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고분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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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진한·변한 등 원삼국시대에 낙동강 하류의 변한 12개국 중 대가야(경남 고령, 반파국이라고도 함), 소가야(경남 고성, 고자국이라고도 함), 성산가야(경북 성주, 벽진국이라고도 함), 고령가야(경북 상주), 아라가야(경남 함안, 안락국이라고도 함), 금관가야(경남 김해, 가락국이라고도 함) 등 6가야(伽倻)는 연맹체를 형성하며 활동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6가야 이외에도 비화가야(非火伽耶)라는 국가가 나오고, 일본서기에는 탁순·탁기탄 등의 국명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가야의 시대 변화에 따라서 달라진 국가명칭인지, 혹은 6가야 이외에 별도로 존재했던 국가들인지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다.
낙동강 하구와 남해안에서 해상교통로와 풍부한 철 생산지를 장악하고 낙랑과 왜 중간에서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가야는 초기에는 금관가야가 연맹의 중심이었으나, 후기에는 내륙인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일제는 경상도 내륙 깊숙이 왜관(倭館)이 설치되었던 것을 이유로 4세기 후반~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지만, 그동안 우리 고고학계는 터무니없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하고 가야사의 독자적 발전과정을 체계화하고 있다.
경남 내륙인 창녕은 변한 12국 중 하나인 불사국(不斯國)이 있던 지역이지만, 삼국유사에는 비화가야로, 일본서기에는 비자발(比自伐)로 기록되어 있다. 불사국이 나중에 비화가야로 바뀌었는지 아니면 가야연맹의 일원이 되지 못할 정도의 소국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라 진흥왕은 16년(555) 이곳을 정복한 후 비사벌군으로 고치고 하주(下州)의 치소로 삼아 군사를 주둔(停)시켰다.
1914년 창녕읍의 진산이자 가을이면 억새밭으로 유명한 화왕산(757m) 꼭대기에서 진흥왕 21년(561)에 세운 척경비(拓境碑; 국보 제33호)를 발견했는데, 척경비에는 창녕 지역을 비자벌(比子伐)로 표기하고 있다. 비사벌은 경덕왕 16년(757) 화왕군(火王郡)이 되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창녕나들목을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화왕산 기슭에 창녕읍이 있는데, 창녕 일대에는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지배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교동고분군·계성고분군·영산고분군·현풍고분군 등 수많은 고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구마고속도로 개설, 국도 확장과 도로 신설, 그리고 도시의 팽창과 택지 조성 등으로 많이 없어지고. 현재는 창녕읍 부근에 약80기, 계성면 지역에 약90기, 영산·이방·성산·대합 부근에 약 43기정도만 남아있다.
교동4호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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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읍사무소 네거리에서 왼편으로 밀양과 청도로 가는 국도 20호선을 경계로 화왕산 중턱부터 산기슭까지 송현동고분군이, 그리고 도로 아래에도 교동고분군이 있는데, 두 고분군은 오랫동안 이 지역 지배세력의 무덤들로서 도로가 개설되면서 나눠진 것 같다.
1963년 사적 제80호와 제81호로 각각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28일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으로 통합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송현동 고분군은 교동 고분군과 달리 봉분 밑에 메주덩이만한 돌을 둘러서 장식한 것이 특징인데, 이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무덤양식의 변화인지 아니면 아랫부분인 교동고분군과는 또 다른 세력의 무덤들인지는 연구과제다.
송현동 6·7호분에서는 2002년 국내최초로 녹나무로 만든 3.3m 폭 0.8m 높이 0.3m의 목선이 발견되었는데, 제주도,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등에서 자생하는 녹나무는 가야와 왜의 교류를 말해주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2006년~2008년 발굴한 대형 고분인 15·16호분과 중형 고분인 17호분, 7기의 소형석곽 등에서는 부장품은 이미 도굴되었으나, 봉분의 축조수법과 관련된 자료를 얻었다. 특히 15호분에서는 5구의 인골을 발굴했는데, 그 중 16세 소녀로 추정되는 순장자 유골을 복원하여 지명인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창녕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계성1호고분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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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20호선 아래에 있는 교동고분군은 약170기로서 숫자와 규모 면에서 창녕 지역의 으뜸인데, 1992년 동아대박물관에서 5기를 조사한 이후 계속 발굴하여 현재까지 36기를 복원했다.
4호분은 입구에 쇠창살을 설치해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으나 잡초만 무성하고, 북쪽 기슭에는 아직 조사하지 못한 고분들이 공동묘지처럼 즐비하다.
그런데도, 담장은커녕 밧줄로 통행로를 만들어서 주민에게 개방하는 등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는 느낌이다.
송현동고분군 쪽 도로에는 지난 4월까지 입장료 500원씩을 받다가 무료개방으로 전환한 창녕군립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에는 군내 각지에서 발견된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구내 오른쪽에는 1999년에 발굴된 계성고분 1기를 옮겨서 내부를 공개한 계성1호 고분이 있는데, 겉모양이 마치 우주선 발사체 같아서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계성 고분군은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 조사를 시작한 이후 1968년~1969년 영남대학박물관 팀이 서쪽에 있는 2기의 무덤을 발굴 조사했는데, 1호 고분은 강돌로 일(日)자 모양으로 만들었고, 4호 고분은 T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토기류는 물론 금동관·금제귀걸이·은제허리띠 등의 장신구와 쇠살촉·쇠투겁창·삼지창·철검·대도 등의 철제 무기가 출토되었다.
창녕고분군은 경주의 대능원이나 오릉, 공주와 부여의 백제 왕릉들이 공을 절반 잘라서 엎어놓은 것처럼 특징이 없는 외형과 달리 표주박 모양이거나 봉분 주위를 돌멩이를 둘러놓는 등 개성이 엿보이는데, 이들 고분에서 녹나무로 만든 목선과 ‘송현이’ 같은 복원인물 등 유물이 쏟아져 나와 가야사 정립에 필요한 자료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5세기 이후 가야의 중심은 바닷가인 금관가야에서 고령의 반파국으로 옮겨갔는데, 이 시기를 가야연맹 혹은 대가야 연맹이라고 한다. 가야연맹은 중국 남조인 제(齊)에 사신을 파견하고, 삼국에 정치적 변수가 되어 백제·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또 백제·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으나, 6세기 초 백제와 국경지역인 기문(己汶:지금의 전북 임실)을 두고 다툰 전쟁에서 패한 뒤 왜와 교역중심지인 대사(帶沙:지금의 하동)지역은 물론 왜와의 무역권을 빼앗기면서 국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이후 그 후손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어 신김씨계(新金氏系)를 형성했다.
구해왕의 아들 무력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벼슬이 각간까지 올랐으며,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창녕읍사무소 골목의 만옥정 공원에는 창녕현 객사, 선정비, 대원군의 척화비 등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진흥왕척경비가 비각 속에 있다. 화왕산 꼭대기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신라진흥왕이 가야연맹을 정복한 후에 세운 이 비는 밑돌과 덮개돌이 없이 자연석을 다듬어서 새겼다.
27행 약400여자의 한자 비문이 있으나,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진흥왕의 순수비는 현재까지 북한산·황초령·마운령에서 발견되었으나, 창녕비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이 오로지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린다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의 관직과 이름을 열거하고 있어서 척경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