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아큐정전'을 읽었다. 아마 살아오며 너댓 번은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령 부득으로 건너 뛰며 '이게 무슨 소리이지?'하며 엉성하게 읽은 일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정신승리법'으로 축약되는 아큐란 인물의 전형만 뇌리에 박혔던 것 같다.
그런데 노벨라 33의 30번째 나쓰메 소세키의 '태풍'을 읽고 이어 이 작품을 대하며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으며, 같은 시대를 고민한 두 작가의 숨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울러 젊은 시절 읽었을 때 신랄하게 다가오지 않던 풍자의 맛이랄까, 아큐를 어리석다고 조롱하는 이들도 실은 진배 없다는 루쉰의 경고가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누구나 여러 차례 읽었을 책의 중요 대목을 옮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 옮긴이 심규호의 후기가 훌륭해 갈음하려 한다.
(중략) 아큐는 중국 민족의 저열한 근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혹자는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자기기인,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망자존대,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기연파경, 무감각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마목건망, 스스로 자신을 경멸하고 천시하는 자경자천, 우매하며 아는 것이 없는 우매무지 등을 들었다. 이런 기질과 근성이 바로 정신승리법으로 귀결된다는 뜻인데, 바로 여기에 역자가 하고 싶은 말이 들어 있다.
분명 신해혁명 전후의 중국 사회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또한 신구의 문화 요소가 뒤섞여 어딘가 기형적이고 착종적이었다. 당연히 그런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 역시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 때로 비굴해지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표변하며, 하찮은 일로 잘난 척하다 금세 꼬리를 내린다. 그런가 하면 스스로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아 거만을 떨다가도 실패하면 금세 자신을 경멸하고 낙담한다. 물론 센 자에겐 꼼짝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겐 게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부으며 스스로 만족한다. 그런데 이런 행태, 심태, 근성이 열강의 침탈에 꼼짝 못하고 당하기만 하던, 그리하여 자신의 전통도 잊고 줏대도 내버린 20세기 초엽 중국 대중들만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중략)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
"중화민국 원년은 이미 지나가서 추적할 수 없지만 앞으로 다시 개혁이 있다면 아큐같은 혁명당원이 또 나타나리라고 믿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과거의 어느 한 시기를 그려냈을 뿐이기를 나 역시 몹시 바라는 바이지만, 내가 본 것이 현대의 전신이 아니라 그 후 혹은 2, 30년 후 일일까 봐 나는 두렵다."
루쉰의 정신승리법을 얘기할 때 프리드리히 니체를 언급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과연 그런 것인지는 더욱 깊고 넒게 생각해 볼 대목이다. 다만 여기서는 '아큐정전'에 어울리는 클래식 작품이 마뜩찮아 니체의 저작을 작품 이름으로 쓴 것을 참고삼아 듣고자 한다.
Strauss: Also sprach Zarathustra ∙ hr-Sinfonieorchester ∙ Andrés Orozco-Estrada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