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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54 추천 수 0 2011.08.23 18:57:47
성지 유치원 선생님께 보낸 글입니다. 꼭 이곳에 공개할 필요는 없는데, 자유게시판이니까 편하게 생각하고 올릴게요.
오늘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꿀꿀해지자, 술을 좀 마시면서 썼네요. 혼자 마시니 금방 달아오르데요. 글을 다시 읽어보니 반복되는 내용도 있는데, 얘들한테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해서 안정시키려는 의도를 그대로 적어보았습니다. 고맙게도 성지 편에 유치원 원장님께서 긴 답장을 써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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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려고요.
밤 9시 반 경에 보통 그렇듯이 성지와 경지를 양쪽에 두고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경지는 샤워와 물놀이를 30분 정도 했고, 성지는 샤워는 싫다면서 그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지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성지가 말합니다.
“아빠, 엄마는 정말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두세 달 전쯤에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지요. 아내가 생전에 병세가 심해질 때, 제가 외출할 경우나 저는 공부하고 있고 아내가 얘들과 있을 경우, 아이들이 말을 잘 안 들으면 가끔 이렇게 협박(?)을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엄마 말 안 듣고, 동생과 싸우면 엄마 힘들어서 죽는다”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고, 성지는 이 불가능한 사태를 몸소 겪게 되었겠죠. 엄마의 ‘돌아가심’은 얘들(특히 성지)에게는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죽음을 눈앞에서 확인하게 되고(엄마의 주검을 보지는 못했지만 화장터에서 몇 줌의 재가 된 엄마를 보았지요), 그 결과 성지에게 일상의 삶에서 엄마의 부재는 죽음이 우리에게도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임을 계속 상기시키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얘들이 가끔 얘기할 때, 어차피 겪은 일이니 그 사실을 묻어두거나 금기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상황을 인정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제가 가장 가슴이 아픈 일은, 어른들이 어른들의 인생에서 겪은 사태의 원인을 아이들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생전에 엄마가 한 말이 성지에게 계속 걸려있는가 봅니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나 봅니다.
엄마의 죽음이 성지나 경지의 잘못이 아니라고 일부러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다 생각해서 그냥 묻어두고 있었는데, 어젯밤 성지가 기어이 자신의 엄청난 트라우마가 된 그 일을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저도 계속 이 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터라, 바로 대응했지요.
“아냐, 성지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어. 엄마는 엄마 몸이 아파서 돌아가신 거야. 절대 성지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니야. 걱정하지 마, 성지야? 엄마가 성지와 경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빠한테, 성지와 경지 정말 잘 키워달라고 부탁하셨거든.
엄마는 성지하고 경지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것을 제일 좋아하셔. 그렇게 잘 자라는지 하늘나라에서 계속 보고 계셔. 아니 우리 옆에서 항상 지켜보고 계셔. 돌아가시면 우리는 엄마를 볼 수 없지만, 엄마는 우리를 볼 수 있으시거든. 그러니까 성지야, 절대 성지 때문에 엄마 돌아가신 것 아니다? 그런 일로 걱정하지마, 알았지?”
“네! 그럼 엄마는 천사가 되신 거예요? 천사면 하늘나라에서 날개 달고 있어요?”
“아니 꼭 천사라고는 할 수 없어.”
“근데에-, 하느님이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잖아요. 잘못하면 벌을 주고요. 하얀 수염을 하고 지팡이를 들고 계시는 하느님요.”
성지가 그 전에 이런 질문을 했더랬지요. 크리스마스가 언제냐고. 그리고 산타 할아버지가 들어오실 굴뚝은 우리집에 어디 있냐고. 우리는 그런 연결된 굴뚝이 없다고 하니깐, 그럼 산타 할아버지가 저에게 선물을 주실 수 없지 않냐고. 그래서 제가 임기응변으로 대답했죠. 우리는 굴뚝이 없으니까 문을 잠궈 놓지 않으면 그리 들어오실 거라고.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어제 저녁밥을 같이 먹을 때 한 얘기 같아요.
성지가 지금 이렇게 산타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하느님, 천사를 상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텔레비전과 책과 유치원 등 여러 소통 공간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습득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 방식에 대해 상당히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항상 이렇게 주입이 되고 있습니다. 너는 잘못이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늘 지켜보시면서 그 잘못에 대해 죄를 줄 것이라고.
이런 식의 경고가 방방 뛰고 정신없게 만드는 자식들에게 부모가 선택할 수 있는 어휘 중에 아주 효과가 뛰어난 것임을, 얘들을 키워보면서 깨닫게 되더군요. 우선 얘들의 행동을 제지할 강력한 장치가 필요한데, 엄마아빠의 ‘말빨’로는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 그 때 에너지가 엄청난 외부의 신을 요청하는 게 가장 쉬운 아이들 제압법이라는 것을요.
저는 성지에게 다시 부드럽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성지야. 하느님과 천사가 너를 보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지가 잘못을 하면 그 잘못을 해서 생기는 일이 결국에는 성지에게 좋지 않다는 거야. 그런데 그 좋지 않은 것이 하느님이 벌을 주어서가 아니라, 성지가 좋지 않게 행동을 했기 때문에 성지가 그렇게 안 좋게 된 거야. 성지가 하고 있는 행동들을 하느님이 보고서 벌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성지가 잘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건 하느님이 죄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지가 잘 하면 하느님이 없어도 성지가 좋은 일이 생길 수다 있다는 말이야.”
저는 서양에서 천 년이 넘게 정교하게 된 기독교 신관(神觀)이 많은 폐해를 야기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이런 식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나의 도덕적 행위에 대해 평가를 하고 그에 대한 벌을 부과한다는 생각을, 우리 성지는 하지 않기를 바라거든요. 저의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성지는 절실히, 심각하게 저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저를 벌주시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그 책임에 대한 결과도 자신이 짊어져야지, 하느님이 대신 벌을 주고 용서해줄 수 없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인간의 삶에서 자신이 지은 잘못을 외부의 절대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그 탓을 돌리는 행위, 이것이 신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백 배 힘든 일이라고. 평생 자신을 반성하며 자신이 그 잘못을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해결해야 한다고. 이런 생각의 원초적 소스는 동양 불후의 고전 『중용(中庸)』에서 많은 계발을 받은 것이지요.
죄송합니다. 부모의 잘못에 대한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 아이들이 그 책임을 떠맡는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다 길어졌네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른들(특히 부모)의 잘못을 아이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이들의 행위를 자신도 전혀 모르는 ‘절대자’가 항상 지켜보고서 그 행위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좋은 아이에게는 칭찬과 선물을,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린다는 사기(저는 이런 행위를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속이는 것이 사기지요)를 그만두어야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 자체로 완벽한 생명체다. 불완전하다고 협박하여 그것을 미끼로 외부의 강력한 절대자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 “아빠는 안 죽어. 성지랑 경지랑 잘 키워야지, 왜 죽어? 걱정마 성지야!” 성지는 제 말을 듣고 바로 울부짖습니다. “아빠 거짓말하지 마세요. 곤충이나 눈이 있는 생명은 모두 죽잖아요. 저도 할아버지가 될 것이고, 할아버지가 되면 다 죽잖아요. 엉엉! 말도 안 돼! 제가 죽는다니! 엉엉!” 아! 일곱 살 된 아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저는 놀랐습니다.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하지만, 결코 웃을 수만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핵심을 건드리는 말을 하고 있는 우리 아이의 토로에 아연실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듣고 보는 게 많아 어휘력이 좋아졌다는, 많은 이들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 성지도 그런 단계가 되었거니 하고 여겼지요. ‘아, 우리 아들이 엄마의 죽음만 슬퍼하는 게 아니구나. 성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생멸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몇 번을 이렇게 안 죽는다고 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지요. 이미 알 것을 안 것이죠. 죽음, 불행, 어둠,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어린 시절에는 가급적 느끼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 핵을 성지가 목도했으니 어쩌겠어요. 성지는 이미 인간 존재의 고통을 너무나 빨리 감각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저는 힘껏 안아주고 등을 토닥거리며 위로했습니다. “성지야. 너무 슬퍼하지마. 아빠도 성지처럼 일곱 살 때, 그런 생각을 하고서 정말 슬퍼한 적이 있단다. 아빠 할머니께서 ‘죽을란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고, 할머니 죽으면 안 된다며 엄청 운 적이 있어. 근데 사람은 아주 오래 살아. 오래오래 살다보면 모든 사람이나 생물이 죽는 것을 그렇게 무섭게 생각하지 않게돼. 우리 지구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그리고 성지 말처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모두 죽어. 원래 그런 거야. 그렇지만, 죽는 것이 나쁜 것이 아냐. 생명은 원래 그런 것이야.” “그래도 저는 동물로 태어나는 것 싫어요. 엉엉.” ... 성지는 인간이 수천 년 간 축적해온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까지 다 가지고 있었지요. 인간의 근원적 한계가 죽음이고, 그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때문에 종교적 세계는 인간에게 부지불식간에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지요. “성지야, 성지는 동물로 태어나지 않을 거야. 그냥 흙이 될 수도 있어.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다 그래. 사람도 마찬가지야. ... ” 지금 잠을 자도록 유도해야 할 시간에 인간 존재의 근본적 고민에 대해 일곱 살 난 아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츄를 보니, 참 기가 막히고 성지가 안쓰럽고 미안하기만 합니다. 옆에서 한참 말없이 듣고만 있던 경지가 한 마디 합니다. “아빠, 그런 얘기 그만 하세요!” 깨갱! ... 맞어. 이 아이들에게는 가혹한 얘기인지도 몰라... “알았어 경지야. 안 할게.” “성지야 걱정말고 오늘 내일 즐겁게 살면 돼. 그리고 건강하게 살면 돼. 그거면 돼. 사람은 그렇게 사는 거야. 앞으로도 또 이런 생각이 들면 아빠한테 말해 알았지?” “네.” 성지는 좀 수그러졌는지, 평소에 하던 이야기로 화제를 바꿉니다. 이불을 덮고 자겠다느니, 자기 이불은 얇아서 좀 춥다느니 하면서요. 저도 얘들 얼른 재운 뒤 공부하려했는데, 같이 잠이 들어버렸네요. 새벽에 깨서 경지 아랫도리를 만져보니 축축합니다. 으! 또. 옷 갈아 입히면서 자연스레 잠이 깼고, 다시 책상에 앉았지요. 논문 작업 중인 조선시대 농업기술사 공부를 하다가, 문득 잠들기 전 성지의 말이 새록새록 생생하게 재생이 되어 이 상황을 선생님께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보던 책을 덮고 자판을 두드리게 됩니다. 아, 사는 게 이런 걸까요. 이런 아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는 선생님은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미래의 인간다운 인간으로 키워주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2011년 8월 23일 새벽 5시 성지 아빠 정명현 드립니다 추신: 아토피 걱정이 많습니다. 이제 얼굴 전반이 까칠해져서 마음이 좋지 않네요. 성지도 이것 때문에 무척 신경이 쓰이는 것 같은데, 먹고 싶은 것은 먹고 싶어 하니,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일까요. 선생님과 친구들 의식을 많이 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수두 자국이 많이 없어졌는데도, 기어코 유치원 가기 싫다는 이유는, 얼굴이 이래서 챙피하다는 거였어요.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성지가 며칠 전에 저에게 고백하데요. 유치원에서 ‘여자짓’을 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못 알아들어 한참 반복하게 한 뒤에 들렸는데, 그게 뭐냐 했더니 유치원에서 여자처럼 변기에 ‘앉아서’ 쉬를 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장면을 여자 아이 둘이서 보았다는 겁니다. 그 때문에 챙피해서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수두 자국 때문인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얘들이 자신의 그런 행동에 대해 비웃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다른 친구들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여 유치원을 가기 싫어한 것 같아요. 그럼 ‘신나는 유치원’ 가지 않을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데요. ... 참 웃기는 일이지만, 성지에게는 너무도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아빠한테만 비밀이니, 선생님께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된다네요.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유치한 일이라고 성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텐데, 이때는 진지하게 심각한 일이죠. 아이들의 이런 마음을 부모가 잘 이해하고 살펴야 할 텐데... 이런 성지의,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심정들을 잘 헤아리는 일이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성지의 얼마 전 집에서의 생활의 단면과 고민에 대한 얘기를 써놓은 싸이트가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7월 17일 분 (www.imwon.net에 들어가시면 “텃밭에 들깨 모종했소!”란 제목이 있습니다) http://www.imwon.net/?mid=freeboard&page=2&document_srl=6751 8월 7일 분 (www.imwon.net에 들어가시면 “의상경계책 7: 이것이 경묘법이다”란 제목이 있습니다) http://www.imwon.net/?mid=freeboard&page=1&document_srl=7508
2011.08.23 22:50:10
*.161.207.190
글을 쓰다 보니 애초 취지와는 약간 달라졌어요.
부모가 아이에게
다른 어른들(경찰, 주변의 적당한 아저씨 아줌마, 아무 관련도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 도둑 등)이나
무서운 것(호랑이, 귀신 등)이나,
초월자를 빌어
협박하는 것을 얘기했는데,
마치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은 것처럼
쓰여졌어요.
사실은 제가 요새 어색한 순간이나
땀 나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얘들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
자주 써 먹는 방법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반성하자고 쓴 건데,
아내나 유치원 선생님에게
탓을 돌리는 꼴이 된 것 같아요.
아이에게 말 한마디를 뱉을 때
좀더 세심하게 고려하렵니다.
2011.08.23 23:20:34
*.161.207.190
성지 유치원 원장님께서 보내주신 답글도 올려야 할 것 같아
같이 싣습니다.
안녕하세요^^
신나는 유치원 원장입니다.
아버님이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고뇌하시는 모습이 글에서 절절히 묻어나면서 아버님의 모습이 글과 함께 클로즈업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성지 어머님의 소식을 접하면서도 저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어요. 그 또한 성지 어머님의 건강했던 모습(?)이 떠올라서요.
아니 제 자신도 아이들의 엄마라 엄마 없는 아이들의 모습 때문에 전화도 드리지 못했다고 해야겠죠. 전화를 드려 위로한다고 하면서 남의 상처를 긁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이나 동식물이나 삼라만상의 모든 생물체들은 태어나면 다시 땅으로 가는 것이 이치인 것을, 아직 성지나 경지는 어리기에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겠죠.
성지가 또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이제 어린 아기가 아니고 성장을 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정서가 분화하면서 인간이라면 반드시 거치는 죽음을 생각할 시기가 된 것인데, 다만 이 죽음이라는 것이 “왜 하필 우리 엄마인가!!”가 성지의 물음이겠죠!!
옆에서 지켜보시면서 애간장이 녹으실 거에요.
이 편지를 보는 저희가 가슴이 아린데요. .......
아버님!!
우리 성지가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는데 현실로 나타나서 그러는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그렇지만 아버님과 함께하면서 점차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성지도 자기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도 할 거에요.
한편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고요... 아무튼 우리 아이들이 너무 갑작스레 엄마의 부재를 맞이해서 그때는 모르다가 지금 서서히 그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
옆에서 지켜보기 힘드시더라도 서로 함께하면서 이겨내셔야 할 거에요.
힘내세요.
그리고 옆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소식을 전하면서 서로 공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어요. 저희가 힘이 되어드리지는 못하지만 서로 마음을 안고 간다는 것이 중요할 수 있거든요.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공유하면서 아이 마음 안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그러한 관계는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마음을 서로 나누시면서 함께 한다면 우리 성지와 경지는 좋은 아이들로 자랄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처럼 아이들과 함게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아버지, 교사, 유치원이 되었음 좋겠다는 생각에 두서없지만 글을 남겨봅니다.
아버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08.23 23:52:40
*.161.207.190
성지가 며칠 전 수두 딱지가 떨어지면서
입맛이 좋아졌나봐요.
오늘은 평상심을 되찾았는지
잘 시간 되었다 했더니,
학습지 '곰돌이'를 다 하고 자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냅두었지요.
제 자리를 독차지했으니
저는 사진이나 찍어둬야죠 뭐!
이 예쁜 고사리손이 글씨를 써요.
유치원 가지 않았던 지난 주에는 텔레비전 보면서
"마법전사 유캔도"라는 어린이 프로의 노래가사를
자막 정지시키고 다 적어서 부르더라고요.
싸우는 프로는 가급적 보지 말라 했는데... 참.
2011.08.24 15:47:56
*.193.56.137
지금 이 때를 그때그때 잘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괴롭다 비관할 필요 없고,
즐겁다 낙관할 수만 없고,
화나면 화나는 대로
예뻐죽겠으면 그런 대로
그때그때를 넘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그렇게 일년 가면
어느 새 아이들은 내 품을 벗어나려할 겁니다.
그래도 아빠아빠하며 매달릴 때
매달려줘야지.
이 시절도 금방 간다잖아요.
그러면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도 실감할 것이고요.
행임 말씀대로 자연 이치대로 순응하다 보면
마음도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현이네도 가고, 보리네도 가고,
나한이네도 가고, 종윤이네도 가고...
가볼 데 많네요.
얘들은 지 또래들이랑 놀 때 제일 좋아 하더군요.
물론 먹을 것이 동반돼야죠^^
행임요 추석 때 가야죠.
2011.08.25 17:00:39
*.152.3.36
"같이 마음을 나누라"는 유치원 원장님의 말씀이 와 닿네요. 성지와 경지 씩씩하게 잘 자랄겁니다.
중용의 새로운 주석이군요.
안회의 아우라 그대로 입니다.
왜이리 눈물이 나는지....?
아~
성경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