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5
2월15일[연중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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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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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ZZ5w6v4Gjk
[서울대교구 최민석 베드로(문정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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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언젠가 각종 자재를 잔뜩 실은 대형 트럭이 저희 피정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울퉁불퉁, 꼬불꼬불한 시골길에, 심한 정체로 기사님과 도우미께서 엄청 고생한 분위기였습니다.
힘을 합쳐 짐을 내리고 나서 두 분 얼굴을 보니 빨리 내려오느라 끼니도 못 챙긴 분위기였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즉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3)
그래서 제가 정중히 두분에게 여쭈었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제가 초스피드로 라면을 끓여드릴 수 있는데,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두분은 반색을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거기다 김치와 밥과 과일과 차까지 내어드렸더니, 두분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철저하게도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철저하게도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아무리 좋은 설교 말씀도 안 먹힌다는 것, 뭘 하든 일단 잘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아이가 있으면 그가 어떤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우선 먹이고 봐야 합니다. 먹이고 나서 법을 따지든 원칙을 따지든, 야단을 치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이 크게 아프면 만사 제쳐놓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아무리 원칙을 중시하는 단체라 할지라도 사람이 아프면 열 일 제쳐놓고 일단 치료를 받게 하고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 각자 모두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셨습니다. 만물 위에 인간이란 존재를 두고, 그의 성장과 구원, 복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었습니다. 굶주리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일, 아파하는 한 인간을 치료하는 일, 마귀 들려 죽을 고생을 다하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죽음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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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 군중이 가엾구나.">
교구 평신도 복음화 봉사자들과 1박 2일로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 어르신 봉사자께서 1970년대 TV에서 방영되었던 사연이라며 말씀해 주신 한 사연이 마음에 와 닿아 이렇게 옮겨봅니다.
6·25전쟁 때 서울에 살던 한 부인이 피난 가다가 가족과 헤어지고 혼자 부산에 도착해 국제시장에서 가게를 세내어 식당을 시작했습니다.
음식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한번 온 손님들이 계속 찾아와 식당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지가 되어 동냥으로 연명했는데, 그 식당에도 거지들이 찾아와 종업원들과 자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밥 좀 주세요.”
“너희 주려고 밥장사 하는 줄 알아?”
주인 아주머니는 거지들을 볼 때마다 헤어진 아들 생각이 나, 모두에게 밥을 주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적자가 나니 고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주머니가 식당에 큰 통을 갖다 놓고 종업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손님이 음식을 남기면 버리지 말고 전부 이 통에 깨끗하게 모아라.”
그날도 점심때쯤 되어 거지들이 몰려오자, 주인 아주머니는 “저녁 9시쯤에 와라. 그러면 밥을 줄게.” 하였습니다. “정말요? 꼭 줘야 해요!”
9시가 되자 손님들이 끊어진 조용한 식당에 거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밥 준다고 했지요?” 거지들이 스무 명 남짓 식탁에 둘러앉자 주인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내게도 헤어진 너희만한 아들이 있다. 너희를 보면 그 아들 생각이 나 밥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이 식당은 망할 거다. 그래서 오늘부터 손님들이 남긴 밥을 깨끗이 모았으니 이것으로 죽을 끓여주마.”
아주머니는 모은 밥과 반찬으로 죽을 한 솥 끓였습니다. 거지들이 그 죽을 한 그릇씩 받아들고는, 늘 멸시와 천대를 받다가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줌마, 고맙습니다!” 거지들은 매일 밤 그 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스무 명에서 서른 명, 마흔 명… 하고 거지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다 죽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지 왕초는 이러다가는 저 식당이 망할 것 같으니 이런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몰려가다가는 저 식당이 망하겠다.
이제부터 조를 짜서 요일별로 나누어 밥을 먹으러 가자.”
거지들도 그 아주머니를 위해 배려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식당 벽에는 “손님 여러분, 음식을 깨끗하게 남겨 주십시오.” 하는 글귀가 붙었고, 그 식당에서는 손님이 남긴 음식을 거지들에게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늘 깨끗한 음식이 나오니까 손님도 믿고 먹을 수 있어서 손님이 더 늘어났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거지들이 다치면 약을 발라주고, 거지들도 식당의 부서진 의자나 문짝을 고쳐주고 청소도 해주었습니다.
어떤 거지는 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운 엄마의 정을 그 아주머니한테서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식당은 점점 사랑의 식당이 되어 갔습니다.
그 해 겨울,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습니다. 바닷바람이 강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시장 전체가 불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가장 피해가 작은 한 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식당이었습니다. 이유는 불이 나자 거지들 200여 명이 순식간에 그 아주머니 식당으로 몰려들었고, 그 중 일부는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막고, 물을 퍼붓고, 또 일부는 물건들을 밖으로 꺼내고, 일부는 그것을 지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합판 조각과 박스 조각들을 모아 와 아주머니가 추위를 피할 집을 임시로 만들고 “어머니, 걱정 말고 여기서 주무세요.” 하였습니다.
거지들은 아주머니와 마음에서 하나로 엮여 있었던 것입니다. 참다운 소통은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것은 사람을 살리지만 육적인 것에 심으면 죽음이 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은 생명을 주지만 육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육을 이기기 위해 40일간 단식하고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도 이겨내십니다. 육체의 욕망은 우리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 중 하나로써 죄를 짓게 하는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의무는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을 나누어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나게 만들면 그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영적으로는 이미 충분한 양식을 주셨지만 육적으로는 배고파하는 이들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예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배부르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배불리 먹일 음식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책임 중 하나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적으로 배고픈 이들도 배불려야 하는 것입니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있었던 한 식당 아주머니와 거지들과의 그 ‘소통’, 즉 아주머니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또 거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아주머니를 도왔습니다. 삼위일체께서 성령으로 소통하듯이, 소통은 각자의 희생을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교도 하나의 소통인데 말로만 성당 나오라고 한다면 배고픈 이들은 오히려 그런 말에 짜증을 낼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도 동시에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 사제로써 이태석 신부님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했던 톤즈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적인 도움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성당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이라면 배고픈 사람들은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 안에서마저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배고픈 이들을 보며 마음 아파 했던 예수님을 따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물적으로 내가 누군가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서 말로만 성당 나오라고 권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소통의 방법이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 주위 배고픈 이들을 보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 말 없이 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교회가 된다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남는 빵이 넘쳐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로 성당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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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은 착오가 있었습니다. 본당 새 신자 분과 모임에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분과장과 5시 40분에 성당에서 만나서 모임 장소로 가기로 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 시간 되는지 물어보니 시간 된다고 해서 직접 모임 장소로 6시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당일 아침 미사에서 분과장은 부주임 신부님에게 ‘신부님도 오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예 저도 갑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분과장님은 그때 부주임 신부님이 저랑 같이 온다고 말한 줄 알았다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은 전날 제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약속 장소로 간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기다리다가 분과장에게 전화했더니 3분 후에 도착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성당으로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분과장님은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행히 약속 장소가 성당에서 멀지 않아서 부주임 신부님이 와서 함께 갔습니다. 말은 정말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같습니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본인의 생각대로 들으면 웃지 못할 일이 생기곤 합니다. 1992년이니 33년 전의 일입니다. 동창 신부님들과 진부령에 있는 스키장으로 휴가를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 한 명은 일이 있어서 따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진부령으로 와야 하는데 오대산이 있는 ‘진부’로 갔습니다. 오대산의 진부는 설악산의 진부령과는 거리가 제법 있었습니다. 늦은 밤 신부님은 택시 타고 진부령의 숙소로 왔습니다. 2004년이니 21년 전의 일입니다. 사목국 신부님들이 양평의 한화 콘도에서 모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신부님 한 명이 일이 있어서 따로 온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양평 한화 콘도에서 회의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신부님이 전화했습니다. 방 호수가 몇 번인지 물었습니다. 우리는 705호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705호는 없다며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용인 한화 콘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양평 한화 콘도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용인에서 양평까지 다시 와야 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단순히 아담의 물리적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태,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관해 묻는 말입니다. 오늘, 이 질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은 상황에서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순히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셨습니다. 이 질문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하느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길을 잃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졌다고 느낄 때, 하느님은 우리를 찾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우리를 향한 부르심을 상징합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구약에서 시작되어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구약의 아담이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렸다면,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서 이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단절된 모든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을 대신 짊어진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질문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과 친교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 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죄와 무관심 속에서 하느님과 멀어져 있는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찾고 사랑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단지 창세기의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 질문을 계속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평화와 기쁨의 시작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여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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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지 않는 분의 이 물음은 그가 당신 앞에 스스로 나서도록 기회를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그를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죄입니다. 원조들의 이야기는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연결해 있는 죄의 실제를 잘 보여 줍니다.
불순종이라는 태초의 죄에 연루된 세 공범은 서로에게 탓을 돌리기 바쁩니다. 사람은 여자를, 여자는 뱀을 탓하면서요. 더구나 사람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3,12)라는 말로 하느님까지 탓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남이 자신에게 한 잘못만 말하지 자신이 한 잘못된 행동은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사람과 여자의 근원적인 ‘탓’은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 대신 아내의 말을 듣고 여자는 남편의 말 대신 뱀의 말을 듣습니다. 무엇보다 그 열매가 먹음직스럽다고 보는 자신의 감각을 따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아 버린 인간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고 에덴동산 밖에서 살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래서 원조들의 이야기는 원죄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자비로 끝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죄는 인간의 삼중 관계를 깨뜨립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인간과의 관계,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죄와 악의 고리를 선의 고리로 끊어 버리고 더 튼튼한 사랑의 고리로 인류를 연결하면서 이 삼중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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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10: 사천 명을 먹이시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2-3절). 광야에서 허기지셨던 주님께서 지금은 생명의 빵으로 인간을 먹이신다. 군중들은 사흘째 주님을 따라 다니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셔서 굶겨 보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의를 하고 계시며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는지 내어놓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일곱 개 있습니다.”(5절) 대답하면서 그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다. 빵 일곱 개는 그 많은 군중 앞에 아무것도 아닌 양이었다. 그러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빵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했다면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제자들의 나눔과 주님의 축복이 그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주님의 축복도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나누지 못할 때 절대로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왕곡성당에서 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처음에 “전능자 주님, 판토크라토르”라는 이콘을 제작하고, 성전봉헌식을 하면서, 주위 본당들로부터 또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빵 일곱 개를 봉헌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전을 봉헌할 수 있었다. 라자로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원회원들의 일곱 개의 빵이 라자로 마을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그대 있으매” 음악회의 빵 일곱 개가 해외의 한센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라자로 마을의 가족들까지도 이 일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려고 내어놓을 수 있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협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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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 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마르 8,1-10)
1) 군중이 예수님 곁에 머무르고 있었던 사흘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과 군중이 모두 계속 굶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흘 동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저들을 돌려보내면, 저들은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이고,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저들을 먹인 다음에 보내야겠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따로 언급되어 있는 ‘먼 데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 이야기 속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뜻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먼 데서 온 사람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군중은 모두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는 상황.>
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길에서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시는데, 바로 그 걱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당신은 왜 걱정하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 설교의 “걱정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을,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산상 설교의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의 끝부분에 바로 그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걱정하지 마라.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은 ‘주님의 힘’으로 하면 된다. ‘주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 맡겨 드려라.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라. 너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또 예수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예수님께서 먼저 아시고, 사람들이 걱정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걱정하시고,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것을 준비해서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가엾다는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분명히 ‘걱정’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걱정만’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빵의 기적’을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6,6)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3)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제자들의 말은, 표현으로는 “이 광야에서 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인데,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을 기억하고서 한 말이라면, 이 말은 “주님의 기적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4)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기적의 빵’은,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집’을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부자로 만들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그 나라에 잘 도착하기 위한 ‘힘’ 말고는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사실 세속의 권력이나 부유함이나 명예 같은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것들입니다. 만일에 세속의 권력이나 부나 명예 등을 얻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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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다>
마르코 8,1-10 (사천 명을 먹이시다)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 8,8)
사람들이 믿음으로 먹다
사람들이 희망으로 먹다
사람들이 사랑으로 먹다
사람들이 기뻐하며 먹다
사람들이 감사하며 먹다
사람들이 정성스레 먹다
사람들이 오순도순 먹다
사람들이 사이좋게 먹다
사람들이 모두함께 먹다
사람들이 어울려서 먹다
사람들이 서로나눠 먹다
사람들이 정의롭게 먹다
사람들이 평등하게 먹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먹다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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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차별 없이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머리로 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도 축복하신 다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육체적 허기를 채우는 빵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채우는 생명의 빵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 감사기도 드리고,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먼 데서 온 사람들의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구분과 차별이 없이 풍요롭게 하시고 넉넉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귀찮아하지 않습니다.
유다인,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충만하게 해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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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빵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 일은 오늘 복음에 앞서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일입니다.(마르 6,30-44 참조) 그때는 사천 명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습니다. 또한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오늘 복음보다 더 큰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이미 체험하였으면서도, 그때와 거의 유사한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행동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사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이러한 의문은 제자들의 물음으로 풀립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마르 6,37)라고 반문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 반응은 첫 번째 기적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질문에서 비용을 중요시하였다면, 두 번째 질문은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거저 주어지는 잔치며, 오늘 복음의 기적은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신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두 기적 이야기를 함께 읽는다면, 빵의 기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잔치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시고 쪼개어 나누어 주십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미사 안에서 보고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미사가 바로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의 잔치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초대의 자리입니다. 돈을 낼 필요 없고, 누가 준비할 것인지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단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야만 유효한 잔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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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하느님께 벌 받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벌이 무서워 남자는 여자에게 탓을 돌립니다. 여자도 뱀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다릅니다. 여자는 뱀에게 속은 사실을 말합니다. 뱀의 기만과 교활함을 인식하였다는 뜻입니다.
뱀으로 형상화된 욕망과 싸우는 것은 힘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여인의 후손)이 하느님의 말씀에 힘입어 욕망을 이겨 내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이야기의 배경에는 고대 근동의 독사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미움이 깔려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과 악의 만남이 마치 사막에서 유목민과 독사의 만남처럼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가 살고 죽는 싸움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의 최종 승리자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여인의 후손이신 그분께서 악마의 유혹을 이기시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지배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된다고 말합니다.(야고 1,14-15 참조) 제1독서의 말씀에 따르면, 욕망(뱀-욕망의 총체)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저주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동물들과 싸우며 땅의 풀을 뜯어먹고 이마에 땀을 흘려 먹을 것을 얻게 된다는 창세기의 예고는 오늘의 현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땅은 미래를 약속받지 못한 채 점점 더 황폐해져 갑니다.
죄의 결과인 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시는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부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자기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탓에 겪어야 하는 결과를 하느님께서 알려 주시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인간의 범죄 이후 우리는 친구로서 다가오셨지만 심판관이 되어 버리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어도 불의한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거짓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자 애쓰시는 의로우신 심판관이십니다. 그보다 더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주님이시고 인자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고 증언합니다.(로마 5,20 참조) 언제나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마태 9,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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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사가 끝나면 성당 뒤편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유아방에 있던 아이들이 다가올 때를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제가 들고 있는 사탕만 바라보며 다가옵니다. 그리고 사탕을 받은 뒤의 모습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큰 만족감을 보이는 것이지요.
만족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막대 사탕이라면, 이 막대 사탕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서는 만족에 끝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만족감을 계속 유지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성인 성녀는 만족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자기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행복=소유/욕망’이라는 유명한 행복의 도식이 있습니다. 소유를 계속 늘리면 행복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욕망이 커지면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인 성녀의 공통점은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계속 줄여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하는 것이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복음삼덕인 ‘청빈, 정결, 순명’을 철저하게 지켰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세 가지 덕행이라는 향주삼덕인 ‘믿음, 소망, 사랑’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것입니다.
암에 걸려 이를 극복한 사람과 암을 전혀 앓지 않은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 지수가 높을까요? 암에 걸렸지만 이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암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기 욕망을 줄여나가야 합니다. 소유를 무한대로 늘리는 행복보다 훨씬 쉬운 길입니다. 쉽게 만족하고, 쉽게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 많은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에게 금은보화가 생겨서 따랐던 것일까요? 세상 것에 대한 욕망을 줄여나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흘 동안 굶으면서도 말이지요. 이들을 가엾이 여겨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가량의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가 산해진미로 바뀐 것도 아닙니다. 그냥 빵과 물고기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상관없이 욕망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먹던 빵과 물고기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고 감사했습니다.
자기 행복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절대로 행복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욕망을 줄여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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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코 8,5)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빵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면 한 개의 빵으로 족하지만 허기진 욕망을 채우려면 수 천 개도 모자랍니다. 몸을 위한 빵으로 공허한 우리의 욕망마저 채울 수는 없습니다.
많은 빵을 가지고 있지만 몇 개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빵으로 욕망을 채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빵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채우려는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수 천 개의 빵을 가지고 있지만 늘 공허한 우리는 더 많은 빵을 가지려고 삶을 바칩니다. 사는 동안 먹고도 남을 빵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 우리는 모자란다고 느낍니다. 마치 빵으로만 살고 빵에 모든 것을 거는 것처럼 삽니다.
한 개의 빵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마저 빵으로 채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수 천 개의 빵을 가져도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영적으로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공허한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는 양식은 빵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허기진 배는 빵으로 채우지만 허기진 영혼은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배를 채우고 남는 빵으로 우리 영혼의 방마저 채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영혼의 방은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공간 입니다. 영혼의 방에 쌓아 둔 빵은 나누고 비워야 말씀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일곱 개의 빵을 가진 제자들이 한 개만 가지고 여섯 개는 비웠습니다. 빵 한 개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여섯 개는 말씀으로 영혼을 채웠습니다.
이 세상에 굶주리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 것은 우리가 비워야 할 영혼의 방에 빵을 쌓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방에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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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 8,1-10)
이 세상에서 누리는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분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전에는 작은 시련에도, 사소한 난관에도 허무하게 사그러들 수 있는 약하디 약한 불꽃이지요. 그렇기에 그 약한 불꽃이 믿음으로 강화되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될 때까지,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우리 삶의 뿌리가 주님이라는 생명의 샘에 닿아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때까지 절대 방심하지 말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그 뜻을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믿음이 굳건해지면 어떤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은총에 따르는 결과에,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숫자에 얽매이고 연연하다보면, 그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니 “너희에게 빵이 몇개나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일곱 개 밖에 없다’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으로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사랑의 기적에 협력하기를 주저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닮아서는 안됩니다.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서 고생한 이들의 끼니까지 챙기시는 예수님의 공감과 측은지심을 닮아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하느님이시라면 그들을 위해 청하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실 거라는 믿음을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심지어 원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빵을 가지지 못한 게 아니라 자기들이 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적을 일으키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은 무지이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의 참된 가치를 모른 채 ‘그걸로는 소용 없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충만하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제자들과 똑같은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제대로 알아보게 해주는 마음가짐이 ‘감사’입니다. 비교의 눈으로 보면 나에게 없거나 부족한 것들이 먼저 보이짐만, 감사의 눈으로 보면 내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보이는 것이지요.
나눔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구원의 나침반입니다. 나눔은 더 가지기만을 바라는 우리의 반쪽짜리 행복에 부족한 반쪽을 채워주는 하느님의 은총이자 섭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사심으로써 참된 사랑을 완성하시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나눔과 사랑을 실천해야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뜻을 따르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는 것을 가장 마음아파 하십니다. 그러니 변명거리를 찾기 전에 나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는지를, 나에게 그 빵을 나눌 마음이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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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생활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은 각 단체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입니다. 저의 경우 주일학교를 담당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가장 커다란 힘을 받게 됩니다. 함께 회의를 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교안을 짜고 행사를 계획하며 한명 한명의 힘을 합치게 되는데, 교사들에게 배울 것도 많고 어떻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어야 할지, 이들에게 어떻게 힘을 실어주어야 할지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봉사하시는 다른 많은 분들도 모두 그러하겠지만 교사들에게 있어서 역시 이 봉사는 사실 물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젊고 아름다운 청년들이 아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자신의 바쁜 시간을 쪼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ㅠ휴일에 나와 힘을 모으고 밤 늦게 까지 행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수많은 희생과 고생이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혹자는 사제가 알아서 지시하고 알려주면 될 것을 꼭 그렇게 긴 회의가 필요하냐 물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일깨워주는 일은 하느님의 일인데 인간이 그렇게 애쓸 필요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는 점은 하느님은 인간이 하는 일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제와 교사가 최선을 다해 힘을 합쳐 노력할 때 그 열매는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몇 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가 맺히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은총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는다면 그 열매는 결코 맺히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협조를 구하시며 이를 통해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어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기적은 이전에 병자들을 고쳐주시던 모습과 다소 다르게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홀로 병자를 고쳐주시는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제자들의 협조를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흘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천명의 군중을 가여워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빵과 몇 마리의 물고기를 축복하신 뒤, 그것을 나누어줄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빵은 제자들의 손을 통하여 한 명 한 명에게 전달됩니다. 이 기적은 다른 여타의 기적이 가지고 있지 않은 몇 가지의 특징을 지닙니다.
첫 번째는, 먼저 당신에게 찾아온 이들을 예수님께서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군중들의 빵과 물고기를 구하시는 것이 아닌 제자들이 직접 가지고 있는 빵과 물고기만 내어 놓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기적은 제자들의 손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이 특징들을 종합해 보면 주님의 기적은, 당신을 찾는 이들을 가여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놓는 제자들의 희생, 그리고 직접 기적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졌을 때 마침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현실 앞에서 무언가를 내어놓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작은 도움이 얼마나 보탬이 될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들이 부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텐데 생각하며 조금은 아까운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소하게나마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께 봉헌 할 때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이웃에게 더욱 더 커다란 기적을 행하십니다.
또한 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일에 참여하도록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당신의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초라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입니다. 오늘의 영성체 송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결코 당신 혼자 이루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 우리의 믿음과 희생 안에서 함께 이루어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 가량이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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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엽구나.~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코 복음 8장 2절-3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르코 복음 7장 5절)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빵”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무지요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빵”이 있습니다.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빵”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빵”을 먹었습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말씀을 듣는 것을 일컬어 “파스카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이라 하였고, 오리게네스는 “성경 독서 중에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키엘 예언서 3장 3절) 그런데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나누는 일, 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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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르 8,2)
주님!
속 깊은 곳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도 다 들으소서.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가슴 속에, 가엾이 보는 눈과 마음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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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삶>
-새 에덴동산이자 생명나무인 예수님-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 90,1)
화답송 후렴이 큰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오늘도 옛 현자의 말씀에 호감이 갑니다. 파스카의 겸손한 삶에 어울리는 모습이자 말씀입니다. 겸손과 예의와 더불어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겠습니다.
“꽃향기를 맡기 위해서는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한다.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다산>
“육포 한 묶음 이상을 예물로 갖춘 자를 나는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논어>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장면과 마르코 복음의 장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에덴동산 낙원은 실낙원이 되었고, 사천명을 먹이신 복음의 기적은 낙원의 회복인 복낙원이 된듯합니다. 실낙원과 복낙원, 아담과 예수님의 대조가 극명합니다. 흡사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인 파스카의 신비를 연상케 합니다.
선악과 나무 열매야 말로 넘어선 안될 마지막 한계였습니다. 흡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상자처럼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는 순간 시작된 재앙이자 불행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했습니다. 이제 한계를 넘음으로 시작된 지옥의 현실은 오늘날 역시 무수히 목격됩니다.
“너 어디 있느냐?”
바로 이 질문이 분기점입니다. 이 질문은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에 대한 물음은 바로 우리 모두에 대한 물음이겠습니다. 바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고 있는가 묻습니다. 정말 깨어 제자리에서 제대로 준비된 삶을 살았다면, “예, 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고 즉시 뛰쳐 나갔을 것입니다. 아담이 용기가 있는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부르심에 회개로 응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알몸이 두려워 숨었고, 주 하느님의 추궁에 대한 답이 적반하장, 비겁하게도 오히려 자기의 잘못이 여자를 아내로 주신 하느님께 있다는 듯이 하느님께 책임을 전가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하느님이 책임이 있고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철면피, 후안무치의 답변에 하느님의 실망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아담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한순간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어지는 하느님의 추궁에 여자의 변명입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사람과 여자 둘다 책임적 존재가 되는데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구차하고 비겁한 핑계나 변명이 아니라 용기있는 솔직한 회개였습니다. 핑계와 변명, 바로 사람이나 여자뿐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실입니다. 다윗의 즉각적인 회개의 응답,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도 생각나고, “I was wrong!(내가 잘못했다!)”의 명수였다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죄에 대한 결과 선고의 벌은 역순으로 뱀에, 다음에는 여자에, 마지막 사람에게 내려집니다. 마지막 하느님 처사에 대한 묘사가 참 엄중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불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였다.’
이런 비상조치를 취한 하느님이지만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을 것이며 정말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할 당신의 효성스런 아드님 예수께서 나타나실 날만 학수고대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담이 우리의 절망이라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회복된 복낙원, 새 에덴동산입니다. 바로 그 생생한 증거가 오늘 복음의 4천명을 먹이신 일화에 오늘 지금 거룩한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전례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린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반영합니다. 광야의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일곱 개의 빵을 받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 하십니다. 이어 물고기 몇 마리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 하시니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일곱 바구니, 먹은 사람은 사천명 가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 믿음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감동하신 하느님의 응답이자 군중들의 응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에 감동한 군중들이 감춰뒀던 빵을 모두 나누어 먹으니 참 풍요한 기적입니다. 무지한 군중의 인기와 호기심, 열광을 피해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타고 미련없이 떠나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공성이불거, 공을 이루면 거기에 머물지 말라는 노자의 지혜가 생각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 예수님이야말로 새 에덴동산 복낙원이자 생명나무가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전례를 통해 앞당겨 실현되는 새 에덴동산에서 예수님의 생명나무 열매인 성체를 모심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내 삶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날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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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주신 벌, 하느님께서 주신 고통>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오늘 창세기는 고통의 기원과 이유에 관해서 얘기해주는데 죄의 벌로서 고통이 주어짐을,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셨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점입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고통이란 자기 업보(業報)라는 말입니다.
선업을 쌓았으면 고통이 없을 텐데 악업을 쌓았기에 고통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틀린 말이 아니고 창세기를 믿는 그리스도교 또한 죄지었기에 고통을 받는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셨다고도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고통이 업보라면 그리스도교의 고통은 벌인데 여러분은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습니까?
제 생각에 내 죗값이라고만 받아들인다면 불교의 업보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상관없이 내 죗값이라고만 받아들인다면 불교의 업보와 별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죄의 벌을 받았는지 그 모범을 본받아 벌을 받더라도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생애 말년에 다윗은 인구조사와 병력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일생 군마가 아니라 주님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으면서도 자기 백성과 군마의 조사를 통해 자기가 이룬 태평성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쨌거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벌을 받기로 마음먹었을 때 주님께서 세 가지 벌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하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그래서 흑사병이 창궐하는 벌이 내려졌을 때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윗을 본받아 하느님께서 벌하시게 해야지 자기가 자기 죄를 벌하거나, 인간이 자기 죄를 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인 우리의 죄는 하느님 뜻과 계명을 어긴 죄이고, 고통도 하느님께서 벌로서 주신 고통이라고 믿기에 우리는 죄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고통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며 그렇기에 죄도 벌도 고통도 성사적인 죄와 벌과 고통이 됩니다.
이것이 죄를 짓고 벌을 피하여 숨음으로써 하느님과 단절된 아담과 하와와 다른 점이고, 다윗처럼 죄를 지어도 하느님을 만나고, 벌을 받아도 하느님 사랑을 만나며, 고통 중에서 더더욱 하느님을 찾는 신앙인다운 것임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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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8,8ㄱ)
<또 하나의 빵의 기적인 성체의 기적!>
오늘 복음(마르8,1-10)은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림에 지친 많은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마르 8,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갖고 있었던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와 축복을 드리신 다음 굶주린 군중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자 사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나 남는 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거창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묵상을 먼저 해 봅니다. 나의 작은 나눔에서 시작되고, 그 작은 나눔들이 모여서 큰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는 분입니다. 작은 나눔을 하도록 이끄시는 분, 당신처럼 너에게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체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 열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최후의 만찬의 재현입니다.
우리는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성체를 받아모시고, 이 성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성체(聖體)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는 영적 양식입니다. 축성된 작은 밀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믿음 안에서 성체를 받아모시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고, 나를 당신의 마음을 닮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죄를 짓게 되고, 하느님이 두려워 숨게됩니다.
"너 어디 있느냐?"
굳건한 믿음과 정성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모시고,
'또 하나의 빵의 기적인 성체의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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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 8, 8)
광야에서도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삶입니다.
모든 자리가
식사의
자리입니다.
하느님께로
우리가
가게 되면
먹을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음식의
움직임이
곧 사랑의
움직임입니다.
식사를 자주
같이하는
관계가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식사를
같이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보살피시고
배불리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성사입니다.
사랑의
성체성사로
우리 삶에
들어오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먼저
정성된 사랑의
양식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우리들에게
바치십니다.
우리의 삶 또한
우리의 나눔으로
바치고
올려드리는
성체성사의
삶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감출 수 없는
오늘의
사랑으로
서로를
배부르게 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자아가
죽어야
빵이 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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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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