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69시간’ 열흘도 안돼 ‘발표→재검토→보완’
gapjil(갑질), mukbang(먹방)처럼 외신이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옮겨 쓰는 단어가 꽤 있다. 영어로 풀어 쓰면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서다. 로이터통신이 2020년 택배노동자 사망 사건을 전하면서 처음 쓴 kwarosa(과로사)도 마찬가지다. ‘death from overwork’라고 하면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오래 일해야 하는 한국의 근로문화를 담을 수 없다는 거다. 그제 호주 ABC방송이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보도하며 kwarosa를 또 언급했다.
▷고용노동부가 6일 발표한 근로시간 개편안은 현행 주 52시간 근무를 유연화해 일이 몰릴 때는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다. 1주일 단위의 근로시간 산정 기준을 월 단위 이상으로 확대해, 일이 많으면 몰아서 일하고 그만큼을 더 쉬게 한다는 것이다. 초과 근무시간을 적립해 한 달씩 장기휴가를 쓸 수 있고, 노사에 근로시간 선택권을 넓혀줬다고 정부는 홍보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있는 휴가도 못 쓰는데 장기휴가가 웬 말이냐” “사실상 주 69시간 근무가 굳어질 거다” “공짜 야근이 더 심해질 거다”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MZ세대 노조인 ‘새로고침’도 “역사적 발전에 역행한다. 장시간 노동과 과로 탈피를 위한 제도적 기반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어 시기상조”라며 반대를 공식화했다. 한국인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 1915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199시간이나 많다. 주 38시간제가 도입된 호주의 언론이 kwarosa를 꺼낼 만하다.
▷예상보다 거센 반발에 MZ세대를 노동개혁의 우군으로 삼았던 정부는 화들짝 놀란 모양이다. 그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재검토를 지시했다.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 특히 MZ세대 의견을 면밀히 청취해 법안 내용을 보완하라”고 하자, 고용부 장관이 하루 만에 새로고침 관계자들을 만났다. 정부는 결국 69시간 근무를 백지화하고 여론조사 등을 거쳐 주당 최장 근로시간을 다시 정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개편안은 불쑥 나온 게 아니다. 대선 때부터 대통령이 진두지휘해 온 노동개혁 1호 정책이며, 정부는 지난해 6월부터 주 69시간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동안 현장의 제도 보완 목소리가 많았는데, 지금까지 뭐하다가 이제야 의견을 청취하고 여론조사를 하겠다는 건지 의아할 뿐이다. 업종과 산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경직적으로 운영돼 온 주 52시간제에 노사 가릴 것 없이 불만이 컸다. 근로시간 유연화를 두고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노동개혁의 시계가 멈춰 설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들린다.
정임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