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바쿠스],
카라바조,
1593~1594년경
캔버스에 유채, 66×52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병든 바쿠스 Bacchino Malato]는 카라바조가 로마에 와서 처음 그린 작품 중 하나이다. 당시 그는 성직자들이 제공한 거처를 전전하다 화가 카발리에르 다르피노(Cavaliere d’Arpino)의 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병든 바쿠스라는 제목은 이 그림 속 인물의 안색이 황달에 걸린 듯 누렇고 푸르스름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모델은 화가 자신이었으며, 그가 이즈음 흑사병 (혹은 말에게 채인 부상) 때문에 극빈자 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병에서 회복되기 전의 자기 모습을 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입원 시기가 이 작품 제작에 앞서는지 아닌지가 자료마다 달라, 단지 본인이 아팠기 때문에 바쿠스를 병든 모습으로 그린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후 카라바지오의 작품 세계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의 묘한 공존이다. 카라바지오가 로마에 도착했을 시기, 로마 미술계에서 인기가 있었던 매너리즘 회화의 복잡한 구성이나 난해한 상징과 비교해 볼 때, 그의 그림은 조형 요소가 단순하고 메시지가 직접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항상 있기 때문에 해석이 쉽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는 풍요와 쾌락의 상징인 바쿠스가 가난하고 병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노출된 어깨와 시선은 관람자를 유혹하는 듯하나, 팔은 몸을 가리고 방어하는 듯하다. 그의 근육은 남성의 것이나, 표정과 자세는 여성에 더 가깝다. 그가 머리에 쓴 것은 주신의 포도 덩굴이 아니라 시인의 담쟁이 덩굴이다.
카라바지오는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서 있거나 옷을 차려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를 취한 전형적인 화가의 자화상을 그린 적이 없다. 대신 그는 자신의 그림 속의 한 인물로 분장을 하고 자주 등장했다. 실제의 자신을 숨기면서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런 작업은 20세기 말에 세계 미술계에서 유행한 작가들의 ‘분장 자화상’과 맥이 닿는 것으로, 그는 이런 흐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작가 중 한 명인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1990년에 바로 이 작품 속 바쿠스, 즉 분장한 화가로 분장하여 그에게서 받은 영감을 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