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2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참 인도자와 눈먼 인도자 분별 법
어느 강론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태어나서 앞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경 10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등산이라는 것을 듣기만 했지, 한 번도 등산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같이 등산 한 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가 안내를 할 테니 다 같이 산에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경들은 기뻐하면서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산에 오르기 전에 그 안내자는 다들 앞을 볼 수 없고 나 혼자 볼 수 있으니 우리가 다 함께 몸을 묶으면 앞을 보지 못해도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그 소경들은 흔쾌히 동의하고 일렬로 서서 몸을 밧줄로 묶었습니다.
안내자가 제일 앞에 서서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가면서 그는 그가 볼 수 있는 광경들을 일일이 다 설명해 주었습니다.
소경들은 난생처음 하게 되는 등산에 두려웠지만 그 안내자를 믿고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안내자의 눈이 점점 흐려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내자는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10명의 소경들이 불안해 할까봐 그 사실을 감추었습니다.
그 안내자의 눈은 점점 더 나빠져서 결국에는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안내자는 소경들이 불안해 할까봐 염려하여 오히려 더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저만 잘 따라오십시오. 그러면 무사히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정말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안내자를 따라가던 10명의 소경들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경들은 점차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자 자기 앞에 펼쳐진 장관을 모두 다 또렷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웅성웅성 대는 것을 듣고 이미 눈이 멀어버린 안내자는 이들이 불안해하는 줄 알고 계속해서 안심시켰습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소경들은 그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큰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안내자에게 계속해서 길을 멈춰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뒤에서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기분이 나빠진 그 안내자는 왜 자신을 믿지 못하냐면서 화를 내었습니다.
길은 점점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었고, 몸을 묶은 밧줄은 풀지도 못할 만큼 단단했습니다.
그 눈 먼 인도자는 더 힘차게 낭떠러지 쪽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인도자를 잘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로 누군가가 지어낸 것일 것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인도자를 올바로 선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인도자를 선택하고 어느 정도 함께 하다보면 잘못된 인도자를 따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더라도 그 대열에서 이탈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단에 빠져있으면서도
이제는 창피해서 못나간다는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잘못된 인도자나 그런 인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길이 틀렸음을 알면서도 바꿀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런 이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도 없이 그들의 잘못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셨고,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이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합니다.
그리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퍼뜨린 소문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도자들을 분별할 줄 몰랐기 때문에 망한 이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눈먼 인도자와 참 인도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눈먼 인도자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좀처럼 돌아설 줄 모르고 다른 사람까지 죄를 짓게 만듭니다.
고집이 세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절대로 인도자로 삼으면 안 됩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칠 줄 몰랐습니다.
베드로가 달랐던 것은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수장이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주장만 옳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지도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잘못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때 잘 보아야합니다.
그 사람이 정말 인도자의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지 아니면 끝까지 아집을 부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신의 완전한 삶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동안 저질러왔던 여러 잘못들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고 공적으로 용서를 청했습니다.
참 인도자는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위대한 사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한 때는 자신의 믿음으로 교회를 박해했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자마자 또 자신이 박해하던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충성을 다합니다.
이런 인도자가 참 인도자인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2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마태오 23,13-22
성모님은 사치와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여왕이 아니라,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모후’라는 말은 ‘왕의 어머니’, 또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왕이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충실히 협조하셨던 성모님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씌워드린 것을 경축하며‘여왕’ ‘모후’라는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왕’ ‘모후’라는 호칭은 단순하고 소박하신 성모님, 고향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성모님께 그리 잘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분,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니피캇 찬가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부요한 자들을 빈손 돌려보내십니다.
목에 잔뜩 힘주는 사람들, 잔뜩 폼 잡는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충실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셨던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께 큰 축복을 내리시어, ‘모후’‘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후요 여왕이기는 하시지만, 사치와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모후가 아니십니다.
대신 지극히 인간적인 여왕,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상처로 힘겨워하는 어린 양들을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굽어보시고, 살뜰하고 극진히 챙기시는 봉사의 모후이십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신 후에도, 한결같이 자애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봉사하고 계십니다.
1900년 들어서면서 성모님께 ‘여왕’이란 호칭을 붙여드려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마침내 1953년, 원죄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 100주년을 맞아,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찬란한 화관’이란 교서의 발표하셨습니다.
동시에 1년간의 성모님 성년을 선포하셨습니다.
교서를 통해 교황님께서는 성모님께서 여왕이심을 선포하셨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셨습니다.
그 뒤 교회 전례력이 개정되면서, 성모님을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는 의미에서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이동시켰습니다.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습니다.
이날 교회는 성모님 승천의 영광을 재확인하면서, 성모님께서 세상과 인류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념합니다.
중세기말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님과 관련된 성모님 공경 안에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숙고하면서 조심스럽게 바라봐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능력이 지나치게 과정되면서 교회의 공식적이고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점점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 나자렛 마리아가 보여준 겸손과 순종, 가난하고 작은 여종의 모습은 위축되고 위풍당당한 천상 모후로서의 모습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과도하거나 남용되거나 비합리적이거나 미신적인 마리아 신심에 대한 경고와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능가하시는 분이 절대 아닌 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성모님은 왕이신 예수님의 노선을 철저히 따르는 여왕, 종속된 여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조심스레 한걸음 내딛습니다>
2022. 08. 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마태오 23,13-2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조심스레 한걸음 내딛습니다>
조심스레
한걸음 내딛습니다
나의 한걸음 따라
한걸음 내딛다
행여 누군가
길을 잃을세라
행여 누군가
길을 빼앗길세라
맑고 깨끗한 얼과
바르고 곧은 몸으로
조심스레
한걸음 내딛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