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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그는 누구인가?
1946년 08월 06일 출생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0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서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태몽)
“백말이 말뚝에 매어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어머니 말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공부도 잘하는 편
이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화로는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편파적인 운
영으로 1등상을 놓치게 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하여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다. 5학년때는 선생님의 권유로 학생회장에 출마해 전교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때에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작문에 대해 ‘백지동맹’을 주도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술과 담배는 고등학교때부터 배웠다
학교 졸업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졸업후 농협 취직시험에 낙방하자 독학으로 고시에 도전하지만 책 살 돈이 없어 공사판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상처는 입가에 흉터로 남아있다.
1966년 10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 -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
1968년 군에 입대 -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
1971년 만기제대 (상병)
1973년 01월 결혼 - 고향친구인 권양숙씨와 2년간 열애끝에 1973년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 권씨도 수업료를 못 낼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 부산 계성여상 3학년 때 중퇴한 경력이 있으며 장인은
좌익경력으로 복역하다가 71년에 옥사했다
1975년 03월 사법시험 합격.
결혼후 권씨는 4년여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도왔고 노 전 대통령은 학교졸업후 9년만에,
결혼후 2년만에 마침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어려운 시절을 부인과 함께 한 노 전 대통령은 국민경선 과정에서 장인의 좌익경력이 문제되자 후보를 버려도
아내는 버리지 않겠다며 정면돌파해 여성지지자들로부터 격려의 박수를 얻어내기도 했다.
1977년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용됐지만 8개월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상속세 반환소송 등 100억원대 이상 거액 소송에서 높은 승률을 보이며 재산을 모았고
부산상고 동창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선기간 동안 한나라당으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던 요트타기도 이때의 취미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8년0 5월 변화사무실 개소. 군사정권 아래에서 폭도라 비난받는 학생들 변호.
조세 전문 변호사였던 그는 81년 시국사건인 ‘부림사건’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로 변신.
평범했던 법조인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81년 부림사건을 맡으면서부터.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소개로 부산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이 연루된 `부림사건` 변론을 담당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불법구금과 고문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고 운동권 학생들과의 만나면서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인식을 함께 했다.
고급술집 출입과 요트반 학생들과의 요트타기 취미는 이때 끊어버렸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을 맡은 고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 노동변호사로 변신했다.
1985년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재야인사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한다
1987년 2월에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했으며, 6·10 항쟁직후 대우조선 사건때는
제 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1988년 04월 국회의원 당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부산 동구에 출마,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정당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13대 국회에 진출하는 이변을 낳았다.
"부산 동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 장세동(張世東) 전 안기부장 등 거물급 증인들을
궁지로 몰아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됐다.
송곳같은 질문과 논리적인 추궁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그러나 마지막 증언을 위해 출석한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90년 01월 민주당이 민정당·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을 했을 때, 그는 합류를 거부했다
1990년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 의원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YS와 결별한뒤 김정길 의원 등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해 야당잔류를 선언했다.
3당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의원 몇명과 (이기택, 김광일,김정길, 노무현) 서명파출심 무소속
박찬종, 이철, 홍사덕등이 모여서 구 통일민주당이 ''꼬마민주당''으로 재탄생한 것이죠.
(당에 국회의원이 딱 7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꼬마민주당이죠.)
그중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등 3명은 지역구가 부산이었습니다.
부산에서 김영삼은 ''절대적인 상징적인물''로서 김영삼과 갈라서면 장차 어떻게 된다는 것은
뻔할 뻔자였죠. 그 3인은 92년 총선에서 나란히 ''낙선''했습니다.
1992년 92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
92년 총선에서 YS가 미는 허삼수씨에게 패배 했다.
1995년 부산시장선거에서 김대중당 소속으로 낙선.
김대중의 정계복귀이후, 노무현은 그 행위를 비판하고 반대하였죠.
그러자 김대중은 동교동계와 지지의원들을 데리고 ''뛰쳐나가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만들었죠.
결국 다시 ''꼬마민주당''이 되버린 노무현, 이철등은 비장한 각오로
96년총선에 나섰고, 수도권에 대거 출마했죠.
1996년 총선에 나서서 종로에서 출마 하였으나 낙선.
노무현은 정치1번지 종로에 출마했는데 여당의 고정표는 이명박이 가지고 갔고,
30%에 달하는 호남고정표는 김대중의 공천을 받은 이종찬이 가지고 가서 3위에
그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때가 노무현의 정치생활 최대의 위기였죠.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90년 3당합당과 비견되는 희안한 일이 또 발생했습니다.
민주화운동출신과 개혁야당인사들로 집합되었다고 할 수 있는 ''꼬마민주당''이 난데없이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으로 탄생했죠. 정말 희안한 일이었죠.
김용갑, 정창화, 최병렬, 정형근, 양정규, 하순봉, 박희태등 5,6공 인사들로 포진된 전두환 노태우의
후손이랄 수 있는 한나라당에 재야출신, 운동권출신인 이부영, 제정구, 이철등이 손을 잡은 사건이었죠.
역시나 노무현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두번이나 야합에 노무현은 모두 ''거부''한 것이죠.
특히 이부영이나 제정구의원은 ''꼬마민주당''이 발굴한 재야출신 정치인이었는데 순순히 합당에 응한 것이죠.
결국 정치적 소신을 지킨 노무현은 오갈데없는 ''왕따''를 당한셈입니다
1997년 97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은 결국 ''정권교체''를 위해서 다시한번 야권통합을 위해서 함께
남았던 김원기의원과 함께 김대중후보를 지지하게 되죠.
거기에 DJP연합까지 해서 극적으로 민주당의 김대중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1998년 국회의원 당선 ( 종로지역 보궐선거에서 )
이명박이 선거법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자, 노무현이 보궐선거에 공천되어
큰차이로 당선됩니다. 6년만에 비로소 국회의원 배지를 되찾게 되죠.
2000년 4월 총선에서 낙선
총선에서 그는 재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 지역구를 버리고, 다시 부산에 도전했다.
민주당 깃발로 부산에서 출마하여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였죠.
여론조사에서 계속 앞서던 노무현은 선거 막판에 허태열후보의 지역감정 선동발언으로
다시 낙선하게 됩니다 지역감정의 벽은 두꺼웠고 또 낙선이었다
그 허태열의 발언을 발췌해 보면 후보연설에서
''여러분중에서 김대중이 대통령되고나서 돈버신분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 보세요. 아 저기 손드신분 혹시 전라도에서 오셨습니까?''
결국 노무현은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십니다. 그리고 명언을 남겼죠.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습니까?''
노무현의 낙선에 전국의 젊은이들은 분개했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의 홈페이지에 지지글이 폭주했고, 결국에는 자발적인 팬클럽인
노사모라는 모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국내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죠.
(노사모는 노무현의 사조직이나 그가 운영하는 사이트가 아닙니다.)
'5,6공인사''들과의 정치적 타협이나 야합을 끝까지 거부하고 정치적 소신을 지킨 거의 유일한
''영남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노무현에게 가려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김정길전의원''도
부산지역구의원으로 계속 소신된 행동을 했죠.)
재야 변호사 시절 노변으로
불리던 노 당선자의 별명은 노사모를 거치며 "노짱"으로 바뀌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과정
노 전 대통령은 국민경선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이인제 자민련 총재권한 대행을 누르고 민주당 후보로 뽑혔다.
예선도 힘들었지만 본선은 더 어려웠다.
국민경선 과정에서 치솟았던 노무현의 인기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본격 경쟁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추락, 지지율이 역전됐고 민주당은 후보교체 논의 등으로 내홍에 휩싸이면서 분당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와의 후보단일화를 극적으로 타결지으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선거운동 과정에서 줄곧 이회창 후보를 압도해왔다.
인생에서 유난히 반전이 많았던 노 당선자에게는 이번 대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보단일화후 공동유세 등으로 막판 대세몰이를 거들었던 정몽준 대표는 공식선거운동 7시간여를 남긴
상황에서 노무현 후보 지지철회를 전격 발표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최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정 대표는 미국과 북한에 대한 노선차이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차차기 보장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행정수도 이전공약에 대한 한나라당의 강한 반대논리와 이에따른 수도권에서의 지지율 변화 움직임 등으로
이회창 후보와의 격차가 좁아진 상황에서 터진 느닷없는 지지철회는 노 후보의 당선가능성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하지만 이같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노 당선자는 지역감정 해소에 대한 노력과 정치개혁에 대한 젊은 세대의 지지 등에
힘입어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고 학력과 지역정서, 사상 등 힘겨운 고비를 넘기며 마침내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선거에서 가까스로 대통령으로 당선
2003년 01월 10일 북한 핵확산방지협약 탈퇴. 핵 프로그램 교착상태. 노 대통령 평화적 해결 요구
2003년 02월 25일 김대중 전임 대통령에 이어 5년 임기의 대통령 취임
2003년 08월 북핵 위기 종식을 위한 제1차 6자회담 개최
2004년 03월 04일 국회, 노 대통령 4월 국회의원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며 선거법 위반이라 성토
2004년 03월 09일 한국 최초로 대통령 탄핵 발의. 3일 후 실제 탄핵
2004년 05월 14일 헌법재판소 노 대통령 대통령직 원상회복
2004년 09월 미국 주도의 전쟁 재건을 돕기 위해 3600명 한국군 이라크에 파병
2006년 10월 09일 북한 핵실험
2007년 04월 02일 한국과 미국 자유무역협정 체결. 국회 비준 남아 있음
2007년 05월 17일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한간 열차 운행
2007년 10월 04일 노 대통령 남북한 정상회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이후 2번째
2007년 12월 19일 현대 최고경영자 출신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2008년 0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노 전 대통령 공향으로 낙향
2009년 04월 07일 노 전 대통령 보좌관 부패 스캔들로 수감. 노 전대통령 부인 기업인으로부터 돈 받음 인정.
2009년 04월 30일 검사 대통령 재임 중 600만달러 수뢰 주장
2009년 05월 23일 노전 대통령 투신자살로 사망 (서거)
오전 9시 30분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지지자들이 ‘소신’이라고 칭송하는 그의 행동을, 반대편에선 ‘돌출’이
라고 폄하한다.
각종 노사분쟁 현장에서 중재역을 맡았는데, 사용자측은 “노동자들을 선동해 타결을 어렵게 했다”는 불만을
표하곤 했다.
또 김중권(金重權) 당 대표가 임명됐을 때 ‘기회주의자’라고 부르는가 하면, 정부 여당에 비판적인 언론들을
‘조폭 언론’이라고 부르는 등 적(敵)을 상정한 정치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두환 명패사건,
노무현을 유명하게 만든것은 바로 ''명패사건''도 있죠.
전직대통령인 ''전두환''이 청문회에 호출되는 ''초유의 역사적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생방송을 지켜보았죠
노무현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은 과거에 주장했던 형식적인 발언만 되풀이하고 미리 준비해온 원고만 읽고,
자기는 별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여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청문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야간 몸싸움이 일어났고, 전두환을 자리를 피해서 단상에서 내려와서 떠나버렸습니다.
결국 전두환이 떠난고 단상은 빈자리로 남아버렸고, 청문회는 휴정이되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아마 자정이 거의 되었을 것입니다.)
온국민이 지켜보던 생방송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죠.
그때 노무현은 빈 단상을 향해서 국회의원 명패를 던져버렸습니다.
(이 명패던지는 모습은 TV에 방영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여당에서 꼬투리를 잡고 노무현은 나와서 사과를 해라 하고 밀어붙였습니다.
다시 생방송이 이어지고 노무현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국회단상에 나왔습니다.
여당에서는 그가 명패던진것에 대한 사과를 하려는 줄 알았죠.
노무현은 차분한 그렇지만 비통한 음성으로 국민에게 연설을 했죠. (이날 이 연설이 정말 노무현을 빛나게 해준
명연설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것도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되었으니)
노무현은 정말 국민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명패를 던진것에 대한 사과가 아니었습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즉 전두환을 불러놓고 아무런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런 망가지는
국회의 모습을 보여준것에 대한 사과와 한계,회의를 느낀것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죠.
그래서 자신이 국회의원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명패를 버린 것이고, 이 명패를 던진 것에 대한 행동에 대하여
여당에게 사과할 뜻은 추호도 없다고 했고, 이 문제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자신은 더 이상
국회의원신분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다고 말했죠.
즉 청문회에서 국민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실망시킨것에 대해서 분명히 사과했지만, 전두환을 옹호하는 여당에
대해서는 추호도 사과할 생각이 없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죠.
마치 울분을 토하는 듯한, 그의 발언과 연설에서는 현실정치의 한계에서 체념한 초선의원의 진솔함이 담겨 있었죠.
이것이 바로 소위 ''노무현 명패사건''입니다.
이걸 가지고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졌다'' 이렇게 왜곡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노 대통령은 많은 지지자와 많은 거부자를 동시에 가진 분이었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유는 ‘바보 노무현’ 때문이다. 뻔히 지는
줄 알면서 출마를 고집했고, 고생길이 뻔한데도 옳은 길만을 걸어갔다.
그는 이익보다 정의를 추구했다.
노무현은 평생 이익 대신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의를 앞세웠다. 스스로 늘 손해 보고 패배했다.
노무현을 거부하는 이유 중에는 말실수와 학벌이 반드시 들어간다. 대통령은 자신을 학벌사회, 연고사회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돛단배로 비유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학벌과 학식은 다르다. 노 대통령은 가난 탓에 학벌은 낮았지만 학식은 높았다.
아니 오히려 학자 군주에 비견할 만했다.노 대통령은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위원회를 설치해서 학자들과 대화했다.
정책을 만들 때도 인기보다는 논리적 타당성과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책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특히 서민과 약자들을 생각했다.
이런 훌륭한 대통령이 일찍이 있었던가? 퇴임 후 고향에 돌아가 농사짓고 책 읽는 대통령이 일찍이 있었던가?
부엉이바위에서 내려다본 내 집과 고향 마을은 과연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