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문학관 <무명(1981)>
1. 이광수의 단편소설 <무명(1939)>을 영상화한 TV문학관 <무명>은 교도소 수감자 중 환자들을 따로 수용한 ‘병감’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갖가지 병들로 이송된 자들이지만, 그들은 비열한 욕망과 타인에 대한 거짓과 증오로 가득 차있는 인물들이다. 인간의 삶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형태의 삶이 진행되는 감옥, 그중에서도 ‘병감’은 오로지 인간의 찌질한 욕망이 있는 그대로 표출되는 끔찍한 인간 상실의 장소이다. 수감된 인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처럼 오로지 동물적 굶주림만 남아있는 것이다. “마치 윤은 먹고, 민을 못 견디게 굴고, 똥칠하고, 자고, 이 네 가지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았다.”
2. 열악한 공간 속에서 충돌은 불가피한지 모른다. 음식 때문에 싸우고, 코골이 때문에 공격하고, 똥간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물을 마시고 씻기 위해 경쟁하고, 그러한 다툼 속에서 서로에 대해 누적된 증오는 상대의 약점을 다시 매섭게 공격하며 마치 정글 속 맹수들의 다툼과도 같은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윤은 소프라노로 정은 바리톤으로 코를 골아대면 나는 언제까지든지 눈을 뜨고 창을 통하여 보이는 하늘에 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작품 제목이 말하듯이 ‘무명세계의 중생’들이 벌이는 아귀다툼의 현장인 것이다. 작가는 병감 속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진실이 실종되고 거짓으로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고 있는 인간들의 비윤리적인 모습을 고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일제강점’ 시기의 작품 중에서 드물게 현대적이며 도시적인 세련된 시각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특별한 소재를 통하여 인간의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어리석음을 제대로 조명하고 있다.
3. 몸에 좋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음식을 탐식하고, 정신적 안정을 포기한 채 끝없는 다툼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감옥의 열악한 치료 속에서 하나둘 죽어나간다. 탐욕은 결국 비극적인 삶의 종말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해 폐악스럽게 욕을 하던 사람들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두려움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중얼거린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존재들이 펼치는 코메디와 같은 모습은 말 그대로 ‘웃픈’ 장면의 연속이면서 인간의 존엄을 포기한 말종적인 인간들의 비참한 군상일 뿐이다. 작품 말미의 후일담처럼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쓸쓸하게 죽어갔다. 모든 것이 ‘공’으로 돌아갈 뿐인 것이다.
4. 작가(이광수)는 감옥을 배경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어리석음을 불교적 세계와 결부시켜 예리하게 그려내며, 병감 속 사람들의 치졸하면서도 공격적인 발언을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식민지 상황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고통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를 통해 인간들을 고발할 뿐이다. 작품의 발표연도가 1939년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전쟁의 광기가 한반도를 파괴시키고 있던 시기에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이 아닌 전형적인 인간의 어리석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혼돈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작품의 세련됨과 인간군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더불어 현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채, 가상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타락을 그려낸 작가의 목소리는 왠지 그가 말하려던 인간 자체의 존엄과는 ‘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5.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TV문학관의 <무명>은 흥미롭다. 특히 감옥 안에서 펼쳐진 인간의 비굴한 모습은 연기자들의 탁월한 연기를 통해서 재현된다. 특히 위조범 윤씨역을 맡은 박근형과 사이비 종교가 역을 맡은 주현의 연기는 말그대로 ‘메소드’적인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인간의 모든 비열한 모습과 순식간에 돌변하는 태도는 깊은 내공이 없이는 표현하기 힘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영화’보다도 치밀하게, ‘연극’보다도 더 생생하게 펼쳐진 거장들의 연기는 작품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여기에서도 연출가의 의도가 살짝 더해진다. 이광수의 원작에는 없는 독립운동의 중요성과 같은 민족들의 단합의 소중함을 한 사형수의 발언으로 부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공허한 현실에 대한 현대적인 보완인 것이다.
첫댓글 - 욕구와 두려움,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모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