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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굳게 닫혀만 있던 고건축 문화재 내부 공간이 공개되고 있다.
이미 경복궁 경회루, 교태전 등과 같은 건축물 내부 공간이 개방되었고, 숙정문이나 창덕궁의 후원도 특별 관람의 형식으로 나마 개방이 되었다. 닫아만 두는 것이 최선의 보존이라는 안이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늦었지만 당국의 열린 자세에 두 손 들어 환영하고 감사한 마음 금 할 수 없다. 관리요원을 더 배치하더라도 전면개방으로 시민들의 문화유산 관람 폭을 넓혀주었으면 한다. 창덕궁 후원이 개방되면서 부용정과 주합루보다 더 북쪽 숲 속에 자리한 연경당(演慶堂)도 일반에 개방되었다. 연경당은 조선 순조 28년(1828) 조선시대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 안에 세운 유일한 민가형 건물로 지어졌다. 그래서인지 연경당의 여러 건물 중 농수정(濃繡亭)만 익공집이고 나머지 건물은 주두나 소로 등 포 부재 장식이 없는 민도리집이면서 일반 사대부집의 꾸밈보다는 섬세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는 전통 건축으로 알려졌다.
장락문 ⓒ 삼척동자 특히 연경당 사랑채는 동양화가인 서세옥 선생과 그의 부인인 <아름지기> 정민자 고문이 1970년대 중반 성북동에 연경당 사랑채를 그대로 본뜬 한옥을 3년에 걸쳐 공을 들여 짓고 지금껏 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 화백은 그 집을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는 뜻으로 무송재(撫松齋), 향기를 엮는 집이라 하여 인향각(繗香閣), 향기를 듣는 집이라 하여 문향각(聞香閣)이라고도 부를 정도로 애정을 쏱고 있다. 옥류천도 보고 연경당도 보기 위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다. 지난 6월 8일 오후 2시부터 두 시간 가량 옥류천 코스를 보았다. 옥류천에서 되돌아 나오는 숲 속으로 난 오솔길 끝자락에 연경당 별채 담장과 서편 행랑채가 보인다. 연경당 주변으로는 산뽕나무 열매 오디가 까맣게 떨어져 있었다.
관람객들이 뽕나무 가지에서 익은 오디를 따서 먹기도 하고 봉지에 담기도 한다. 실한 오디 한 알을 먹어 보니 달콤한 맛과 향이 혀끝에 감돈다. 서편 행랑채를 돌아서니 연경당 바깥 행랑채가 나오고 행랑 앞마당에는 연못과 오래된 느티나무와 괴석 석분들이 손님을 맞는다. 연경당은 대체로 남향하여 가운데 쪽에 안채와 사랑채가 좌우로 붙어 있고 남쪽과 서쪽에 행랑채가 있는데 바깥 행랑채 중간쯤에 큰 대문인 장락문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 삼척동자 굳게 잠겨있던 장락문(長樂門)이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열려있다. 그러고 보니 낙선제에도 장락문이 있었다. 낙선재 장락문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로 알려졌는데 여기 걸린 편액 글씨도 낙선재 것과 닮았다. <장락>은 <오래 오래 항상 즐거운>, <오랜 기간 즐거움>의 뜻일 것이다. <장락>을 <신선이 누리는 즐거움>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가족과 더불어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집이라는 뜻이니 집의 문 이름으로는 이만한 게 없을 듯싶다. 대문은 집주인의 얼굴이다. 되바라지면 주인의 성정도 그렇게 비치고, 화려하고 장대하면 주인의 기개가 활달하게 느껴진다. 안존하면 분수를 지키며 사는 선비 기풍이 느껴진다. 그래서 예로부터 대문은 집의 규모나 격에 맞아야 한다고 했다. 장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남쪽의 행랑채가 있고 행랑에는 다시의 두 개의 중문이 있다. 왼쪽의 것이 수인문(脩仁門)이고 오른쪽의 것이 장양문(長陽門)이다. 하나는 안채로 드는 문이고 하나는 사랑채로 드는 문이다. 장양문은 수인문 보다 크기도 크고 솟을대문으로 되어있다. 장양문으로 들어가면 이집 당호인 사랑채 연경당이 보인다. 사랑채는 주인의 일상거처로 이곳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 문객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 공간이다.
선향재 차양 ⓒ 삼척동자
사랑채 처마 밑으로는 안채로 통하는 널문을 두어 주인이 드나들 수 있게 꾸미고, 사랑채의 동쪽 끝으로는 마루를 한층 높여 시원하게 꾸민 누마루를 만들었다. 사랑채 마당에는 괴석과 석함도 있고 마당 모퉁이엔 석련지(石蓮池)도 있다. 석련지는 물을 채워 연못을 대신하는 것인데 이맘 때면 연꽃이 피어 손님을 맞이했을 것이다. 사랑채의 마당 옆으로는 사랑채와 안채를 나누는 <내외담>이 가로 놓여있다. 이 내외 담에는 통벽문(通碧門)이라는 일각문을 두어서 필요시에 통행 할 수 있게 했다. 사랑채 동쪽으로는 선향재(善香齋)가 자리한다. 선향재는 독서와 서고를 겸한 서향(西向)한 일자 집이다. 특이한 것은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지붕을 내어달았다. 농가에서는 생솔 가지를 두름 엮어 처마 끝에 잡아매어 햇빛을 막기도 했는데 이를 일러 송첨(松檐)이라 했다. 향긋한 솔 냄새가 좋고 짚으로 만든 것보다 무거워 바람에 날리지 않으며 잘 생긴 소나무 그늘에 앉은 듯한 기분도 들어서 여름 지내기가 한결 쉬웠다. 고려사에 송첨에 대한 기록이 있고 단원이 그린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에서도 송첨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선조들의 여름나기 멋과 지혜을 느낄 수 있다.
선향재 온담 ⓒ 삼척동자
선향재 차양지붕은 동판으로 지붕을 씌우고 이 동판 지붕 밑에 정자살로 짜여진 문짝으로 차양을 달아 이를 조절할 수 있게 도르래와 끈을 매어 놓았다. 이런 차양시설은 강릉의 선교장 사랑채의 청동판 보첨과 북촌 윤보선 대통령 댁 사랑에서도 햇빛을 차단하는 보첨을 볼 수 있어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전통적인 시설임을 알 수 있다. 선향재에서 또 하나 특별한 아름다움은 맞배지붕 박공 밑으로 사고석과 검은 전돌과 붉은 벽돌을 사용해 만든 아름다운 온담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온담 가운데 위쪽, 지붕 박공머리 밑으로 큰 사각 틀 속에 팔각 곡두문양(曲頭紋樣)을 넣고 그 가운데에는 파련화 문양을 집어넣어 단조롭기 쉬운 화방벽에 운치와 격조를 더해주고 있다. 선향재 대청 내부 가구를 들여다보니 우물마루에 5량 도리와 대들보 종보 그리고 아무런 꾸밈이 없는 판대공과 서까래가 연등천장으로 들어나 있어 우리 한옥의 조촐한 아름다움을 보는 듯 하다. 대청마루 뒤 쪽으로는 여러 쪽의 분합문이, 방으로 통하는 중간에는 8폭 불발기 분합문이 달렸다.
농수정 ⓒ 삼척동자
선향재 동북 쪽 언덕위로는 장대석 계단과 돌난간을 놓고 안쪽으로 농수정(濃繡亭)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과 측면 각 한 칸인 아담한 정자건물이다. 잘 다듬어진 기단 위에 높은 초석을 배치해 세운 것으로 건물의 사방에는 완자살의 분합문을 달았고 바깥으로는 툇마루를 두르고 완자살 난간을 두었는데 연경당 건물 가운데 제일 화려한 익공집이다. 연경당의 뒤뜰로 해서 우신문(佑申門)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안채는 안주인의 방인 안방과 큰 마루, 며느리 방인 건너방, 부엌간, 찬간으로 구성된다. 연경당 안채에서는 부엌이 따로 없고 반빗간으로 별채에 따로 지었기 때문에 부엌간 자리에는 안방에 불을 때는 함실아궁이와 여름을 보내는 누다락을 두었다.
안채를 들여다보면 올망졸망한 작은 방들이 사랑채까지 이어져 있다. 안채의 방문 높이도 행랑채나 사랑채의 문보다 아주 낮다. 사람이 드나들며 머리와 허리를 숙여야 될 정도로 문이 낮은 것은 늘 나대지 말고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는 듯하다.
사랑채 툇칸 ⓒ 삼척동자 흔히 한옥은 천장이 낮고 칸칸이 막혀 답답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는 잘 못된 편견이다. 한옥의 특징 중에 하나는 개폐가능한 공간구조이라는 점이다. 분합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방이 생기기도 하고 벽이 생기기도 한다. 한옥에서 방을 두실(斗室)이라고 하고 우리 선조들은 자신의 집을 겸손히 일컬어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고도 했다. 한 됫박 두 됫박 하는 단위인 되 두(斗)자에서 알 수 있듯이 두실은 됫박만한 좁은 방이다. 그러나 작기는 해도 선비들은 작은 공간에서 글 읽기에 빠지는 것을 최상의 낙으로 삼았고 앞문과 뒷문을 열어 놓으면 막힌 듯 열린 공간 안에 자연을 끌어들여 큰 우주라도 안고 사는 듯한 멋을 즐겼다. 마침 동쪽 행랑채는 도배를 하고 있었다. 한옥의 내부를 제대로 꾸민다는 것은 도배를 제대로 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도배를 반듯하게 하려면 벽과 벽이 만나는 선이 반듯해야 하고 그러려면 벽이 반듯해야 한다. 천년을 가는 종이 한지 도배야 말로 한옥과 어울리는 최상의 인테리어가 아닌가?
안채 ⓒ 삼척동자
연경당은 순조가 효명세자로 하여금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케 함으로써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궁궐 안에 사대부 집을 짓고 세자 스스로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케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연경당을 짓기 1년 전인 순조 27년에 이미 대리청정을 하던 때이므로 실제로는 세자가 직접 연경당을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효명세자 스스로 백성의 삶을 직접 체험코자 궁궐 안에 사대부 집을 짓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는 왕이 되기를 마다했을지도 모른다. 벽파와 시파간의 치열한 권력투쟁, 안동김씨 일문에 의한 세도정치로 인한 왕조의 위기, 홍경래의 난, 크고 작은 역모사건, 전염병 창궐과 수재로 인한 민심 흉흉 등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세자는 몸도 허약했던 데다가 정사에 쫓겨 심신이 지쳤을 때 이곳 연경당 선향재에서 쉬거나 책을 읽고 농수정에서 사색에 젖어 나라의 안위와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만인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죽고 만다. 그는 왕위에 올라 보지도 못하고 그의 아들이 즉위하니 그가 헌종이고 효명세자는 후에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어쩌면 연경당에는 효명세자의 삶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가 미쳐 다 이루지 못한 한이 서려 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사가에 태어나 사대부의 삶을 누렸더라면 장락문 드나들며 오래도록 즐거운 삶을 누렸지 않았을 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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