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증언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이르신다.
그때가 되면 고난이 닥쳐오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강의를 많이 하고 있는 김길수 교수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라는 책에서는
조선 시대의 두 사람의 삶과 죽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조선 시대 최고의 충절을 보여 준 문신 성삼문이며,
다른 한 사람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신념 때문에 목숨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성삼문은 죽기 전에 다음의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 돌려 보니 해가 서산으로 저무는구나.
황천 가는 곳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 나는 어디서 머물꼬.”
이 절명 시에서 우리는 성삼문이 생을 마감하면서
짙은 허무를 느끼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반면, 김대건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하여 일해 왔습니다.
이제는 이 목숨을 바치려 합니다.
바야흐로 나를 위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이 말에서 김대건 신부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생각해 보건대, 두 사람 의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인 가치에 따른 신념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증언한 모습은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증언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며
희망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힘을 믿지 않고
스스로 자신은 버림받았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을
성령께서도 도울 수 없으므로
그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곧 죄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이야말로
성령의 도우심을 거역한 사람으로서
성령을 모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모독한 사람도 용서하시는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겐 용서하시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그분의 자비를 의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는 순간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간 각자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현존하고 계시는 성령의 궁전입니다.
비록 부족한 죄인인 우리 인간이지만,
우리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살아 숨쉬고 계십니다.
이토록 소중한 성령의 현존 장소인 인간 존재를 모독하는 일 역시,
일종의 성령 모독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희망하시는 나를 향해,
“나는 틀렸어!” “내 인생을 끝났어.”라고 외친다면,
이것 역시 성령 모독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매일같이 인내하시며,
든든한 성채처럼 지켜주고 계시는 그를 향해,
“너는 도저히 안되!” “너는 희망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이것 역시 일종의 성령 모독죄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성령 모독죄가
바로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가 됩시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역시 모두 귀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