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계절, 이 시집
‘굴 아이’의 카프카적 방랑기
–
김정현
1. 성장하지 않고 망각하기
수은은 실온에서 액체인 금속입니다 수은, 중얼거리면 이름 같습니다, 누구일까
남 생각하는 시간은 아깝고 신경증은 없어요
- 「생활-오토매틱」 중에서
소년도 아니며 소녀도 아닌 “중성인간”(「중성인간」)인 ‘굴의 아이’. 이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유리로 된 눈. 그 눈을 통해 비춰진 세계란 어떠한 형상을 지니고 있을까. 명료한 초점이 부재하며 난반사되는 빛들의 세계. 하나의 분명한 초점이 아닌 분리되고 분산되는 이미지들의 기묘한 움직임. 시인 자신이 밝힌 것처럼 시집 제목으로 차용된 라디오헤드의 「glass eyes」가 들려주는 음울하고 어두운 음색들의 마음인 것. 이처럼 시인의 언어는 끊임없이 몽환적이고 부정확한 자신‘들’의 목소리를 발산한다. 그 세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볼 수 있을까. 이에 우선 필요한 바는 ‘굴 아이’의 세계와 우리의 일반적 세계 사이의 간극을 이해하기일 것이다.
이는 아마도 시집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중 하나인 ‘핑크’를 통해 말해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규정된 여성성 혹은 핑크의 세계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이해하는 세상 자체라 할 터인데, 그 장소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이야기한 ‘유토피아’이자 ‘~이다’란 규칙으로 성립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핑크의 세계는 정의 자체로 기능하며 동시에 아이를 청록의 소년과 핑크의 소녀로만 규정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 틀에 부합되지 않는 시인은 스스로를 ‘중성인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규정될 수 없는 ‘n개의 성’을 지닌 한 개별적 존재로 인식하려 한다. 이 ‘헤테로토피아’적인 인간의 눈에 비친 풍경이란 분명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항상 그리고 기묘하고 불편하게 어긋날 수밖에는 없겠다.
난반사되는 유리눈에 비친 세계 자체라 해야 할 시인의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들었던 생각들 중 하나를 말해보자면 그것은 이제재 시인의 세계감이 확실히 ‘카프카’적이라는 것이었다. 시인의 시들은 핑크의 세계에 대해 격렬하게 투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우연적’ 이미지들은 그 독특한 ‘무희망성’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며 맞서나가려 한다. 벤야민은 카프카적인 세계의 근본적 특징에 대해 “잊는다는 것은 항상 가장 좋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필자가 느낀 이제재 시인의 세계감도 그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벤야만의 말처럼 이 난반사된 유리눈들의 풍경은 핑크의 세계 속에 편입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 유리눈은 핑크의 세계를 ‘망각’하고 그 속에서 말없이 부유하는 자들을 보려 하며, 이들이 구축한 기묘한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일 따름이기에. 즉 독특한 무희망성의 이미지들이 구현된 세계이자 카프카적이며 이제재적인 것. 바로 그것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단 전제되어야 하는 점은 그 텍스트의 세계가 희망에 가득 찬 미래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언젠가 카프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란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 나쁜 날일 따름’이라면. 그리고 핑크의 세계에 유래하는 ‘무수히 많은 충분한 희망’들이 더 이상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닐 따름이라면. 우리가 그 세계에 대해 굳이, 애타게 매달려 있을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 아닐까.
무희망성의 희망성이라 할 무언가를 인식하려는 행위. ‘오직 희망 없는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발터 벤야민, 「괴테와 친화력」)이라 불릴 기묘한 사유의 층위. 아마도 벤야민의 이 말은 ‘굴의 아이’가 지닌 세계감과 근본적 유사성을 지닌 말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카프카적인 ‘굴의 아이’는 “우는 데도 울지 않는 얼굴”(「아게르, 까마귀 마을 –굴의 아이1」) 표정을 지니며 특별한 기쁨도 없이 성장하지 않고 방랑할 따름이다. 그 고통스러우며 또한 정직한 망각의 기록들인 것. 이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유리눈의 알레고리로 비춰진 우리 자신을 보는 것에 있다. 즉 “뒤로 뻗은 팔로도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배영」)된다는 것. 혹은 그저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닌 텍스트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 언어에 ‘의해서’가 아닌 언어를 ‘통해서’ 전달될 시인의 세계감 그 자체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면 푹 빠질 것만 같다
- 「화이트보드」 중에서
2. 핑크는 왜 질문하는가
작렬하는 흰빛 속에서 발작적으로 흑염소가 된 선
생님이 작은 가시나무 한 그루를 뚝 뚝 끊어 먹기 시작하는데,
젊은 선생님은 왜 화부터 내시는 걸까
- 「줄지어 걷는 흑염소 무리와 거꾸로
매달린 체리 꼭지들」 중에서
그러니 이제재 시인이 구축한 세계에 대해 우선 검토해야 하는 것은 이미지들의 복잡함과 산만함 자체만이 아니다. 물론 이는 시집의 텍스트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선 주목되는 부분은 시인이 흔히 생각하듯 시의 언어를 아름답게 다듬거나 조탁하는데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이 난반사된 이미지들의 파편들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까.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 기묘하고 이해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조감도’이며 이 알레고리들의 기괴한 목소리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가이다. 그런 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시인의 이야기들 속에 감추어진 은밀한 이미지들의 연결망이다. 그 숨겨진 형상들을 통해서만이 시인이 지닌 세계감의 구체적 형체에 접근해볼 수 있는 것이기에.
이제재 시인이 건축해둔 텍스트들의 세계이자 이 이미지들의 난반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기 위해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시는 아마도도 「성장기-굴의 아이3」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를 구체적으로 톺아보게 된다면 시인의 세계가 어떠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기’란 제목처럼 이 시는 확실히 시인의 세계감과 존재규정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데,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부모의 질문’이 가진 함의에 있다. 즉 문제는 왜 이‘굴의 아이’는 그 질문으로부터 ‘미끄러지며’(「해피니스」) 규정되려 하지 않는가이다. 시 속에서 ‘굴의 아이’이자 시인은 “삶은 난데없는 것. 그렇게 쓰고 나자 정리되는 것이 있었”다고 말하며, 부모의 핑크빛 질문을 다음처럼 ‘쓴다’.
그래서 정말 남자가 되고 싶은게 아니냐?
꿈속의 일이니까 배나 마저 깍도록 하지. 굴의 아이는 식칼을 들고 살 살 둥그런 것을 더 둥글게 깎고
아버지, 그놈의 지긋지긋한 메모장은 왜 여기까지 들고 왔어?
아버지가 들고 온 것은 아니야 하지만 미안하구나
됐어, 머리밖에 없는 아버지는 좀 귀엽군
굴의 아이는 둥근 것의 살을 잘 조각 내 아버지의 입속으로 하나씩 넣어주고
그래서…… 정말 아니냐?
굴의 아이는 목 위로 딱딱한 머리의 껍데기를 연신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푹 쉰다
(…중략…)
얘야, 그럼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아버지, 아버진, 당신 인생을 이해해보려고 해본 적 있나? 난있지, 아버지를, 아버지가 단순히 소년이었던 순간부터. 하지만…… 이해해봐도 어쩔 수 없었지. 우린 우리의 역할극을 계속 할 거잖아. 난 딸이니까 입 다물고 아버지한테 잘 보여야만 하는거지. 도망쳐봐도 별수 있나?
- 「성장기-굴의 아이3」 부분
벤야민은 「프란츠 카프카」에서 카프카의 작품 속 관료와 아버지들의 세계가 지닌 근본적 특징을 ‘더러움’과 같은 ‘늪의 세계’이라 칭한 바 있다. 카프카적 세계에서 부친이 자식에게 끊임없이 유예되며 그 정체조차 명확하지 않은 ‘형벌’을 내리는 자라고 규정될 때, 그로부터 느껴질 수 있는 세계감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시인 역시 이 시에서 그에 대해 “잿빛에 거무죽죽, 침 냄내 나는 종류의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시인의 말처럼 “삶은 난데없는 것”이며, 정돈된(것처럼 보이는) 표면의 이면에 항상 이해불가능한 것들이 우글거리는 무엇이다. 시인은 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혹은 당연하게도 아버지들은 모르며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부모의 질문은 남성 혹은 여성이란 범주 하에서 포섭되어 있으며 그 외에 다른 답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부모들은 이해되지 않는 ‘굴의 아이’에게 그저‘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마치 끊임없이 미뤄지며 미뤄지며 영원히 유예되어버리는 카프카적 ‘소송’처럼 말이다.
이 측면에서 그들의 질문이란 일종의 억압이자 이해불능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인용한 시의 첫 구절에 명확하게 씌여진 그 말. “그래서 정말 남자가 되고 싶은게 아니냐?”라는 질문의 함의. 언제나 문제는 자식(“딸”)의 위치에 있으며 자식으로 태어난 ‘운명’ 때문에 우리는 이 쓸모없는 질문들이 산포된 ‘끈적한 공기를 평생토록 내내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 질문은 반복되는 “그래서…… 정말 아니냐?”라는 말처럼 끊임없이 증식하고 또 증식하며 나를 먹어치우려 할 뿐. 그러니 ‘굴의 아이’는 아버지의 질문에 직면에서 할 말을 찾을 수 없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 측면에서 「월드」에서 언급된, 말을 거의 하지 않고 부모 또는 가족만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로만 말하는 증세란 “함묵증”의 함의는 시인이 왜 핑크의 세계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힌트가 되어 준다. 말한다면 이 ‘반복되는’ 형벌이자 대답을 명령하는 부모의 목소리 앞에 시인은 침묵하며 “목 위로 딱딱한 머리의 껍데기를 연신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푹” 쉴 수 밖에 없기에. “우린 우리의 역할극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으며 어쩔수 없이 “난 딸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한숨’을 단순한 포기나 질문에 대한 항복으로 받아들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이 시를 지배하는 보다 더 중요한 감정들 중 하나는 죄를 질문받는 자가 지닌 분노에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함묵증” 이면에 감추어진 스산한 분노인 셈이며, 그런 점에서 침묵은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분열증적 주체, 즉 “언어를 익힌 모범수인 척 구는 나”에 대한 거부이자 ‘자꾸만 나를 이해하려 드는 이제재’(「월드」)인 존재는 함묵증의 이면 속에서 “도망쳐봐야” “이해해봐도 어쩔 수 없”겠지만, “아버지, 아버진, 당신 인생을 이해해보려고 해본 적 있나?”라고 분명히 중얼거리고 있다. 이 미약하고 작은 목소리이자 그 속에 새겨진 분명한 적의. 그러니까 ‘굴 아이’가 감춰왔던 공격성이자 동시에 단순히 뜨거운 분노가 아닌 서늘한 어떤 마음. 핑크의 반복된 질문들 속에서도 그와 빗겨나가는 어떤 중얼거림의 말들이 여기에 있다.
난데없이 부모가 된다는 것과 난데없이 부모를 가진다는 것. 아이는 태어내고 아이는 정상적 규범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아이는 혼자 크는 것처럼 생각되고 부모는 아이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늙어가고 부모는 왜 문을 열어보려 하지 않았지? 아이는 왜 안방 앞에서 한번 노크해 보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지? 녹다운의 계절. 아픈 머리를 감싸고 저는 한번 일어나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미워할 수 있는 것과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 메모장 속에는 무수히 많은 끝이 있었고 무수히 많은 시작이 있었습니다. 페이지가 넘어가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일상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질서와 순서 속에서 우리는 평온해 보였습니다. 방문을 열면 난데없이 다 자라 있는 아이가 입을 열고, 어머니 아버지 나는 집을 가지고 싶은데 집을 떠날 수 없어. 집을 부수고 싶은데 집을 부술 수 없어. 굴은 껍데기부터 자라났을 텐데, 그 속에서부터 얼굴이 녹고 있는데, 모든 것이 꿈속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
- 「성장기-굴의 아이3」 부분
시에서 언급된 것처럼, 아이는 ‘불쑥 자란다’. “질서와 순서 속”에서도 그리고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기에. 그러나 어느 날 방문을 열면 이미 다 자라 있는 ‘정상적 규범에 맞지 않은’ 아이는 부모들에게 질문이 아닌 중얼거림을 들이민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아이는 교육된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란 것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미워할 수 있는 것과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 메모장 속에는 무수히 많은 끝이 있었고 무수히 많은/시작이 있었”던 “메모장”과 함께. 요컨대 ‘함묵증’을 가진 ‘굴의 아이’는 스스로를 써나가면서 성장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리고 돌아와 중얼거린다. “모든 것은 꿈속의 일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나는 집을 가지고 싶은데 집을 떠날/수 없어. 집을 부수고 싶은데 집을 부술 수 없어.”라는 시인의 말처럼, 부모의 질문이 드러내는 강요된 핑크의 질문들로부터 탈출하기란 쉽지 않으며 요원하다. 그러니 여전히 사회적이자 경제적인 조건 하에 우린 삶아지고 먹힐 수밖에. 그 뜨거운 여름의 ‘냄비’속 삶아지는 고기들처럼 알맞게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진다는 것. 하여 엄마의 손에 들린 그 뒤집개에는 “그래서…… 아니냐?”란 핑크색 문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뜨거운 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군. 아직도 여름인가? 아니다 여긴 냄비 속이군. 삶고 굽고 그렇게 또 한 번 먹힐 작정이군.
무방비하게 입을 벌리면 뚜껑을 든 엄마는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그래서…… 아니냐?
엄마 난 핑크가 싫어 하지만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지
엄마 난 꽃 귀걸이가 싫어 하지만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야
엄마 난 내 몸이 제일 싫어 몸을 싫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 가 준 옷이 내 몸에 꼭 들어맞아서 드러날 때 그 곡선이 싫어
하지만 정말로는 굴이 싫어 달마다 뚝뚝 떨어지는 피가 엄마가 입에 넣어준 굴,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마 난 엄마를 사랑하지, 이것만이 믿을 수 있는 진실
그러나 삶은 난데없는 것 뚜겅을 든 것은 새 여자친구였습니다 넌 굴의 정체를 모르는구나? 메모장을 들고 읊어주는 내용, 그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제 무의식의 기록이었습니다
- 「성장기-굴의 아이3」 부분
시인은 말한다. “엄마 난 핑크가 싫어 하지만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며, “꽃 귀걸이가 싫어 하지만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며, “난 내 몸이 제일 싫어 몸을 싫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며, “엄마, 가 준 옷이 내 몸에 꼭 들어맞아서 드러날 때 그 곡선이 싫”을 뿐이라고. 우리의 판단기준과 인식기준을 벗어난 그 무엇. 남성도 그리고 여성도 아닌 것. 시인이 스스로를 ‘중성인간’이라 부르면서, “남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 여기에 시인의 어떤 스스로의 자기증명에 대한 목소리가 있지 않을까.
핑크색 부모이자 우리의 세계 자체인 ‘질문’들이 남성과 여성 이외의 다른 것을 보지 못할 때, 이 명료화될 수 없는 ‘굴 아이’의 언어들은 일종의 부정성의 형태이자 ~이 아닌 것이란 형태로 제시될 수 밖에 없다. 강요된 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을 때, 적어도 나는 그것이 아니라는 중얼거림. “하지만 정말로”는 싫었다는 것. 그렇게 본다면 이 굴의 아이에게 진정으로 필요했으며 얻어내게 되었던 것은 ‘중얼거림’이란 부정성의 이면이자 서늘한 분노의 암묵적 표출이 아니었을까.
요컨대 자신의 서늘한 분노를 중얼거리며 현실을 직시하기.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 정말로 싫었던 음식(혹은 여성성)을 맛봐야 하는 자학적 행위. 혹은 부모의 증식하는 질문에 갇혀있는 자기 자신의 육체. 우리는 이미 그러한 형상을 카프카의 「변신」에서 본 적이 있다.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리 잠자에게 스스로의 육체가 감옥이 되어버린 것처럼. 우리 자신의 육체이자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서 그저 버둥거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 그 지옥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난데없는 삶’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누군가를 보게 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 ‘난데없는 삶’처럼 ‘새 여자친구’로 호명된 자이자 ‘굴의 아이’가 지닌 본질적 이름을 묻는 자가 있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이는 부정성을 어떻게 근본적인 자기 긍정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은밀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넌 굴의 정체를 모르는구나”라며, 메모장을 읊어주면서 나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자. 메모장 속에 적혀있던 그리고 끊임없이 감추고 억눌러왔던 나의 숨겨진 본질을 질문하는 자. 그 ‘무의식’의 기록이자 또 다른 나를 인식할 때 비로소 시인은 자신의 서늘한 분노를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 분석자로서의 나”(「월드」)의 숨겨진 사명이기도 하다.
굴은 여름에 먹어서는 안 된다
굴은 수컷에서 암컷으로 몸을 바꾸는 교대성 자웅동체
여름, 성별 전환기에 생기는 독
뚝뚝 흐르는 것
내 꿈은 굴의 중간 단계, 독이 되고 마는 것
계절성 성 정체성에 다다르는 꿈
나는 굴이 싫고…… 굴이 부럽다
- 「성장기-굴의 아이3」 부분
부정성과 우연성이 결합되었을 때 시인이 ‘부러움’을 통해 스스로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더불어 시의 마지막에 시인이 “더 크고 새하얀 노트를” 산다는 것은 이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부모와 세계의 영토인 여름이 아닌 곳. 남성도 여성도 아닌 “교대성 자웅동체”이자 이 여름의 세계에게는 그저 “독”인 것. 고정되어 있지 않고 “뚝뚝” 흐르는 것. 새로 씌여질 수 있는 무수한 페이지를 가진 ‘노트’인 것. 시인이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꿈이 이와 같지 않을까. ‘내 꿈은 사실 굴의 중간 단계이자 남성도 여성도 아닌 나’로서의 ‘독’이며 그 되기의 의지를 표명한다는 것은 시인이 지니는 스스로의 세계감이 무엇인지를 알레고리화한다. 그 꿈이자 시인의 언어이자 이미지인 ‘독’은 ‘정말 아니냐’는 증식하는 감옥같은 핑크색 질문들을 오염시키고 부패를 독성으로 맞서며 세계를 붕괴시킬 힘을 지향한다. 그렇게 본다면 ‘독’의 근본적 정체이자 분열증적 언어들은 사실상 시인 자신의 정직한 기록이자 자신의 내면적 풍경 그 자체라 말해져야 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시집을 구성하고 있는 산만해 보이는 분산된 이미지들은 사실상 시인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으로부터 비춰지는 난반사되는 빛들이자 그 알레고리들이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의 작품들에 대해 현실성을 따져 물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이제재 시인의 텍스트들에 대해 현실성을 물을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는 이제재 시인의 시를 남성성 혹은 여성성의 기준으로서만 볼 필요도 없다. 이 ‘n’개의 분열증적 존재 그 자체가 바로 시인의 본질적 형상이며 이 세계를 구축하는 근본적 원리이기에.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이해지평도, 부모의 증식하는 질문과도 무관하게, 우연히 만난 ‘친구’인 나와 함께 여행하며 “껍데기로 쌓아놓은 집”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마치 “두 팔에 힘을 빼고/ 로이드는 단지 두발이 앞을 향하고 있”(「백 개의 튜브가 떠 있는 바다」)는 것처럼. 그리고 ‘로이드’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아침엔 다리가 셋 점심엔 머리가 여덟 저녁엔 팔 대신 꼬리의/ 독이 솟는다 해도/ 인간이라 답할 것”(「반사되는 빛」)이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그 세계감의 알레고리가 드러내는 근본적 목적은 시인의 ‘유리눈’에 비친 스스로의 존재됨일 따름이다.
가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있다
- 「리플렉션-평행한 세계」 중에서
3. ‘우연한’ 빛들의 범람을
너를 보면
너는 욕망하는 것들을 가득 모아
너와 닮은 것을 조립하고 있었다
가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라기보다는
인어랄까
- 「구름과 인어와 은빛 나사들」 중에서
한 편의 시를 다소 길게 다룬 셈이 되었지만, 「성장기-굴의 아이3」에 대한 면밀한 접근이 필요했던 것은 한 시인이 가진 근원적인 세계감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 측면에서 본다면 시인이 보여주는 다채롭고 다양한 변신술적인 등장인물들은 바로 핑크이자 부모의 세계와 나의 세계의 간극와 차이를 인식하는 다양한 방법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말하자면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길은 쉽게 주어지지 않으며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벤야민이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생물들 가운데 동물들이 가장 많은 사색을 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법 속에 부패가 있듯이 이들 동물들의 사고 속에는 불안이 있다. 불안은 상황을 망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희망인 것”이라고 지적하며 “우리는 왜 카프카가 자신의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기침을 <동물>이라 불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문장들을 이제재 시인의 세계감에 빗대어 말할 수 있겠다. 정상적이지만 그러나 부패하고 썩어가는 핑크의 질문들에 맞서는 독특한 이제재 시인들의 ‘분열적’ 케릭터들은 모두 카프카적인 무희망성을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세계에 우연히 내던져져 있으며 세계는 증식하는 부모의 질문처럼 우리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 ‘다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의사’ 앞에서 ‘굴의 독을 먹어치우며’(「굴 뱉기-굴의 아이2) 불안하게 중얼거리기. 다르게 존재하기에 대한 ‘욕망’이자 시인의 변신술적 이미지들은 고통과 불안을 경유하는 그 난반사된 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나를 존재하게하기 위해서.
그것을 우리는 교환이라 불렀는데, 종래엔 모든 것이 교환이라 불렸다
교육을, 공감을, 언어를, 형벌을, 기억을, 관계를
교환되지 않는 것이 없어지자 마음이라 할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몸은 아직 남아있었고
마을을 불태워도 마을은 있었다
차를 때려 부숴도 차는 있었다
죽고 싶어서 죽고 싶어졌고
우울해서 우울해졌다
이 동어반복의 세계에선
몇 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크게 나빠지지 않았는데 우리는 곧잘 잘못된 것처럼 생각되었고 시뮬레이션 속에서 여러 번 죽고나자 이것이 곧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세대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들이 우리의 신경증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것이란 생각만으로 연민은 시작되는 것이다
- 「안드로이드 파라노이드」 부분
‘금방 더러워지는 핑크의 배설’(「해피니스」)같은 질문들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완고하고 이분법적인 질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을 규정된 ‘몸’으로 묶으며 ‘불태우고 때려 부셔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에. 그렇기에 시인은 모든 것이 나빠질 수 밖에 없는 “이 동어반복의 세계”에서 불안과 ‘우울’을 통해 버티려 한다. “잘 잘못된 것처럼 생각되”고, “시뮬레이션 속에서 여러 번 죽고 나자 이것이 곧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 ‘굴 아이’는 이 세계의 법칙에 종속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이 아닌 우리의 다음 세대’ 가 물려받아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경증”이자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변신술적 이미지의 우연성일 것이다. 마치 ‘나의 욕망들을 가득 모은’ 새로운 무엇이자 “사람이라기보다는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라기보다는/ 인어”(「구름과 인어와 은빛 나사들」 )일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이 되려는 것처럼. “갑자기 주인공이 된 브레이크는 자신의 운명을 믿지 않기/에 가드레일로 돌진”하고 “그리로는 가지 않기 위하여 헤드라이트를 깜박”(「택시, 이리로 와요」)이면서.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는 ‘유령 G의 발’(「욕조 속의 오수」)처럼.
질문이 무엇이든 간에 답은 같을 것이므로
아침의 인간은 점심의 인간이 되고 저녁의 인간이 되는 이야기는 결국
여럿을 동시에 하나의 얼굴 안에 가둬버리는 거울의 이야기인 것이고
화장실이 없어서 외로워지는 꿈들, 배출구를 갖지 못해 미궁이 되는 당신의 꿈속에선 누가 되새기고 있는 메아리 인지, 거울은 무엇도 구해내지 못하는 겁니까 질문이 울리고 있는데
절망에 빠진 당신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인간, 종이 위로 끄적이게 되지만
자기 자신을 모른다면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오래된 예언은 미래가 되고
그러나 이럴 때에도 당신의 등장인물은 변기 레버를 내리며 흘러가고 메워지고 있는 여기와 깊어지는 저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당신과 나, 우리가 거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해도 빈 종이는 빈종이의 가능성으로 남고 이 거울의 뒤편은 종이의 빛을 반사해 무성해지는 것이다
- 「반사되는 빛」 부분
「반사되는 빛」은 이 측면에서 시인의 존재됨 그리고 우연성의 가능성을 통해 바라는 근원적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질문’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핑크들의 질문의 본질적 속성이란 “질문이 무엇이든 답은 같을 것”이라는 말을 통해 드러난다. 그 어떤 개별적인 형상들을 담아낼 수 없는 핑크의 부패한 세계. 그것은 “여럿을 동시에 하나의 얼굴 안에 가둬버리는 거울의 이야기”일 뿐이며, 그런 방식으로는 우연성을 알지 못할 뿐이다.
시인은 카프카처럼 거울의 세계 속에 머물러왔던 자신을 부정하고 다른 무엇인가로 변신하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그 욕망을 직시하기 전에 필요한 것은 불안과 우울 그리고 고통인 “절망”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시인의 시쓰기란 그 절망의 벽 앞에서 시작될 수 있기에. 요컨대 ‘화장실이 없어서 외로워지며 배출구를 갖지 못한 미궁의 꿈’은 중얼거리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단 하나로 환원하는 거울 속에선 “무엇도 구해내지 못”한다는 것. 시인은 바로 그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의 우연성을 구축해내려 한다. “절망에 빠진 당신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인간, 종이 위로 끄적”이고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질문으로 변형해 볼 수 있겠다. ‘자기 자신을 모르며 오래 살아가는’ 자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 속에서 존재됨의 시쓰기란 무엇인가라고. 그에 대한 시인의 중얼거림이 ‘글라스드 아이즈’를 통해 비춰질 ‘반사되는 빛’의 가능성이자 부유하는 이미지들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러나 이럴 때에도 당신의 등장인물은 변기 레버를 내리며/ 흘러가고 메워지고 있는 여기와 깊어지는 저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 시인은 쓰기를 통해서만 절망의 너머를 사유할 수 있다는 것. 그 노트에 씌여질 말들의 보이지 않는 형상을 위해, 그럼에도 쓰려고 한다는 것. 이것은 결국 “당신과 나, 우리가 거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해도”, 그 씌여짐을 기다리고 있을 텅 빈 종이의 희미한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바로 그 가능성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에게 출현하게 될 우연성. 그렇게 본다면 “거울의 뒤편은 종이의 빛을 반사해 무성해지는 것”이란 말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이자 ‘난반사된 빛’들의 언어적 형상들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가 아닐까. 시인은 그러한 예감과 기대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할 무성한 ‘빛’들의 언어를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시인 자신조차 아직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훈육자인 선생님이자 “흑염소의 울음소리는 메에에 메에에 이어지고 나는 빛의 과육을 꾹 눌러 터트리며 어리둥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이야기라 불러도 될까?”(「줄지어 걷는 흑염소 무리와/ 거꾸로 매달린 채리꼭지들」)란 질문은 지극히 타당하다. 우리는 이 ‘어리둥절한’ 것을 이야기라 불러야만 한다. 단 그것은 우연한 방랑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며, 핑크색의 견고하고 완고한 절망의 벽 앞에서 통곡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무엇일 따름이다. 즉 시인이 분해된 육체를 통해 자신의 수호신을, 스스로의 언어를 호명하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의 ‘가능성’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 사슴의 털을 쓰다듬으면 나는 과거를 망각하게 되고 나의 차가운 귀와 익숙한 겨울의 농도 창밖으로 침착하게 내리는 눈들 문득 나는 새벽 네 시를 이해하게 되지 사슴은 착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 이곳의 오두막, 나는 사슴의 뿔을 잘라주고 이곳의 미래, 나는 조용한 동물의 마음으로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게 된다 나는 정지하고 사슴은 숨을 몰아 쉰다 촉촉한 코와 긴 목 내 몸은 천천히 분할되어 어디론가 날아가려 한다 사슴은 호흡으로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겨울이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내 몸의 분자들 사슴을 휘돌아 감고 나는 내가 알던 것이 완전한 겨울이 아니었음을 이해한다 투명한 사슴의 발굽 사슴의 침착한 맥박 이제 그곳엔 시선이 남고 단지 사슴이 있었다 날이 밝아오고 창문으로 빛이 들어 왔다 사슴의 털이 빛나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 「페트로누스」 전문
우리가 이제재 시인의 시를 읽어나갈 때, 그리고 그 빛의 세계에 대해 조심스레 접근하려 했을 때. 늘 항상 이 세계의 거울이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본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질문을 통해 끊임없는 죄를 묻는 세계는 시인의 세계에 끊임없이 그리고 언제나 침범하니까. 마치 과거 또는 악몽처럼. 그렇다면 그 부패한 질문에 맞설 수 있는 우연성이란 무엇일까. 그 거울의 세계에 맞서 시인은 자신을 존재하게하기 위해 자신의 수호신을 부른다. 바로 나의 미래이자 ‘사슴’을 말이다.
헤리 포터에 등장했던 수호자인 ‘페투로누스’란 원래 패트론(후원자)과 동일한 어원을 가진 단어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핑크빛 거울의 법칙이 지배하는 겨울의 세계 속에서 시인은 왜 자신의 수호신이자 자신의 무의식이자 언어를 부르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사슴의 털을 쓰다듬으면 나는 과거를 망각하게 되”고, 이 겨울의 차갑고도 익숙한 공간을 ‘침착하게 보게 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나조자도 잘 알지 못했던 나의 마음인 것. 새벽 네 시이자 빛이 없는 어둠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점에서 세계의 본질을 바라보는 ‘굴 아이’의 시선과 동궤적인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거울이자 겨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오두막’에 기거하며 나의 수호신인 사슴과 함께 ‘있다’.
이 머무름이란 행위를 손쉽게 현실의 폭력 속에서 도피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 세계는 핑크빛 겨울로부터 불어오는 ‘강력한 폭풍’처럼 그 위력과 지배력을 언제 어디서든 과시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폭풍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망각’을 통한 벗어나기가 될 수밖에 없다. ‘과거’가 아닌 “이곳의 미래”이자 “조용한 동물의 마음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즉 아감벤식으로 말해보자면 이 ‘정지하기’란 핑크빛 질문의 폭풍들에 저항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사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벤야민은 카프카의 동물적 인물들(혹은 조수들)이 수행하는 공부에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며, 공부라는 것은 폭풍을 막아내려는 기병의 전진’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시인의 자기분열적 목소리들이 근본적으로 가리키는 무엇이자 “내 몸의 분할”이 도달할 어떤 가능성이자 미래적인 것. 시인이 자신의 수호신이자 자신의 언어인 ‘사슴’을 이해하며 그저 자신의 공부를 지속해 나아갈 때, 그때에 비로소 “나는 내가 알던 것이 완전한 겨울이 아니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이를 위해 자신의 언어이자 사슴을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그저 중얼거리며, 이해한다. “이제 그곳엔 시선이 남고 단지 사슴이 있었다”는 것처럼.
“겨울”이 “완전한 겨울이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시선”. 오직 파편화된 꿈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말없이 증명하려는 행위. 그렇게 본다면 시인이 꾸준히 중얼거리며 드러내려는 ‘빛’의 근본적 정체란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자 미래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언어들의 형상이 될 것이다. 어두운 밤이자 아무런 빛도 없는 시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로 존속하기. 시인의 사슴이 ‘수호신’(페트로누스)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수호신이 지닌 언어의 빛은 ‘완전해 보이지만 완전하지 않은’ 겨울의 세계 속에 균열을 내고, 자신의 육체를 분할하고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드러날 나의 존재적 의미를 구현할 것이기에. 그렇다면 오직 그 빛을 인식하는 자만이 시인이 ‘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언어를, 더 정확히 말해 자신의 꿈이 씌여진 노트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적어나갈 뿐이다. 이 희미하고도 작은 우연한 빛남 그 자체를 인식하며 말이다.
그것이 되어간다
머리가 일곱 달린 것
다수의 이름으로 불린 것
하나의 이름도 진실되지 못한
언제든지 있으나 사라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되어간다
신비롭지만 불량한 것
불량하지만 예리한 것
마침내 미끄러질
우리는 그것과 손을 잡는다
- 「성」 중에서
4. ‘굴 아이’의 유리눈 속에는
어쩌다 살아있음에 대한 은유로
- 「구름과 인어와 은빛 나사들」 중에서
그러하기에 시인은 결국 쓰는 자에 다름 아니다. 권력과 제도도 이름과 명분도 권위의 폭력의 무한한 증식을 통해 ‘핑크빛’ 세계의 부패한 질문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반복될 것이니까. 우리가 그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상상의 힘을 통해 무언가의 구현’(「쓰는 사람 –굴의 아이5」일 수밖에 없다. 그 ‘어설픈’ 행위 자체를 지속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세계를 바라보며 인식한다. 그리고 종이를 쥔 채 그저 쓴다. “삶이 신이라면 이 모든 배치를 받아들일 수 있겠니”(「반사되는 빛」- 부록」)라고 중얼거리며.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아게르, 라고 부르면 흰 김이 입 밖으로 계속 흘러나왔다 검은 갈대밭이 바람에 쓰러지고 아게르, 부름에 뒤를 돌아본 얼굴들 사이로 불가능한 그리움.
이름을 붙였지. 쓴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이야기가 끝나고도 안녕을 오래 빌며 미안하다고 했지. 어설프게 구현된 거리엔 우체통의 붉음이 없고 지는 해의 붉음만 있어서 흰 종이 다발을 꾹쥔 채
아게르, 살아있는 아게르에게
- 「쓰는 사람-굴의 아이5」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쓰는 사람’이란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라고.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한 아게르를 향해 중얼거린다. “이름을 붙였지. 쓴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이야기가 끝나고도/ 안녕을 오래 빌며 미안하다고” 나직히 말한다.“아게르, 부름/에 뒤를 돌아본 얼굴들 사이로 불가능한 그리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존재하지 않았으나 존재해야 했던 유령들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그 흐릿하고 잘 보이지 않는 마음의 형상들은 아마도 시인이 인식하는 무수히 많은 분열된 나이기도 할 것이다.
남성도 여성도, 핑크와 청록도, 부모와 세계도 아닌 ‘굴의 아이’가 지닌 유리눈과 그 이면에 비친 난반사된 빛들의 이미지들. 자신의 존재를 걸고 세계와 ‘망각’을 통해 맞서기. 시인의 ‘헤테로토피아’적 시쓰기란 그러하기에 고통과 슬픔이며, 또한 자신의 우울에 대해 말하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을 통해 이 말을 느껴야 할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시집은 그저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집합채에 불과하니까. 단지 ‘쓰는 것만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것’이란 그 말을. 끊임없이 ‘핑크와 청록의 모서리 경계로 미끄러지’(「해피니스」)며, “살면서 나는 내가 많은 가명을 가졌으면”(「맑은 계절에 걸린 거울」) 한다는 절규를. 그 절망과 통곡의 벽 앞에서 알지 못한 채 내던져진 인간에게 유일하게 가능해질, 바로 ‘살아있으며’ 아름다울 그 말을 우리는, 들어야 하는 것이다.
깨어나면
물속 빠져나올 수 없는 손 하나
푸른 달이 뜨고
나는 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 「산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