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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동 서 원
조선사림파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될 만한 김굉필(1454∼1504년)을 봉양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원래는 1568년 현풍읍 동쪽 비슬산 아래에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란 때 불타버렸고, 전후 재건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이곳의 대니산은 김씨 일가의 선영이 있는 곳이고, 김굉필이 직접 대니산 중턱에 초막을 짓고 선친의 3년상을 지낸 곳이기도 하다. 대니산 아래 낙동강을 굽어보는 경사지에 서원의 입지를 잡았다. 그런데 이 서원은 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강 건너 고령 땅의 개진들과 그 들판에 솟은 잘생긴 안산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스승이었다.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면서 예의 실천과 도의 실현을 가치로 생각했으며, 무오사화 때 도와 예를 위해 죽음으로써 동방5현에 오른 인물이다. 현 도동서원의 설립자는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영남학파의 걸출한 예학자인 한강 정구(1543∼1620년)였다. 모셔진 인물이나 지은 인물 모두 예와 질서를 중요한 규범으로 생각한 이들이다.
그 인물에 그 건축이랄까. 도동서원은 한 마디로 질서와 규범의 정신으로 꽉 짜여져 조직된 건축물이다. 질서와 규범의 건축적 표현은 통일성과 위계성 그리고 대칭성이다. 아마 이 의도들은 비단 도동서원뿐만 아니라 예학의 시대에 지어진 모든 서원 건축, 더 나아가 성리학적인 건축들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18개의 좁고 긴 석단들로 비교적 급한 경사지의 터를 닦았다. 후에 조성된 수월루 위한 석단을 제외한다면, 강당과 사당을 위한 두 곳의 평지 사이에 매우 좁은 수많은 석단들이 중첩된 구성이다. 석단들의 동일한 수법이 대지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석단들의 좁고 넓은 운율이 부분들의 전체성을 확보한다.
석단들로 조성된 터 위에 건물들을 세웠는데 모두가 맞배지붕의 동일한 형태들이다. 사모지붕의 환주문만이 다른 형태지만 워낙 규모가 작아 무시될 정도이며, 최근 중건된 수월루만이 팔작지붕의 형태다.
맞배지붕은 가장 단순한 목조 건물의 지붕 구조이면서도 가장 엄숙하고 견고한 형태이다. 따라서 엄격함과 신성함을 지녀야 할 유교 사당 건물에 잘 어울리는 유형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처럼 모든 건물을 맞배지붕으로 통일시킨 예는 찾아보기 어렸다.
동일한 형태지만 건물들간의 위계질서는 명확하다. 강당이 가장 크고 높으며, 재실들은 그보다 작다. 강당 영역의 정문인 환주문은 나지막한 1칸 문이다. 강당, 재실, 문간의 순으로 위계화된 질서가 건물의 규모와 격식의 차이로 나타난다.
정확한 직선의 중심축 위에 수월루, 환주문, 중정당, 내삼문, 사당이 배열되었다. 서원의 중요한 건물이 모두 중심축선상에 배열된 것이다. 이 정도는 다른 향교나 서원에서도 흔히 발견된다고 한다면, 도동서원은 중심축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한 가지 장치를 더하고 있다. 좁은 폭의 길과 계단을 모두 중심축선상에 놓았고 잘 정제된 석물들로 마감하여 중심축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비록 대칭성이 모든 유교 건축의 규범이라 할지라도, 도동서원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의례공간뿐 아니라 일상 생활공간인 고직사(도동서원에서는 전사청이라 부르는 부분)까지도 대칭의 규범을 적용하였다. 이곳의 전사청은 서원의 노복들이 기거하면서 유생들의 음식과 세탁, 청소 등을 수발하던 곳이며 제사 때에는 제수를 마련하고 참례인들의 숙소로 제공되던 곳이다. 이런 행위들은 전혀 비대칭임에도 불구하고, 전사청은 ㄷ자집으로 가운데대청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방 배열을 하고 있다.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 잦은 변형이 있었고 실질적으로 대칭의 구성이 해체되었음은 물론이다.
강당 건물은 주목할 만하다. 서원건물치고는 드물게 주심포 형식의 정교한 건물이고 당당한 위풍을 자랑한다. 강당의 기단은 매우 이례적이다. 면석들을 잘고 복잡한 형태로 잘라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구성하였다. 기단 중간 중간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끼워 놓기도 하고, 다람쥐와 액자 모양으로 조각한 돌도 끼워져 있다. 서원 건축으로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그렇지만 대단히 정교한 모습이다. 게다가 강당 측면에는 돌로 만든 툇마루까지 놓여 있다. 강당 기단뿐 아니라, 입구 계단과 사당 앞 계단에도 용머리나 봉황, 연꽃문 등이 새겨져 있어 묘한 미소를 자아낸다.
용연사 극락전-도유형문화재 제41호
용연사(龍淵寺)는 통일 신라 53대 신덕왕 1년 912년에 보양국사가 창건한 선종 (禪宗)계열의 전통깊은 천년 고찰이다. 보양국사(寶壤國師)는 청도 운문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던 중국 유학승이다. 조선 세종대왕 1년 1419년에 천일 대사가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왜병이 불질러 불타버렸으나, 사명대사의 명으로 다시 지어졌다. 극락전은 영조대왕 4년 1728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極樂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多包系)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졌고, 18 세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아래 부분은 화강석으로 쌓아올려 기단을 높게 만들었다. 높은 기단은 주위 건물에 비교해서 극락전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다포계는 지붕과 기둥 사이에 화려한 소 혀 모양의 포를 여러 층으로 쌓아올리는 건축 양식이다.
이 방식은 지붕과 기둥 사이에 공간을 넓게 만들었기 때문에, 건물의 크기도 높고 규모도 훨씬 넓다. 다포계는 주심포와 구별되는 방식이다. 주심포는 기둥 위에만 포를 쌓아올려 건물의 규모가 크지 않다. 맞배지붕은 지붕을 앞과 뒤에만 덮고, 지붕 좌우 모서리에는 추녀를 달아두지 않은 삼각형으로 된 지붕을 말한다. 그리고 맞배지붕에서 발전한 팔작지붕은 지붕 좌우 모서리에도 추녀를 달아놓은 지붕을 말한다.
극락전(極樂殿)은 서방 극락 정토에서 계시면서 중생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극락정토는 중생들이 모든 고통과 윤회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기쁨과 평안만이 있다고 해서 안양국 (安養國)이라고도 한다. 용연사에서는 범종루를 안양루 (安養樓)로 부른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로 자비를 베풀어주는 관세음보살과 지혜의 빛을 비추어주는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그러나 용연사 극락전은 한 가운데에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 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셨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민중 사이에 미륵 신앙과 정토 신앙이 크게 번성하였다. 정토 신앙은 불경의 깊은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陀佛) 염불을 외우면 극락 정토에 왕생한다는 민중 신앙이다. 또한 고려 성종 대왕 때에 아미타 결사가 비슬산을 중심으로 해서 조직되었다고 알려졌다. 용연사에서 대웅전을 대신해서 극락전으로 그대로 부르고 있다. 아마 용연사는 그 시대에 아미타 정토 신앙을 이어나갔던 전통 깊은 큰 사찰로 짐작된다.
용연사 석조계단
용연사 석조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이곳에 봉안된 사리는 신라 선덕왕 때 고승인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는 길에 2과(顆)를 가져와 두 함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괴하고 사리를 도굴 했으나 유정대사가 격문을 보내어 송환 받았다. 이에 송운대사가 받들고 금강산에 가서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태백산 보현사와 통도사에 안치코자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송운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봉안하여오던 것을 청진스님 등이 현종 14년(1673) 5월 5일에 이곳 용연사에 사리탑을 건조하고 안치하게 되었다.
계단은 석조로 된 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중앙에 안치한 형식으로 상층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을 양각하고 하층기단의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했다.(사천왕상은 도난 우려로 별도 보관중임)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나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 구조에 균형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그 수법이 상당히 우수하다.
달성 인흥마을 남평 문씨 문중문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남평문씨 세거지의 인수문고. 1910년 무렵 문영박 선생이 19세기 책으로 만들고, 그의 3대 후손 문태갑씨가 20세기 책을 덧기운 문중문고다. 1차 경사자집 2만여권에 2차 문사철 5천여권을 합쳐 2만5천여권이다. 희귀, 진귀본이 아닌 기초학문에 필요한 것 위주여서 국권회복 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행정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402번지. 비슬산 북편자락 서남향의 인흥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다. 문익점의 18대손이자 대구 입향조 문세근의 9대손인 인산재 문경호(1812~74)가 61살(1872년)에 집을 짓기 시작했으니 130년쯤 된 마을이다. 그 후손 수봉 문영박(1880~1930) 아들들이 분가해 한 동네를 이루면서 1만평에 아홉 살림집과 두 재실(수봉정사, 광거당)이 들어섰다. 키를 넘는 흙담 뒤로 살림집들은 문을 잠갔고 남정네 서넛이 겨우내 약해진 토담을 고치고 있었다.
“72년 전 1935년에 ‘장안 3재’ 중 한명인 김태준이 여기를 다녀가서 기행문을 쓴 적이 있어요. 영남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문집류가 그 목록에 실은 것만 193종이니 기호 본위로 모은 규장각도서관, 이왕직도서관, 한림서림 등의 서적 목록에서 보지 못한 것이 상당수 있다고.”
인터넷 시대에 이곳까지 찾아온 젊은이(?)가 대견해서일까, 이곳 문중문고 지킴이인 문태갑(78)씨가 선뜻 ‘인수문고’ 문을 열었다. 겨우내 고인 찬기운이 후르륵 빠져나갔다.
문고의 규모는 1095종 6948책. 경(經) 536책, 사(史) 1813책, 자(子) 588책, 집(集) 4011책이다. 개인 문집인 집부(60%)가 가장 많고 사, 자, 경 순이다.(1975년 조사 결과) 근자에 나온 문집, 전적류 1000책과 집안의 개인 장서 600책을 더해 모두 8500책 정도로 추정된다.
갈색 오동나무 상자가 서가에 가지런하고 개개 뚜껑에는 속에 든 책이름과 책수가 적혔다. 뚜껑을 열자 좀약 냄새. 한적이 두 줄로 차곡차곡 가로 뉘어 있다. 두께에 따라 30~40책이 들어간다. 76책인 <강목(綱目)>은 두 상자에 나뉘어 담겼다. 어떤 책은 방금 인출해 묶어내 먹이 묻어날 듯하고 어떤 책은 몇 손을 거친 듯 낭창낭창하다. 책 밑에 서목과 권수를 적어두었고 미처 그렇지 못한 것은 한지 꼬리표를 달아 서로 구분했다.
독립운동 혐의로 잡혀가 고초도
문고를 만든 이는 문영박. 호는 수봉(壽峰) 또는 수백당(守白堂), 자는 장지(章之)다. 서른 즈음인 1910년부터 타계한 30년 직전까지 20여년에 걸쳐 모아들인 것이다. 수봉은 허미수를 이은 남인 계열로 치주 손정은, 만구 이종기한테 배우고, 심재 조긍섭, 근재 정지순, 다곡 이기로, 백괴 우하구, 소암 김현동 등 거유들과 어울렸다. 일찌기 국토를 순례하며 견문을 넓히고 1910년 따로 광거당을 지어 만권당을 두었다. 그곳에서 매일 5~6명의 유림이 모여 필요한 책 목록을 만들고 하나하나 사들였다. 대구시내는 물론 서울을 수시로 다니며 직접 책을 구입하고 중국 쪽에서는 창강 김택영(1850~1927)의 도움을 받았다. 사학자인 창강은 당시 중국에 망명해 양쯔강 하류 난퉁에서 출판소 일을 거들고 있었다. 배로 목포까지 실어온 책은 다시 달구지로 여러 차례 인흥으로 끌어들였다.
거질의 <이십오사>, <강목>, <십삼경주소> 등이 낙질없고 <성호집>, <면암집>, <매헌집>, <학호집> 등 개인문집 사이에 <임충민공실기>도 끼어 있다.
그는 <약산만고>, <대산실기>, <결송장보>, <만성집> 등을 협찬 간행했다. 서고 한켠에는 금세 찍고 꽂은 듯 잔먹이 흔연한 목판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남긴 글모음 <수봉유고>를 보면, 그는 29년 봄 옛 것을 지키고 집안에 먼뎃손님이 드나듦이 많은 까닭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혐의로 구금돼 신문을 받은 적이 있으며 대구시의 한 서점에서 서점주인과 식사 중 검사국에 소환돼 조사받기도 했다. 또 서른살이나 차이가 나는 창강과 망년지교로 창강이 중국에서 간행한 <열하일기>의 발(跋)을 썼다. 비밀문서라고 내놓으며 상해 임정을 빙자해 겁박하려는 자를 물린 사례가 있어 수봉은 임정 사정을 잘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행장’ ‘가전’). <독립유공자공훈록>은 그가 19년 임정수립부터 31년 만주사변 한 해 전 별세하기까지 13년 동안 전국 각지를 왕래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임정에 군자금을 전해 주었다고 적었다.
국권 회복 대비해 사 모은 듯
“귀중한 것 하나 보여줄까요?” 문태갑씨는 비닐봉지에서 액자를 꺼냈다. 비단에 인쇄한 ‘추조문’과 ‘특발문’. 임시정부가 30년 12월 그가 죽자 임정 경상도 책임자 이교재를 통해 보낸 것이다. 이교재는 이를 전달하지 못한 채 체포돼 옥사했으나 50년 집 수리 중 천장에서 발견돼 후손에게 전달됐다. 수봉을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 기리고 ‘임정에 의연금을 보내주어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임정이 이토록 기린 것은 군자금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았겠는가. 문씨의 추측이다.
‘무엇’이란 다름 아닌 역사의식이 아닐까. 희귀 진귀본이 아닌 역사서와 문집을 사모아 길이 전한 것은 국망산하재 하니 언젠가 회복할 나라에 다시 필요할 터, 이에 이바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가 문고를 직접 언급한 적이 없어 추정할 따름이다.
‘횡령한 후손은 출입금지’ 규약
‘광거당 전수규약’을 보면 △독서와 학문을 하루도 폐하지 말 것 △책을 열람할 제 더럽히거나 찢지 말 것 △가벼이 빌려주지 말며 빌려줄 때는 반드시 적어둬 돌려받을 것 △7월 초에 한차례 햇볕을 쬐어 좀과 습기를 막을 것 등을 지시하여 세전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자손 중 한 권 책, 한 뼘 땅, 푼돈, 한 말 곡이라도 공물을 횡령한 자는 본당 출입을 금한다며 공사를 분명히하고 있다.
이 책들은 광거당 다락에서 10월 대구폭동과 한국전쟁을 온전히 버텼다. 그 와중에 백여점의 서화는 흩어졌다. 문씨는 가는 새끼로 친친 동여매 우물에 넣어 보관했다가 두어 달 뒤에 꺼낸 화첩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물먹은 먹그림은 그대로인데 낙관은 겹친 종이에 번졌더란다. 후손들은 82년 정부 보조로 지금의 자리에 서고를 따로 짓고 인수문고 현판을 달아, 70년부터 광거당과 수봉정사의 책을 합쳐 존안각에 보관해 오던 것을 옮겨왔다. 몇해 전에는 경인문화사에서 내려와 석 달간 머물며 문집 100여종과 상당량의 문헌을 영인해 갔다. 책에 손상이 가지만 나눔으로써 이바지한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응했다.
“인수문고의 정신 그대로 기초학문에 꼭 필요한 20세기 책들을 모았어요.” 93년 5천여권의 ‘중곡서고’를 인수문고에 이어붙인 문태갑씨는 수봉의 둘째아들 진채(1906~90)의 둘째. 인수문고를 바탕으로 학자가 되려했으나 여의치 않아 언론계, 정관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 와중에 “인수문고를 보첨할” 한국학 기본자료를 모았다.한국사 네질(조선총독부, 진단학회, 국사편찬위원회, 한길사), 각종 지리지, 유명인사 자서전, <역사학보>, <과학사상>, <한국학보> 등 주요잡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사대계> 등 백과사전류, 한국문학·예술·역사 연구서.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출간된 주요서적들이다. 홍명희-홍기문-홍석중 3대의 책, 북한판 <조선통사>(국내인쇄본)가 눈에 띈다.
중곡서고 건물은 인수문고 왼편에그보다 공간을 적게 차지하고 읍하듯이 서 있다. 인수문고 책들이 오동상자에 누운 반면 중곡서고 책들은 유리장 안에 세로로 꽂혔다.
이상이 19세기 서책이 흠없이 보관돼 온데다 20세기 책을 더해 기적처럼 명맥을 이어온 문씨네 문중문고의 소종래(내력)와 소이연(까닭)이다.
혹여 좀약이 책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대학 한문학과와 결연해 한 해 한 차례 포쇄를 하려고 했어요. 학생들이 원본을 만져보는 기회도 될 것이라며 좋다고 하고는 연락이 없더군요.” 문씨는 또 “구경 온 전공자 가운데 원본을 들춰보는 사람은 열 명 중 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늙은 회화나무를 에돌아 수봉정사 뒷길로 빠지면 광거당. 본디 만권서가 있던 자리다. 유자들의 두런거림 대신 울처럼 두른 대숲에서 쏴아, 바람이 일었다. 엄습하는 쓸쓸함. 이곳에서 사극을 찍었다던가. 경사자집은 위패처럼 모셔지고 현금 한국학 책은 트로피처럼 갇혀 예와 지금의 맥이 끊긴 것은 아닌지….
다시 마을 앞 소나무군락과 조산무더기, 애잔한 신라 고탑. 3대 100년에 걸쳐 장관을 이룬 문중문고는 매향에 잠기고 또 한 명의 나그네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 한겨레신문에서 발췌 -
육신사
대구 계명대학교 성서 캠퍼스에서 성주 방면이나, 왜관 방면으로 가다 보면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이신 취금헌 박팽년(醉琴軒朴彭年)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의 집성촌이고, 구한말까지는300여 호의 집이 꽉 들어차 있었고, 해방 전까지 만해도 100여 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30여 호만이 남아 있다.
이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가면 맨 끝에 높직한 솟을대문이 나온다. 이 대문이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육신사(六臣祠)의 정문이다. 또, 육신사 내의 태고정이란 곳은 보물 5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먼저 육신사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이다.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 사육신으로 일컫는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사당을 지을 대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제삿날 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뒤부터 나머지 분들의 음식도 장만하여 함께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 뒤 하빈사(河濱祠)를 지어 이들에게 제사지내다가,1691년(숙종17) 낙빈서원을 지어 이들을 봉안하고 제사지냈다. 1866년(고종3)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서원이 철폐되자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유림들에 의해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워 다시 사육신을 봉안해 왔다. 그 뒤 1974~19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육신사를 건립하였다.
현재 육신사가 들어선 대지에는 박팽년의 유복손인 박일산이 세운 아흔아홉칸의 종택이 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초익공계의 정교한 구성을 보여주는 조선 중기의 정자 건물이다. 대청이 있는 오른쪽에는 팔작지붕, 방과 부엌이 있는 왼쪽은 맞배지붕으로 이곳에 부섭지붕을 달아 마감하였다.
사육신은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에 의해 그 자신은 물론이고 일가친척까지 3족까지 멸문지하를 면치 못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손이 있었으니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다. 박팽년의 일가가 형벌을 받을 무렵 둘째 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임신중이었다. 나라에서는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비로 보내라는 엄명이 내렸다.
부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때를 같이하여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 부인의 아들과 바꿨다. 박비(朴婢)라는 아명으로 외할아버지에 의해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가 16세가 되었을 때,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모부 이극균이 처가인 묘골에 왔다가 장성한 그를 보고 자수를 권했다. 상경하여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돌아온 그는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아흔아홉칸 종택을 짚고 묘골에 정착했다.
이에 박비는 박일산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떳떳하게 나서 묘골을 터전으로 잡고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사육신 중 유일한 혈손인 박일산의 후예들은 육신사를 세워 사육신 여섯 어른의 제사를 매년 지내고 있다.
육신사는 1927년 기초공사를 시작하여 1981년 완공한 건물로 외삼문, 삼층각, 숭절당 등이 들어서 있고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박일산이 창건한 태고정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외에도 묘리에는 박팽년의 후손들이 건립한 충효당, 금서헌, 삼가헌 등 고가들이 들어서 순천박씨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외삼문, 삼충각, 숭절당, 관리사, 담장 등을 갖추었다.
사당 앞에는 1979년에 ‘육선생사적비건립위원회’ 에서 세운 육각비(六角碑)가 서 있고, 각 면마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태고정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가공이 정교한 편이다.
삼가헌
묘골 입구로 나와서 오른편 지름길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주요 민속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고,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묘동 박황(妙洞 朴煌)가옥이 나온다. 이 집이 바로 삼가헌(三可軒)이다.
충정공 박 팽년(忠正公 朴彭年)의 11대손인 가선대부이조참판 삼가헌 성수(嘉善大夫吏曹參判 三可軒 聖洙)가 영조(英祖) 45년(1769)에 건립하여 그의 호를 따라 삼가헌(三可軒)이라는 편액을 걸고 이듬해 그 서편에 정각을 세웠으며, 주변에 국화를 심고 연못에 연꽃을 심어 정자 이름을 하엽정(荷葉亭)이라 불렀다.
이 건물의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앞이 사랑채이고 이를 거쳐 안채에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조선시대 관아(官衙) 양식과 비슷하며 사랑채는 ㅁ자형으로 이루고 있으나 두 동으로 분리되어 있는 분산형이다.
정면 4간, 측면 1간의 일자형 평면으로 곳간 2간, 대문간 1간, 방 1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사랑 대청 4간, 온돌방 2간을 두었으며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대청 안쪽으로는 1간의 마루방이 있고 그 뒤로 1간의 온돌방이 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2간의 부엌, 2간의 안방과 반간 폭으로 개방된 툇마루, 정면·측면 각 2간의 건너방, 2간 반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사이 서쪽에는 장독대, 우물, 곳간채, 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초가로 된 중문채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진입하는 통로로 180°회전해야 진입이 가능하며 방아실 등과 같은 헛간채의 일부가 중문이다.
별당은 원래 서당으로 쓰던 4간 5행의 ㅡ자집을 1874년 현재의 모양과같이 개축했다. 여기에 ㄱ자로 돌출된 누마루를 부설하여 연당과 어우러진 운치있는 별당채가 완성되었다.
삼가헌의 건평은 68평이고 하엽정 약 15평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04호 이다.
해묵은 기와집과 투박한 돌담이 잘 어울리는 한개마을
위 치 :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고향길 같다. 차창 밖의 평범한 풍경이 오히려 고향처럼 소박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또한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은 계절의 풍요로움을 말해주고, 나직한 산자락에 등을 기댄 마을마다 가을걷이하느라 몹시 분주해 보인다. 그러나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마을은 여느 마을들과는 달리, 여유 있고 고즈넉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랜 내력을 이어온 전통마을 특유의 위엄과 기품이 엿보인다.
한개마을의 한개는 큰 나루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옛날 낙동강 물길을 따라 이동하던 나룻배가 백천의 물길을 거슬러서 이 마을 앞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당시 교통의 요충지이자 큰 나루터를 끼고 있던 한개마을은 경상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백천은 작은 쪽배 하나도 떠다니기가 어려울 만큼 수량이 적어서 옛날의 나루터 풍경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성산 이씨의 집성촌인 한개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마을 뒤쪽에는 영취산(331m)의 산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있고, 앞쪽에는 백천이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그런 지세로 인해 옛날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길지(吉地) 중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조선 세종 때에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였고, 그 이후 월봉 이정현의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가 얼추 500년가량 이어져오는 셈이다.
내력 깊은 한개마을에서는 이름난 선비와 학자도 여럿 배출되었다. 조선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으로서 평생토록 절의를 지킨 돈재 이석문, 조선 말기에 성주를 빛낸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응와 이원조,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유명한 한주 이진상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현재 한개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과 옛 건물에도 이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한개마을 북비고택의 사랑채
한개마을의 큰길은 Y자 형태이다. 갈림길 지점에 진사댁이 있고, 왼쪽 길로 들어서면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이 차례대로 나온다. 반대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하회댁, 극와고택, 한주고택이 잇달아 나타난다. 왼쪽 길의 첫 집인 교리댁은 영조 36년(1760)에 지어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북비고택은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는 집이다. 이 북비고택은 사랑채 마당에 잔디를 깔아놓아 퍽 깔끔해 보이고, 안채 마당의 한쪽에는 가지런히 돌담을 두른 장독대가 아주 인상적이다.
한개마을 한주종택의 한주정사
오른쪽 골목길의 맨 위쪽에 자리한 한주종택은 이진상이 고종 3년(1866)에 새로 고쳐지은 집의 원형을 지금껏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또한 한주종택 내의 한수헌은 높이 쌓아올린 축대 위에 지어진 정자인데, 마치 깊은 산중의 정자처럼 호젓하고도 자연스런 느낌을 준다.
한주종택의 앞집인 하회댁은 대문에서부터 사랑채, 안채까지 집주인의 부지런하면서도 정성스런 손길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넓은 마당에는 잡초 한 포기도 찾아보기 어렵고, 집안의 안팎은 늘 정갈하게 소제된 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술독, 쌀독, 바가지, 키, 말[斗], 옛 다리미 등이 빼곡하게 들어찬 곳간도 눈길을 끈다.
각양각색의 자연석과 황토흙을 섞어 쌓은 한개마을의 돌담
이처럼 한개마을에는 마을의 역사와 함께 내력을 이어오는 고택이 많다. 하지만 이들 고택보다도 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구불구불 이어지는 고샅길이다. 이곳 고샅길의 담장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죽담이다. 황토흙 사이사이에 크기,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군데군데 박아놓았다.
그래서 언뜻 무질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현대적 감각으로는 감히 흉내조차 어려울 만큼 멋스럽고 자연미가 넘친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돌담을 끼고 이리저리 골목길을 걷노라면, 어느 고택에서 어머니나 할머니가 달려 나와 반가이 맞아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더욱이 이곳의 주민들은 역사가 숨쉬고 인정이 살아있는 전통마을에 사는 사람들답게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초면의 관광객까지도 피붙이처럼 반갑게 맞아준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
석선산 아래 태봉에 자리한 이 태실은 조선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와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원래 이 산봉우리에는 성주이씨 중시조인 농서군공 이 장경의 묘와 묘각이 있었으나, 조선왕가에서 왕자들의 태를 한곳에 안장하기 위해 지관을 통해 길지를 찾던 중 이곳의 산세와 지형이 뛰어난 명당이라 하여 이 장경의 묘를 옮기게 하고 세종 20년~24년(1438~1442년) 왕자들의 태를 안장한 곳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태실지이다. 태실은 높이 140cm의 화강암으로 되어있다.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 항아리와 태 주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식을 세웠다.
처음에는 20여기의 태실을 두었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과 무고로 연좌된 화의군, 계유정난에 죽은 안평대군의 태실과 태실비 등은 세조 3년(1457) 에 산 아래로 파 던졌으나, 1977년 흩어진 석물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세조가 왕위에 등극한뒤 예조판서 홍 윤성이, 세조의 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고 비를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 볼 수 없으며, 민담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찧고 갈아서 거의 글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태항아리, 지석 등의 유물의 일부는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및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1929년 왕가로 모두 옮겨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이 장경의 묘를 옮긴 것은 그의 장지에 노승이 나타나 "산(태봉)위의 나무를 베고 12개의 관으로 깊이 묻어 묘를 쓰면 더 없는 길지이나 묘각을 지으면 후일 소유주가 바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마침 산위의 나무를 베니 나무에서 큰 벌이 나오면서 노승은 쏘여 죽고 후손들이 11개의 관으로 묘를 쓰고 그 후 묘각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방사지 칠층석탑
이 석탑은 신라 후기 애장왕 때 창건한 동방사의 석탑이다. 원래는 9층의 탑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파괴되어 7층만 남아 있다. 높이 약 8m이다.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 8세기 말 신라 애장왕 때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전소된 동방사(東方寺) 경내에 있던 석탑으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방사는 수백 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대사찰로 절터는 논밭으로 변하고 석탑만 남았다.
일명 지기탑(地氣塔)이라고도하는데, 성주의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소가 누워 있는 형)으로 동남쪽의 성산, 서쪽 풍두산, 북쪽 다람쥐재 등으로 둘러싸여 냇물이 성주를 돌아 동쪽으로 빠지고 있어, 지기(地氣)가 냇물과 같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석탑의 옥개석은 훼손되고 2층 탑신까지는 양측 우주와 중앙부 탱주가 있으며, 3층 탑신부터는 우주만 남아 있고, 각층의 옥개석 모서리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것이 특색이다. 성주 읍내에서 왜관읍으로 가는 33번 국도를 따라 1㎞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다.
회연서원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소재하고 경북유형문화재 제51호이다. 조선 선조 때 문신이었던 한강 정구가 1583년에 회연초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627년 정구를 주향으로 건립하였으며 1690년 사액되었다.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신정리 봉비암 아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정염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영남 5현(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가운데 1명인 정구가 1583년(선조 16)에 세워 제자들을 교육하던 회연초당(檜淵草堂)이 1627년(인조 5) 지방사림의 여론에 따라 서원이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 사액을 받았다.
경내에는 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양현청은 없어졌다. 현판은 한호가 쓴 것으로 유명하며, 1977년 사당과 동·서재를 고쳐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정구의 문집판인 《심경발휘(心經發揮)》가 보관되어 있다.
강당의 마루 안쪽 벽에는 사액되었다는 측기가 적힌 ‘회연서원’ 편액을 가운데 두고 독특한 글씨체로 유명한 미수 허목이 쓴 망운암(望雲巖), 옥설헌(玉雪軒) 편액이 좌우에 걸렸고, 돌아가며 두어 점 제영이 덧붙였다.
첫댓글 기냥 한번 읽어보시요...
좋은곳에 다녀오셨네요
얘들이 넘 귀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