축제를 경험하는 “콘비벤츠”의 원리를 무엇보다 복음서에 기록한 예수님의 삶에서 입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그들과 함께 동고 동락 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이러한 식탁 공동체야 말로 예수님의 선교에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식탁은 ‘공동체’와 ‘잔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타자와 함께 사는 교회이다.” 너무너무 올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4,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
예수님의 선교적인 삶은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김”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리고 원수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선교는 “함께 사는” 것이고 그리고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의 선교적인 삶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면서 말이 아닌 삶과 죽음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선교의 깃발을 높이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를 유창하게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만큼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강력하게 전파한 복음의 증인과 복음의 선교사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긴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1988년 여름 북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0개 이상을 파주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 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노재인 선교사는 지금까지 25년 동안 “사랑과 섬김”의 선교의 사역을 너무너무 귀중하고 아름답게 하고 있습니다. 1995년부터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1999년경부터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60 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15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대표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대의 대형 트럭에 싣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그곳 민화협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014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방문하고 테러로 130여명의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한 역사적인 교회인 올 쎄인트 교회의 성도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세계 곳곳을 방문하면서 조그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모슬렘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설교나 강의나 전도를 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마음과 생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강의나 전도를 말로 하는 길이 아니고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길도 아니고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과 섬김의”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중국 연변지역에서도 발견했습니다. 부르키나 파소의 모슬렘의 최고 지도자가 수백 년 동안 간직해온 가보를 우리들에게 전해주면서 자기들은 자손들을 살릴 수가 없는데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이 와서 자손들을 살려주어서 너무너무 고맙다고 절을 했습니다. 중국 연변지역의 고아 아이들과 저들을 보살피고 있는 지역의 회장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저는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강변교회가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1,400만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아프간 무라취드에 갔습니다. 그 지역의 모슬렘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경찰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4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프간에 두 번 방문했지만 공식적으로 설교나 강의나 전도나 기도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준공식을 하는 중에 모슬렘 지도자들이 나와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했으며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한국말로 감사와 사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한 한국말 발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너무너무 놀랐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조용히 펼 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이 녹아지는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가장 올바른 아름다운 선교적인 삶과 사역은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5.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고 함께 놀아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는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도 하시고 대화도 하시면서 함께 놀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0년 전인 2005년 11월 12일자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렸던 글의 일부를 여기 그대로 소개합니다.
『나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과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힘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초년생 선교사 한 사람과 밤 늦게까지 볼링을 친 일이 있다. 아주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가 모두 이겼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 젊은 초년생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선교지를 떠나려고 했었는데 스승인 나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고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내가 5년 전에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20여명의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 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다.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씨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다. 어린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너무 기뻐했다. 유치부 어린 아이 하나는 내가 떠날 때 예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네를 함께 탄 아이였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정예찬 2000.6.10” 하루 오후에는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다 가에 가서 놀다가 왔다. 맛있는 바다 가제도 사 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나는 두 주전에 한 주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 러시아 목회자 50여명과 한인 선교사 20여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다. 내가 저들에게 강의도 하고 설교도 했지만 내가 주력한 것은 저들과 함께 교제하고 음식을 먹고 놀아준 것이었다. 도착하던 날 저녁 46명의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한국식당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를 방문 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 학생이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놀아줄 때 선교사들과 자녀들은 물론 현지인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저는 이와 같은 경험을 태국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홍콩에서도 했습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6.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이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심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증오와 분노와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우주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데 있었다고 누가와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화해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세상을 등지고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진 모습이었고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말하기 싫어하는 수가 성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소통을 먼저 시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통이야말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진 모습으로 그리고 따뜻한 모습으로 수가성 여인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여인이여, 내가 목이 마른 데 내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해 줄 수가 있소?” 그 여인은 아주 퉁명스러웠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은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네며 물 한 모금까지 달라고 하시네.” 아주 무례하고 퉁명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낮은 자세로 따뜻한 모습으로 말을 건네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결국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수가성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주님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과의 “화해와 평화”도 이루어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왔다고 했습니다(요4:28-30).
저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를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랜시스와 사랑의 원자탄인 손양원 목사님과 한국교회와 사회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낮은 자세와 따뜻한 자세로 말을 건네고 소통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과 식물과도 친밀한 소통을 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선교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길 때 거기에는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가이사랴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로마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본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화해와 평화”는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방편이고 과정이고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함께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는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이 반드시 이룩하여야 할 필수적인 일이고 민족적인 과제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 엡1:10과 계7:9-12은 앞으로 이루어질 우주적인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모든 천사가 보좌 앞에 엎드려”(계7:9,10).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정치적인 방법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깃발만을 휘두르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고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일어나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악을 선으로 갚으며 악을 행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포용하고 품었던 야곱과 같은 그리고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 앞에서 일곱 번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절하며 예물을 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33:10). 남한 교회가 북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겸손과 존경과 사랑의 자세를 취하여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2007년 10월 12일 신촌 성결교회에서 림인식 목사님께서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형들을 만나자 방성대곡하며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5,7,8).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한국과 세계 안에 지금이야말로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야말로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세계 곳곳을 찾아가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로서의 선교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니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요3:16)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순복음주의자도 싫어했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람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며 중국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60여명을 지난 15년 이상 돕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를 방문하며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가까이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동물들과 식물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개들도 고양이들도 새들도 물고기들도 식물들도 친밀하게 다가가면 반갑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고 조금씩, 조금씩 흉내를 내고 배워서 되어진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물려주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귀한 영적인 유산들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선교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7.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제물 되는 삶”을 사시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기독교는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885년 조선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셀라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헨리 아펜셀라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교회와 조선의 교육과 조선의 의료 사역의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 없이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듭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조선땅에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2005년 12월 31일 강변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06년도 새해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는 2010년 1월 1일 새해의 소원과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온유와 겸손과 착함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권 선교도 모슬렘 선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의 삶과 사역이 어떤 것입니까?
❶ 선교는 “버리고”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❷ 선교는 찾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찾아 간 곳의 사람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❸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❹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❺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❻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❼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두 너무너무 부족한 죄인들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위에서 지적한 일곱 가지 선교의 모습을 몸과 마음과 영혼과 삶에 지니고 세계 곳곳을 찾아가면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과 화해와 선교의 역사가 세계 곳곳에 아름답게 나타나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화성 물댄 동산교회를 축복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교적인 삶을 살게 하시고 선교적인 사역을 하게 하시고 그리고 선교적인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선교적인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