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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명문가 - 學行志節근칙賢行의 명문家
廣州이씨 둔촌공 율정공 석암탄공 십운공系의 合一, 돈수단합
1, 우리 종족은 2000여년전 멀리 新羅시대로부터 올라가서 初期 서라벌國의 부족이다
우리나라에서 姓氏를 사용한 기록은 백제가 부여씨를 포함에 부여.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사(沙),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李), 백(苩)씨등의 8대성이 있었고,
세부적으로는 변진한 54개국을 비추어 적어도 54개 성이 있었다
고구려는 왕의 고와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등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 환노부등 국내성 인근 거주지역등의 6개 부족성을,
신라시대는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 설화와 6부 촌장에게 각각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 등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중국측의 사서와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 등장한다 그렀다면 오늘같은 성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中國 史書는 단군조선과 고구려 우리 강토의 나라 명칭을 왕의 성으로 부르고
기타의 이름은 고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나 한서지리지 에서 단군조선-삼국시대의 人名에 대하여는
"고을이름과 나라이름"을 동시사용한 것이다 즉 당시의 부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이름을
소리나는 글자로 표기한 것이 오늘의 金 李 朴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사람들을 이야기할때 高의 나라 주몽 高의 나라 영이라하거나 을지문덕 연개소문 천개소문등이
이름을 사용한다거나 부여 玉의 저,東의 명,예의 구, 등을 사용한 것이다
그것이 마한 진한 변한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나라(고을)마다 마을의 이름이 있거나
우두머리가 있고 우두머리는 전부,단군, 당굴, 상제, 천제, 칸, 거서간. 차차웅, 마립간,세, 님금. 이사군 등으로 물렀다
부족의 명칭은 지명의 "집단지의 명"으로 부르다가 "지명이 부족 이름"이 되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위 姓"이 된 것이다
한강 이남의 성씨들은 부여와 단군의 지배층 족이 남하를 하게 되므로
각각의 부족 명칭을 사용하니 고족,부여족이라고 한것이다
新羅 시대의 徐羅伐은 서라 수라 신라 등이었는데 밝다의 박과 석등도 있으나 주로 金성이 서라벌을 지칭하는
이름이므로 후에 이를 金(진,김)이라한 것이다. 진한 지역의 서라벌은
金국, 금성의 나라인 바, 金부족 이라 하다가 朴(밝다)부족이라 하다가
李씨라 孫씨라 薛씨라 하는 것등은 일종의 마을 이름, 부족 지명인 것이다
전부 금성과 서라벌부근의 지배 세력의 별칭이다.오늘날 金씨가 많은 이유는
金성 金나라의 지도세력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권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므로, 金씨 성을 칭한 인구가 많은 것이다
(물론 동일한 씨족은 절대 아니다 즉 신라시대의 부족들인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통일 하였다면 高씨나 부여씨가 많아졌을 것이다.기실 金李朴의 의미는
성씨나 그 유래고찰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문화 수입으로 붙여진 일종의 氏갈래이지, 정확한 氏의 유래는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국호 고구려에서 따와 성을 고(高)씨로 하였으며, 주몽은 휘하의 충신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 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왕이 하사한 백제 팔족성(八族姓)인 사(沙), 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苩)씨 등은 백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는 성이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하여 부여(夫餘)씨를 칭하였다. 후대의 백제 왕들 중에는 부여를 줄여 여(餘)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우(優)란 성을 취한 백제왕도 있었다.[3]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백제 개국공신 중에는 마려(馬藜) 등이 있는데, 현재 마(馬)씨가 마려를 시조로 하고 있다.신라에서는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이 설화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며, 유리왕 6년에 6부 촌장에게 각각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 등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4] 그러나 그러한 성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565년 《북제서》에 신라 진흥왕인 김진흥(金進興)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김씨 성을 쓰기 시작한 신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5]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성이 없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치원이나 장보고 등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계층에서부터 성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남해 완도의 천민(賤民) 출신인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벼슬길에 오르면서 당시 당나라 대성(大姓) 중 하나였던 장씨(張氏) 성을 취해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꿨다. 발해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이 대(大)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대(大)씨와 태(太)씨가 대조영을 시조로 삼고 있다.)
2. 오늘의 성씨는 한반도 지역이 통일신라로 합쳐지게
되므로 당나라의 漢字의 음원과 표기를 차자하여, 오늘날 같은 姓氏가 나왔다 기실 원래의 발음은 우리말이다.
우리 이씨는 중국에도 李氏라고 있었고 신라 초기나 백제 초기에도 각각 李氏라는 姓氏가 있었다.
신라 지방은 서라벌부의 李氏 또는 李의 부족이름 들에서 나온 것이고
어원은 또한 고을의 이름, 종족의 별칭인데 한자문화의 유입으로 李라 한것이다.
즉 서러벌지역의 부족들이, 지배층의 일부가 되면서, 일부는 김의 종족으로, 일부는 박의 종족으로,
일부는 이의 종족으로 있다가, 당문화 수입이후 한자표기를 할 때 그들 무리의 부족명을 이, 박, 김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종족간의 연대 의식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도록 강하다. 특히 지역적 연고성이 강하다
조선조 초기까지 어디 지역에 모여 살았던 씨족이다 집단이다라는 종조숭본 혈통의식 집단동맹의 의식이 강하여
동일 혈통이라는 성씨의 개념으로 그것을 취했는데 (이것들이 우리나라의 본관의 유래가 된다)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과 중국 문화가 흡수되어 과거를 보거나 출사를 하거나 하니 반드시 유래가 필요하고
근원이 필요하여 소위 8고조도라는 가문이 필요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전래 성씨 이외에
현달한 자를 시조로 모시고, 그 성을 차자하는 풍속이 유입 되어 오늘에 이른것이다 그래서
280여 씨종이 이르지 아니하였던가 !
우리 이씨족은 신라초기 서라벌시대에 부터 서라벌 근처에서 發興하다가 신라가 亡하자 고려 건국에 이르러
칠원에서 회안으로 移住하여, 집단촌을 이룬 것으로, 이사실은 구전 世傳으로 온것으로 自明한 것이라 할 것이다.
신라가 망하자 당시 칠원의 지배층을 이루었던 李自成의 후손인 칠원성주와 부족민들이 왕건에 의하여 회안지역으로
강제로 이주한 것이다. 회고하건데
통일 신라 말기는, 중앙 왕권이 약화된 시기이다. 지방에 집단으로 근거를 둔, 호족들이 병권과 행정권을 독점하고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각지의 호족들이,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칭왕하기도 하고, 군사를 보유하고
해당지역과 부족민,백성들 재물을 장악한 것이다
독립된 통치영역을 이루며 중앙정부와 병립한 시기라 할수가 있다. 고대사회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리 李족은 눌지왕 시기 이후부터 대대로 칠원지방을
지배하여왔다...따라서 넓은 토지와 풍부한 곡식,강과 산촌, 자원을 지닌
칠원이족은 서라벌 정부와 유대관계 또한 좋은 사이인 것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는데, 갑자기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고 나라를 바치자 이에 북족들이 왕건 군대에 저항 한 것이다.
왕건의 군대에 함락을 당한 칠원성은, 결국 성주와 부족들이 전부 경기도 회안으로 이주를 한 것이다
회안에 이주를 하였으면서도, 우리 이족들은, 부족 집단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이사금이사군 즉 향임 당임"과 같은
영동정 동정을 뽑아서 모시었고 (호족 부족 씨족사회에서 이는 당연한 것들)
일종의 자치향을 이루면서 서로 돕고 살았다, 고려 초기에
일족들은 驛의 吏로, 또는 武士 集團(고려무신정권시의 무신들) 집단으로, 가병으로 속하면서
광주 지역에서 모여서 살았는데,
칠원의 회안 이씨들이 어느 해 부터인가, 출중한 인물들이 나오게 되고 공을 세웠다.
그러자 조정의 담로한 중신들이 민망하게 여기어 높은 관리에 오르도록 추천을 하거나 오르게 된 것이다.
회안(광주)에 집단촌을 이루면서 살았고, 망한 신라부족의 후손들이 전해오는 것들로
기억하면서 오기를, 이 부족의 선대는 "신라시대 사람이다. 칠원에서 왔다.
내사령 自成이란 분이 선조이고 우리들은 그 후예"들이다
라는 구전이,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자성 비은 구전의 내용으로 이자성의
자성은 우리 말의 首長 이름으로 보는 것이 사학적으로 맞는 말이다. 자성은 쇠족 즉 신라수도 서라벌 금성의
어원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 우리 나라 옛 고을의 왕들, 시조들 이름은 이렇게 부족장을 뜻하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즉 자성이나 내사령이나 부르는 이름들은 전부
각각 고을을 지배하는 伯( 간 님금 등)이 었는 지라, 그의 용어는 높임말, 즉 존칭이다
군린, 용수.동이. 향임, 당임라고 한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시대 인명을 분석한, 이제현은 왕건의 원래 유래, 이름의 고찰에서,
작제건(왕건의 조부), 용건(왕건의 아버지・다른 이름은 왕륭), 왕건 자신까지 3대가 이름에 ‘건(建)’자를 넣은 것은, 신라시대에
통용되어온 존경의 표시였던 ‘간(干)’을 이름 밑에다 붙여서 부른 것이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전(傳)되어
‘건’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왕건의 성명에 대해 비판한 것은 그가 고려 왕실의 계보를 믿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작제건", 아버지가 "용건", 그 아들(고려태조)이 "왕건"으로서 "건"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서양의 귀족들이 아들 이름을 아버지, 할아버지와 똑같이 하면서 "2세", "3세"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과 같다)
(자성이 자션의 쇠의 부족의 이름에서 높임말과도 같다)(내사령의 이사금설도 같다)
여기서 "자성 군린 용수 동이"는 신라 초기 중기어인 "높임의 의미어"와 가깝고
신라말 또는 고려시대의 의미어인 "향임 당임 한희"는 중국의 한자가 전래된 이후의
언어와 같다고 할 수가 있다.(이민영 연구 글 참조)
자성의 "成"의 사용은 신라 인물들 표기에도 자주 나오고 마찬가지로 "용수.군린.동이"도 통일 신라 이전에도 자주 나오는
이름자 명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나타난 통일신라 이전의 이름자를 분석하면 쉽게 이해 되는 부분이다
신라인들의 이름 표기는 당나라 문물을 수입한 한자 이후에 표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그냥 마을의 우두머리 정도로 불려진 이름인 것이다
다만" 鄕任 당임 漢希"는 唐문화의 수입시기인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부분 만성보나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세보를 연구하다보면
전부 고려중기-말기시대의 인물로 시조를 삼고 있고
그들의 직위가 전부 호장이나 영동정이나 수장의 이름을 사용 한것을 볼때
1차는 고려초기 고려 건국에 참여한 부류, 2차는 고려중기 현달한 부류 3차는 조선건국초기에 현달하여 고려말기의 인물로
시조를 삼는 부류로 나눌수가 있는데, 우리 종족은 고려중기부터 현달한 자가 있었으나 세보상으로는 고려말
조선초에 현달한 분들이 명백하므로 이를 세조한 파가 많다. 실은 세조는 신라인이다)
용의 수, 군의 린, 향의 임으로 오다가
고려말에 이르러 다시 광릉 3익이요,
석암탄공과 율정공과 생원공 둔촌공 십운공의 후손들인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아야할 것은 자성. 용수. 군린. 향임.당임. 한희는 곧
선조들의 이름이다는 것이지 필자가 이글에서 언급한 것으로 "지배자란 어미어" 찾기는
그 유래를 분석하기 위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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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암탄공은 고려중기부터
三益 이후부터 중앙 권역에 進入하여 조기 출사를 하였다
둔촌과 율정공의 先代는 각각 향리의 文班과 武班의 음직인 섭사정 호장 동정등에 있다가
둔촌공은 고려말 유명한 학자로 그 후손들이 본조에 이르러 현달한 것이므로, 국자생원 당과 둔촌을 시조로 모신 것이다.
둔촌공계는 여말에 이르러 오자구등과에 이르러 형제들이 전부 출사를 하게되고
휘 漢할아버지는 섭사정으로 무관의 음직이고, 휘 당할아버지는 국자생원으로 학생이며, 諱 녹생 또한 국자 생원으로 학생이다
당의 다섯 아들이 여말에 등과를 하였다. 諱 녹생공은 생원이었으나 아들 諱 밀과 諱지와
손자 諱관의 관인은 출사를 거부한 것이고
석암탄공과 아들은 태종의 친구이나 출사를 거부하였고,특히 암탄공은 그의 4대 손까지 출사하지 않았다.
당 할아버지의 제1자 諱인령(봉)과 4대손, 제 5자 諱천령(봉)과 제4자 諱자령과 아들 손자 또한 조선의 출사를 거부하였다.
국자생원 諱녹생과 아들 밀 손자 지, 증손자 율정은 당대의 석학이었으나 고려출사를 거부한 선비이고
특히 율정은 세종도 칭찬한 당대의 석학으로 정여창 손순효.남효온 등 선비들이 스승으로 모신 존경받은 선비이나
세종의 부름에도 입조를 거부한 강직으로 유명하다
십운공 諱자령의 아들과 손자또한 입조를 거부하였다.
4. 둔촌공과
석암탄공과 아들
십운공, 生員 諱 祿生공과 아들 密, 손자 知와 딸 徐甄공등은 고려 수절신이다.
율정공의 고모부 서견은 문과 장령으로, 고려 수절신이며, 여말 학자 둔촌과 석탄과 함께 유명한 고송정의
시회에 참석하여 시를 남긴 분이며 은둔하며 지냈다. 석탄과 둔촌은 구암서원에, 율정의 고모부서견은
금천 서원에 배향되었다. 암탄공이신 판서 諱양몽과 아들 손자 증손자는 모두 고려에 수절하고 본조에 나가지 않았으며
암탄공 휘 양몽의 배위는 고려 수절신 판서 박상진의 딸이며 역시 수절신이다.
다음은 석탄, 둔촌, 율정의 고모부가 참석한 詩會의 연구이다
고송정회동지사연구(孤松亭會同志士聯句)
운곡 원천석 (耘谷 元天錫) 原州人 학자
옛 나라의 석잔 술에 고국삼배주 (故國三盃酒)
은근 하게 모였네 은근공합잠 (慇懃共합簪)
고송 허 견 (孤松 許 絹)
여윈 대나무는 눈속에도 의젓 하고 피황영설은 (疲簧迎雪은)
늦게핀 국화는 서리앞에 향기롭네 만국오상암 (晩菊傲霜암)
야은 길 재 (冶隱 吉 再) 海平人 성균박사
하늘에 해가 둘이 있을수 없고 천일원무이 (天日元無二)
사람에겐 삼강(三綱)이 있도다 인생진유삼 (人生진有三)
도은 이숭인 (陶隱 李崇仁) 星州人 밀직제학
억센 고사리로는 폐부를 맑게 하고 강미징폐부 (剛微澄肺腑)
모지랑 버들가지로 람삼을 짜네 독유직람삼 (禿柳織람삼)
둔촌 이 집 (遁村 李 集) 廣州人, 학자
진귀하고 흠없는 구슬은 진중무하옥 (珍重無瑕玉)
세상이 浮沈해도 물들지 않는 쪽이라네 부침불염람 (浮沈不染藍)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 廣州人 참의
외로운 신하는 옛 친구로 남았는데 고신여고구 (孤臣餘故舊)
어진 벗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도다 양우진서남 (良友盡西南)
상촌 김자수 (桑村 金自粹) 慶州人, 대사성
나랏일은 춘추의 대의를 따르고 곤월춘추의 (袞鉞春秋義)
농사는 조석으로 논해야 함이러라 농상일석담 (農桑日夕談)
여와 서 견 (麗窩 徐 甄) 利川人,사헌장령, 율정 관의의 고모부
슬픈 회포 낙조에 의지하고 창회빙낙조 (愴懷憑落照)
엎드려 솔과 쑥대밭에 숨노라 전칩엄송암 (전蟄掩松菴)
5. 국자생원 諱 당의 큰아들 인령은 개명하여 봉인데 고려 경선고사이고
둘째 둔촌공은 고려 판전교시사이며
휘 희령은 고려 지군사이여
휘 자령은 고려 판서이며
휘 천령은 고려 보현과 판서이고
이분들은 고려의 패망을 걱정하고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것이다.
둔촌의 세 아들과 딸 諱유창 부자와 둔촌공의 손자와 증손자
휘 희령의 딸 諱홍순과 아들과 손자(공신 홍복기의 부)
석탄의 자와 손들은
각각 조선의 개국에 적극 참여 태종 세종 세조를 도와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신 분들로
소위 동방의 서업을 이룬 가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찬성 오겸과 판서 정현의 만시에 울창한 회안의 이씨는 대대로 현재가 있었다
광이가 동방의 서업을 이루다 광의의 팔극조정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대동갑우가란 것도 이때 나온 말이다
십운공의 아들과 손자는 본조에 입조를 하였고, 증손諱 두신 또한 세종조 전공판서에 이르렀으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여 손들이 모두 처형을 당하고 諱두신은 장흥에 귀양갔다.
성종조에 이르러서야 십운공 율정공 암탄공의 후예들이 입조를 하게 되었으나
다시 연산조와 광해조에 이르는 동안 사화와 정쟁에 얽히게 되어
반대파와 적대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둔촌공의 후손들은 조선의 서업을 이룬 명문사대부가로 왕조를 지근에서 보위하다가
연산조에 이르로 율정공파과 같이 훈구파와 사림으로 나누게 되는 것을 본다)
6. 상고 하건데 동고상공이 광릉세보를 편찬 목판으로 간행하였으나
임진 병화에 불타고 소실하였다.
이때는 석암탄이든 율정공이든 둔촌공이든 십운공이든
서로 8촌-16촌이내의 형제들로 종족간의 구분이 없던 시대이고 8고조도라는 세보로도 서로 가까운 친척간이다
한음상공이 경술보를 간하고 이후 병진 갑진보 발간 당시 석암탄공과 율정공은
세보에 나온 사대명휘와 시조 이자성을 포함하여 동성보 편찬을 주장하였으나
4대 명휘와 비조 문제등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이후 둔촌공 후손들과 석암탄율정 후손의 둘로 나누어서 동성보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나라 여타 성씨들을 보면 우리와 같이 비조와 대수등의 문제로 합보에 이르지 못하거나
분란에 이른 종족들이 간혹보건데
이분들 보면 비조를 확정한 것은 그대로, 일치를 보지못한 곳은 각자의 파시조 시조 원시조의 주장대로 하여
동성보를 출간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광이에는 족보 이외에 광이 세적이라는 역사서가 있다
선고 諱 휴징 할아버지가 판찬한 것으로 신라기원과 칠원이씨,
광이기원, 생원공 唐 전설, 영천 최사간과의 일화,둔촌공의 일화,
둔촌공의 외조부 광주 태수의 호송산 전설과 시조비 인화이씨 묘의 전설, 묘갈개수기. 속광기.
산소 수호기. 회합의 과정, 종보 활동을 기록한 책자가 있는바
조상이 신라 내물왕대를 기원한다는 것과 내사령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실학자이신 諱 이기양(판서)공의 기록을 보면 광이 방계 지파와의 합보를 위한 노력과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한음 상공의 경술보. 이후 諱승원공의 갑진보, 대사간 諱 상도공의 병진보
판서 諱 기양의 1797년의 병진보, 이판 諱 의익의 1873년의 계유보
가선 이참의 諱 용학의 계유보 중간서 諱승재 선고의 기미보 족보를 분석해보면
언전잡기와 세전의 기록을 완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신할 수가 없어서 특서를 못하고 별보로 기록한다고 하였고
모두 광이의 합보를 주장을 하였다 특서를 한것이다.
궁내부 특진관 諱 승재공의 기미보와 1987년의 대동보를 간한 종욱 도유사님의 취지를 보더라도
광이의 합보를, 적극적 강제적으로 이의 주장을 반영하였고,
앞으로의 유지를 당부한 만큼, 우리
廣李 부족들은 선고들의 취지와 유지, 여망을 받들어 반드시 합보를 하여야할 것이고
비록 이자성할아버비의 비조설을 일부가 인정치 않더라고
인정하는 방계와 지파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 것이고
인정하지않는 지파와 방계는 종래대로 하는 것이며,
7. 동성보의 간행과 동성의 합일은 존보숭본의 우리 조상들의 의지를 받드는 것이니
한음상공께서는 계서에 말하기를, 조선님게 엎드려 부복을 할때에는 항렬과 대수에 따라 이마를
땅에 극궁하여 조아리고, 수연하고 정을 나눌때는 백대 일문의 정으로 단합할 것을 말씀하셨다.
또한 조선시대에서는 영천의 諱당할아버지와 석암탄공의 고덕제와 양악산 율정공의 묘에 이르러서는
각파의 종로들이 모여 찾았으니 광이의 정신이 아니던가
역사적으로 전래적으로 우리 광이는 한 一門인 만큼
종회의 도유에 계신분들 일수록 파의 일종에 머물지말고 광이정신에 부합한
미래지향적이고 현대적인 보통적인 사고에 근접하여
정신적 영적 합일하는 방안을 止持는 것이 선대를 대하는 모습일 것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합보 검토시에 예조판서 諱 하원 선고님이 사대명휘 이전의 대수 문제에
대한 의문과 바꾸어짐에 대하여도 후손들에게 훈계 당부하는 것은 성리학이 국가치도의 근본이 된
조선조 당시의 예법으로, 응당한 당부라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광이를 오늘의 대동갑우가로
올려놓은 것은, 둔촌공의 근칙유현행과 학행의 정신으로
조선조 8극을 비롯한 동고 한음상공과 우리 우리나라 조선의 황조와 사림의 명분을 이끈
선대들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한 사람이라도 광이는 광이인지라,
자성 할아버지 비조을 주장하는 석암탄공과 율정공은
고려 중기 이후 諱 한희-삼익시대 부터 탄탄한 문반과 무반의 직위에
출사를 한 것을 연유로, 추사정 군부좌랑 동정, 영동정, 호장이라는 마을의 首長으로 지내오면서
廣州에 모여 살며 대대로 이룬 集姓村의 어른들인 만큼, 입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諱 자성 비조를, 口傳이든 世傳이든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려 수절신이요, 충신이자, 선대에 대한 효행과 국가에 대한 충절이
어느 가문보다도 강한 시조 어르신님들의 후손입니다.(신라의 고려손국을 거절한다거나
고려수절신으로 조선개국을 반대한다거나)
또한 동방조선의 서업을 이루면서 나라를 오늘까지 이르게한 선조들의
덕업은 여타 제족들의 선망의 모습입니다.
遁村공님과 석탄암공님과 율정고부 서견님과 판서 십운공님은
兄弟 叔姪간으로 그 情은 피와 학문으로 뭉친 분들입니다. 亡한 신라에서 회안으로
파천한 忍苦를 지닌 선조의 후손분들이기에, 그 情은 피의 정입니다.
지금처럼 各自를 달리하여 各自는 따로 따로 시조요, 집안이라고 하였을까를
反問합니다. 이 12월 겨울에
삼가 둔촌공 할아버지님과 석암탄공 할아버지님과 율정공 할아버지님과
십운공 할아버지님 묘소앞에서 엎드려
嘆嘆獨白을 하는 심정으로 이글을 올립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자성비조님을 받들어 주장하는 분들은 그를 따르고 따라서 간직하고,
이에 여말 대학자 둔촌선조님과 당할아버지를 모신 분들은
우리 광이가 2천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의 거족이다라는 자부심을 지니면서
오늘의 우리의 근행을 당부한 둔촌공의 학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도리일 것 같습니다
24대 후손 주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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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와 기록등(향토대문화사전, 고기,삼국사기, 유사
성 씨족에 관한 주장 (첨부)
8 성씨족에 관한 것과 우리나라의 통류인식의 견해
[서론]
사서의 기록을 보면
진한 6촌과 서라벌 건국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甲子(※서기 전 57년)4월 丙辰일에 서라벌이 건국되었다
그 전에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와서 산곡간에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1은 알천양산촌(촌장:알평)이고, 2는 돌산고허촌(촌장:소벌도리)이고, 3은 자산진지촌(촌장:지백호)이고, 4는 무산대수촌(촌장:구례마)이고, 5는 금산가리촌(촌장:지타)이고, 6은 명활산고야촌(촌장:호진)이다. 이를 진한 6촌이라 한다. <삼국사기>
전한 지절 원년 임자(※서기 전 69년) 3월 초하루에 6촌의 촌장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하되,우리들 위에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방일하여 제 욕망대로 따르니 덕 있는 이를 찾아 임금으로 삼자, 라는 의논을 하였다. 그 때 멀리 나정숲 사이에 한 줄기 서광이 하늘을 뻗는지라 달려가 보니 큰 박같은 알이 있어 쪼개보니 해와같이 환한 미소년이 나왔다.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 여겨 "밝은누리(朴赫居世)"라 이름짓고,거두어 기르기 13년(※서기 전 57년.甲子)에 박혁거세를 왕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니 국호가 서라벌(徐羅伐)이요, 신라천년 왕국의 출발이었다.<삼국사기>
성씨는 성(姓)과 씨(氏)를 합친 말이다. 성은 지금의 성(姓)과 같고, 씨는 지금의 본관(本貫)을 뜻한다.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은 최초의 기록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할 때, 삼국 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근래에 발견되고 있는 삼국 시대의 금석문을 살펴보면, 성(姓)의 사용은 간헐적으로 보이고 지명(地名)을 이용한 씨(氏)의 사용이 대체적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금석문에는 씨(氏)의 사용이 주를 이루고 기록서에는 성(姓)의 사용이 주로 나타나는 이유는 금석문은 삼국 시대에 만든 기록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지만, 기록서는 시간적 차이를 두고 고려 중기에 발간되어 내용적 서술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덧붙이고 첨가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씨의 사용과 기록은 계급과 신분에 따른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금석문과 기록서 사이에 간극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은 실제 사용과 남은 기록에 관해서는 시차적인 차이와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감안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 성씨는 삼국 시대에는 왕과 일부 귀족 계층만이 사용하는 전유물이었고, 고려 후기에는 일반 백성들까지 성(姓)을 사용하는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제력을 갖춘 외거 노비를 중심으로 성을 갖게 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성와 씨를 갖게 되었다.
[성씨의 종류]
우리나라 최초의 성씨는 신라의 국성(國姓)인 박(朴)·석(昔)·김(金) 3성과 6부 촌장의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 등이 신라 초기부터 보이고, 고구려는 동명왕의 고씨(高氏)를 비롯하여 왕비들의 성씨인 예(禮)·송(宋)·우(羽)·연(緣)·주(周)와 신하들에게 사성(賜姓)된 기록이 보이며, 백제는 온조왕의 부여씨(夫餘氏)와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鞠)·목(木)·백(苩)[또는 묘(苗)] 등 대성 8족이 있었다. 이렇듯 삼국 시대는 왕족 외에는 귀족에게 내리는 사성에 의한 성씨의 사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고려 시대는 왕의 기록물인 왕대 종록(王代宗錄)과 문신들의 묘지(墓誌)에 나열된 성씨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성씨의 종류에 관한 본격적인 기록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265종이 나타나며, 그 후 『도곡총설(陶谷叢說)』에 298종, 『앙엽기(鴦葉記)』에 486종,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496종이 기록되어 있다. 근대의 기록으로는 1930년의 조선 국세 조사(朝鮮國勢調査) 때에 250종의 성씨가 조사되었고, 1960년의 인구 주택 국세 조사에서 258종이 조사되고, 1985년의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성이 275종, 본관이 3,349종이 조사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성씨의 기원과 그 유래
(중국을 중심으로)
우리가 보통 하나의 단어처럼 사용하는 성씨(姓氏)는 고대에는 성(姓)과 씨(氏)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성은 조상 때 생긴 것이고, 씨는 후대의 자손 때에 와서 나뉜 것이다.
「삼대(하 · 상 · 주) 이전 성씨는 둘로 나뉘었었다. 남자는 씨를 불러 주었고, 여자는 성을 불러 주었다. 씨는 귀천을 구별하는 작용을 했는데, 귀한 자는 씨가 있었고, 천한 자는 이름은 있되 씨는 없었다. 성은 혼인 관계를 구별하는 작용을 했다. 그래서 동성(同姓), 이성(異姓), 서성(庶姓)의 구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씨는 같고 성이 다르면 혼인할 수 있다. 성은 같고 씨가 다르면 혼인을 할 수 없다. 삼대 이후에 성과 씨는 합해져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모두 혼인 관계로 구분하고 땅의 위치로 귀천을 밝혔기 때문이다.(三代以前, 姓氏分而爲二. 男子稱氏, 妊人稱姓. 氏所以別貴賤, 貴者有氏, 賤者有名無氏. 姓所以別婚姻, 故有同姓異姓庶姓之別. 氏同姓不同者, 婚姻可通. 姓同氏不同者, 婚姻不可通. 三代之後, 姓氏合而爲一, 皆所以別婚姻而以地望明貴賤.)」(《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이성(異姓)은 천자나 제후와 혼인 관계에 있는 성을 말하며, 서성(庶姓)은 천자나 제후와 친속 관계가 없는 성을 말한다.
〈성씨의 발생〉
삼황(三皇) 중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는 인류 문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공헌은 바로 ‘성씨를 바르게 하고, 매파를 통하게 했으며, 혼인을 제정한 것’(正姓氏, 通媒妁, 制嫁娶)이다. 원시시대에는 인류가 군거잡혼(群居雜婚)을 했으므로 근친혼을 함으로써 열성유전자가 전달되는 폐단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복희씨는 혈친 간의 혼인을 피하게 하기 위해 동성 간에 혼인하지 않는 제도를 제정했다. 중국인의 성은 그 뿌리를 복희씨에 두고 있는데, 복희씨의 고도인 회양(淮陽)은 중국 성씨의 최초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최초의 성은 복희씨의 성인 ‘풍(風)’이라 할 수 있다.
「복희씨는 수인의 아들로 바람으로 인해 태어났으므로 풍 성이 되었다.(伏羲氏, 燧人子也. 因風而生, 故爲風姓.)」(《삼분(三墳)》)
《삼분》은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의 책으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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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기원 어디서 유래하는 가
서혼
성의 기원은 원시사회 모계가족제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 성에는 여자 ‘여(女)’ 부수나 ‘여(女)’가 밑에 들어간 글자를 성으로 쓴 경우가 많다.(‘성(姓)’ 자 자체도 ‘여(女)’부이다.) 예를 들자면 황제(黃帝)는 희수(姬水) 가에 살아 ‘희(姬)’ 성을 가지게 되었고, 염제(炎帝)는 강수(姜水) 근처에 살아 ‘강(姜)’ 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우(禹)는 치수에 공을 세워 ‘사(姒)’ 성을 받았다. 성은 고대 부족들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 특정 부호였는데, 이 경우 주로 부락의 명칭이나 부락 수령의 이름을 그 성으로 사용하였다. 부락 수령의 아들들도 성을 받았다. 예들 들면 황제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성을 받은 자가 14명이었다. 사회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모계가족제도 사회에서 부계가족제도 사회로 넘어가면서 씨족제도가 점차로 계급사회제도로 대체되면서 귀족들은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하(夏) · 상(商) 시기에 이미 귀족들은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 씨는 성의 지파(支派)들을 말하는데, 이는 ‘가(家)’나 ‘족(族)’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가(家)는 공동생활을 하는 권속(眷屬)이고, 족(族)은 동성의 친속, 혹은 공동의 기원과 유전적 특징을 가진 무리, 혈통 관계가 있으면서 집단으로 거주하는 무리 등을 말한다.)
1. 나라 이름으로 씨를 정한 것
제후국의 군주는 봉토의 이름으로 씨를 정했다. 예를 들면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는 그 이름이 진중(晉重)인데, 진나라의 국명 ‘진(晉)’이 씨가 되었고, 노(魯)나라 희공(僖公)은 그 이름이 노신(魯申)인데, 역시 국명인 ‘노(魯)’가 씨가 되었다.
2. 봉지가 씨가 된 것
경대부와 그 자손들은 채읍(采邑, 봉지)의 이름으로 그 씨를 삼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진(晉)나라의 대부 필만(畢萬)은 그 채지(采地)가 위(魏)였는데, 그 후세들이 ‘위(魏)’로 씨를 정했다. 곡옥환숙(曲沃桓叔)의 아들 공자(公子) 만(萬)은 ‘한(韓)’에 봉해졌는데, ‘한(韓)’으로 씨를 삼았다.
3. 관명을 씨로 삼은 것
귀족과 그 자손들은 관명을 씨로 삼았다. 예를 들면 진(晉)나라의 임보(林父)는 보병 조직인 삼항(三行) 중 중항(中行)의 군수(軍帥)였는데, 그의 관직을 따 중항환자(中行桓子)로 불렸다. 그의 아들 순언(荀偃) 역시 중항언(中行偃)으로 불렸다. 이들은 ‘중항’으로 씨를 삼았다.(진문공(晉文公) 5년(BC632), 북방의 적족(狄族)에 대항하기 위해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의 삼군(三軍) 외에 세 개의 보병 부대를 설치했는데, 이를 중항(中行), 우항(右行), 좌항(左行)의 삼항(三行)이라 했다. 삼항은 삼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펼쳤다. 삼군과 삼항을 합해 육군(六軍)이라 부른다.)
송(宋)나라의 집정경(執政卿)인 낙희(樂喜, 자한(子罕))는 사성자한(司城子罕)으로 불렸으며, 그의 손자인 낙기(樂祁, 자량(子梁)) 역시 사성씨(司城氏)로 불렸다. 이들은 이로 인해 사성(司城)을 씨로 삼았다.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구(司寇) 역시 이런 유이다.
4. 직업을 씨로 삼은 것
예를 들면 무씨(巫氏), 복씨(卜氏), 축씨(祝氏), 사씨(史氏), 장씨(匠氏), 도씨(陶氏) 등이 있다.
5. 거주지를 씨로 삼은 것
노장공자(魯莊公子) 수(遂)는 노나라 동문(東門)에 살아 이름을 동문수(東門遂)라 하고, 자를 동문양중(東門襄仲)이라 했는데, 이는 거주지의 이름을 씨로 삼은 경우이다. 송(宋)나라의 악대심(樂大心)은 우사(右師) 벼슬을 지냈는데, 송나라 동문(桐門)에 살아 동문우사(桐門右師)라 불렸다. 그는 동문(桐門)을 씨로 삼았다. 동곽(東郭), 서문(西門), 지(池) 등도 이런 유이다.
6. 주나라 왕이나 제후, 군주와의 혈연관계의 원근을 나타내는 칭호를 씨로 삼은 것
주(周)나라 희왕(僖王)의 아들 호(虎)는 왕자호(王子虎)로 불렸고, 그의 손자는 왕손소(王孫蘇)로 불렸다.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아들 희(喜, 자한(子罕))는 공자희(公子喜)로 불렸고, 그 손자 사지(舍之, 자전(子展))는 공손사지(公孫舍之)로 불렸다.
7. 귀족의 자(字)를 씨로 삼은 것
종법제도에 의하면 공족(公族, 제후나 군왕의 동족)은 각 대 군주의 근친 3대만 포함할 뿐, 공손(公孫, 제후의 손자)의 아들들은 공족에 속하지 못하며 반드시 따로 씨를 가져야 했다. 이런 귀족 자손들은 그 조부의 자를 씨로 삼았다. 예를 들면 정(鄭)나라 공자(公子) 발(發)의 자는 자국(子國)인데, 그의 손자 이름은 국삼(國參, 자사(子思))이다. 이는 바로 할아버지의 자인 ‘자국(子國)’의 끝 자인 ‘국(國)’을 씨로 삼은 것이다. 또 다른 공자의 자는 자사(子駟)였는데, 그의 손자는 ‘사(駟)’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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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기원(한국학)
성(姓)이란 같은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본관(本貫)과 함께 다른 혈족과 구별하는 데 사용되는 칭호다.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혼인제도가 없었던 모권사회에 있어서 어머니는 알 수 있어도 아버지를 알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모계(母系)의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게되었다.
경제 활동은 수렵경제에서 목축경제로 변하고, 다시 농업경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짐승이나 목초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생활하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일정한 곳에 정착을 하게 되었고,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것을 재산이 사유화되면서 경제제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굴 같은 곳에서 함께 모여 살던 것이 차차 일부일처(一夫一妻)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경제 생산에 힘이 센 남자가 가정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일부일처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확실해짐에 따라 비로소 부권사회(父權社會)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모계의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던 집단은 차차 부계의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살게 된 것이다.
원시사회에서는 모권사회이건 부권사회이건간에 모두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으므로 이러한 사회 집단을 씨족사회라고 부른다. 이 씨족사회는 같은 혈연과 같은 조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인 만큼 단결과 협동으로 사냥이나 고기잡이, 농사 등의 힘든 일을 함께 할 수 있었고, 적이 침입했을 때 공동으로 방어하는 등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씨족사회도 점차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게 되어 한 조상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자연히 좀더 가까운 혈연끼리 모여 살게 되었으므로 한 씨족사회는 많은 씨족집단으로 갈라지게 된다.
사회생활이 점차 발달하고 복잡하게 되어 감에 따라 한 씨족집단이 단독으로 사는 것보다 혈연이 가까운 다른 씨족집단들과 공동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군사적으로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혈연이 같은 각 씨족집단이 서로 모여 한 사회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회를 부족사회라고 부른다.
부족사회는 다른 부족사회와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만들게 되었고, 다시 한 부족국가가 다른 부족국가들과 합쳐서 부족국가연맹(部族國家聯盟)을 만들게 되어 점점 집단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사회의 규모가 작았던 씨족사회에서는 같은 조상을 가진 혈연끼리 모여 살았으므로 씨족을 지칭하는 이름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국가연맹처럼 조상이 다른 집단이 모인 사회에서는 각각 자기 씨족을 가리키는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는 글자가 없었던 때이므로 자기 씨족이 살고 있는 강이나 산 이름으로 씨족의 이름을 삼았다. 이것이 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은 중국 민족으로 중국에서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부터 제후들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혹은 강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는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살았으므로 강(姜)이라는 성을 붙여 불렀으며,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는 어머니가 희수(姬水)에서 살았다 하여 성을 희(姬)라 했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는 요허(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요(姚)라는 성을 붙여 불렀던 것이 그 좋은 예이기도 하다.
성씨의 발생과 변천
우리의 성씨(姓氏)는 1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함께 세계에서도 가장 독특한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씨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성씨는 외국인의 성씨와 어떻게 다르며, 어떠한 역사적인 과정을 밟아 변천해 왔으며, 얼마만한 성이 어떻게 분포되어 왔고, 또 본관이 왜 생겼으며 동성 동본이란 어떤 뜻을 갖는 것인지, 또 우리 민족이 오늘날의 형태로 형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이민족이 들어와 우리 민족에 동화되었는지 하는 것 등은 매우 중요한 알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이 현대로 오면 올수록 엷어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역사적인 변천 과정을 짚어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뿌리에 대해 알게 되고 자부심을 갖게도 될 것이라 생각된다.
본(本)의 기원
본은 본관(本貫), 본향(本鄕), 관향(貫鄕), 관적(貫籍), 선향(先鄕) 등으로도 부르며, 시조의 출생지나 정착지 등으로 본을 삼았다. 그러나 시조의 발상지가 아니더라도 봉군(封君)이나 사관(賜貫)에 의해 본관을 정하기도 했으며, 후손 가운데 어느 한 파가 다른 지방에 나뉘어 거주하면서 오래 살게 되면 그 자손들이 독립하여 그 지방을 본관으로 삼은 예도 많았다. 이를 분관(分貫) 또는 분적(分籍)이라 한다.
분관의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은 본래 전라도 곡성 출신이었으나 태조로부터 평산(平山)을 본관으로 하사받아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던 일을 들 수 있다.
성은 같은 조상을 가진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써 다른 혈통의 씨족들과 구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성은 같으나 시조가 다른 경우가 많아 씨족의 완전한 구별이 어려웠으므로 성 앞에 본관을 붙여 다른 혈통과 구별하고 있다. 오히려 성이 생기기 전부터 본관이라 할 수 있는 부족 이름을 사용하여 같은 씨족임을 나타냈었다.
이러한 출신지가 성과 결합하여 동족을 다른 종족과 구별하는 표시로서 오늘날과 같은 본관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대체로 신라말부터 고려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였으므로 사족(士族)들 사이에서만 본관이 일컬어졌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일반 서민들까지도 본관을 표시하게 되었다.
원래 같은 성씨라 할지라도 각 성에는 여러 친족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 각기 동성의 중앙 귀족과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 신라 말기 골품(骨品)제도가 무너지면서 그런 유대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지방의 친족 공동체들이 각기 분립하여 직계 선조를 시조로 내세워 본관을 달리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경주 김씨나 경주 박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과 씨의 차이
성(姓)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는 집단의 호칭이다. 한자의 뜻을 풀어놓은 중국 최초의 자전인 《설문해자》에 따르면, "姓은 人之所生也"로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였다. 한국에서 성은 부계 혈통의 표지로 쓰여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평생 바뀌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해, 씨(氏)란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될 때에 각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였다. 즉, 씨는 핏줄이 아니라 땅과 연계되어 있는 개념으로, 한국의 본(本)과 유사하다. 한국의 성(姓)은 본(本)을 필수요소로 하여 각 성마다 한 개 이상의 본관(本貫)이 있고, 성이 같더라도 본이 다르면 동족(同族)으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성과 이름을 성명(姓名)이라고 하는 데 비해, 일본은 씨명(시메이, 氏名)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씨(氏)는 지명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다만, 일본은 1870년까지 무사(武士) 아래 계급에는 성씨를 가질 수 없게 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성씨 의무령'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씨를 갖게 되면서 출신지의 지명이나 지형적 특징을 씨로 정한 것이 많아 한국이나 중국과는 그 역사적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름'의 어원
이름이란 단어는 "이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중세 국어에서는 “일홈” 또는 “일훔” 등으로 표기되었다. 더 오래전에는 니르다, 니름 등의 발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좁게는 성 뒤에 붙은 개인명(個人名: personal name)만을 말하며, 넓게는 성(姓)을 포함하여 사람이나 사물을 부르거나 가리키는 모든 명칭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도입과정 성을 사용하는 과정)
한국에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한자(漢字) 등 중국 문물이 수입되었던 시기에 그와 함께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씨족 사회와 그 집단을 통치하는 지배자 계급이 발생함으로써, 성씨는 다른 씨족이나 피지배 계급과 구별하기 위한 목적, 즉 정치적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로 쓰이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국호 고구려에서 따와 성을 고(高)씨로 하였으며, 주몽은 휘하의 충신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 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왕이 하사한 백제 팔족성(八族姓)인 사(沙), 연(燕), 협(劦),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백(苩)씨 등은 백제 권문세족(權門勢族)을 대표하는 성이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하여 부여(夫餘)씨를 칭하였다. 후대의 백제 왕들 중에는 부여를 줄여 여(餘)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 우(優)란 성을 취한 백제왕도 있었다.[3]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백제 개국공신 중에는 마려(馬藜) 등이 있는데, 현재 마(馬)씨가 마려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이 설화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며, 유리왕 6년에 6부 촌장에게 각각 이(李)·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 등의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4] 그러나 그러한 성이 당대에 실제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565년 《북제서》에 신라 진흥왕인 김진흥(金進興)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김씨 성을 쓰기 시작한 신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5]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백성에게는 성이 없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치원이나 장보고 등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계층에서부터 성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남해 완도의 천민(賤民) 출신인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었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벼슬길에 오르면서 당시 당나라 대성(大姓) 중 하나였던 장씨(張氏) 성을 취해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꿨다. 발해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이 대(大)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대(大)씨와 태(太)씨가 대조영을 시조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에 정착과정)
삼국 시대를 통틀어 이름은 대부분 고유어를 한자로 취음한 표기로, 오늘날의 3음절 성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남북국 시대까지는 극소수의 특정 계층을 제외하고는 성(姓)이 없었다. 심지어, 귀족집안이었던 고려 태조 왕건도 처음에는 왕씨가 아니었으며 성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고려 태조의 선대(先代)가 어떤 성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고려 태조의 윗대에서도 성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 자신의 경우도 원래 왕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기보다는 본래 성이 없었고 이름도 다른 것을 갖고 있었는데, 고려 개국과 함께 ‘왕’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도선의 예언을 내세우면서 성을 ‘왕’, 이름을 ‘건’이라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편년통록》 등에 의하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충선왕(忠宣王)이 왕자로 원(元)나라에 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한 사람이 충선왕과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충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다. “듣건대 그대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755~762)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가 있어서 나온 말인가?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있을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당신의 나라 고려에 가서 자식까지 두었다는 것인가?” 이 말에 충선왕은 부끄러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제현은 작제건(왕건의 조부), 용건(왕건의 아버지・다른 이름은 왕륭), 왕건 자신까지 3대가 이름에 ‘건(建)’자를 넣은 것은, 신라시대 존경의 표시였던 ‘간(干)’을 이름 밑에다 붙여서 부른 것이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와전(訛傳)되어 ‘건’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왕건의 성명에 대해 비판한 것은 그가 고려 왕실의 계보를 믿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작제건", 아버지가 "용건", 그 아들(고려태조)이 "왕건"으로서 "건"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서양의 귀족들이 아들 이름을 아버지, 할아버지와 똑같이 하면서 "2세", "3세"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과 유사한, 또는 부칭이나 성씨의 개념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아무튼 고려 초에도 한동안 성의 사용은 최상층 계급에 국한되었으며, 귀족 계급이라도 성을 갖지 않는 인물이 많았다.[5] 참고로 왕건은 "임금 왕 세울 건"의 한자와는 상관 없는 당시의 순우리말, 즉 중세 한국어의 어떤 뜻을 지닌 단어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말을 한자로 각각 왕을 임금 왕으로 표기하여 성, 건을 세울 건으로 표기하여 이름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왕씨는 중국의 왕씨와는 한자는 같지만 관련이 전혀 없는 성이다.
신라 지증왕의 국호·왕호의 한자어 개정, 법흥왕의 연호·시호 사용, 경덕왕의 두 음절 지명 개정, 문무 관직명 개정 등 일련의 한화(漢化) 조치로 점차 중국식 이름이 보급되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의 통일 후 사성(賜姓)을 통해 귀족들이나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한국에 성명(姓名)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했다.[6]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것을 도운 네 명의 부장(副長)인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白玉杉), 능산(能山), 사귀(沙貴)도 이름만 있을 뿐 성은 없었다. 태조는 즉위한 후 홍술에게는 홍(洪), 백옥삼에게는 배(裵), 능산에게는 신(申), 사귀에게는 복(卜)씨 성과 함께 중국식 이름을 하사(下賜)했다. 이로써 홍술은 홍유(洪儒), 백옥삼은 배현경(裵玄慶), 능산은 신숭겸(申崇謙), 사귀는 복지겸(卜智謙)이라는 성명을 갖게 되었다.[7]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성’은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필수 요건이 되었다. 1055년(고려 문종 9년)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할 자격이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된 이후 성씨 제도가 귀족 계급의 정치적 신분과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전역에 확대과정)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주로 지배계층이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조선 초기만 해도 전 인구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천민계층까지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씨의 대중화가 촉진됐고, 일제강점 직전 해인 1909년 민적법의 시행과 함께 누구나 성과 본을 갖게 됐다.[8]
조선 중기부터 천민층을 제외한 양인들에게 성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조선에서 성씨가 없는 무성층(無姓層)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왜란과 호란 이후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져야했기 때문에 양반과 결탁하여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려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족보매매, 족보위조, 공명첩 등을 통해 일부 천민의 양민화가 이루어지는 등의 사회변화로 무성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8권에서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의 하나도 진짜가 없다.”며 이는 한 때의 세속(世俗)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적고 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 김근식 교수(法制史)는 “김 이 박의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정상적인 친족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고 평민, 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참칭(僭稱)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위조 족보가 처음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주목할 점은 족보를 위조한 장본인이 양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764년 족보를 위조 판매하다가 발각되었던 김경희의 신분은 중인이었다. 양반이 아닌 중인 김경희가 여러 족보를 위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쇄시설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몰락한 양반들로부터 족보를 사들이거나 문중 대표들에게 뇌물을 주고 여벌로 족보를 더 찍게 한 다음 비밀리에 건네받는 방식이었다. 족보 매매를 의뢰한 고객이 족보를 선택하면 고객의 이름이 들어갈 지면을 확정하고 그 부분에 어울리게 가계 기록을 위조해 별도의 종이에 활자로 인쇄했다. 그리고는 본래의 족보를 해체하여 원래의 지면을 빼내고, 그 대신 위조한 별지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 수법이었다.[9]
보학(譜學) 관련 책에 나오는 내용은 공식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게 많다. 각 집안에서는 자기들 가문의 선대(先代)에 관한 기록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보내지만, 그 중에는 검증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족보가 조작된 사례로 경주 김씨의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다. 조선 인조 때 나왔다는 이 책의 저자는 조선 말기에 출생한 김경대(金景大)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한 종인(宗人)이었다. 또한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으로 조작한 위보도 있다.[10]
성씨를 가진 양반 중에서도 일부는 반역, 모반에 연루되면 노비로 강등되는 경우도 있었고, 첩의 자식은 서얼이라는 신분으로 차별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의 장적, 호구 단자, 수원성 축조시의 임금 노동자 기록, 소송 문건 등을 분석해 보면 일반 평민은 물론이고, 일부 노비도 김(金)씨, 이(李)씨 등 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이 쓴 성이 본관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성관(姓貫)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화성성역의궤》에 백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기록된 백성들의 이름들은 신체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키가 큰 사람들의 이름은 박큰노미(朴大老味), 최큰노미, 키가 작은 사람들은 김자근노미(金者斤老味), 임자근노미, 김작은복(金者斤福), 망아지처럼 잘 달리는 사람은 최망아지, 강아지처럼 생겼다고 김삽사리, 눈이 튀어나온 사람은 이부엉이, 지팽이처럼 말랐다고 신지팽(申之彭), 혹이 튀어 나왔다고 이혹불(李或不), 뚱뚱하고 느림보처럼 생겼다고 박뭉투리, 다리 길이가 작은 사람에게는 조조자근노미(趙足者斤老味), 착하다고 지어진 박선노미(朴善老味)·김순노미(金順老味), 일을 잘해 기특한 사람에게는 박기특·김기특이라고 천민들의 성과 이름을 짓고 기록하였다. 백성의 성씨와 이름을 알 수 없어 대충 나이로 이름 지은 기록도 있다. 나이가 한 오십쯤 된 것 같다고 김쉰동이(金五十同), 이름은 모르고 대충 태어난 달만 알아 지은 박시월쇠(朴十月金) 등이 있다. 김팔월쇠(八月金), 장막쇠, 정복쇠, 윤좀쇠 등 하층민의 이름에는 '김(金)'이나 '쇠'자가 들어가는 기록이 많다. 쇠가 곧 금(金)을 뜻하는 것이기에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이다.[11]
한편 황현(黃玹)이 저술한 역사책 《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의 인구를 의도적으로 늘리기 위해 성씨가 없던 백성 중에서 전주 이씨를 희망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올려주어 이 때 전주 이씨가 10만 명이 늘면서 흥선군이 기뻐하였다고 쓰여 있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성씨가 없던 노비들은 모시던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고, 자신이 부리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 주었던 양반도 있었다. 무성층에게 성을 갖도록 했더니 대부분이 인구가 많던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하여 일부 성씨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성씨의 종류가 4천개가 넘는 중국이나 10만개가 넘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성씨의 종류가 매우 적고, 그마저 인구도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인구가 기형적으로 많은 성본의 경우 씨족간 연대성은 찾기 힘들다. 신분질서 해방조치로서의 성씨 부여는 양반 질서를 허물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원래부터 인구가 많던 거대씨족을 더욱 더 거대하게 만들어주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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