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36
2월16일[연중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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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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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Z9YSRtJSnE
[서울대교구 양정진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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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8천원짜리 순대국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행복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을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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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prEy7NPM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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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은 좀처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게 행복하다면 음식은 왜 먹어야 할까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러면 도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느냐면,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대로 박해받고 모욕과 중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사랑’을 개입시키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면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해서 고생하는 게 행복’이란 뜻입니다. 100세를 넘기고도 활발한 활동을 하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어린 왕자’는 작은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집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그 꽃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이려고 배고파지고, 그것의 짜증을 다 받아내며 슬프고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꽃이 피어있는 자기 별을 떠납니다. 여행하던 중에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기 별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바라는 허풍쟁이, 세상 고통을 잊으려 온종일 술만 마시는 술꾼, 돈만 아는 사업가, 의미 없이 혼자 사는 별에서 일만 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지리학자 등입니다. 이들은 부자이고 배부르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외로워 보입니다.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와 사막여우를 만나 우정을 싹틔웁니다. 사막여우는 관계를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별에 있는 자기를 괴롭혔던, 그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를 다시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록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참 행복은 그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함임을 깨닫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안다면 참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사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안젤로라는 의사 선생님은 학생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성령 안수 기도를 받는 중에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뚫어진 손과 찔린 가시관이 곧 자신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저의 배를 불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었고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배를 채워야 할 젖을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양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셨고, 그 행복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불리려면 배고파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많은 배를 곯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김희아 씨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희아 씨는 모반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괴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지우개가 되게 해 달라며 자기 얼굴이 까지도록 문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그분이 나의 처지를 위해 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멸시를 선택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 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행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한 학생이 건널목을 건너는 신부님을 치어 사망하게 했습니다. 교구에서는 신부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학생을 용서했을 것이라며 학생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찾아낸 물건이라고는 낡은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통장에도 적은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안 받으려던 강의료를 억지로 받아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려고 모아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당신을 위한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사제의 그런 가난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왜일까요? 느닷없이 준비도 못 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행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사랑해서 고생하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사랑 없이 편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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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톱’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노려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뱀은 톱을 몸으로 칭칭 감았습니다. 톱이 숨을 멎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뱀은 톱에 몸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뱀이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만일 뱀이 처음 상처를 받아들이고 톱을 무시했다면 입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상처를 입었어도 톱을 무시했다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만 그럴까요? 저도 어릴 때 뱀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장난하다가 친구가 저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친구의 책을 찢었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서 제 연필을 부러트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친구의 가방을 찢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아셨고, 친구와 저는 무척 혼이 났습니다. 그냥 공책이 찢어진 걸 무시하고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연필이 부러지는 일도, 책이 찢어지는 일도, 가방이 찢어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
장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제목은 ‘빈 배’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묻지 못하면, 다시 소리쳐 묻고 그래서 안되면 세 번 소리쳐 묻는다. 또 그래도 안 되면 나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생의 강을 흐른다면 누가 해하겠는가.”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스는 연일 정치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비가 가려질 겁니다.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저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감정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작은 상처를 무시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먼저 행하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라는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서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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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은 이른바 평지 설교의 시작입니다. 이 본문에서 대조되는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습니다. 전반부의 행복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 5장의 참행복 선언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 이인칭으로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불행 선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불행 선언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유함과 즐거움은 바랄 것이 못 되고 오직 내세에만 희망을 두라는 식의 해석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난과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불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목 헌장’은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26항)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는 구원은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전인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아우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인 기준은 바로 하느님 나라,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오직 영원한 행복이신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합니다. 지금 배부르고 부유하고 웃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기에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도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나누면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현세에서 끝나는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둘 때 참행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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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5,1-12)에서는 산상설교로,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의미이다. 루카 복음에서는 4개의 축복이 나온 다음 4개의 저주가 나오는데 이렇게 축복과 저주가 쌍을 이루게 한 것은 축복의 의미와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복음 내용을 잘 조명해주고 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5-8절).
성경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따라서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 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하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축복이 현재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유하다.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23절)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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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6)
1) 이 말씀의 ‘행복’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고, ‘불행’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심판과 멸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2)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이 말씀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아주 가난했고, 날마다 굶주렸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날마다 울었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나쁜 부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루카 16,19) 그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날마다 웃으면서 살았고, 주변 사람들의 아첨에 취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처지는 저승에서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3-26)
3) 저승에 있는 ‘큰 구렁’은, 한 번 심판이 이루어지면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변경과 취소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큰 구렁’은 이승에서 이미 부자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막고 있는 ‘큰 구렁’은, 가난한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장벽’입니다. 이승에 있는 그 장벽은, 또는 그 ‘큰 구렁’은 부자들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부자들 자신들이 할 일입니다.
4) ‘가난’과 ‘굶주림’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금 가난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또 재물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라자로’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의롭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탐욕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5) ‘부유함’은 그 자체가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착한 부자도 많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라는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분들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채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착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도 과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착한 부자’ 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에 취하면 금방 교만해지고 위선자가 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부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부유함을 유지하려고 애쓸 때, 그것이 악한 일이 아니고, 죄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이미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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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과 불행>
루카 6,17.20-26 (참 행복, 불행 선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행복과 불행>
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내가 없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을 없애면
나도 없으니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과 함께
나는 행복합니다
나 홀로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믿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믿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바라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바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만을 사랑하면
나는 불행합니다
내가
당신의 행복이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내가
나만의 행복이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당신이
나의 행복이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이
나의 불행이라면
나는 불행합니다
나 있음이
행복이요
나 없음이
불행일지니
당신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고
당신을 없애면
나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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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19살에 뇌막염을 앓고 나서 앞 못 보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온몸이 마비된 채 누워계셨는데 얼굴이 항상 맑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된 후 ‘나는 행복합니다’, ‘소라의 꿈’, ‘당신이 머무는 곳’등 많은 영혼의 시를 쓰셨습니다. 그중에 ‘나는 행복합니다’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 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 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 자매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는 데서 행복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감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들,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논리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치시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으로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큽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상의 행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한번 마음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는지?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지?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지?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의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상태가 나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결국, 행복한 사람은 지금 배부르고 잘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은총의 상태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정진하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내와 가난, 다른 이들에 대한 섬김, 사랑으로 위로의 길을 걷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참 행복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증”(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참된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약속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시편 1,1-3)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다면 말씀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차지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으로서 행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의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 있고, 웃게 될 날이 있고,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곡식 단 들고 춤추게 될 날을 알기에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릴 줄 압니다.
사실 오늘날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습니다. 넘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고 남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포장하다가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행복해 보입니까? 예. 왜 행복할까요?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도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보내신 하느님 때문에, 아니,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한번 옆 사람 좀 바라보세요! 그분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 행복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한번 쥐어박고 싶은 분도 계시고 때로는 밥맛이 떨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안 봤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단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셔서 행복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어렵고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부디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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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윤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참행복">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많은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곤 하지만,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부터 답을 내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행복'에 대해서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이 생활 속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차원에서 행복을 정의하는 듯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뜻은 "사람의 운수가 좋은 일이 많이 생기거나 풍족한 삶을 누리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 번째 뜻에서 '풍족한 삶'이라는 말은, 저에게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행복을 느끼게 하는 그 '상태'를 위해 돈은 필수적일까요?
유럽과 미국에서 진행된 한 연구에서는 돈이 실제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미국은 연간 약 4억 원이 필요하고, 서유럽은 연간 9천만 원이, 동유럽은 6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개인의 행복에 연간 가격을 매긴 것으로, 연구자들은 '동료와 비슷한 나이, 교육, 결혼 및 주택 소유 상태를 가진 사람들일 경우, 자신이 더 많이 번다고 믿는 것이 행복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들이 말하는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내가 물질적 우위에 있을 때 느끼 는 만족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돈은 행 복의 정도에 비례할 수는 있으나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도 꾸준히 존재하기에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라는 것보다 '약간의 만족감을 살 수 있다.'고 이해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위에서 말한 사전적 정의가 행복에 대한 개념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이란 '좋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참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받고 소외받는 이들'이 되레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느낄 수 있는 좋은 상태의 행복이란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복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개인의 행복을 넘어서는 보편적이며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하느님 께 향하는 길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다가감으로써 추구 할 수 있는 구원이라는 행복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을 위해 오늘도 주님께 나아가며 그분과 하나 되는 참행복을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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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창범 라자로 신부님]
<행복과 불행의 기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는 이들’을 향해 ‘행복하여라’하시며, 반대로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고, 사람들로부터 좋게 평가되는 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의아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너무나 쉽게 바뀌는 것들입니다. 만약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라서 배가 고프면 행복 선언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저녁을 먹고나서 배가 부르면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도대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과 불행 선언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독서의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한 부류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제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이며, 다른 부류는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입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서 복음을 살펴보면, 행복 선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고,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의 기준은 우리의 신뢰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사람들로부터 미움받기에, 이를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의지하려고 하면 불행할 것입니다.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고, 사람들로부터 좋게 평가받지만, 그 모든 것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면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외적 요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누구를 바라보고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행복은 당신과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불행은 당신과 함께하지 않는 불행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찾아와도, 주님과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기에 행복합니다. 어떤 좋은 것이 우리에게 있어도,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영원하지 않기에 불행합니다.
우리는 지금 행복과 불행 중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뢰를 주님께 드리면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며,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행복하여라.’ 하고 말씀하실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한 주간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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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정비오 비오 신부님]
<가진 것으로 베풀다가 가난해진 사람들은 행복하다.>
제가 살았던 곳에는 지적장애가 있는 행려자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마을 슈퍼 앞에서 혼잣말하고 웃곤 했습니다. 어렸던 저는 그분이 무서워서, 학교 갈 때 전속력으로 달려서 그분 앞을 지나치곤 했습니다. 그분은 제삿집을 찾아가 밥을 얻어먹었는데, 저희 집에도 종종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분께 밥을 한 상 차려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인상적이어서 북동 성당에서 부제 수련을 할 때, 행려자에게 돈을 주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나서, 돈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분이 “부제님, 행려자에게 돈을 주면 술사 먹어요”라고 해서,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찾아온 분이 배고프다길래, 같이 국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또 차비를 달라길래, 버스정류장까지 따라가서 차비를 드렸습니다. 그런 제가 귀찮았는지 그 뒤로 행려자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저는 돈이 굳었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저의 민낯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저는 가난할까요. 사실 예전보다 가난하지 않습니다. 시리아 난민보다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선교사였던 제 아버지보다 부유합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보다 끼니 걱정 없는 지금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을까요? 어릴 적 가난했던 분들에게 농작물을 나누고, 명절 때 자식들이 찾아오지 않던 분들에게 명절 음식을 갖다 드리라던 부모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설명하기 힘든 보람과 행복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시절을 묵상하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해진 이유가, 가진 것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베풀다보니 그리된 것이구나. 예수님은 그렇게 가진 것을 나누다가 가난해진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신 거구나.’
이제는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모습을 벗어버리고, 제가 가진 것으로 궁핍한 이들을 찾아 도와야겠습니다. 그들을 돕다가 함께 굶주리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으로 죽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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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민 요한(인권연대연구센터) 신부님]
<행복하게 역설을 살아가는 법>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꽤 잘 어울리는 답변 가운데 하나가 '역설을 살아가신 분'이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그다지 영광스럽게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혼인도 아직 치르지 못한 처녀에게 잉태되셨으니까요. 또 태어나신 예수님 곁에는 당시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목동들을 비롯해, 심지어 동물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어부나 세리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사랑을 주었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고, 모욕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삶을 '실패한 삶'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실패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역설이 예수님 삶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분 가르침의 요체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가난하고 굶주리며 미움받고 울고 있는 이들은 행복하고, 오히려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고 있는 이들이 불행하다는 가르침은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역설은 우리에게 한 가지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하느님의 행복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고 할 때 사용되는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마카리오스(μεσάριος)'입니다. 원래 마카리오스는 신들, 부자, 권력자처럼 모든 것이 풍요 로워서 근심이 없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뜻하는 단어입니 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전혀 반대의 뜻으로 사용하십니다. 풍요로움이 아니라 빈곤함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설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역설은 상식적으로는 부조리하지만 직관적으로는 옳은 모순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설은 우리가 우리의 상식, 우리의 부유함, 우리의 풍요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눈에는 결핍, 모욕, 실패로 보이는 것들로 우리를 채울 때 삶의 참된 실체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설이 주는 행복함을 잃어버릴 때, 그럼으로써 상식의 세계로 넘어가버릴 때, 우리는 번영 신학과 같은 영적인 천박함에 빠지게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본질인 겸손함과 고통을 잊어버린 채 세상의 부귀영화에 눈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이 품고 있는 역설을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가난과 겸손은 비참과 비굴의 동의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삶 자체에 깃든 풍요로움에 대한 감각을 잊게 되었던 것입니다. 좀 더 우리가 예수님의 역설을 행복 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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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성칠 미카엘(상도동성당)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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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장미 무료
흰 눈 무료
어머니 사랑 무료
아이들 웃음 무료
무얼 더 바래
욕심 없는 삶 무료
양광모 시인의 <무료>라는 시입니다.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며 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행복은 미래에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그때 행복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시간입니다.”(2 고린토 6,2)
양광모 시인도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과 아이들 웃음이 있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죠.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으니 지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공짜이고, 무료입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해도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는 걸까요?” 이 물음에 제가 아는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도 크게 감사할 줄 압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러나 아쉬운 것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것에도 기뻐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가난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우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수녀님은 이 질문에도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이 시대에 울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울음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고, 가슴이 메마른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보다 울 줄 아는 사람이 낫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굶주린 사람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는 수녀님도 대답하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살 뺄 걱정을 안 해도 되니까 행복하겠네요.” 조금씩 살쪄가는 수녀님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지금 우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변에서 늘 만나던 이들은 이런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당신들도 행복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도 철저히 가난하셨고 굶주렸던 분입니다. “이 돌로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예수님께서 배고프셨을 때, 길가의 돌멩이들이 분명 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배고파 보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저는 여러분이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가난이 여러분의 행복을 빼앗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때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행복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는 말일 수도 입니다. 그러나 가난해서 행복할 수 없다면, 돈이 많이 생겼다고 행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일 것입니다. 풍요롭고 돈 많은 사람들이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부유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많고, 그들은 사실 가장 슬픈 사람들일 것입니다.
행복은 얻어 챙겨야 하고 성취하는 데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고맙게 생각하는 그런 능력인 것입니다. <프렌치 스프> 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납니다. “행복은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것이다.”
살아 있어 좋구나
오늘도 가슴이 뛴다
가난이야 오랜 벗이요
슬픔이야 한 때의 손님이라
푸르른 날은 푸르게 살고
흐린 날은 힘껏 산다 (양광모, <인생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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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이냐 많은 이가 현금보다 신용카드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현금의 가치는 없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현금도 그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여기에 만 원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이 지폐가 매우 더럽다면 어떨까요? 또 구겨져 있다면? 만 원의 가치가 아니라 9천 원의 가치가 될까요?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러워도 똑같이 만 원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한다면, 구겨지고 찢어지고 또 더럽다면서 만 원 지폐를 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기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만 원이 만 원인 것처럼, 나의 가치도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 원이 구천 원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만 원으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 가치를 이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가 쓸모없을 리가 없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강조하신 것을 보면 ‘사랑’에 의해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다 보면 자기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 또 사람의 아들 때문에 모욕과 중상을 당하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그 반대인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남에게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의지하느냐, 세상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니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하늘 나라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과 사람들의 인정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잊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가치는 하느님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를 부정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자기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특히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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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유의 특별한 은총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하느님을 만나고 알 수 있도록, 또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라는 우리의 은총은 주님 곁으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써 보려 합니다. 천천히 글을 읽으며 주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이른 아침, 아침 이슬도 사라지기 전에 주님을 따라 언덕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새들의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합니다. 아침 이슬이 우리의 발을 적셔 상쾌함을 더해 줍니다. 저기 수많은 군중이 보입니다. 푸른 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모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바람이 그분의 옷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주님께서 천천히 그러나 힘주어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굶주리고 울고 있으니, 너희는 행복하다. 모욕과 중상 때문에 너희는 행복하다.”
“아~ 너희는 불행하다. 세상에서 부유하고 웃고 있으니, 그리고 배부르니 너희는 불행하다.”
주님의 말씀에서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갈망하고 있으니 행복하고 슬픔에 눈물 흘릴 줄 알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기도 합니다. 주님보다 가끔 세상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웃고 있으니 나는 불행합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지만 지금 주님과 함께 있기에 마냥 행복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언덕 밑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합니다. 순식간에 행복이라는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퍼져 모두가 행복에 가득 차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진정한 불행과 행복은 주님과 함께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따뜻한 가슴을 가졌으면서 가끔은 싸늘한 독선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한 우리에게 주님은 천천히 아침의 신선한 공기처럼 다가오십니다. 아침의 희망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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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은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우리는 많은 우연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우연들 안에서 우연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여겼던 필연
우연이라고 생각됐던 인연
우연 안에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듣기도 하고
치유를 얻기도 하며 희망을 찾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 우연일까요?
어쩌면….
하늘의 뜻은 ‘목적이 있는 우연’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요….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그 안에 내게 필요한 선물을 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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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루카.6,20,24)
인간지사 새옹지마(人間之事 塞翁之馬)라고 합니다. 행복이 불행이 되고 불행이 행복의 근원이 됩니다. 행복할 때 불행을, 그리고 불행할 때 행복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는 동안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불행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곧 하늘나라를 얻게 되리라 믿기에 행복합니다. 지금 굶주리는 것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곧 배부르게 될 것이라 믿기에 행복합니다. 행복은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때 얻는 선물입니다.
지금 우는 것도 곧 지나가게 되고 곧 웃게 될 것이라 믿기에 행복합니다. 우리의 믿음때문에 겪는 미움과 모욕이나 중상모략도 지나가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이 크리라고 믿기에 행복합니다. 불행 가운데 가지는 행복은 세상보다 하늘나라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 얻는 선물입니다.
부유한 것이 불행이 아니라, 주님께 의지할 은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불행합니다. 영원히 가지려는 헛된 믿음으로 베풀지 못하기에 불행합니다. 지금 배가 부른 것이 불행이 아니라, 곧 굶주리게 될 것이기에 불행합니다.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하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 곧 배신 또한 맛보기에 불행합니다.
불행은 우리가 사는 동안 영원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기에 생깁니다. 지나가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에서 생깁니다. 영원한 것은 진리이신 뿐 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지나가는 세상의 행복이나 불행에 집착하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미야 17,5)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 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코린토 1.15.19)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영원한 삶과 참된 행복에 대한 희망을 둘 것을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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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낭독 묵상)
https://youtube.com/shorts/lYgWYinSK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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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예레미아서>에서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이를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이처럼, 축복과 행복의 길은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행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실의 세속정신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행복선언은 현실을 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현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전환을 요청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축복은 첫 번째 축복, 곧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힘도, 돈도, 그 어떤 선이든 모두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행복해 하고, 감사하고, 나누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마지막 것,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에 대해서만 잠깐 머물러 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해주고 호의적으로 말해주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 하고,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비위맞추며 눈치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늘을 보고 있지 않는 까닭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혹은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관계를 맺고, 단순히 공동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단지 인간적인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손도손 재미나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것도, 그저 열심히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 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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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다 내려놓고, 당신만을 차지할 것입니다.
굶주릴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도 마음을 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쁠 것입니다.
진정,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배척받고 모욕 받으면서도 기뻐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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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루카 6,20.24)
<행복을 말하는 사람!>
오늘 복음(루카 6,17.20-26)은 '참 행복과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참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의 개념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아도 불행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이 찾아왔는데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고통스러운 일이 없는데도 늘 짜증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행복과 불행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도 "이런 예수님이셨어?" 하며 예수님을 떠나갈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이제와 영원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 오셨고 땀 흘리셨고 죽으시고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될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 목적과 희망을 믿는 사람들은,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겪는 불편함과 아픔들을 이겨냅니다. 더 적극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1,1-2)
지금 행복한 사람, 지금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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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 21)
우리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참된
행복입니다.
우리 삶 안에
계신
하느님의
참된 행복을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알아주십니다.
우리의 불행을
아파하시며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되돌려놓으시는
하느님의
행복입니다.
우리에게는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십니다.
울고 있는
우리의
슬픔 속에서도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며
행복한 삶을
우리 삶 안에서
당신과 함께
시작하십니다.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든 불행은
우리가
하느님을 떠난
교만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우리가 겪는
가난도
굶주림도
울음도
추방과 모욕과
중상도
행복의
여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참된
행복입니다.
불행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참된 행복을
체험하는
행복한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우리 삶으로
기쁘게
받습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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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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