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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스타일'에 관한 小考(1968~2003)
글쓴이 : 대중음악평론가 조원희
1976년 사상 초유의 히트곡이 탄생했다. 제목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악곡의 형태는 트로트 계열의 음계를 차용한 8비트 록넘버. 지역정서를 중심축으로 한 인기몰이는 전국으로 퍼지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 전대미문의 히트는 지금처럼 '기획'에 의한 전면적인 마케팅에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 초근처럼 방송 매체들이 쉽게 음반을 받아서 틀 수 있는 상황 또한 아니었다.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 시스템도 없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요'라고 불리우는 한국 대중음악이 서구 팝 음악에 비해 엄청나게 천대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공식적인 첫 히트가 이런 여러가지 핸디캡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후 구의 행보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만드는 포인트다. 조용필은 당시 '업소'들을 통한 장기간의 연주활동을 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서구 대중음악에서 우리가 그렇게 ㅂ부러워하는 '공연 투어'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첫 행보는 '어떠한 사회적, 문명적 발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았다. 너무나 고답적이고, 또한 너무나 인력에 의존한 히트였다.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로 한국 대중음악의 기초가 마련된 이후,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교과서적인 히트곡이 탄생했던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이 곡이 '밴드 스타일'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신중현과 같은 거대 권력을 지닌 작곡자나 편곡자가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 홍선우의 곡을 아티스트 자신이 스타일화하여 새로운 편곡으로 던져냈다는 것은 주목해야할 사실이다.
1976년 '밴드스타일'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이전, 그는 같은 곡을 1972년 메이저 음반사가 아닌 지방 음반사용으로 통기타 반주 버전을 취입한 적이 있다. 제작자는 트로트 풍으로 불러달라는 주문을 했고, 조용필 자신은 그 주문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4년후,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록과 트롯을 융합한 형태로 새로운 편곡을 했고 그 완성품이 바로 전대미문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던 것이다. 곡이 뭇혀 있었던 4년간, 1970년대적인 유행의 변화는 또한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세월을 횡단했을까.
하지만 조용필의 감각은 그러한 시간의 간극을 완벽하게 극복해 내는데 성공했다.
1976년은 조용필에게 아주 중요한 해다. <<조용필/영사운드>>의 음반, 그리고 조용필로서는 <추억의 종이배> 단 한곡을 제외하고 전국을 작곡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출발 앨범 <<님이여>>가 발매된 것이다. 가왕의 탄생은 이렇게 트로트와 록밴드 스타일, 두가지 출발점을 지닌다
조용필의 음악적 변화는 크게 3기로 나뉜다
첫번째 시기는 1970년대 초반 데뷔 시절로부터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활동 중단에 이르는 시기까지
두번째 시기는 1980년의 '재기'로부터 1988년 10집 파트 1과 파트 2까지 . 음반에 소속되어 있던 시기이자 소위 '연말 가수왕'을 석권하던 바로 그 전성기이다.
세번째 시기는 1990년대. 소속사로부터 독립해 자주 플듀서 시스템을 완벽하게 성립한 그 시절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이다. 하지만 크게 나눈 이 시기들을 또한 2시기씩 쪼개어 살펴볼 수있다. 본고에서는 편의상 1970년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로 나누고, 그 시기들을 각각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총 6기로 규정하고 각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1970년대 중반기
1968년, 본격적인 프로페셔널 음악활동을 시작한 조용필은 벤춰스와 비틀즈의 영향권 아래 음악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포지션은 기타리슽. '가왕'이라는 칭호의 그가 연주자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연예인'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이 시절. 그는 밴드를 일종의 트레이닝 수단으로 생각했다. 무대 위에서, 멤버들과 호흡을 맞춰나가면서 즉흥적인 연주를 하는 것은 물론,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앙상블은 곧바로 악상으로 옮겨나가는 작업을 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우드스탁 세대의 몰락과 짐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의 사망에 이르는 서구 팝 음아계의 지각변동을 때로는 모사하고 때로는 응용하면서 클럽 뮤지션 생활을 계속했다. 말하자면, 당대의 '유행을 선도'하는 밴드였던 것이다.
1970년대 말. 그는 전설적인 프리 재즈 퍼커션 뮤지션 김대환, 기타리스트 최이철과 함께 밴드 '김트리오'를 함께 한다. 또한 김트리오 활동 시기에 즈음하여 당시 리더 김대환과 친분이 있던 재즈 색소폰의 달인 강태현과 교류를 하게 되면서 청음과 채보법 등을 학습하기도 한다. 당시 뮤지션들과 함께한 것이다.
조용필은 이때, 텐션코드와 스윙감 등, 재즈적인 음악 요소들을 습득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고, 자신은 '재즈의 맛도 모르면서 어깨너머로 조금 배웠다'는 식으로 겸손해 하지만, 그가 이 기간 동안 얻어낸 음악적 파운데이션은 시간대 성능비 만점의 것이었다.
이 시기의 활동으로 그는 장기간 클럽에서 연주할 수 있는 지구력과 다양한 레퍼토리를 지니게 되었다. 그는 김트리오 활동에서의 재즈적인 감성과 당대 최고의 서구 기타리스트였던 지미 렌트릭스의 영향을 접목시켜서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었따. 바로 '조용필과 그림자'였다. 그는 프로야구 페넌트 레이스와 같은 정신, 즉 장기간의 연주활동으로 음악적인 완성도를 높여갔다. 아직 '방송출연'을 하지 않은 무명밴드였지만 클럽에서의 대우는 최고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최고였고, 청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전. 중반기는 바로 이 '조용필과 그림자'가 그 활동의 핵심을 차지한다. 이 밴드를 운영하면서 수 많은 팝 레퍼토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레퍼토리의 확장 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대 유행하던 록, 소울, 그리고 포크에 이르는 수많은 '해외 장르 음악'에 대한 연구를 동반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가 1970년대 '목소리를 만들던' 시기에 소울 음악에 천착했다는 것은 그의 가창력이 다른 어떤 뮤지션들과도 차별되는 코어(core)를 지니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는 스티비원더, 제임스 브라운, 그리고 로드 스튜어트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목소리를 벤치마킹하며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몰두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스트레이트'한 음악인 록보다 훨씬 더 기술적인 면이 강조되고, 또한 20세기 대중음악의 70%를 만들어낸 흑인의 감각을 가져왔다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정상의 뮤지션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다. 1980년대 그의 전성기 동안 어느 한 장르에 치우치지 않은 음악적인 내용을 보여줬다는 것은 이 시기의 연구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증거한다.
조용필은 이 밴드 활동와 함께 지방 레코드사와 계약을 했고, 대중들에게 파고들기 쉬운 '트로트계열'의 음악을 자신의 스타일에 접목시킨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76년 발매된 <<조용필/영사운드 너무 짧아요/긴머리 소녀>>음반이다. 한면은 조용필의 곡이,다른한면은 <긴머리 소녀>를 타이틀로 한 영사운드의 곡들이 포진해 있는 일종의 컴필레이션인 이 음반은 조용필이 '음악적 욕심'을 부린 타이틀곡 <너무 짧아요> 보다, 1972년 김트리오 시절 사랑과 평화의 이남이와 함께 이미 녹음한바 있었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밴드 버전이 큰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이 곡의 엄청난 히트와 함께 조용필은 8년여간의 '무명'의 딱지를 떼어버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소위 '퇴폐향락문화'에 철퇴를 가하던 군사독재정보는 조용필에게 '대마초'가수란 누명을 씌우며 그를 대중들로부터 분리시켜버렸다. 수상 도중 그는 남산의 취조실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직접적인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한 정치적 상황. 조용필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처연하고 다채롭다
1970년대 후반기
조용필, 1970년대 최고의 히트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만들어낸 그의 이름은 정권의 탄압에 의해 순식간에 잊혀졌다. 하지만 그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수 많은 아류작, 대한민국의 온갖 항구에 대한 노래들이 나오면서 그 영향권을 행사했고, 또한 그와 같은 트로트와 밴드스타일을 접목시킨 수많은 후배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가왕은 수면 아래로 잠수했지만, 그의 그림자는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용필 그 자신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외면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풍의 노래가 아니었던 것이다.단지 대중들의 취향에 영합한, 수준낮은 노래로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는 또한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유명세를 가져다 줌으로써 역으로 자신의 음악 생활을 단절시켜 버린데 대한 그 곡을 향한 자신만의 원망이 깔려 있기도했다. 여기서 우리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의 제왕이었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그들 최고의 히트곡을 너무나 싫어했던 것을 떵ㄹ릴 수 있다. 뮤지션들의 음악적 고집은 자신의 성공수를 뛰어넘는 경우가 많은 것일까
그는 '절망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을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 이 땅을 떠나서 이민을 갈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그것도 쉽지는 않은 일. 그는 대중 앞에서 마음대로 연주를 할 수는 없었지만,어두운 연습실, 그리고 대 자연 속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또한 연주 감각을 우지했다. 그리고 수 많은 팝 음악과 후배, 동료 뮤지션들의 한국 대중음악을 들염 동시대적인 감각 역시 유지한 것이다. 이런 와신상담 속에 1979년, 결국 박정희 정권은 한 발의 총탄으로 사라지고, 1980년대 가왕 조용피르이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1980년대 전반기
박정희 정권의 퇴진과 함께 조용필은 그간 묻어 둔 자신의 음악적 혼을 엮어 한 장의 앨범을 출반한다. 바로 1970년대 대표곡들과 신곡들을 모은 <<조용필 1집>>을 출반한 것이다. 조용필은 4년간의 공백을 완벽하게 깰 수 있었다. 지난 4년간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수많은 클럽에서 불리워졌고, 가왕이 돌아올것이라는 대중들의 기대는 쌓이고 또 쌓였던 것이다.
<<조용필 1집>>은 단순한 히트곡 모음집이 아니었다. 단순한 트롯만이 차지하고 있던 '성인가요' 시장에 마이너 발라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메가톤급 히트를 기록했떤 넘버, 그가 직접 작곡한 야심작 <창밖의 여자>가 A면 1번 트랙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용필은 왕좌로 돌아오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장르를 연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들의 취향에 야합하는 수준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렇다면 '트로트' 장르로 점철되어 있는 슬로우 템포, 소위 발라드의 영역에 도전해야 했다. 그가 만들어낸 곳은 보수적인 취향의 대중들을 설득하는 곡이었지만 그 형식은 대단히 혁신적이인것이었다. 바로 이 부분 '보수적인 취향의 대중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혁신적인 노래들'은 앞으로 조용필이 계속 가지고 나갈 그의 거대한 전략이 된다.
새로운 발라드 <창밖의 여자>가 방송과 클럽 모두를 점령하고 있을때, 그는 또 하나의 신곡<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통해 전통적 트로트 시장에 대한 안배도 잊지 않았따. 뿐만 아니라 <한오백년>을 통해 득음의 경지에 이른 자신의 목소리를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동안 소울풀한 창법만 선보였던 그가 새롭게 보여준 자신의 목소리는 한국 전통음악의 '한'이 서려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공백기간 동안 만들어낸 자신의 새로운 목소리는 놀랍게도 소울과 전통음악의 크로스오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곡은 따로 있다. 바로 <단발머리>이다. 팝음악의 뉴웨이브와 전통적인 소울의 팔세토 창법을 접목시킨 이곡은 그 완성도에 있어 20세기 한국 대중음악을 통털어 가장 화려하고 또한 독특한 것이었다. 신서사이저 연주와 훵키한 기타의 앙상블. 후일 조용필 자신을 비롯해서 공일오비 등의 후배 뮤지션들이 리메이크 했지만 이러한 원곡의 '맛'을 내는데는 모두 실패했다.
조용필의 음악 감독적인 재능이 처음으로 빛난 1집 앨범이후 그는 재기에 성공한 1980년이 채 가기도 전에, 한국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것을 계기로 기념음반 성격의 2집을 발표한다.
TV 드라마 주제가였던 <촛불>이 타이틀곡인 앨범이었다.
1981년, 그는 자신이 음악감독이 된 새로운 앨범을 출반한다. <미워미워미워> 와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수록된 3집 앨범이었다. 1980년대 초반, 최고의 음반 구매자들은 지금과는 다른 성인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곡을 타이틀로 삼은 것은 전략적인 마케팅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3집에서 또 한곡의 명곡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고추잠자리>이다.
사이키델릭한 스타일과 휭키한 16비트 리듬이 이상적으로 녹아있는 이곡은 그야말로 조용필식 진보음악의 정수로 볼 수 있다. 당시 대중가요의 보편적인 가사 형시겡 비추어 보아 상당한 이질성을 띠고 있는 본 곡의 가사를 캐치해 낸 조용필은 실험적인 이펙트 기법, 주도면밀하게 겹겹을 쌓아나간 보컬 더블링, 한국 대중가요 파일에서 단연 돋보이는 반전을 수반하는 극적 구성 등 다양한 방법론을 투입, 하나의 완성형으로 가사의 이미지를 형상화시켜 내고 있다. 단순히 스트ㅔ이트한 록 넘버라기 보다는 조용필이 그동안 자신의 음악적 핵심으로 지니고 있던 소울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곡은 4집의 훵키 넘버들인 <못찾겠다 꾀꼬리>와 <자존심>으로 이어진다. 특히 당대 <못찾겠다 꾀꼬리>에 가리워져 큰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던 <자존심>의 경우 그 훵키한 초퍼 베이스라인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흥분도를 지니고 있었다. <못찾겠다 꾀꼬리>로 조용피링 훌륭한 뮤지션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면,
<자존심>과 같은 넘버의 완성도는 그에게 '위대한 뮤지션'의 칭호를 조금도 아깝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기의 조용필은 단순하게 '장르 백화점'적인 히트 상품을 만들어내려고 했떤 여타의 '가수'들과는 차별화되는 관점의 멀티 장르적인 특성을 지닌다. 즉 <오빠생각>이나 <따오기>등과 함께 창작 동요인 <난 아니야>와 같은 따뜻한 넘버들을 함께 지니고 있다. 소울과 록이 퓨전된 새로운 음악, 그리고 성인층을 공략하기 위한 마이너 발라드, 더욱 보수적인 대중을 위한 정통 토르토, 거기에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은 민요들까지.
그것은 발라드로부터 댄스와 랩까지 팝음악 형읳 ㅕㅇ태소들을 따라가기에 급급한 요즘의 다장르 뮤지션과는 분명 차원이 다른 음악적 궤적을 지닌것이다.
그의 멀티 장르적 행보는 자신의 지난 음악적 수련기의 포괄적인 자을 수련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즉, 그 자신이 이미 30대 초반의 적지 않은 나이로, 10년여의 혹독한 수련기를 통과하면서 그에 비례하는 음악적 욕심과 대중에 대한 자세를 내장해 왔으며, 복귀와 동시에 그 동안의 그러한 축적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놀라운 완성도로 펼쳐 내 놓는 다. 하나의 앨범에 이질적인 장르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개개의 작품들은 결코 간과하지 못할 수준의 독립적인 장르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장르 특유의 음악적 의지가 표현되어 있었다. 시기적으로 아직 채 다양성의 시대로 진입하지 못했던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의 수용자들은, 이러한 장르별 완성도의 기반위에서 세대와 취향을 가로질러 한 지점에서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그 어느 아티스트도 성취하지 못한 조용필만의 성과로 자리잡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그의 음악세계를 후대의 시각으로 파악하는데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1980년대 후반기
1980년대 전반기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는 ㅍ현을 해도 될 정도의 조용필은 1985년, 그의 7집 앨범을 통해서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한다. 더 이상 나아갈 음악적인 진보가 그의 기준에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세계로 뻗어 나가기 가장 편리한 장르였던 '록'음악의로의 본격적인 진출이었다.
때로 아이돌 스타들이 음악적인 성숙의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 억지로 록 음악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 때 마다, 1980년대 조용필이 보여줬던 안정적이면서도 또한대단히 파격적인 실험을 동시에 동반한 그의 록음악을 떠올리며 웃음짓게 된다.
1980년대, 조용필의 증언대로라면, 조용필이 7집 앨범을 들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나타나기 전까지, 대중들은 록이라는 음악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공중파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몇몇 고집스러운 아티스트들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음악적인 이디엄이었기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필은 이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냈다. 호텔의 디너쇼나 어른들을 위한 공연, 때로 안정적인 방송 스케줄만을 따라가도 충분히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던 그가 '낮은대중' 을 위한 음악이자 실질 구매력이 적은 '젊은이'들의 음악이었던 록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친위 쿠데타'에 가까운 것이었다. 1990년대, 10대 소녀들을 위한 발라드로 인기를 얻었던 신새철이 '친위 쿠데타'를 통해 본격적인 록으로 전향했던 것이나 댄스 뮤직으로 치부되던 랩 음악을 록과 접목시키며 자신들의 팬들을 놀라게 만드렁ㅆ던 서태지의 행보, 이는 모두 조용필의 '7집 쿠데타'라는 대중음아그이 혁명, 그 영향권 아래 있는 것이다.
사실 조용필은 자작곡이 트롯 넘버인 <정의 마음> 단 한곡밖에 없고 나머지를 모두 유명작곡가들의 노래로 채운 6집 앨범을 통해서 '인기'는 이어나갓지만 음악적인 포기 선언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고 이썼다. 하지만 그는 후일 1년에 한 장 이상 꼭 앨범을 내야만 하는 소속사와의 계약때문에 6집을 탄생시켰고, 그러면서 동시에 7집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어제, 오늘, 그리고>의 스트레이트함. <미지의 세게>의 놀라운 음역 구사, 그리고 <아시아의 불꽃>과 같은 곡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 하면, <여행을 떠나요>로 이 땅에서 단 한번도 각광받았던 적이 없는 '진짜 본고장의 록큰롤'을 멀찍이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여준 것이다.
1980년대 전반기, 그가 소울을 완성했다면 그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자마자 록큰롤을 완성했다. 그가 음악을 시작한지 20년도 안된 세월, 이 정도를 이뤘다는 것은 '대중문화의 수입국'인 이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성인층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성인층을 공략하기 위해서 얄팍한 상업적 전술을 취한 것도 아니다. 7집과 같은 해에 발표한 그의 8집 앨범엔 양인자. 김희갑 콤비의 최고 명곡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너무나 파격적인 자세로 레코드에 각인되어 있다. 대중추수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을 이끄는 선도자로서의 자세는 성인가요에서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7집과 거의 같은 컨셉트로 진행된 9집 앨범, 그리고 1988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가운데 발매한 2장의 10집 앨범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이제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처럼 앨범의 한 면을 한 곡으로 채우는 드라마틱한 음악의 실험도 쉽게 할 수 있는 상황,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 과 같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장의 길이를 가진 트랙'을 탄생시키기도 하낟.
1980년대 후반기의 조용필은 이렇게 '안전한 옥좌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저 낮은 곳으로부터 저 높은 곳까지 모든 대중들을 아우를 수 있는 명실상부한 제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1990년대 전반기
1980년대,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그는 이제 소속사로부터 독립,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만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1990년, 새로운 10년이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그의 12집 앨범에서는 차트 1위곡인 <추억속의 재회>를 통해 그의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준다. 이제 그의 음악적인 코드는 '원숙미'이다. 1990년대, 이제는 발라드의 시장이 다채로워지고 있었다. 특히 트롯의 멜로디라인과는 차별화된 메이저 발라들이 변진섭, 이승환, 신승훈 등의 출현과 함께 매우 달라지고 있던 상황이다. 이때 조용필은 1990년대 발라드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다. 그 곡은 바로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였다. 신세대 작사가인 박주연의 가사에 조용필이 직접 작곡한 피아노 발라드인 이 곡은 분수 코드를 이용한 클라이막스의 5도권 진행이 그야말로 감미로움과 후련함 거기에 애수까지,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던져준다. 이제 조용필은 단순한 음악 권력자, 제왕으로부터 '거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의 거장으로서의 발자취는 또 한편의 컨셉트 앨범인 13집, <<The Dreams>> 를 통해서 완성된다.
'꿈'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내세운 이 앨범은 때로는 동심으로 회귀하고 싶은 현대인의 정서, 그리고 꿈을 잃은 현대인의 상실감을 직접 공략하기도 하며 최고의 완성도를 구가하고 있다.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던 <꿈>의 히트는 물론, <장미꽃 불을 켜요> 의 서정성과 폭발력의 만남은 그야말로 그에게 '마이에스트로'의 칭호를 주는 것을 조금도 아쉽지 않게 한다. 마에스트로로 변신한 수퍼스타. 그는 어덜트록의 최고 명곡 <흔적의 의미>가 담겨있는 14집 앨범에서 <고독한 러너>를 통해 변화한 환경 속에서 거장으로 살아남는 법을 이야기한다. 10대 취향의 발라드와 랩 댄스 음악으로 모든 방송이 획일화되는 그 상황 속에서 현역 뮤지션으로 고독하게 한 길을 걷는 이는 정말 조용필 단 한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기~현재
1994년, 조용필은 밴드와 함께 돌아왔다. 언제나 전체적인 사운드를 장악하는 음악감독의로서의 편곡능력이 최고였던 그는 지금까지 밴드를 '백 밴두' 이상의 것으로 활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5집 앨범에서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였다.
1994년 발매된 이 앨범은 그 커버가 상징하듯 조용필이 '위대한 탄생'의 한 멤버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희망이었던 들국화으 손진태가 1980년대 메이저 필드의 제왕이었던 조용필과 손을 잡고 함께 앨범을 만들었다는 것은 1990년대의 현실 속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끝없는 날개짓 하늘로>와 같은 한국적 프로그레시브록의 전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상업적인 주목을 얻어내지 못했따. 뿐만 아니라 대중들은 물론 평론가들까지 일렉트로닉 댄스뮤직과 아직 힙합의 형태도 지니지 못한 랩 음악에 경도되어 그이 신작을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소수의 평론가들만이 이러한 상황에 비분강개했다.
이러한 조용필 음악사상 최악의 상황이 지나고, 3년의 와신상담 끝에 그는 1997년, <바람의 노래>가 수록된 16집 앨범을 내놓았다. 톰킨, 제러미 러복 등 세계적인 세션 뮤지션들과 함께 만든 16집 앨범은 그야말로 핑크플로이드(Pink Floyd)가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이미지 사운드의 향연이었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간 거장의 솜씨에 목말라 있던 대중의 호다ㅏㅂ으로 대단한 판매고를 올린 앨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조용필 록'의 집대성인 17집 <Ambition>을 1998년 발매하게 된다. 제목처럼 거장의 야망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앨범은 멜로디아 편곡의 조화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그동안 조용필이 관심을 가져왔던 가사들은 더욱 세련되게 앨범 전체에 포진해 있고, 그 가사를 휘감는 조용필의 선율은 그야말로 '거장의 손길' 그 자체였다
<작은천국>은 그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추구했던 '동시대성'과 '보수적인 대중성' 그리고 '동심으로의 회귀'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명곡이었다. 이러한 후기 조용필의 작품들은 이제 세계 어느 밴드도 부럽지 않은 안성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증거물은 2002년 발매된 조용필의 공연실황 DVD <<비상>> 이었다.
최고의 '위치'에서 최고의 '실력'을 구사하는 뮤지션은 많지 않다. 한국 대중음악 최고의 거장인 조용필에게 후배 뮤지션들은 당연히 경배해야 할 것이고, 평론가들은 존경의 글을 바쳐야 할 것이며, 대중들은 환호와 기립 박수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글출처 : 팬클럽 위대한 탄생 발간 인쇄물 ' 조용필 THE HISTORY'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