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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구리의 우리 고대사(고조선의 역사와 영토) : 사기등 중국 고대문헌의 지리적인 고찰
--> https://tnrnfle.tistory.com/39
■【후한서 동이열전와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 진서 동이열전】 부여에서
(위)구태의 부여는 비류백제이고, 비류백제 위치는 예맥=예=동예가 있었던 하북성 창주시다
-. 『후한서 동이열전과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에는
졸본부여 동명왕이 부여선조로 기록되어 있고, 공손도가 (일족의) 딸를 부여왕 (위)구태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 『주서 이역열전 백제』에는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백제)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 『북사 동이열전 백제』에는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의 옛땅에 백제를 건국했는데 공손도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 『정사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 동이열전』 부여에
부여국 가운데에 옛 예성이 있는데 예맥의 성이라 했다
-. 『한서 무제기』에서 예(동예=예맥)의 임금(예군, 濊君) 남여가 항복하여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사마천사기 평준서』에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소란해 졌다고 했으니
연제지간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이니, 예=동예=예맥의 위치는 하북성 중동부인 지금의 창주시 지역이다
-. 삼국사기 일설인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 【우태를 주몽의 다른 이름인 아명으로 본다】
주몽과 우태를 동일인으로 보는 이유는
주몽은 우발수에서 잉태하여(우태) 태어났으며 (동)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니
우태의 설명과 주몽의 설명이 같기 때문이다(비슷하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①후한서 동이열전과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부여가 주서 이역열전과 북사 동이열전의 백제, 비류백제다
② 비류백제 나라 가운데 예맥(=예=동예)의 성이 있으니 하북성 창주시에 있었던 예(예맥)에 비류백제가 있었다
(비류백제가 미추홀인 바닷가에 건국 했는데, 창주시도 바닷가)
■ 하북성 창주시 비류백제의 전라도 나주(호남지역) 이동과 일본열도 진출
1) 비류백제 의려왕은 백제 8대 고이왕
백제 제8대 고이왕의 성이 우태의 우씨이고, 사망년도가 AD 286년으로,
진서 동이열전 부여에 나오는 의려왕의 사망년도와 동일하기에 고이왕이 의려왕으로 추정된다
2) 비류백제는 하북성 창주시에서 전라도 나주(호남지역), 일본열도로 이동했다
비류백제는 하북성 창주시의 해양세력이었습니다
286년 서진의 도움으로 부여(비류백제)를 재건한 의라태자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하북성 창주시에서 서해를 건너, 살기 좋은 전라도 나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일본열도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진서 동이열전에 태자 의라가 부여를 재건했다고 했는데
재건 후에 의라태자의 부여는 중국 사서에서 사라졌으니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다)
3) 반란을 일으킨 내신좌평 우복(優福)은 비류백제 의려왕의 후손으로 서부여(녹산부여) 왕
삼국사기에 백제 11대 왕 비류왕 24년(327)에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북한성에서 반란했지만 비류왕이 토벌했다고 했다
북한산(한산 북쪽)은 백제북쪽이고, 요서 남동부이니,
자치통감에 "백제에게 쫓겨 요서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346년 전연(모용황)에 흡수되며 멸망한 서부여(녹산부여) 왕 여현(餘玄)이
내신좌평 우복(優福)으로 추정된다
4) 전라도천년사는 전라도역사와 영토를 일본에게 팔아 먹는 역사매국 대하 역사소설이다
호남지역의 4세기 중반이후 고고학적 물질문화 변화는
하북성 창주시 비류백제 의라왕의 전라도 나주(호남지역) 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라도 천년사』는
야마토왜의 일본열도 정복 과정인
【일본서기 주어를 백제로 바꾸어】 백제의 호남지역 진출 내용으로 기술하여
전라도 역사와 영토를 일본에게 팔아먹는 역사매국 대하 역사소설을 쓴 것이다
5) 자치통감에 나타나는 AD 346년의 부여(녹산부여=서부여)는 요서백제다
요서지역인 석가장시 부근에 녹산이 있었으니,
자치통감에 나오는 서부여로 알려진 (녹산)부여가 요서백제로 추정된다
근거는 (녹산)부여 왕은 여현餘玄이었는데 전연의 모용황에게 346년 망했다
327년 반란을 일으킨 백제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녹산)부여 왕인 여현(餘玄)으로 추정된다
※주) 녹산(백록산,白鹿山)은 온조왕이 건국한 하북위례성 부근(요서 지역) 으로 추정되는데..
1) 위서지형지 영주 건덕군(전한의 우북평군)의 석성현에 (백)녹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2) 삼국사기에 비류와 온조가 (보정시 지역의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패수 대수를 건넜다는 내용과
온조왕이 백제 동쪽에 낙랑군이 있고 북쪽에 말갈(오환) 있다고 했으니,
석가장시 남동부 방향, 요서군 남동부 방향인 우북평군 부근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
■ 삼한의 지리적인 위치 비정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 열국 지도(BC 1세기의 고구려 부여 마한 등 위치)"에서 확인하면 된다
--> https://blog.naver.com/tnrnfle/222488545290
1) 후한서와 정사삼국지에는 백제와 신라가 없고, 한과 예가 있으니
신라는 진한이고, 비류백제는 위구태의 부여, 온조백제는 한 또는 마한일 확률이 매우 높다
(AD 244년 관구검이 환도성을 파괴할때 역사서를 갖고 갔을 것이고,
이것을 기준으로 위만조선시대의 부여, 예=동예, 삼한의 지리와 풍습을 설명했을 것이다)
2) 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의 예濊조에 지금의 조선(今朝鮮)이 나오는데,
중국 삼국시대(오 촉 위 AD 220~280)에는 낙랑군이 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으니
지금의 조선(今朝鮮)에서 조선은 위만조선이고 지금은 위만조선 시대인 BC 194 ~ 108년으로 보이니,
위만조선 시대의 고조선 열국의 위치와 풍습을 설명한 것이다
3) 고조선인 북부여와 졸본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는 한나라와 전쟁이 했으니,
후한서와 정사삼국지에 고구려를 강제로 끼워 넣을 수 밖에 없었는 것으로 판단되며,
한나라가 신라나 백제와는 치열한 전쟁가 없었기에 백제는 마한이나 한,
신라는 진한으로 표현하여도 문제가 없었기에 바꾸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4) 부여에 대해
(1)해모수의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가 동명왕의 졸본부여, 동명왕의 졸본부여를 이어 받은 나라가 고구려다
(2) 동명왕을 피해 북부여 동쪽으로 이동한 나라가 해부루 - 금와왕 - 대소왕의 동부여,
(3) 동부여의 대소왕이 죽자 대소 동생이 갈사국으로 이동하여 갈사부여가 세웠다
5) 후한서에 AD 57에 등장하는 부여는
(1) 북부여나 졸본부여가 될 수 없고 (북부여 - 졸본부여 - 고구려로 이어졌으니..)
(2) 동부여는 AD 22년에 망해서 고구려 연나부가 되었으니 동부여도 후한서의 부여가 될 수 없다
(3) 북부여와 동부여 남쪽에 졸본부여/고구려가 있었고 고구려는 사방 2천리 영토 였으니
갈사부여 위치는 고구려 동북쪽 2천여리정도에 있었고
갈사부여는 AD 68년에 고구려에게 항복했으니 갈사부여도 후한서의 부여가 될 수 없다
6)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부여를 건국한 사람이
색리국(고리국) 출신의 동명왕으로 나오니, 후한서와 정사삼국지의 부여는 동명왕인 졸본부여의 후손일 수 밖에 없으니
졸본부여왕의 외손자(동명왕의 외 고손자)가 비류와 온조다
따라서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의 부여는 비류백제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7) AD 30년에 동옥저에 설치했던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었고, AD 37년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켰고,
AD 56년에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벌하니, 동옥저 부근의 갈사부여가 AD 68년에 고구려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AD 247년 동옥저 지역인 진황도시 지역에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고 수도를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주)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 조에 당고종의 아들 장회태자가 주석을 달았다는데,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당고종과 즉천무후의 아들인 장회태자가 주석하기를,
【그 산(개마대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고 했으니,
예(동예)인 창주시 북동쪽에 동옥저가 있으니 평양성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다
8) 졸본부여를 세운 색리국(고리국) 출신의 동명왕을 선비족으로 본다
관구검의 관(毌)이 모(母)의 오기로 의심되고, 전연/후연의 모용씨를 동명왕과 비류의 후손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비류백제가 망하자 비류백제 출신의 모용씨가 요서백제 왕이 되었고
모용씨 후손인 동성왕(모대)이 백제 왕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9) 전연과 후연, 북연을 요서백제로 보는 근거는
(1) 양직공도에 서진(265∼316) 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고 했는데...
전연(337∼370) 모용외가 서진 말 사람이고 평주자사 였고,
아들 모용황이 극성에 도읍하여 337년에 전연을 세웠다
(2) 그런데 진서지리지 평주에 보면 평주는 창려, 요동,현토, 낙랑, 대방 5군인데, 모용외가 평주자사가 되고,
손자인 모용준이 계성으로 전연의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전연의 도성 계(계성)은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이니 요서군 부근이고 평주도 요서군 부근이다
따라서 서진 말기에 요서를 차지한 것은 모용외니, 전연이 요서 백제일 수 있다
(3) 서진 말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내용은
미천왕 12년(AD 311)에 고구려가 서안평(요동군 치소인 양평 서쪽)을 차지한 기사가 있다
10) 위서(魏書)는 북제(550~577)의 위수가 편찬한 사서인데.. 『동이열전 백제』에
『북연이 국운이 다하여 남은 무리가 급하게 (고구려)로 도망간 이후로 고구려가 강성해졌다』는 내용이
AD 472년에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게 보낸 친서(表)에 기록되어 있다(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1) 따라서 북연의 풍씨가(북연 왕이 고운-풍발-풍홍)
백제로부터 고구려로 도망가서 고구려가 강성해졌다는 내용이니
북연은 백제의 담로국이었고, 북연의 전신인 전연과 후연도 백제의 담로국으로 봐야 한다
(2) 친서(表)에는 개로왕이 여례를 불사후에 임명하고, 장무를 대방태수에 직접 임명했다는 내용도 있다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 弗斯侯 長史 餘禮, 龍驤將軍 帶方太守 司馬 張茂.)
따라서 대방군도 백제의 담로국으로 보인다(불사국도 담로국)
(3) 북연이였던 풍씨일족의 군사들이 보금자리를 그리워하고, 낙랑의 여러 고을들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라고
개로왕이 표현했으니 보금자리나 고향은 백제로 볼 수 있다(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백제영토였던 북연과 낙랑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표현으로 보인다
11) 삼국사기의 비류백제인 바닷가 미추홀은 예맥=예=동예인 하북성 동부 창주시로 보인다
(1) 삼국지 위서동이전과 진서 동이열전의 부여에서
비류백제로 추정되는 의라왕 부여에는 나라 가운데 옛날 예의 성이 있는데,
본래 예맥의 성이다는 내용이 있다
(2) 『한서 무제기』에서 예(예맥)의 임금(예군, 濊君) 남여가 항복하여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사마천사기 평준서』에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지간(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소란해 졌다고 했으니
연제지간에 창해군을 설치한 것이니, 예=동예=예맥의 위치는 하북성 중동부인 지금의 창주시 지역이다
☞ 『삼국지 위서동이전 및 진서 동이열전의 부여 내용』
그 왕(부여 왕)의 인장에는 「예왕의 인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 가운데에 옛 예의 성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예맥의 성이다.(其王印文稱「穢王之印」. 國中有古穢城, 本穢貃之城也)
첫댓글 2) 반란을 일으킨 내신좌평 우복(優福)은 비류백제 의라왕
삼국사기에 백제 11대 왕 비류왕 24년(327)에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북한성에서 반란했지만 비류왕이 토벌했다고 했는데 한산 북쪽이 백제북쪽이고 우복(優福)이 우씨이니 비류백제 왕인 의라왕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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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 앞에 나옵니다. 비류왕이 사냥을 갔다 왔기 때문입니다. 역사학도라면 327년에 우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맞는지부터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증명은 문헌 사료와 고고학 사료의 양쪽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못하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우면 됩니다.
나머지도 다 비슷한데 중국사료에 어떤 기록이 나오면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 왜 맞고, 틀리면 왜 틀리는지부터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역사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증명을 못하면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비류왕이 325년에 사냥을 갔다 왔는 내용이, 2년 후인 327년에 우복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였다고요
주장하시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이고요
비유왕이 사냥을 했는데 2년후에 우복이 사냥을 이유로 반란 했다는 내용은 문헌에 근거하지 않은 그냥 주장(망상)일 뿐입니다
만약에 혹시라도 저런 내용과 주장으로 대학 역사 교수가 논문을 써서 통과되었다면 대학 역사 교수가 아니라 역사소설가로 봐야할 것 같은데요
(만약에 혹시라도 저런 논문을 통과 시켜준 지도교수가 있다면 해당 지도교수도 참 한심한 사람이 될 것 같고요-
만약에 혹시라도 저런 논문이 학술지에 실렸다면, 학술지가 아니라 네이버 소설 잡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존역사 학자들 대학역사 교수들의 논문은 참조해서는 않되고요 배울 것도 없다고 봅니다
1) 전라도 천년사 내용을 보면 대학역사 교수들 논문(내용)은 거의 소설에 가깝고요
국민들 속이고 기망하고 거의 막장입니다
2) 전라도 천년사에서 고고학박사들의 논문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연구성과는 존중하지만
문헌학자들의 내용이 고고학 자료에 포함되면서 아쉽게도 같이 막장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문헌학자들의 내용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고고학적인 내용 만을 기술했다면 좋은 출판물이 되었을 것인데
문헌학자들 내용이 고고학 내용에 포함되면서 도매급으로 같이 폐기되어야 마땅한 자료가 되어서 안탑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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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서 동이열전 기록을 마지막으로 비류백제인 부여의 내용이 중국 정사에서 사라집니다
1) 비류백제인 부여가 멸망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나 중국 정사에 나오지 않고요
2) 의라왕이 죽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의라왕을 기리는 의라신사가 있습니다
■ 4세기 중반부터 영산강 유역에 분구묘의 대형화, 대형 옹관 등장, 백제와 다른 금동관과 금동신발 출토등
비류백제 이동과 정착을 추론할 수 있는 고고학적 물질문화 변화가 영산강 지역에 나타납니다
■ 무령왕 시대인 AD 501년에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인 달솔 우영(優永)이 뜬금없이 삼국사기에 등장합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고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 내용을 연결해서 정리하면
1) 개로왕은 부여의 여씨
2) 문주왕과 동성왕은 모용의 모씨(삼근왕도 모씨로 추정)
3) 무령왕 이후부터는 부여인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로 추정
그래서 부여인 비류백제의 후손인 성왕이 백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주서부터는 백제 시조가 우태로 등장합니다:무령왕 부터 북주시대에도 비류백제의 우씨가 백제왕이 된 것이지요
최종 정리해 보겠습니다
비류왕의 공격으로 하북성 창주시에 있던 의라왕(우복)이
신천지인 영산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하고 일본열도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부여씨인 개로왕이 사망하자
2) 개로왕을 보좌하던 모용씨의 문주가 백제왕이 되었는데..
3) 모용씨의 동성왕을 암살하고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우태씨의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비류백제의 후손인 우태씨의 우씨가 백제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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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리 3) 모용씨의 동성왕을 암살하고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우태씨의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여 ...
->일본서기 웅략 5년조를 보면 곤지가 개로왕의 임신한 왕비를 데리고 왜국으로 가던 중 왕비가 각라도에서 아들(무령왕)을 낳자 아들은 백제로 돌려보내고 왕비만 왜국으로 데려갑니다.(전용신 포함 일부 일본서기 번역본이 오역을 하였음. 원문을 확인할 것) 그런데 이후 아들(무령왕)이 언제 왜국으로 갔습니까? 이후 무령왕이 왜국으로 갔다는 단 하나의 증거라도 있습니까? 만일 무령왕이 왜국으로 깄다면 그의 무덤은 전축분이 아닐 것입니다.
@수구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비류백제의 후손인 우태씨의 우씨가 백제를 다스리게...
-> 비류백제는 목지국 진왕의 백제로 왕성이 부여씨 아닙니까? 중국에서 발견된 부여융의 묘비명을 보면 부여씨의 출자를 적고 있는데 '백제辰朝人'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지국 진왕계 백제인이라는 뜻 아닙니까?
@수구리 비유왕이 사냥을 했는데 2년후에 우복이 사냥을 이유로 반란 했다는 내용은 문헌에 근거하지 않은 그냥 주장(망상)일 ...
-> 정성스럽게 적어주신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비류왕의 사냥이 내신좌평 우복의 반란 원인이 아니면 우복의 반란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백제본기의 최초 반란이 내신좌평 우복의 반란이라면 신라본기의 최초 반란은 아달라이사금 때 있었던 아찬 길선의 반란입니다. 길선의 반란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제가 보는 길선의 반란 원인은 우복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같은 원인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한서와 동이전 한조에도 두 각료의 반란 원인이 나옵니다.
백제본기는 사냥기록이 삼국 중 가장 많은데 백제본기 사냥기록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우복의 반란 원인은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제본기 초고-구수왕조는는 70년 동안 사냥이 없는 매우 특이한 시대인데 이때는 반란도 당연히 없습니다. 누가 만일 초고-구수왕조에 왕이 사냥 갔다고 슬쩍 적어 넣으면 이것이 거짓말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미래한류 .
질문 1의 답변) 일본서기 내용은 글자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개념. 즉 흐름만 믿습니다
무령왕이 일본열도에서 일본을 다스리던 왕인 곤지왕 세력의 지원을 받던 비류백제의 후손으로 백제왕이 되었다 정도
질문 2의 답변) 목지국.정확히 말하면 정사 삼국지에 월지국이니 후한서의 목지국은 월지국의 오기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마한이라는 나라는 BC 1~2세기 내용이니 후한서와 정사삼국지 마한 기사는 마한이 아니라 백제 기사입니다
(정사 삼국지의 금조선今朝鮮에서 금今은 BC 1~2세기, 조선朝鮮은 위만조선이니 마한은 위만조선 시대에 있었던 마한이니 후한이나 삼국시대의 백제입니다)
월지국이 BC 1~2세기 나라이고, 서기 9년에 온조왕에게 멸망했는데 비류백제가 목지국 진왕이리는 믿음 재고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고요
백제 辰朝人에서 辰은 천자 진자로 봐야 하고요 그래서 백제는 천자국이니 백제 辰朝人(천자 고조선 사람)은 백제왕의 후손이라는 의미.
질문 3) 반란의 원인이 삼국사기에 없으니. 추론하고 주장하시는 것은 자유이지만 추론이고 주장일뿐
반란의 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소설 쓸 생각 없음)
@미래한류 마지막으로
후한서와 동이전 한조에 두 각료(우복과 길선)의 반란 원인이 나옵니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 없습니다
후한서에 나오는 반란원인은 어디에 어떤 내용인가요?(정확한 출처와 내용 제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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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역사 교수들이
잘모르는 국민들을 속이고 기망하는 수법이 사료 내용제시 없이 말로 하는 것입니다
(문헌 왜곡과 변조는기본이고요.
설을 풀면서, 그럴듯하게 꾸미는 수법을 자랑으로 생각하지요 모르는 사람들에게 맞는 것으로 보이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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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길선이 AD 165년 반란을 일으키고 백제로 도망갔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후한서를 포함한 중국 사서에는 길선이나 우복은 나오지 않습니다
1) 후한서 한조에는 AD 44년 염사치 기사기 전부이고요(AD 165년 기사는 없습니다)
2) 우복의 반란은 AD 327년이니 서진시대(265∼316)도 아니고 동진시대 기사이니 후한서에 기록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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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만약 문헌 근거없는 주장을 하셨으면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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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한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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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역사교수들의 문헌왜곡/ 변조의 대표적인 사례(전라도천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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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직공도에 기문이 나오지 않는데 『남원지역은 양직공도에서 백제 주변의 소국인 기문국으로 알려져 있다』(전라도 천년사 총설 77페이지) 고
♥ 양직공도를 국민들이 잘 모른다고 거짓말 하는 대학역사 교수들이 사이비 역사학자들 입니다♥
2) 약직공도 그림에 ■상사문(上巳文)을 상기문(上己文)으로 주장하고 상(上)자를 없애고(지웠고)
상기문(上己文)이 문文의 한자를 문汶으로 치환하여 상기문(上己文)이 기문(己汶)으로 둔갑술을 발휘 할 수 있으니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대학역사교수들이 사巳자를 무조건 기己로 우길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렇게 문헌을 왜곡하고 설을 풀어서 약직공도 상사문(上巳文)을 일본서기 기문(己汶)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대학역사 교수들이니
대학 역사 교수들을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수구리 1) 월지국은 목지국(삼국지 빼고 모든 한중 사서가 목지국임)의 오기인데 그 이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목지국의 건국과정이 상세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동이전에 관해서 뭐라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록 한 줄 한 줄에 대하여 맞으면 왜 맞고, 틀리면 왜 틀리고, 그러면 맞는 것은 무엇인 지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후한서와 삼국지 한조에는 길선과 우복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이 나옵니다. 님이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이들의 반란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삼국사기에서 비류백제가 보이게 됩니다. 우리 고대사에 관해서 무슨 이야기라도 할 정도가 되리면 우리 기본 사서인 심국사기 초기기록을 놓고 기록 하나하나에 대해서 사건 연도가 맞으면 왜 맞는지, 틀리면 왜 틀리지를 설명하여 구분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한류 삼국지는 AD 280년 경에 편찬된 사서이고요 후한서는 AD 450년 경에 편찬된 사서입니다 따라서 후한서의 내용은 삼국지 내용을 참조했으니
삼국지 월지국을 후한서에서 목지국으로 필사 오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