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73 : 1 - 28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내보다 못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스스로 실망과 좌절에 빠져 들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는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살았고 내가 공부도 더 잘 했는데 지금 나보다 더 잘 사는 것을 보면 실망에 좌절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한 것으로 인해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난과 역경을 만나면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에게도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실족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성도가 고통 받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실망하고 신앙적으로 실족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영적인 무지와 미숙함에서 오는 오해로 인해 생기는 것으로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영적인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으로 인해 실족하게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 시는 아삽이 쓴 시입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 성가대 대장으로 음악가였습니다. 다윗 왕도 음악을 좋아해서 많은 시를 써서 찬송으로 부르게 하였지만, 아삽도 많은 시를 써서 찬송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시편에 다윗이 쓴 시가 많고 다음으로 아삽이 쓴 시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아삽도 신앙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았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의인이 고통을 받고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을 때 실족할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2절에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왜 아삽이 넘어질 뻔하고 미끄러질 뻔하였는가 하면, 3절에 그 이유를 말했습니다. ‘내가 악인의 형통함으로 보고’ 라고 했습니다. 아삽과 같은 믿음이 좋은 분도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고 크게 실망을 하였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지 않고 열심히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으로 알았는데, 세상을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는 가난하게 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상 섬기고 죄를 즐기며 사는 악인이 더 형통하고 건강하고 사업도 잘 되고 죽을 때도 고통도 없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죄값으로 불행하게 되어야 할 악인은 형통하고, 성도에게는 고난이 따르는 것을 보고 실족할 뻔 하였고 미끄러질 뻔 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것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상 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분명히 저주 받아 마땅한 사람이 저주가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만사가 형통할 뿐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았을 때 과연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신가 의심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신가 하는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며 자기 욕심대로 살아도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11)고 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열심히 믿음으로 살았는데도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삽이 더욱 실망하게 된 것은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 난다는 것입니다(12). 아삽은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이 불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자신의 깨끗한 마음 깨끗한 손 무죄한 것이 실로 헛되다고 말했습니다(13). 과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신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삽은 찬양을 지휘하는 믿음의 사람이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좋은 아삽이 악인의 형통한 것을 보고 또 자신은 매일 징벌 받는 것을 보고 상당한 믿음에 실망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생각을 입 밖에 발설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을 했습니다.
15절에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느끼는 심적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심적 고통을 말하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신앙적인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 악행을 하게 될까 해서 자신 혼자만 심적 고통을 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존경받는 사람의 입에서 실망하는 말을 하게 될 때 그 말을 듣는 신앙이 어린 성도는 크게 낙담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혹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 받는 다는 불신앙적인 말을 하고 행동을 취하면 다른 성도들까지도 실족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삽은 자신이 느끼는 불신을 말하지 않고 자신 혼자 고민하였습니다.
아삽은 혼자 불신앙적인 고민을 안고 씨름을 하다가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16)다고 했습니다. 아삽의 주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악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삽의 생각에는 저런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한데 그게 아니라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고 빼앗고 남을 억울하게 하여도 소득은 넘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은 하는 일마다 어려움이 있고 손해를 보고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것을 보았을 때 상당한 심적 고민을 하였습니다. ‘심한 고통이라’고 할 정도로 신앙적인 혼선이 올 때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던 성도가 불신앙적인 생각으로 고민을 하게 되면 심한 심적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기나 하는가? 정말 하나님이 성도를 사랑하고 복을 주시는 분이신가? 하는 신앙적인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저런 고민에 빠지게 될 때 영적 빈곤에 시달리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거짓말처럼 들려지게 될 때 예배드리는 한 시간이 고역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아삽은 이러한 고민을 안고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신앙적인 고민을 할 때 성전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적 고민은 성전을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는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아삽이 성소를 찾았을 때 비로소 자신이 고민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라고 말했습니다. 아삽은 자신의 신앙적인 고민을 안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성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비로소 악인의 종말을 알았습니다.
최후 심판날에 인간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영원한 멸망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일시적으로 형통할 수 있으나 의인이 하나님 안에서 영복을 누리게 되는 것과 달리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성경적 인과응보 사상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삽은 악인들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 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8,19)라고 말하므로 악인의 종말이 어떻게 되는 가를 알았습니다.
악인들의 번영의 기초는 굳건한 반석이 아니라 마치 눈내린 비탈길이나 얼음판과 같이 미끄럽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결코 영원한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형통함이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날에 마침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려서 파멸에 이르고 말게 될 뿐입니다.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정함과 철저함을 보여 줍니다.
이제 아삽은 자신이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17)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돼지가 먹이를 앞에 두고 서로 먹으려고 밀고 싸웁니다. 먹을 것을 실컨 먹고 배가 불러 드러누워 잡니다. 잘 먹고 살이 통통하게 찌고 성장하면 어디로 갑니까? 돼지는 빨리 먹고 빨리 성장하면 죽음이 더 빨라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돼지가 빨리 먹고 빨리 성장하면 빨리 죽는 다는 것을 알면 먹이를 앞에 두고 서로 먹으려고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돼지들은 빨리 죽는 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삽은 악인들의 형통한 것만 보고 믿음에 회의를 느끼고 실망하였던 자신을 마치 짐승과 같은 우매무지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악인들이 형통한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은 짐승과 같은 우매무지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아삽은 알았습니다.
아삽 뿐 아니라 하박국 선지자도 역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신앙적 실망감을 느끼고 심각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의인이 고난 받을 때 하필 악인으로부터 고난을 받는 것을 보고 이해 할 수 없어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를 하였습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1:13). ‘악인이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하11:17)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따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박국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른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2:1)고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할 말이 있으시면 대답해 보시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이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은 비로소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박국은 하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라고 고백하므로 자신의 미숙함을 고백하였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실망하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든가를 말했습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몸이 떨리는 것 같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불신자들의 형통함과 성도의 어려움을 보고 신앙적 실망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성도가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실족할 뻔 할 정도라면 아직 미성숙한 성도일 뿐입니다. 아삽은 이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 아삽이 넘어질 뻔하여도 넘어지지 않게 주께서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34,25) 라고 고백하므로 넘어질 뻔 했던 자신의 신앙이 회복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고 노래함으로 더 이상 실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른 자들처럼 부자같이 살지 못하고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도 실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처럼 건강하지 못해도 낙심하지 맙시다. 우상 섬기는 자들이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부러워하지 맙시다. 참된 복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복입니다. 이제 아삽은 말합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27)라고 말하므로 악인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알았습니다.
악인은 결국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는 무한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