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피키캐스트 "Curious_Park"님
브금: The Hunt for Red October by Basil Poledouris - Red Route I(붉은 10월 OST)
오늘은 <미국 역사 시리즈 – 19편> 포스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지난 편에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재편되는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경쟁을 다루었는데요.
이 경쟁은, 곧 ‘냉전(Cold War)'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국과 소련 양국 사이에 직접적인 무력 마찰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농후했습니다.
오늘은 그들의 총성 없는 전쟁..
냉전의 심장부로 들어가 볼게요.
Let’s Go!
푸쳐핸섭~ 세이 반공!!
: 마셜 플랜과 코민포름
지난 편에서 언급했듯이, 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은 동유럽을 공산화시켰고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외교 정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트루먼 독트린의 핵심 골자는 ‘공산주의 봉쇄 정책’이었어요. 즉, 미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공산화되는 세계를 어떻게든 막고자 했죠. 그래서 트루먼이 쓴 전략은..
트루먼 왈
: “Say~ 반공!! 이라고 외쳐 봐! 그럼 우리가 돈과 무기를 제공해 줄게”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에 4억 달러를 원조하면서, 본격적인 ‘원조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는, 막강한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여
소련 공산권 나라들의 확산을 막고,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죠.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유럽 16개국도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받게 됩니다.
‘마셜 플랜’이라고 불리는 이 서방 원조 정책으로 인해, 약 3년 동안 미국은 서유럽에 약 120억 달러를 투입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셜’은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의 성(姓)입니다. 그렇다면, 이 원조 정책의 명칭이 왜 ‘트루먼 플랜’이 아니라, ‘마셜 플랜’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미국 내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트루먼보다 훨씬 인기가 좋은 ‘조지 마셜’ 국무부 장관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범국민적 지지를 받아내자는 뜻에서 트루먼 대통령 대신 마셜이 발표해서 ‘마셜 플랜’이라고 명명되었죠. 실제로, 조지 마셜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스탈린에게 미국의 ‘마셜 플랜’은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이 덕분에, 그리스와 터키뿐만 아니라 서유럽에 소련의 영향력이 차단되었기 때문이죠.
마셜 플랜을 지켜보고 개빡친 스탈린..
안되겠다 싶었는지, 스탈린은 공산화된 동유럽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스탈린 왈
: “여러분! 우리도 뭉쳐야 돼. 우리 소련도 지원해 줄 테니까 좀만 기다려”
그래서 소련은 마셜플랜에 대항하여 재빨리 ‘코민포름’을 창설하죠. 이 모임엔 소련, 폴란드, 유고슬로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프랑스 공산당 등 9개국 공산당 대표가 참가합니다.
소련 대표 ‘안드레이 주다노프’ 왈
: “이미 세계는 통합되긴 글렀어.. 미국 얘네들 착한 척하지만 결국 돈 많이 벌고 제국주의를 퍼트리려는 음모야!”
코민포름에서 공산권 국가들은 미국에 대항하여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를 이끌자는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한편 스탈린이 미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이 시기에, 트루먼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핵무기 통제’에 관련하여 소련과 합의를 보려고 합니다.
트루먼 왈
: “스탈린! 우리 사이가 좋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핵무기는 너무 위험하니, 조금 통제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스탈린 왈
: “무슨 소리야? 니들 얼마 전에 일본한테 한 방 먹였잖아. 개소리 작작하고 우리도 개발할 꺼임!!”
안 그래도 미국을 극혐하는 스틸린이 트루먼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죠. 결국, 둘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양국은 냉전이 시작된 초기부터 핵무기 개발에 더욱 올인하게 되죠. (작은 불 끄려다가 휘발유 부은 꼴)
미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50년에는 히로시파 원폭보다 훨씬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열을 올리죠.
이제 미국과 소련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바야흐로 ‘진정한 냉전 시대’가 개막한 것입니다.
세계사의 웃지 못할 해프닝
: 베를린 봉쇄와 독일의 분단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된 이래,
양국이 처음으로 총성 없는 교전을 시작한 것은 ‘독일 재건 문제’이었습니다.
트루먼은 유럽의 미래를 위해서는 독일의 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방이 점령하고 있는 독일의 세 영토를 합쳐 하나의 ‘경제 단위’로 묶고자 했죠.
스탈린 왈
: “예전에 내가 분명 독일 재건은 안 된다고 했을텐데? 누구 맘대로 합치려는 거야!!”
스탈린은 서방의 이러한 계획에 크게 분노를 느꼈죠. 그래서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하기에 이릅니다. 베를린을 봉쇄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독일의 지도에 주목해야 하죠.
당시 독일 전체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지도입니다. 독일의 서쪽 영토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사이좋게 분할하여 점령하고 있었고, 베를린을 포함하고 있는 동쪽 영토는 소련의 점령지였죠.
그런데 문제는 ‘베를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독의 주인은 소련이었지만 정작 동독 안의 도시인 베를린은 서방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고 있었죠.
스탈린은 서방의 점령지인 서베를린의 철도와 수도, 도로를 전면적으로 봉쇄하면서, 서베를린을 고립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서베를린은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입니다. 서베를린에 보급이 끊기게 되자, 주민들은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죠.
그러자 서베를린 주민들을 살리기 위한,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작전이 실행되죠. 그것은 공중에서 서베를린에 식량과 생필품을 보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11개월 동안, 200만 명의 서베를린 주민을 살리기 위하여 미국은 2억 2400만 달러를 퍼부으며 비행기로 물자를 실어 나르죠.
스탈린은 이를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스탈린 왈
: “스고이.. 미국이 돈이 겁나게 많긴 많나보다.. 수송기를 폭파시킬 수도 없고 참..”
결국 1949년 봄, 스탈린은 더 이상 효력을 상실한 베를린 봉쇄를 풀게 되죠. 이러한 상황은 독일 입장에선 좋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해 10월에 독일은 서방의 ‘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과 소련의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이 둘로 분단됩니다.
어쩌면, 독일의 분단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 이미 예견된 시나리오였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유럽 대륙은 독일의 서독과 동독을 경계로 하여 둘로 분할되었습니다(철의 장막) 그리고 둘로 갈린 영토의 지배자는 각각 미국과 소련이었죠.
미국을 포함한 서방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했고,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즉시 도와주기로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NATO의 창설에 자극을 받은 공산권 나라들도 이에 질세라 '바르샤바 조약'을 맺으면서 굳건하게 동맹하게 됩니다.
트루먼과 후버의 은밀한 거래
: CIA의 창설과 레드 콤플렉스
한편, 냉전시대의 개막에 발맞추어 트루먼은 CIA(중앙정보국)를 창설하는데 서명합니다. CIA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창설된 미국전략정보국(OSS)의 후신이죠.
그러나 이 시기, 미국에는 CIA 창설을 반대하는 거물급 인사가 있었어요. 바로 ‘FBI(연방수사국)’의 국장 ‘존 애드거 후버’였습니다.
후버는 CIA를 FBI의 산하 기관으로 두고 싶어했지만, 트루먼은 반대했습니다. 이에 빡친 후버는 어떤 정보도 CIA에 넘기지 말 것을 지시합니다.
트루먼 왈
: “후버 참 마음에 안 드네.. 조만간 후버를 잘라버려야지!!!”
그러나 후버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 시기부터 ‘비밀 정보’를 대통령에게 은밀히 주곤 했는데, 이를 트루먼한테도 똑같이 한 겁니다.
그래서 트루먼은 후버와의 은밀한 거래를 할 수 밖에 없었죠. 후버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기 상황에 몰릴 때마다 한 가지를 유용하게 써먹었죠.
바로 ‘반공주의’이었습니다. 그는 1953년까지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일을 시행한 실세였죠.
후버는 미국인들에게 공산주의의 위협을 매우 과장하여 선전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특히, 그는 할리우드가 공산주의에 더럽혀졌다면서 영화계에 ‘피의 숙청’을 진행하죠.
그래서 수많은 유명 할리우드 배우와 제작자들이 청문회에 참석해야 했죠. 당시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인 ‘게리 쿠퍼’와 ‘로버트 테일러’는 공산주의 의심분자 혐의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미국 내 만연한 ‘반 공산주의’ 의식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커졌고 과감해졌습니다. 미국에서는 1946~1954년 까지를 흔히 ‘매카시 데케이드(McCarthy Decade)’라 부르는데요.
이 말은 당시 공화당 의원이었던 ‘조지프 매카시’에서 유래되었죠. 매카시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애용한 전략은 ‘반공’이었습니다.
그는 FBI 국장인 후버에게 거짓 공산당원 205명의 리스트를 넘겨 받고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물론, 그 리스트는 조작된 것이었죠.
그 연설로 인해, 매카시는 하루아침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설과 때맞추어, 공산국가인 북한이 한국 전쟁을 일으키면서 더욱 날개를 달게 되었죠.
즉, 미국인들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면서 유명세도 얻고, 정치적인 입지도 다진 것이죠.
그래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매카시즘은 한마디로 공산주의를 도구로 쓰면서, 어느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 미국에는 반공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서 ‘레드 콤플렉스’가 만연하게 되죠.
< 20편 예고 >
지금까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막한 냉전(Cold War)에 대한 이야기와 독일의 분단, 미국 정부의 여러 가지 반공 정책들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피할 수 없는 세계사의 흐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냉전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해 오늘날까지도 여러 상반된 주장이 제기되고 있죠.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까닭에 대하여,
많은 역사학자들은 스탈린이 동유럽에 공산주의를 전파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이후, 냉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미국이 전 세계 시장에서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냉전 상황을 만들었다는 주장이었죠.
결국, 이 냉전 문제는 후대 사람들에게
‘냉전은 꼭 있어야만 했나?’
‘냉전의 책임은 미국인가? 소련인가?’
등의 의문과 역사적 평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음 편에서는
1950년대에 발생한 한국 전쟁 이야기와 냉전 초기의 미국 사회를 소개하여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연재 시리즈
1편 미국은 왜 천조국인가? : 한 눈에 보는 미국역사
2편 한 큐에 읽는 미국역사: 신대륙 개척의 승리자는?
3편 천조국 탄생 스토리: 미국의 건국 과정
4편 미국이 11년동안 대통령이 없었던 이유
5편 미국땅이 하룻밤 사이에 2배로 늘어난 이유는?
6편 텍사스 사람들이 유독 자부심이 쎈 이유
7편 아메리칸 드림의 진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8편 그 전쟁이 알고싶다: 미국 '남북전쟁'의 진실
9편 남북 전쟁 그리고 그후, 우리는 노예가 아니에요.
10편 미국, 세계 최강이 되다: 거대 자본의 탄생
11편 천조국의 1900년대 역사: 다 비켜! 세계는 내꺼야
12편 미국 시리즈 전쟁으로 인해 돈방석에 앉은 나라
13편 미국 역사상 가장다이나믹했던 10년
14편 천조국에도 이런 시절이 있었어?
15편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늦게 참전한 진짜 이유
16편 미국이 천조국으로 레벨업하게 된 이유
17편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꼭 투하해야 했을까?
18편 미국 VS 소련의 전쟁: 냉전과 열전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