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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25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마6:9절
기도 말은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습니다. 친구 모친이 한 평생 새벽기도회를 다니면서 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건강을 주시고, 자식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하루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건강을 주셨고, 내 두 아들과 며느리까지 목사가 되었는데, 하나님께 더 달라고 기도한 것이 염치없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그 뒤로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옵소서.”
사람은 자라면서 필요한 것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눈만 뜨면 먹고, 대소변을 싸고, 아프면 웁니다. 그렇다고 갓난아이에게 철없이 떼쓴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들어간 아이가 선생님과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눈만 뜨면 밥 달라고 조르고, 잠만 잔다면 큰일입니다. 아내가 둘째 놈한테 “떨어져 있으니까? 누가 가장 보고 싶더냐?” 물어 보았습니다. 둘째 놈은 “강아지! 강아지가 비실비실해서 어떻게 될 것 같아서 걱정이 되더라.”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은근히 서운해서 “엄마는?” 물어보자 아이는 “엄마는 평생 내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 되냐?”고 말하더란 것입니다. ‘남자는 군엘 가서 고생을 좀 해봐야 철이 든다.’ ‘여자들은 자식을 낳고 키워봐야 부모의 심정을 조금 안다.’ ‘철이 들어서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려고 하는데, 부모님은 벌써 돌아가시고 안계신다.’고 말하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5~8절에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과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를 과시하려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의로움을 과시하려고 이상한 목소리를 내고 유창한 말을 쓰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죠.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더 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천제적인 신학자이자, 불의한 일에 자신의 몸을 바친 본훼퍼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음의 자리에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대체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의 불행을 피하고, 내가 원하는 조건이 확장시키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버튼만 누르면 내가 원하는 것이 튀어나오는 자동판매기가 아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기독교가 아니라 미신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광야 40년 동안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40년 동안 마실 물이 없다, 먹을 고기가 없다, 다리가 아프다,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에서 새롭게 살아가도록 10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중 3번째 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 세상을 파괴하고 사람을 괴롭혀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필리핀 선교사로 있는 후배목사를 지난 월요일에 만났습니다. 필리핀은 80%이상이 가톨릭신자라고 합니다. 선교사가 상선을 타고 육지에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드릴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 있는 군인의 총에 죽을 것인가? 선택하시오’ 지금 필리핀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는 교회를 다닌 것 같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예전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원주민을 점령하습니다. 히틀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건대 나는 거짓말을 안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비겁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기도가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를 하면 또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여 점쟁이를 찾아가서 부적을 사고, 궂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얻으려고 바위와 나무에게 기도를 올립니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를 받습니다.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팔려 임당수에 몸을 던졌습니다. 왜 처녀를 바다에 던집니까? 용왕님이 처녀를 좋아합니까? 우린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빕니다.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우상에게 비는 것은 미신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성공만 위해서 기도한다면 믿음이 어린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 대항 축구대회를 하였습니다. 그 때 양쪽 교회의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축구 선수를 모아놓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아버지, 우리 교회가 저 교회를 이길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힘을 주시고 좋은 기술을 주옵소서.” 이 기도를 들은 하나님께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두 교회 다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누구의 기도를 들어줘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만약 목사님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양쪽 교회의 축구선수들을 다 모아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흩어졌던 형제, 자매들이 모처럼 주의 은혜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평소 형제, 자매가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나 혼자만 성공하려고 미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이 시간만큼은 형제, 자매가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은혜를 맛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주의 가족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경기를 하다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는 것을 배워 세상에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경기를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좋은 기도를 하려면 먼저 기도할 대상을 잘 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여서 어떤 희생도 감당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알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름에는 그의 권위와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얍복나루에서 밤을 새면서 허리가 부셔질 정도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사기꾼, 거짓말쟁이 야곱을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이스라엘로 바꿔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름이 바꿨고 삶이 변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시몬이 베드로, 사울이 바울로 바꿨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한 뒤 자비를 베푸는 자로 바꿨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이름에 맞게 살아갑니다.
김춘수시인은 “꽃”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꽃을 꽃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꽃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으로 다가옵니다. 장미를 보고 쓰레기라고 부르면 장미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답게 대우할 때 우리가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은 신비한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여기 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금까지 네 혈기로 살면서 살인하고 실패했던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시기에 자기의 인생에 간섭하시는지? 궁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겨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 하노라.”고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세하게 살피고 보호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시고,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출3장10절에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러나 모세는 아직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요?” 모세는 하나님이 이름을 몰라서 바로에게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출3장14절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네셨다 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 모세는 교만한 바로에게 가서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광야로 보내 달라.’ 하나님의 이름을 안 모세는 두려움 없이 민족을 해방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다가 나면서부터 다리 장애인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장애인이 일어나 걷고 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뒤 육신의 종이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바꿨으면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두렵고 떨려서 나를 돌아보고, 새롭게 되려고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사6:3절에서 이렇게 말하십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자 성전의 문지방이 요동하고 연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더러운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5절에서 하나님께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자신이 더럽다고 고백합니다. 정직한 고백을 들은 하나님은 더러운 이사야의 입술을 숯으로 지져서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더러운 것도 깨끗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무엇이 거룩한 것입니까? 건물이 크고, 웅장하면 거룩합니까? 금으로 교회를 지으면 거룩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더러운 것도 거룩해집니다. 사람이나 건물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면 어떤 것이든 거룩해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정과 부패, 거짓말과 술수가 하나님처럼 통용됩니다. 저는 교회의 지도자가 나쁜 일에 연류 되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 화가 납니다. 저는 믿지 않은 사람들이 “저 사람도 혹시, 교회 다니지 않습니까?” 라면서 냉소를 보낼 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 같아서 화가 납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묻지도 않는데 자신이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여서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하면 불쌍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어디서 새롭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잘 키운 아이는 나이가 들면서 누가 자기 부모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씩씩거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 받도록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을 위하여 제가 이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대 하시다! 하나님의 이름은 영화롭도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의 명예를 걸고 어떻게든 거룩하신 뜻을 이 땅에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서도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가실 것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통해서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아버지를 거룩하게 대우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대해주십니다. 이 세상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짓밟히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주의 사랑으로 정의를 이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이 억눌리고, 자연이 파괴되고, 세상은 전쟁의 소문이 커져가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도록 깨어서 기도하는 동서교회 교우들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