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Castle)이란 무엇인가?
성과 요새는 기본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둘 모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된 군사적 구축물, 또는 그것으로 방위되는 지역을 말한다.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1)의 말을 빌리자면, '요새의 효과는 두 가지 상이한 요소, 즉 능동적 요소와 수동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요새는 수동적 요소를 수단으로 요새 지역과 지역내의 모든 것을 방어하며 능동적 요소를 수단으로 야포 사정권 밖의 지역에 대해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 한다.
즉, 요새는 요새에 의지한 방어 이외에 주둔군을 통한 공격의 거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성의 역사
:: 성의 구조
- inner ward : 내부구역
- inner curtain : 내벽
- tower : 대형 방어탑
- inner gate : 내문
- outer gate : 외문
- moat : 해자
- drum tower : 소형 방어탑
- outer curtain : 외벽
성은 최초에는 지형적 효과에 의존하여 오로지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런 성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대 로마의 일곱 언덕을 감싼 성벽을 들 수 있다. 로마는 그 성벽에 보호받으며 왕, 원로원, 민회가 공동 통치하는 형식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성벽밖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또 다른 예는 부르흐(Burh)이다. 스코틀랜드 지방의 고유한 형태의 성인 이 특이한 건축물은 밖으로 난 창이 하나도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은 나중에 가서는 영주나 왕의 거주를 나타내기도 하고, 주위 도시, 혹은 국가 간의 경계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큰 성벽도 종종 생겨났다.
10세기 무렵까지 성의 본질적 목적은 지역주민 모두의 보호였다. 성이란 단어의 어원은 카스트룸(Castrum)과 카스텔룸(Castellum)이다. 카스트룸(Castrum)은 지역주민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벽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반면에 카스텔룸(Castellum)은 개인적인 성곽을 의미했다. 영어의 캐슬(Castle), 프랑스어의 샤토(Chateau)나 그 외의 로망스 어 계 「성(城)」이라는 단어는 모두 카스텔룸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캐슬, 샤토 등의 말은 「개인적인 성곽」을 의미하는 말이다.
게르만어의 부르크(Brug)는 12세기 이전에는 「방어 설비를 갖춘 피난처」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12세기 경부터 역시 개인적 성곽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즉, 캐슬, 샤토, 부르크 등은 모두 「봉건 영주의 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롤링거 왕조(9세기)경의 프랑크 문헌에는 팔라티움(Palatium)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 말은 직역하면 「궁전」에 가까운 말이지만, 그 외에 왕후나 유력자의 개인적 가옥에도 적용되었다.2) 같은 9세기에 영국에서는 홀하우스(Hallhouse)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홀하우스는 앵글로색슨족의 건축물로서, 홀을 중심으로 하는 목조 건축물이었다. 팔라티움도 홀하우스도 간단한 방어시설은 있었겠지만 성이라 부를만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도, 영국도 당시에는 중앙집권적인 평화로운 국가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방어를 위한 성벽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9세기 이후 성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대륙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해체되고, 영국에서는 바이킹들의 일족인 데인 인의 침입이 빈번해 짐으로서 사회 유력자들은 개인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팔라티움과 홀하우스는 평면적인 구조를 벗어나, 높은 탑을 가진 입체적인 건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것이 타워하우스(Towerhouse) 이다. 이 변화는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원리인 「높이 쌓아올려 방어선을 축조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변화는 이후에 모트(Motte) 성곽의 기본이 되었다.
이후 성은 흙을 작은 언덕 모양으로 쌓아올린 모트(Motte)라는 기반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수직적으로 높다는 구조는 방어를 할 때 장거리 무기의 사정거리를 늘여주었고, 반면에 적군의 장거리 무기의 사정거리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하였다. 또한,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야 하는 공격측 병사들은 쉽게 지쳤다.
그런 이유로 모트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영주가 생활할 타워하우스가 지어졌다. 성벽은 모트의 가장자리에 지어졌으며 그 바깥쪽에 토루를 쌓았다. 11세기 이후 성은 목조 건축물에서 석조 건축물로 발전하였다.
킵(Keep:本城)
12세기 경 타워하우스는 석조 건축물인 킵(Keep)으로 변화하였다.
킵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사각형과 원형이었다. 초창기 대부분의 킵은 사각형 모양이었지만 빠르게 다른 형태로 변형해 나갔다.
사각형 킵(Square Keep)은 중요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각형 킵의 모서리 부분은 적의 포격(Bombardment)이나 땅굴(Undermine)에 의하여 쉽게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모서리 부분이 없는 원형 킵(Round Keep)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원형 킵은 땅굴로 공격하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화살이나 돌덩이들은 성벽의 곡면에 빗겨맞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킵의 주위에는 성벽(Curtain Wall)이 건설되었다. 킵 주위를 둘러친 성벽은 이내 외벽(Outer Curtain)과 내벽(Inner Curtain)으로 늘어났고, 외벽과 내벽을 따라 방어탑(Guard Tower)이 건설되는 등 성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성의 군사적 가치가 변화한 이후에도, 킵은 여전히 건설되었다. 본디 성주의 개인적 주거지였던 킵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요새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특이한 킵의 형태로는 킵-게이트하우스(Keep-Gatehouse)가 있다. 이것은 성문을 성벽에 건설하는 대신 성문이 있을 자리에 킵을 세운 것으로, 킵의 앞뒤로 성문이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킵의 좌우로는 성벽이 건설되었다. 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외문(外門)을 부수고 들어온 적들은 내문(內門)을 부수는 동안 머리위에서 계속 공격을 받아야 했다.
공성전, 그리고 수성전
성을 점령하거나 방어하는 것은 중세 시대의 군대가 주로 하는 일이었다. 성을 방어하는데에는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했지만, 성을 점령하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어떤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공격할 성 근처의 지역을 제압하고, 성 외부에서 오는 지원을 차단해야 했으며, 직접적으로 성을 공격하거나 혹은 탄탄한 포위공격을 펼쳐야만 했다.
공격군은 공격에 앞서 성을 지키는 영주에게 공격에 대비하라는 경고를 담은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 경고에는 항복 준비를 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침략군의 군대가 성에 다다르면, 보통 그 지방의 사람들은 음식과 무기들을 가지고 성안으로 후퇴했다. 공격군은 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막사와 막사를 보호할 나무 요새(Palisade)를 건설했다. 전투 준비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 양측 군대는 항복에 대하여 협상하였다. 협상이 결렬될 경우 전투가 일어났다.
실제의 공성전에서는 돌격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돌격은 보통 절망적인 상황이거나, 혹은 양동작전을 위하여 주의를 끌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돌격은 수비군에 비하여 공격자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는 행동이었으며, 그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을 경우는 퇴각할 수 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피해가 생기는 돌격 대신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피해도 적은 포위공격이 행해졌다. 설사 지원병력이 도착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수비병력은 싸울 수 밖엔 없었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은 기사들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으며, 수비병에게는 반역죄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원군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패배가 분명한 전투에서는 수비병력은 적당한 기간을 저항한 후 항복했다. 수비군은 항복하면서 공격자에게 자신들이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 저항을 시도했으며 얼마나 용감히 싸웠는지를 증명하는 문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크라크 드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기사의 성)는 십자군 전쟁 당시의 유럽인 요새들 중 가장 유명한 성이었다. 이 성은 십자군 전쟁 초기부터 1271년 아랍인들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130년 동안 구호기사단(求護騎士團:Knight hospitllar)이 방어했다. 아랍인들은 크라크 드 슈발리에의 수비대에게 항복 명령이 담긴 가짜 명령서를 보냈다. 심한 병력차와 지원의 희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수비병들은 명령서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충실하여」 명예의 손상이 없이 퇴각하였다.
전투를 피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공격이 행해졌다. 수비군을 보호하는 단단한 성벽은 공격군에게는 형체를 갖춘 재앙이었다. 이 단단한 구조물을 돌파하기 위하여 두가지 수단이 사용되었다. 성벽을 넘거나 혹은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트레뷰쳇(Trebuchet) 공성기나 망고넬(Mangonel) 투석기가 매일 성벽과 탑을 향해 돌을 쏘았고, 보병들은 사다리를 성벽에 세우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방어자는 사다리를 밀어내거나 돌과 끓는 기름을 머리위로 붓는다.
공격자는 성벽보다 높은 공성탑(Belfry)을 만들어 성벽보다 높은 위치에서 활을 쏘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공성탑에 다리를 설치하여 성벽위로 병력을 투입하려고도 하였다.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기도 하였다. 땅굴을 파서 성안으로 기어들어가거나, 혹은 팠던 땅굴을 무너뜨려 성벽의 기반을 흔들려는 목적이었다. 수비자는 적군의 땅굴 위치를 향해 땅굴을 파들어가 백병전으로 그들을 물리친 뒤 땅굴을 메워버리기도 하였다.
성문이 점령당하면 성안의 공터인 베일리(Bailey)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베일리마저 돌파당한다면 수비군은 최후의 보루인 킵(Keep)에 들어가 농성했다.
1) 클라우제비츠 (Clausewitz, Karl von) [1780.6.1~1831.11.16] - 프로이센의 군사전략가. 게르하르트 요한 폰 샤른호르스트의 제자. 주요 저서로 「전쟁론(Vom Kriege」이 있다.
2) 이 팔라티움(Palatium)에서 팔라딘(Paladin)이라는 말이 나왔다. 팔라딘(Paladin)의 원래 의미는 「궁정기사」로, 그들이 궁전에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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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ㅜㅜ 정말 유익한 자료네여... 그림도 조코여...^^
적군이 킵까지 몰려왔다면 싸움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 없죠.
헤에..진짜루 알고싶었던 성 구조다!! 좋은자료에염 !! 근데 프린트 고장나서 인쇄가 안된다..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