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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게시판에 아주 오랫만에 들렀다가 좋은 주제로 좋은 토론이 있어서 퍼올립니다. 우리도 함께 생각해볼 기회가 되시길
두서 없는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조직내의 문제를 공론화 할 필요성에 대한 제안
- 조직내의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정파의 폐단을 지적
- 전교조 사업의 중심이 '아이들 살리기'가 되어야 함. 소모적인 정파적 대립을 청산하고 대승적으로 힘을 모아, 입시지옥 시스템을 분쇄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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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우리 조합이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문제가 없는 조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나마 전교조는 한국사회에서 존재하는 거대조직(시민단체를 제외한) 가운데 가장 건강한 조직일 겁니다. 우리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에 비해서도 전교조는 훨씬 바람직합니다. '민주노총'에 대해서도 나중에 한마디 적겠습니다.
그럼에도, (특히 현금에 이르러) 조합 내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 겁니다. 내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우선 "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병이 뭔가를 알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겠죠.
1. 인식
그렇습니다. 어떠한 문제든 그 처방을 위해 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문제를 인식하기’입니다. 병 걸린 사람이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몸에 병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겠죠.
인식이 중요합니다. "조합이 위기다. 조합이 문제있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개별적으로는 모두가 이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실 겁니다. 일반조합원들도 막연히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저마다 문제를 포착하는 틀이 다르고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겁니다. 따라서 ‘인식’을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파편화된 저마다의 문제의식 가운데 설득력이 없는 부분은 걸러지고 - 즉, 조합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가 수정되고 - 바람직한(보다 과학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2. 인식의 공유가 왜 안 이루어지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이에 대해 우리 조직내의 ‘담론 구조’가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이 같은 이치에 대해 풀어보겠습니다.
1) “조직의 무엇이 문제인가”는 조직 속으로 들어간 본 사람만이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말하는 ‘문제 인식’의 주체는 ‘활동가’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조직 내에 정파라는 것이 존재하는 지조차 모르는 일반조합원들이 ‘정파 운동’의 문제에 대해 인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물론, “조합원대중은 늘 무지하다”거나 “조합원대중을 배제시키고서 이 문제를 논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중에게 널리 알려야 합니다. 치유하기 힘든 병일수록 널리 소문을 내야 고치기가 쉬운 법입니다.
2) 그런데, 많은 활동가들이 특정 정파에 속해 있던 말든 정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파의 영향력은 주로 지역 또는 지회단위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특히 선거과정에서 표면화됩니다. (민감한 문제여서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만 솔직하게 적겠습니다) 헌신적인 카리스마형 지회장이 주도하는 지회일수록 그 휘하의 지회 활동가들은 ‘조직적 차원의 어떤 선택’을 앞두고서 대개 지회장이 의도하는대로 움직이게 마련입니다.
물론, 지회장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지회 활동가들에게 강요하고 이분들이 수동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직내에서 영향력을 갖는 특정 선배활동가의 정파적 관점이 자신의 영향력 내에 있는 후배활동가에게 어떻게 파급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조직 내에 정파가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3) “조직 내에 정파가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원론적으로 정파의 대립은 바람직합니다. 제가 늘 강변하듯, 모든 대립은 발전을 낳기 때문입니다. 조직내의 정파간 대립은 마오(毛)가 말하는 ‘비적대적 모순’에 해당합니다. 비적대적 모순은 토론 따위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고 또 이를 통해 생산적인 결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조직 내에서는 이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첫째,
정파의 형성이 어떤 지성적인 관점(=세계관)이 아니라 인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육노동자(일상적 용어로는 ‘교사’)를 자임하면서도, 학습과 토론을 꾀할 생각은 않고 그저 인간적인 차원의 친화력에 따라 어떤 새로운 식견을 흡수하여 ‘나의 관점’을 정립하게 됩니다.
술자리에서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그대로 ‘나의 관점’으로 자리해서는 안됩니다. 보다 정확한 관점은 독서와 생활(=실천)을 기초로 해서 궁극적으로는 거듭되는 성찰적인 사고를 통해 정립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나의 관점’ 가운데 어떤 주관적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토론 또는 대화(conversation이 아닌 dialogue)가 필요합니다.
('정파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실천이 중요하다. 이론은 관념이다"라 합니다. 그런데, 무식한 이러한 사고야말로 관념적이라 하겠습니다.
실천의 본질은 '프락시스(praxis)'입니다. 프락시스는 간단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으로 요약됩니다. 이론에 터한 성찰(reflection)이 실천(action) 그리고 재성찰-재실천...의 부단한 과정을 밟으면서 변증법적으로 '진리'에 보다 가까운 관점이 정립됩니다. 때문에 실천없는 이론(=장학사)과 마찬가지로 이론 없는 실천(=전교조)은 무의미합니다. 나는 "무슨무슨 이벤트형 연수는 잡다하게 벌이면서 도무지 공부할 줄 모르는 이 조합은 앞으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면허 의사가 함부로 시술 해서는 안되듯이, 공부하지 않는 활동가는 활동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정파 운동을 펼치는 주체들의 수준 문제를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지적인 대립(=토론)은 어느 정도의 지적 수준과 논리를 갖춘 당사자들끼리나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전교조내에서 '민족'이나 '계급'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동지들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른바 '정파' 본연의 주제에 국한된 문제입니다. '교원평가'에 관한 토론은 "수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담론은 정파라는 '간판'을 내세우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현재의 정파란 것은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지역주의’ 또는 ‘패거리 문화’의 속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형성된 허구적 실체라는 것이 나의 관점입니다.
때문에 나는, “(정파적 입장에 매몰되어) 지회사무실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것과 교육노동자로서의 의식이 고양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결론짓게 되었습니다.
4) 정파가 엄연히 존재하며 정파적 대립이 조직의 건강을 해치는 역기능을 수반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조직 내의 담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정파’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즉, 정파활동을 실천하는 분들이 “정파적 대립이 조합 발전에 누를 끼치고 있다”는 고백을 할 이유가 없겠죠.
홈페이지 상에서 ‘정파적 대립’은 지부차원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부게시판에서 이루어지는데, 보시다시피 [조합원목소리]는 ‘지성의 토론장’이라기보다 ‘쓰레기장’에 가깝습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한 굵직한 담론들이 ‘공론화’가 아닌 “진흙밭에서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개들의 싸움터”,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있습니다.
‘조합원목소리’는 조합이 망해가고 있는 징후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바로미터입니다. 익명성을 이용해 소모적인 ‘게릴라전’의 방법으로 서로 물어뜯는 아귀다툼을 허용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입니까? 이러한 창백한 소부르주아적인 기치 아래... 썩어 빠진 정파의 담지자들이 “각각 제 팔 제 흔들며” 제 갈 길만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그걸 ‘실천’이라고 자부하면서...... 조합원대중을 소외시키고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나 자신부터 자꾸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만, 정파에 대해 최근에 내가 내린 결론은 조직내에 정파가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은 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조합원대중들의 의지를 최대한 모아 정파 세력에게 어떤 압박을 가하고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민족이냐 계급이냐’ 하는 도식이 ‘생명’의 문제에 앞설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미쳤습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미쳐있습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병들어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교 내에서 점심시간에 학생들에 의한 집단 강간이 버젓이 벌어지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 주 [교육희망]에는 아이들이 '성폭행'을 즐기는 게임이 있다고 실려 있더군요.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에게는 ‘비상구’가 없습니다. '자살'이나 '교육이민' 외에는 없습니다. '대안학교'는 일시적인 도피일 뿐입니다. 오죽하면, 입시지옥으로부터 자녀를 해방시키기 위해 미국사회로 아이를 입양시킵니다.
교원평가는 물론 막아야 하고, 교장공모제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아이들부터 먼저 살려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교원평가 반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살리기’ 위해 연가투쟁 아니 총파업을 벌여야 하지 않을까요?
결코 무모한 제안이 아닐 겁니다. 8만 조합원을 갖춘 전교조가 일어서면 우리 아이들 살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파업이라면 오히려 국민들이 환영할 겁니다.
(이런 파업을 당장 조직사업에 배치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아이들 살리기'를 전면에 내세운 적이 있었던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자는 뜻입니다.)
미칠 대로 미친 현실을 외면하고서는 어떠한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사회의 학교는 문을 닫는 것이 최선입니다.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이들이 미쳐가고 그나마 잘난 소수의 엘리트들은 더욱 영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에 집단 강간이 이루어진 그 학교에서도 정규수업은 물론 보충수업도 이루어졌겠죠. 그 학교를 나온 아이들 가운데서도 서울대로 향하는 아이들이 있겠죠. 그리고 그 학교는 '경쟁력 있는 학교'가 되겠죠. 하지만, 이런 따위는 '교육'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상거래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설하고!
‘죽어가는 아이들 살리기’에 정파적 입장의 차이가 존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힘을 모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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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지루한 긴 글을 그 나마 맺지도 않고 미완의 상태로 올립니다. 나머지는 우리 동지들이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의견도 환영합니다.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부분적으로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어서 이견을 붙입니다만, 생각할꺼리를 던져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조합원목소리의 익명의 문제점도 말씀하셨는데, 저의 경우 익명이 아니라면 좀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익명의 장단점을 잘 살피고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직내의 ‘담론 구조’가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이성우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1. 현실 인식
선거 혹은 대의원대회 등에서 특정 입장이나 견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정파의 영향 정도는 큰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정파의 폐해로 보는 것에는 생각을 달리 합니다. 선생님이 예로 들었듯이 어떤 지회에서 특정 정파의 표나 견해가 비정상적으로 한 쪽으로 치우쳐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 합니다만, 이는 다른 소수 의견이나 입장에 대한 토론이 보다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나 과제를 조직이 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이를 이유로 정파 활동 그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선생님도 말했듯이, 조직 내에 정파가 존재하는 것은 토론과 결론 도출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합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지회장이나 지회 활동가가 지회 내에서 조합원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어느 한 쪽으로 견해의 쏠림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선거의 예를 들면, 어느 지회에서는 혁단에서 지지하는 후보의 지지표가 90%까지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어느 지회에서는 교찾사에서 지지하는 후보의 지지표가 90%까지 나오기도 합니다.
2. 정파는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는가?
정파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지성적인 관점(=세계관)을 핵으로 합니다. 그러나, 선생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지성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차원의 친화력도 정파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인간적인 차원의 친화력은 그 가치의 긍정성 여부의 자를 섣불리 들이대기 어려울 정도로 활동가들의 평소 활동과 자세에 대한 신뢰의 크기 만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의 친화력에만 머물지 않고, 지성적인 관점(=세계관)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파와 활동가들의 과제로 남을 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풍부한 판단 근거와 자료 및 정보들이 조직 내에 흘러넘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풍부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말씀하셨습니다만, 동의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실천이 완벽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어떠한 실천도 아무런 이론적 근거가 없는 경우도 없습니다. 과학적 이론과 근거가 아니어도, 감각적 경험적 초보적 이론과 근거는 있게 마련입니다.
3. 정파 활동과 관련하여 전교조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정파활동의 폐해라기보다는 정파의 수준을 어떻게 높이는가입니다.
선생님의 “현재의 정파란 것은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지역주의’ 또는 ‘패거리 문화’의 속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형성된 허구적 실체라는 것이 나의 관점입니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의 고질병이란 단어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인간사회라면 어느 사회나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다시 비슷한 의견끼리 조정하고 힘을 합치는 경향 즉 정파의 발생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 이를 한국사회의 열등한 특성인 것처럼 고질병이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선생님께서는 정파의 현존하는 낮은 수준의 제고를 고민하기보다는 쉽사리 선생님의 앞의 주장 ‘정파는 바람직하다’에 모순되게, 정파의 역기능을 과장하게 되고, 급기야 '정파의 해체'라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조합원목소리’는 조합이 망해가고 있는 징후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바로미터입니다.”라는 선생님의 주장 또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조합원목소리의 익명성의 문제가 있다면 이를 개선하면 될 일이지, 쉽사리 전교조의 망쪼를 결론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며 감정적 충동적 판단으로 여겨집니다. 아무리 험담을 하고, 헐뜯기를 하고 있다고 보여지더라도 진정성과 전교조의 대의만 전제한다면 조합원목소리 게시판은 진지한 대화와 토론으로 제 갈 길을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조합원목소리의 ‘쓰레기장’같은 현재의 모습은 명백히 반전교조적인 1-2명의 불순한 의도적인 음해 행위에 기인하는 바 크며, 부분적으로는 정파의 낮은 수준을 반영하고 있을 뿐, 전교조의 망쪼도 아니며 해체 결론을 들어야 할 만큼 정파의 폐해 때문도 아닙니다.
4. 민족이냐? 계급이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 또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민족의 문제 또한 중요하며, 계급의 문제 또한 중요합니다. 생명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민족의 문제와 계급의 문제는 이미 생명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진리는 어떤 실천적 방략을 내옴에 있어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무가치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을 강조하고 중시하는 것은 현존하는 현 시대의 민족, 계급 문제를 희석시키는 오류를 나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