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은
태조와 장화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 자는 승건이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던 왕건은 나주의 미천한 집안 출신 오씨로부터 첫 아이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921년
정식으로 정윤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 936년 후백제 정벌 전쟁에 참가하여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가 943년 5월 태조가 죽자 고려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비록
태자 무가 왕위를 이었지만 충주 유씨 일가를 비롯한 반발 세력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혜종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그를 제거하려는
세력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혜종은 왕위 찬탈을 노리는 이복동생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태자
무의 출생과 관련하여 [고려사]는 우스꽝스런 이야기 하나를 전하고 있다. 궁예의 신하로 있던 시절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오씨를
만났다. 이때 왕건은 비록 동침은 했지만 그녀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염려하여 임신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오씨가 이것을 즉시 흡수하여 임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 달 후 아이를 낳았더니 이상하게도 아이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혜종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무리들이
고의로 퍼뜨린 악의 섞인 이야기일 것이다.
혜종의
얼굴에 유난히 주름살이 많은 것과 장화왕후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연결지어 그의 왕위 계승이 부당하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노림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역사적 기록으로 공공연히 실렸던 것을 보면 당시 혜종이 받은 수모가 얼마나 지대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어쨌든
혜종은 이 우스꽝스런 출생담 때문에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은 단지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많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의 친모 오씨의 출신이 미천한 것을 빗대고 한편으론 이복동생들의 왕권 위협에 시달려 고민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는
사실을 함께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주름살
임금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혜종은 2년 4개월간의 재위기간 내내 주름살 펼 날 없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낸다. 태조가 죽자 혜종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있던 충주 유씨 세력과 요(정종), 소(광종) 등의 신명순성왕후 소생들이 본격적인 권력팽창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왕요와 왕소는 서경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 박술회와
왕규에게만 의존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던 청주 유력가 김긍률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또한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의 장인 박영규와 박수경, 수문 형제 등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왕권은 점점 위축되어, 혜종은 침실을 옮겨가며 잠을 자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 하며 혜종에게 왕요 형제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역모 세력을 엄단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내주면서 화해 의사를 타진한다.
비록
왕규와 박술희의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모
양이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 일파의 왕권 위협은 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송악산 동쪽 기슭 순릉에 묻혔다.
혜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병명도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호위 병사를 거느리고 다닌 점으로 미루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쓴 [고려사]는 혜종의 이 같은 행위와 당시 혼란에 대한 책임을 모두 왕규에게 전가시키고 있으며, 이를 위해 몇 가지 장치를 해놓고
있다. 왕규가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객을 시켜 벽을 뚫고 왕의 침실 안으로 침입케 하여 혜종을 살해하려 했다거나, 자객을
보내 귀양 간 박술희를 죽였다는 내용 등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 장치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왕의 침소에 자객들이 침입한 사실을 놓고 왕규의 소행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는데,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자객을 보낸 쪽은 왕요일 가능성이 더 크다.
왕이
자객에 의해 급살 되었을 경우 왕위를 이을 사람은 세력이 가장 컸던 왕요였을 것이고 또 실제로 혜종이 죽었을 때 왕요가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혜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곧 왕규의 기반 상실을 의미하는 일이므로 왕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왕규가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 왕규의 사정은 이 같은 일을 추진할 입장이 아니었다.
왕규는 본래 함씨였다가 왕건의 신임을 받아 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박술희와 더불어 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명을 받든
몸이었다.
때문에
태조의 유명을 어긴다면 박술희와 등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하지만 왕규는 무장 출신이 아닌데다 군사력을 동원할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무력 동원 능력이 있는 박술희와 적대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
혜종이
죽자 왕규가 왕요 일파에 의해 즉각 제거되었던 것으로 봐서도 왕규의 군사력은 미약했거나 아예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규는 오히려 혜종과
박술희에 의해 보호받는 입장이었다. 혜종이 왕규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왕규가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왕규가 자신의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면 혜종이 끝까지 왕규를 보호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고려사]는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혜종을 협박하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역모를 꾸몄다고 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이는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우선
광주원군을 앞세웠다면 왕규가 제거될 때 필히 광주원군도 함께 언급되어야 하는데, [고려사]는 광주원군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고려사]는 단지 실록에 광주원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만 쓰고 있다.
역모가
일어났을 경우 반드시 역모자들이 추대하고자 했던 인물도 함께 처리하는 것이 역모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해결 괴정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비록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란 사실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광주원군은
적통도 아닐 뿐 아니라, 엄연히 차자(次子)인 왕요가 있었고 그 이외에도 적자가 여섯 명이나 더 있는데 제16비의 아들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한 발상이다.
이는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왕규가 그런 발상을 했을 경우 왕후를 배출한 황주의 황보씨, 정주의 유씨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황해도,
경기도 세력의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경기도 세력은 왕규를 추종하고 있었다. 이는 왕규가 그들을
자극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는 왕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왕규를 죽이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혜종의
임종 직전에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개경으로 진입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에 대하여 [고려사]는 왕규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때 왕규를 체포하여 귀양 보냈다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고 했다.
하지만
[고려사]의 이 같은 서술은 조작된 흔적이 역력하다. 만약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면 필시 군사를 일으켰을 것인데. [고려사]는 그런
내용을 전혀 싣고 있지 않다. [고려사]는 단지 왕규가 반란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왕식렴 군대가 개경에 진주하였다고 쓰고
있다.
왕규가
반란을 도모했다면 적어도 왕식렴의 서경 군대가 오기 전에 도성을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먼 곳에 있던 서경 군대가
도성을 먼저 장악했고, 당시 대광 벼슬에 있던 왕규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식렴에게 쉽게 붙잡혔다.
이는
왕규가 반란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되려 왕식렴이 반란군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왕식렴의 서경 군대는 왕요 일파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는 문무
대신들과 개경 백성들을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은밀히 개경으로 진입하여 왕성을 에워쌌던 것이다.
말하자면
왕식렴의 군대가 개경으로 진주했을 땐 이미 혜종은 병사했거나 살해당한 이후였고 왕성 또한 왕요 세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요 일파는 왕요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던 왕규와 문무 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이런 사실은 박술희의 죽음을 통해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태조의 유명을 받든 박술희가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고 또 혜종이 아닌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는 것은 정종 왕요가 이미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
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혜종에게 엄연히 아들 흥화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종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도 그의 왕위 찬탈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더구나 박술희는
왕규에 의해 죽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을 왕규에게 뒤집어씌운 그야말로 성패론에 입각해서 작성된 날조된 역사일 가능성이
높다.
박술희는
혜종의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왕요 일파에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왕요가 박술희를 왕규보다 먼저 죽인 것은 바로 혜종의 무력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왕요는 정권을 장악한 후 왕규의 무리 3백 명을 처형했다고 했는데, 이들은 개경의 문무 대신들일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발했다는
것은 왕요의 즉위가 부당한 행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왕요가 왕위를 계승하자 개경의 문무 대신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왕요 일파는 급한 마음에 이들을 역도로 몰아 모두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혜종이 끝까지 왕요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지 않은 사실과 왕요가 측근들의 추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이처럼
당시 사료를 통한 정황 분석은 혜종이 단순히 병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왕요 일파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규와 박술희를 비롯한 문무 대신들을 역도로 몰아 왕위찬탈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에 왕규가 역적으로 올라 있는 것은 정종, 광종 등 왕위 찬탈세력들의 철저한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에서 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였다.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도 함께
소실되었다.
실록
편찬은 바로 이때 소실된 사료의 복원 차원에서 이뤄진 일로서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칠대실록' 편찬에 착수하게 된다. 왕명을 받고 실록
편찬을 주도한 인물은 황주량이었다. 그는 사초 소실로 과거사를 알 수 없게 되자 나이가 많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료 수집 작업을 벌이고 사료
수집이 완료되자 그것들을 토대로 '칠대실록을 편찬하였다.
'고려실록'
편찬 사료들이 이처럼 허술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혜종, 정종대의 왕위 계승 다툼에 대한 내막은 정확하게 기록될 수 없었고 왕규를 역적으로 기록한
[고려사]의 평가 역시 신빙성 없는 자료와 정종, 광종조의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혜종은
의화왕후 임씨를 비롯 후광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 궁인 애이주 등 4명의 부인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의화왕후
임씨는 대광 임희의 딸로 921년 12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태자 무와 혼인하였으며 9t3년 5월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흥화군, 경화군부인, 진헌공주 등이 있다. 생몰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사망 후에는 순릉에 안장되었다.
후광주원부인 왕씨는 대광 왕규의 딸이며, 청주원부인 김씨는 원보 김긍률의 딸로 두 사람 모두 소생이 없었다. 궁인 애이주는 경주 사람이며
대간 연예의 딸이다. 소생으로는 태자 제와 명혜부인이 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