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냉수리-중성리 신라비ㅡ150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신라를 말하다.
<1> 포항 냉수리-중성리 신라비
이문기 경북대 사범대학장이 포항시 신광면사무소 인근에 위치한 냉수리 고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학장은 고분의 조성시기와 냉수리비의 제작시기가 비슷하다며 이 고분에 묻힌 사람이 ‘냉수리비’를
조성한 신라의 귀족일 것으로 추정했다.
경북은 유ㆍ불ㆍ선 3대문화권이 집합된 한국 문화의 본향이다. 전국 문화재의 20% 이상을 보유한
문화재의 보고이기도 하다. 경북을 빼고는 한국의 문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아직 경북지역 곳곳에는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가 지천이다. 무궁무진한 전설과 설화, 신화 등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역사와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 문화재는 없다. 문화재는 크든 작든 저마다 이야기와 사연을 지니고
있다. 대구일보는 매주 수요일 경북지역의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10년 주기설’
한동안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10년 주기설’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아 다녔다.
이 말에는 연구 자료의 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고대사 연구자들이 제발 10년마다 한 번씩 획기적인 새
자료가 나와 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 ‘10년 주기설’이 만들어진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지금부터 30여년 전인 1978년에 충북
단양에서‘단양 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가 발견되었고, 이듬해인 1979년에는 충북 충주에서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가 확인되어, 그때까지 몰랐던 신라와 고구려 역사의 중요한 매듭을
푸는 실마리가 되었다. 그로부터 꼭 10년 뒤, 1988년에 ‘울진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 1989년에는
‘포항 냉수리신라비’라는 신라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획기적인 새 자료가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 4기의 비석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고대사 연구는 훨씬 풍성해졌다. 연구자들 사이에 ‘10년 주기설’이
성립하는 순간이었다.
‘10년 주기설’이 사실로 입증되려면 1998년이나 1999년에 다시 괄목할만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어야 했다.
사실 이 두 해 동안 가슴 두근거리며 새 자료의 출현을 기다렸던 사람도 제법 많았다. 그러나 1998년과
1999년은 새 자료 발견이라는 낭보를 전해주지 못한 채 속절없이 지나갔으며, ‘10년 주기설’도 설득력을
잃고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흐른 2009년, ‘냉수리비’가 발견된 지
20년 만에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에서 또 하나의 놀랄만한 비석이 땅속에서 출토되었다. ‘포항 중성리신라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의 소망인 ‘10년 주기설’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두 비석 발견의 숨은 이야기
‘냉수리비’와 ‘중성리비’라는 두 개의 비석은 건립된 시기가 비슷하고, 발견된 장소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와 흥해읍 중성리로서 20리 남짓 떨어진 매우 가까운 곳이다. 더구나 비석에 새겨진 내용까지도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에는 서로 다른 뒷이야기가 숨어 있다.
‘중성리비’가 발견되어 문화재청에 신고되고 학계에 알려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결국 보물 제1785호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모범적인 절차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2009년 5월 초순 흥해읍 중성리,
학성리 일대에서는 도로 개설공사가 한창이었다. 도로의 지하에 하수관을 묻기 위한 터파기 작업도
진행되었다. 파낸 흙과 돌은 트럭에 실려 다른 곳으로 버려지고, 몇 개의 자연석만이 흙 속에 묻힌 채
작업 현장에 남아 있었다.
현장 가까이 살고 있었던 김헌도씨는 몇 개의 자연석 가운데서 평평한 돌 하나를 발견하고 그 돌을 작업
현장에서 끄집어냈다. 집으로 가져가 화분 받침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의 무게가
만만찮아 곧바로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이틀 후 휴무일이 돌아오자 그는 돌의 바닥에 지주목을
받치고 밧줄을 묶어 조금씩 끌어 겨우 집 마당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옮겨진 돌에 묻은 흙을 씻어 내려가던 김헌도씨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돌의 표면에 글자와 비슷한 것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페인트 붓으로 남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내자 그 돌의 한 면에 글자가
가득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중성리비’가 세상에 처음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확인 직후 발견자는
그 사실을 지역 언론사에 제보하였고, 언론사에서는 포항의 향토사학자들에게 연락하여 그들에 의해 최초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문화재 당국에 신고되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이
이 비석을 연구소로 옮겨 학계에 공개하였다. 이로써 ‘중성리비’는 신라사 연구의 일급 자료로서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냉수리비’의 발견 경위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대조적이다. 20여년전인 1989년에 자기 밭에서 ‘
냉수리비’를 찾아냈던 발견자는 신광면 냉수리에 살던 이모씨였다. 그는 1988년에 ‘봉평비’가 울진군 죽변면
봉평 2리의 논 가운데에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자기 밭에도
종종 쟁기에 걸려 애를 먹이는 돌이 있다는 부친의 이야기가 떠올라 쇠꼬챙이를 만들어 밭을 찔러가며 조사하다가
비석을 발견했다고 한다. 밭에서 캐낸 비석을 집으로 옮긴 발견자는 화선지에 비면의 글자를 옮겨 그린 후,
그것을 들고 대구 지역 연구자들에게 비석의 금전적 가치를 문의하며 다녔다고 한다. 문화재보호법의 엄중함을
알지 못하고 비석을 매매가 가능한 물건으로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여곡절 끝에 ‘냉수리비’는 대구의
모 학술재단에 알려졌고 문화재 당국에 신고가 이루어져 결국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베일에
싸여 있던 6세기 초 신라의 역사를 밝혀주는 등대가 되고 있다.
뒷이야기 한 가지. 마을의 노인들은 수십년전인 일제시대에 냉수리 마을에서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그 비석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과연 그때의 비석이 ‘냉수리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라가 비석을 아무리 많이 세웠다 한들, 지방의 한적한 촌락에 두 개씩이나
세웠을까? 누군가가 훗날을 도모하며 남몰래 비석을 밭 가운데 묻었던 것은 아닐까?
발견 경위가 어떠하든 우리는 발견자에게 감사해야 한다. 역사 연구의 귀한 자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줄 자랑스러운 문화재를 우리 시대에 찾아냈으니 말이다. 만약 이 비석이 그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땅속에 묻혀 있거나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깨어지고 부스러져 영영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비석의 발견 과정을 보면, 내 주위의 평범한 돌조각 하나라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잘만하면 국보나 보물의 최초 발견자라는 명예와 함께 포상금까지 받게 되니,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일이 아니겠는가?
◆두 비석이 말하는 신라의 역사
두 비석은 형태부터 독특하다. ‘냉수리비’는 3면에 걸쳐 글자가 새겨진 3면비인데, 특히 비석의 상면에 글자가
있어 후대의 비석과는 그 모습이 크게 다르다. ‘중성리비’는 앞면에만 글자가 있는 1면비이지만, 글자가 비면의
거의 끝까지 새겨져 있어 어떻게 세워두었는지조차 잘 알 수 없다.
비석이 세워진 시기는 비문의 첫 머리에 기록된 간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냉수리비’는 계미년에, ‘중성리비’는
신사년에 건립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 60갑자는 6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것이므로 그 정확한 연대가
확정되어야 한다. ‘냉수리비’는 약간의 논란을 거쳐 503년(지증왕 4년)에 세워진 것으로 확정되었고, ‘중성리비’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441년(눌지왕 25년)설과 501년(지증왕 2년)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441년설이 옳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라도 ‘중성리비’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 비석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두 비석은 비문의 내용에도 흡사한 점이 있다. ‘냉수리비’는 진이마촌이라는 곳에 사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이 가진 재물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자 중앙의 고위 관직자가 판결을 내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중성리비’에도 흥해 지역에 있는 몇 개의 촌락에서 분쟁이 발생하자 중앙의 관직자가 판결을 내린 내용이
쓰여 있다.
오늘날의 포항지역은 신라 당시에는 수도인 경주의 외곽에 위치한 하나의 지방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 지역에서 발생한 각종 다툼에 경주의 중앙 정부가 관여했던 이유는 포항이 경주
귀족들의 삶을 뒷바라지하는 배후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포항에서 발견되었고 건립 시기가 비슷하며 내용까지 서로 닮은 ‘냉수리비’와 ‘중성리비’는 현재 멀리
떨어진 곳에 나누어져 보관되고 있다. ‘냉수리비’는 포항시 신광면 면사무소 앞마당의 비각 속에 허술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중성리비’는 경주문화재연구소의 유물보존실에 들어 있어 관람이 자유롭지 못하다.
포항시청 김진규 학예연구사에 의하면, 포항시는 머잖아 ‘시립 국보관(가칭)’을 건립하여 두 비석을 옮겨
보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두 비석은 하루라도 빨리한 곳에 모아 보존되어야 한다. 포항 시립 국보관에서
두 비석을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문기 경북대 사범대학장ㆍ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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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냉수리 비는 신광면 사무소 마당에서 봤는데 중성리 비는 아직 실물을 보지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