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유머가 정가의 화제다. 원래 유머를 즐기는 그였지만 지난 1년간 ‘유머 모드’와는 거리가 있었다. 세종시 등 껄끄러운 쟁점들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의 얼굴에 최근 미소가 되살아나고 있다. 그가 참석하는 자리마다 풀어놓는 유머가 의원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뿐 아니다.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김무성 원내대표 곁을 지나가며 눈인사를 건넸다. 김 대표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박 전 대표가 한번 더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서먹해진 사이로 알려진 터라 주위 의원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박 전 대표는 통로를 오가며 다른 의원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권영세 의원이 깜짝 놀라 일어서 는 모습도 보였다. 평소 기자들이 묻는 말에 짤막히 한마디 던지거나 자리에 앉아 찾아오는 의원들의 인사만 받던 것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활짝 웃고, 한층 밝아진 박 전 대표. 무엇이 그를 ‘침묵모드’에서 벗어나게 한 것일까.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본회의장서 김무성에 먼저 눈인사
허태열 전 최고위원은 “지난 1년의 제약을 뒤로 하고 이제 정상으로 돌아오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시 등 민감한 현안이 잇따르면서 갈등이 끊이질 않았지만 박 전 대표를 옥죄고 있던 쟁점들이 해소되면서 마음의 족쇄가 풀렸다는 설명이다. 윤상현 전 대변인은 “최근 의원들 전화도 무척 반갑게 받아주신다”며 “목소리가 밝아진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라고 전했다. 박 전 대표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도 “박 전 대표가 특유의 맑은 웃음을 되찾았다”며 “이게 박 전 대표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단전호흡을 하며 건강관리에도 열심이란 전언이다.
보폭도 눈에 띄게 넓히고 있다. 친이계·여성 의원들과의 공개회동은 물론 비공개 만남도 줄을 잇고 있다. 2일 점심 땐 친박계 초선 의원의 생일파티를 해주자며 의원 6~7명을 여의도 이탈리아 식당 ‘올라’로 초대했다. 13일엔 친박계 3선 이상 중진의원 10여 명과 점심을 했다. 조만간 김성식·홍정욱 의원 등 친이계 개혁 성향 초선 의원들과도 만날 계획이다. 유기준 의원은 “내년 초 본격 행보를 앞두고 나름 시동을 걸고 계신 것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워밍업을 시작했다는 얘기다. 박 전 대표 비서실장격인 이학재 의원은 “지난달 21일 청와대 회동 때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교집합인 한나라당이 잘돼야 현 정권도 잘되고 정권 재창출도 가능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며 “서로의 오해가 풀리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진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선은 지킨다”는 기본원칙엔 변함이 없다는 게 친박계 의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한 핵심 측근은 “대통령 임기가 절반이나 남은 상황에서 대선 붐이 조기에 부는 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박 전 대표의 확고한 신념”이라며 “ 주변에서 빨리 움직이라는 주문도 많지만 바위처럼 요지부동”이라고 전했다. 이경재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권력의 속성을 몸소 경험해왔기 때문에 하늘 아래 해가 두 개면 시끄러워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다만 세종시 이후 경직된 이미지를 좀 바꿔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화하는 ‘박근혜 유머’
만남이 이어지면서 박 전 대표의 농담이 화제가 되고 있다. 한 친박 의원은 “식사 도중에도 틈만 나면 웃기는 얘기를 꺼낸다”며 “좌중을 웃기려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14일 여성 의원들과 만났을 때 했던 ‘먼데이~버스데이’ 유머도 웬만한 친박 의원들은 한두 번씩 들어본 농담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유머도 단골메뉴 중 하나다. “30분 연설하며 청중을 3번 이상 웃기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란 그의 지론은 여의도에 회자된 지 오래다.
회식 때는 폭탄주도 직접 제조하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제가 공대 출신인 거 아시죠? 이공계는 과학적으로 제조해요. 소맥 비율과 술 따르는 각도는 물론 잔을 잡아 건넬 때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적외선까지 감안하죠. 그래서 다들 제가 만든 폭탄주가 맛있다고 해요, 호호~.”
2005년 한나라당 대표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들과 호프타임을 했다. 서울에서 급한 전화가 와서 조금 늦어지자 일부 기자들이 불만을 털어놨다. 뒤늦게 달려온 박 전 대표가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벌로 후래자 세 모금을 마시겠다”며 꿀꺽꿀꺽 세 모금을 마셨다. 서먹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된 것은 물론이다.
호남 사투리도 곧잘 쓴다. “아이고, 어째야 쓰까이~”라며 오른손으로 옆 사람을 살짝 치는 제스처까지 곁들인다. 아주머니들의 애잔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좋아하는 표현이란다. 전남 곡성 출신인 이정현 의원과 호남 사투리로 얘기를 주고받으면 좌중에 폭소가 터지곤 한다.
김종인·이한구·유승민 종종 호출
박 전 대표는 요즘 ‘열공 모드’다. 이혜훈 의원은 “점심, 저녁 외부 약속 빼곤 늘 공부하신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후보로서 국민들에게 뭘 제안하고, 뭘 약속할지 고민 중이란 설명이다. 이한구 의원은 “경제·사회 각 분야의 대략적인 흐름 파악은 이미 끝낸 상태”라며 “지금은 분야별로 자신만의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능일(2012년 12월)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느냐”며 “집권할 경우 곧바로 정책 실행에 들어갈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해놓자는 취지”라고 덧붙였다. 서병수 최고위원도 “재정 건전성과 조세 문제 등 경제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야에서도 상당한 내공을 쌓고 있다”며 “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국가경제를 조망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전했다.
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토론하고 전화로 조언을 구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당내에서는 이한구·유승민 의원이 ‘가정교사’로 종종 호출되고 있다. 최근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게도 조언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 한 측근은 “박 전 대표는 요즘 국가 선진화를 위한 자신만의 ‘박근혜노믹스’를 가다듬고 있다”며 “2012년이면 우리나이로 60세인데 배우고자 하는 열정은 20대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