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속페달을 밟게 된다. 좀 느리게 달리면서 주변 경치를 살피고 싶어도 비좁은 왕복 2차로에서는 가속페달을 밟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뒤쫓아 달려온 자동차들이 좀 더 빨리 가라고 경적을 울려대기 때문이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부터 앞차의 꽁무니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나무들,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잔잔한 바다, 올망졸망 떠 있는 섬들을 살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무섭게 달려오는 뒷차를 피하려고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가속페달을 더 힘껏 밟게 된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은 나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마음의 품도 좁아지는 것을 느낀다.
잠시 속도 다툼에 대해 생각해본다. 바람직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네 모듬살이를 떠받치고 있는 법칙은 아마도 경쟁이 아닌가 싶다. 다윈의 적자생존의 법칙이 사람 사는 동네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이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퇴출을 당하여, 어두운 그늘에 묻히고 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의 법칙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미지는 키 재기, 앞 다투기, 힘겨루기이다. 다른 사람보다 크고자 하는 욕망, 다른 사람보다 앞서고자 하는 욕망,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힘을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곳곳에 도사리고서 사람들을 들볶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경쟁은 목표를 향한 질주다. 그러하기에 경쟁은 빠르기를 부추긴다. 경쟁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은 목표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자연히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고, 목표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거나 품어 안는 여유를 가질 수 없다. 목표만이 그의 가시권(可視圈)일 뿐이다. 그의 가시권에 들지 못한 존재는 모두 망각의 강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고 말했다. 느린 걸음걸이에서는 주위의 존재들을 품어 기억으로 남길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느린 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시야에 들어오는 존재들을 받아들일 품도 넓어진다. 반면에 빠른 질주에서는 주위의 존재들을 스쳐 지나갈 뿐 기억에 담을 여유가 전혀 없다. 빠른 만큼 시야가 좁아지고, 목표 외에는 그 무엇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서 받아들일 품도 자연히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경쟁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은 자신의 가시권에 들어온 사람을 정겨운 이웃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는 자신의 가시권에 들어온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추월하거나 눌러버려야 할 경쟁상대로 간주할 뿐이다.
하루는 운암이 마조의 제자인 지상을 찾아갔다.
지상은 운암을 보자마자 활시위 당기는 시늉을 했다.
이에 질세라 운암도 칼을 뽑아 화살을 쳐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지상이 소리쳤다.
"너무 늦었어!"
하지만 운암도 물러서지 않았다.
"늦으면 깊은 법이지요!"
이 소리에 지상이 껄껄 웃었다.
빠름의 강도를 다투는 삶은 경박, 아니 천박만을 드러낸다는 것을, 그런 삶에는 심오가 자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이야기이지 싶다. 속도전에는 깊은 혼이 깃들지 않는다. 인류의 정신은 성숙하지 않았는데, 물질문명이 너무 앞서간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빨리 먹는 밥에 체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얼마 전, 평소 존경하는 선배목사님과 통화하면서 값진 속담 하나를 들었다. "대장간의 칼도 삼대를 가야 제대로 된 것이 나온다." 깊이와 그윽함, 얼과 넋이 깃든 것은 그만큼 더디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리라. 분과 초를 다투며 기계로 탁탁 찍어 내놓은 그릇이 명품 전시관에 앉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딘 손길로 느릿하게 혼을 넣어 만든 그릇이라야 명품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즉석복권을 긁어대듯이, 모든 것을 속전속결로 끝장내려는 이들은 설익은 밥만을 먹을 뿐이다. 사는 맛과 멋은 뜸들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경쟁의 법칙이 자리한 곳에서 사라지는 것은 깊이와 정신만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틈도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경쟁에 돌입할수록, 그는 점점 빈틈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빈틈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살풍경한 다툼이 일게 마련이고, 그러한 삶은 모질고 각박해지게 마련이다.
키 재기와 앞 다투기에 빠져 틈을 잃어버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사랑과 이해로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할 제자 공동체가 키 재기 때문에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로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여 다투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속맘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중에서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다(누가 9,46-48).
제자들은 경쟁과 각축에 몰두한 나머지 빈틈없게 된 사람을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예수님은 틈 있는 사람이 큰 사람임을 밝히신 셈이다. 예수님이 밝히신 틈 있는 사람은 어린이 같이 작은 자를 기꺼이 맞아들이는 사람, 고통 받는 이웃, 동료, 옆 사람을 환대하는 사람이다. 큰 사람은 틈 있는 사람이고, 품이 넓은 사람이다. 바로 이런 사람의 품에 주님이 보금자리를 치시고, 하느님이 깃들이신다.
이 점에서 본다면, 키 재기와 앞 다투기에 몰두하다가 사람을 받아들일 틈을 상실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도 하느님도 깃들이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존재조차 품어 안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존재를 품어 안을 수 있겠는가?
[장자]에는 “달팽이의 양쪽 뿔” 이야기가 있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나라를 정한 이 있으니 촉씨라 하며, 달팽이의 오른쪽 뿔에 나라를 정한 이 있으니 만씨라고 하는데 서로 땅을 다투어 싸우니 시체가 수만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키 재기와 앞 다투기는 서로를 받아들일 틈과 여유를 없애버리고, 결국 살림의 세계가 아니라 죽임의 세계를 몰고 올뿐이다. 안타깝다, 달팽이의 뿔 위에 나라를 정했으면 달팽이 가는대로, 달팽이의 속도로 느릿느릿 행보하면서 한없이 깊어지면 좋았을 것을.
살림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틈은 느림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틈에서는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받아들임과 환대, 사랑, 생명의 탄생, 사귐 등이 일어나는 것다.
나는 고단하게 남을 앞지르고, 남을 밟아 누름으로써 얻는 기쁨을 버린 지 오래다. 소시에는 종교계를 주름잡는 큰 인물이 되리라는 부질없는 야심을 품기도 했지만, "느릿느릿"과 "빈 틈"을 트레이드마크로 내건 자연의 세례를 받고나서는 그 부질없는 야심을 마음자리에서 내려놓았다. 풀 한 포기, 들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졸졸졸 흐르는 물줄기와 어우러질 줄 아는, 그래서 또 하나의 풍경이 되는 것, 그것이 내 꿈이다. 지금 내 본업은 매순간 다가드는 은총에 맛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보폭을 익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말했다, 하느님의 보폭은 봄이 오는 속도와 같다고. 그 보폭을 잊지 않고 붙잡는 것은 그분과의 대화를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날마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빈둥거림과 농땡이의 연속이다. 그래도 지향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적이 없다. 다들 뛰어가는데 나 하나쯤 처져서 기어간들 나무랄 사람은 없으리라. 복 있으라, 이정표 없는 질주에서 벗어난 보배로운 빈둥거림, 소중한 농땡이, 보기 드문 느릿느릿이여! 자연이 깃들고, 사람이 둥지를 틀고, 하느님이 보금자리를 치는, 깊이의 끝을 모르는 느림이여! →김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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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느리면 깊다" 지극히 당연한 진리지만 평소에는 잊고 살아가는데 목사님으로 통하여 나를 돌아보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영성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목사님의 글 읽기만 하고 답글도 드리지 못해 카페 온에 목사님 모습만 보이면 늘 죄송한 마음이랍니다... 오늘도 잠시 인사라도 여쭐까 망설이다 그냥 ...
방금 전까지 앞에 가는 자동차 꽁무니만 바라보다 왔습니다. 잠시라도 늦어지면 신경질을 내는 운전자들... 나도 어느새 그들 중에 한 사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여유있는 마음으로 살기를 희망해합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어서라도 천천히 하나님의 보폭을 따라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김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
아굴라님! 부족한 글에 함께 동행해주시고, 사람, 자연, 하느님이 깃들이시는 느림의 여유로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람 걸음걸이만큼만 속도를 내며 살고 싶습니다. 사람의 걸음걸이, 봄이 오는 속도, 하느님의 보폭,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보폭만큼만 속도를 내며 산다면 쉬이 넘어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원화님! 여름에도 낮기온이 10도에서 15도 사이라는 말씀을 듣고서 조금은 부러웠습니다. 요즘 이곳은 한밤에도 섭씨 25도를 웃도는 열대야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져 먹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맛이 있다는 생각을 되찾습니다. 이렇게 인사해주셔서 고마워요. 자주 뵈어요.
천국열쇠님! 무한질주와 무한성공의 신화를 향해 너무 앞서 나가는 야곱에게 하느님께서 브레이크를 거신 사건이 생각납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을 절름거리며 살아간 야곱의 인생 후반기는 하느님의 보폭을 익히는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보폭을 유지하는 것, 저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늘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