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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9/ 성벽 재건 후에 일어난 일/ 느7:1~6/ 말씀: 하용조 목사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수산 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 수산 궁이라는 별장에서 술 맡은 관헌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만나서 예루살렘의 현지 사정을 물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말도 마세요.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이방인의 발에 짓밟히고, 성물은 다 도둑질 당했다” 라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눈물을 흘렸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이외는 할 일이 없었어요.
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성벽 건축을 하라” 는 명령을 하였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벽을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드라마처럼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느헤미야의 <불타는 마음>에 전심을 기울이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전>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비전>이 심어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불가능> 한 일이 <가능>해 지고, 안 되는 일이 <되게 만드는 일>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전심으로 <그 일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렇게 <동기부여>만 되면*** 우리 마음속에 비전이 심어지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 교회가 부흥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전>이란 무엇입니까?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마음속에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을 넣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더는 <그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교회 [리더]가 교인들에게 그런 비전을 심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가 발전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온누리 교회는 25년 전에 12가정으로 시작되었지만, 25년이 지나서 지난 번 상암 경기장에서 모인 사람이 40,000명이 넘게 모였어요. 이렇게 교인들의 마음에 자발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비전>입니다.
성벽을 건축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고, 삼발락과 도비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어요.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어려움과 시험이 따라 다닙니다.
사도 바울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어디에서나 음모와 훼방이 항상 존재했어요.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사람>은 단단해 지고 완벽해 집니다.
어떤 선교사는 서울에서 선교비가 오지 않아서 굶는 사람도 있어요.
선교지에서 선교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돈을 빌립니까?
예수 믿으면서 고난이 올 때에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줄까?” 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야 나에게 고난을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고난을 즐겁게 받으세요.
나에게 고난이 오면, 그리스도인으로 <이제 정상이다>라고 생각하세요.
느헤미야는 <말> 대신 <기도>를 했고, 사람에게 항의하기 전에 말없이 기도했어요.
저는 이번 선교 대회에 참석한 선교사님들, 그 분들의 얼굴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안수 기도해 주고, 그 분들은 내 기도를 받고 간 사람들인데***
“내가 그동안 잘 돌보지 못했구나?“라는 반성을 했어요.
나는 보내기는 했는데*** 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설교할 자신이 없었어요.
꼭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민망했어요.
그 분들이 갈 때는 열정도 있었고, 얼굴은 팽팽했는데*** 이제 보니 많이 많이 늙으셨고***
그 얼굴에는 <성자의 모습>이 보였어요.
이번에 와서 무대에 섰는데, 말을 잃어버린 성자의 얼굴을 보았어요.
그렇게 말을 많이 하던 사람이 말이 없어지면, 충격을 받아요.
그 분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그렇게 변했을까요?
수많은 말을 침묵으로 대신 하다보니까*** 참 그리스도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어요.
아마 느헤미야의 심정이 <이런 마음 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번 상암 경기장에서 우리 교회가 보여 준 영성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뙤약 볕을 받으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설교를 듣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7장 1절을 보십시오. “성벽을 건축하고, 문짝을 닫고 나서,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들과 레위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느7:1)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무얼 해야 합니까?
성벽 건축을 할 때에는 성안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어요.
그러나 성벽이 건축되고 나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그럼, 성벽이 완공되고 나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1. 성벽 건축 후에 제일 먼저 세운 [일]이 <문지기>입니다.
처음에 할 일은 성문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것은 영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을 지키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가 <문지기>입니다.
시편84편 10절을 보세요. “주의 뜰에 하루 있는 것이 다른 뜰에 천 날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악인들의 장막에 있느니 <문지기>로서라도 차라리 내 하나님의 집에 있겠습니다.“ (시:84:10)
그래요. 내가 세상에서 화려하게 사는 것보다, 주님의 집에 <문지기>로 사는 것이 기쁩니다.
2. 두 번째로 성벽을 지키면서 한 [일]은 <예배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여기서 <예배자>는 ①찬양하고, ②레위 인들이 제사장을 세우고, 섬기는 일들을 합니다.
가만히 묵상해 보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찬양>이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일보다, 기타 다른 일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찬양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등한시 하면 안돼요.
저는 교회에서 “회장 직분 받은 사람은 참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은 예배를 돕기 위해 <진짜 자기 자신은 예배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예배를 돕는 일>만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자>예요. 목사나 장로나 집사라는 직분이 아니고, 전심으로 예배드리는 <예배자의 모습>이 중요해요.
느헤미야는 이것을 알았으니까 <찬양>하고, <말씀>에 집중하는 <진정한 예배자>로 나갔어요.
이렇게 <참된 예배자>가 되었을 때에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사람 많이 모였다“고 <예배>가 아닙니다.
요즘 유행하는 <엔터테인먼트>와 <찬양>은 다릅니다.
“찬양이 좋다”고 “예배가 중요하다”고 얘기하니까, 연예인들을 데려다가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그건 아니예요. “세상에서 음악을 하듯이*** ”
“사람을 즐겁게 한다”고*** <진정한 예배>가 될까요? 그건 아니예요.
“노래 잘하고, 춤 잘 춘다”고 감동이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때에 감동이 오는 거예요.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온누리 교회의 연예인들은 노래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러브 소나타가
은혜 중에 진행되는 거예요. 일반 연예인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이고, 교인들에게 감동이 주지 않지만,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나가는 사람은 감동이 오는 거예요.
뉴욕의 <부르크린>에 진심발라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갔을 때, 찬양대가 245명이 섰어요.
<부르크린>은 대표적인 흑인도시인데, 거기에는 마약하고 매춘부들과 홈 리스들이 판을 치는 곳인데, 그들이 성령을 받아서 술을 끊고, 마약을 중단한 사람들이 찬양하는데, 너무도 놀라운 감격을 주었어요.
그교회는 홈 리스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다가 그 후에 그렇게 부흥한 거예요.
더 감동적인 것은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울면서 찬양을 해요.
얼마나 은혜스러우면 울면서 찬양을 하겠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하는 사람이 245명이니까, 예배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았겠어요.
약 5만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 교회의 특징은 흑인들이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려 와요.
그들이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 위대하고 자랑스럽게 느끼니까, 그렇게 정장하고 오는 거예요.
그 의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높이려는 뜻이 있는 거예요.
나는 그 분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보면서, "우리의 예배가 너무나 형식적이고, 너무나 엔터테인먼트한 것
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3. 세 번째로 느헤미야가 한 [일]은 <성을 지키는 사령관>을 임명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느헤미야가 혼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업무를 이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실한 사람에게 일을 분담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일곱 집사에게 일을 맡겼다”고 했듯이, 그 분 중의 한명이 <스테반>입니다.
예수님도 "12제자를 선택하여 제자로 삼았다”는 것과 같은 얘기예요.
7장 2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동생 <하나니>와 성의 사령관 <하나냐>를 세워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하나냐>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많은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느7:2)
<하나냐>는 느헤미야의 동생이예요.
<동생>이라고 해서 임명한 것이 아니고, 진짜 성전복구에 제일 앞장서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을 임명한 배경은 두 가지가 있어요.
1. 첫째, 이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이기에 임명합니다.
교회는 똑똑한 사람이 일하는 곳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일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부자가 일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일하는 곳이예요.
2. 둘째는, 그들은 <성전복구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임명했어요.
그럼, 첫 번째로 <문지기>를 세웠는데 그 <문지기>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7장 3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해가 높이 뜰 때까지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동안에도 문을 단단히 닫고, 빗장을 질러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경비로 세워 각기 지정된 초소와 자기집 앞을 지키게 하라“(느7:3)
<문지기>는 얼마나 철저하게 조심하면서 성문을 지켰을까요.
이것이 영적 <삶의 원리>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지만, 우리가 철저히 문을 막지 못하면, 원수 마귀가 또 들어와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이 명령했어요.
“예루살렘 성문을 해 뜰 때까지 열지 말라. 성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고, 경계병을 세워, 자기 집을 지키듯이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어요.
<완성된 것>보다 <미완성된 것>이 더 아름다워요.
여러분? 우리가 돈이 없기에 망정이지, 우리에게 <돈이 조금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돈이 있으면 위기가 따라 와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돈을 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돈을 주지 않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채워주면 우리가 기도안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것을 채워주면, 교회에 10번 올 것을 2번 밖에 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자주오지 않는다"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4. 네 번째로 한 [일]은 느헤미야에게 <인구조사>할 마음을 주셨어요.
7장5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이 내게 귀족들과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을 모아 종족별로 인구 조사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마침 나는 처음 돌아 온 사람들의 족보를 찾게 됐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느7:5)
드디어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인구 조사할 마음을 주셨어요.
구약시대에도 인구조사는 군사적인 목적이나 또는 경제적인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계속했어요.
그것은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족보>를 세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자기가 관리해야 하는 <하나님의 족보>를 챙기고 계시는 분입니다.
인구의 변동사항을 <하나님이 알고 싶기 때문에> 인구조사를 시키는 거예요.
계시록에 보면 <144,000명이라>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제시했어요.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시킨 목적은 “12지파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나?”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거예요.
오늘 말씀에도 “누구 누구의 자손이 몇 명이다”라고 계산하고 있는 거예요.
6절을 보세요.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그들의 각 성으로 돌아 왔어요. (느7:6)
특별히 구약에서는 “짐승의 숫자까지도 숫자로 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축의 숫자까지 센 목적은 <족보>를 알기 위해서 센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지파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센 것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일이 그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노래방에서는 노래를 잘하는 데, <교회에서 성가대하라>고 하면, 잘 안 해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목이 썪어요.
그 재능은 여러분 것이 아니예요. 그 재능을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리는데 사용하세요.
그리고 발바닥에 불이 붙도록 열심히 다니면서 봉사하세요.
상암 경기장에서 우리 청년들이 밤새도록 무대장치를 하느라고 고생했어요.
그리고 그 청년들이 나한테 밤늦게 문자를 보냈어요.
<그렇게 늦게까지 고생은 했어도, 기뻤다>고***
우리가 잠을 자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 기쁨이 와요. 그렇게 기쁘게 사세요.
이게 <교회>예요.
교회 [일]을 세상 [일]보다 더 바쁘게 살아야 [기쁨]이 와요.
그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항상 임하세요.
느10/ 성전 복구후 말씀부흥/ 느8:1~18/ 말씀: 하용조목사님
느헤미야는 도비야등 반대 세력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벽 공사를 완성하였고, 그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공사가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에 와서 생각을 하니, 뭔가 마음이 허전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시 <물문>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어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어서, 곰곰이 생각을 했더니 공사에 전념하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어요. 즉,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허전한 맘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를 초청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스라가 “내가 가르치 겠다”고 먼저 나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말씀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학사 <에스라>는 어느 때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언제나 전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그 말씀은 느헤미야 8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일곱째 달이 되었고,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자기 마을에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백성이 <물문>앞 광장에 일제히 모였습니다. 그러고는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 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일곱째 달, 1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남녀 회중과 알아 들을만한 모든 백성들 앞에 율법 책을 들고 나왔습니다.(느8:1~2)
여기서 뭘 발견하십니까?
그것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백성들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그동안 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52일간 성벽재건 공사에 열중했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말씀을 듣고 싶었던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성경 말씀이 테이프로 너무나 많이 돌아 다닙니다.
즉,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정작 홍수가 나서 먹을 [물]이 없어요.
그래서 흙탕물과 같은 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깨끗한 생수>를 갈망하고 있어요.
우리들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생수>를 원하는데, 그런 <생수>가 많지 않아요.
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는 물문 광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율법을 큰소리로 낭독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느8:3)
<일곱째 달, 1일> 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달력으로 9월~10월에 해당하는 달이고, 그 첫날에 말씀을 듣는 거예요.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장소에 가서, 예배에 참관한 적이 있는데, 사람 키 정도의 두루마기 율법 책을 두 사람이 들고서 읽는데, 그 태도가 너무도 경건하고 조심스러워서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여기에 나온 에스라도 새벽 6시부터 12시까지 6시간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는 거예요.
우리들은 예배시간이 1시간 정도 넘어서면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예배 후에 할 일에 관심이 있으니까, 버티기 어려워 해요. 그런 영혼에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어요.
그들은 에스라의 말씀을 6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듣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런 우리들의 부유한 환경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성전이 아름답게 꾸며졌다”고 예배가 잘 드려집니까?
성전에서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와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백성들 위에 서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책을 펼쳤습니다. 그가 책을 펴자 백성들이 다 일어 났습니다. (느 8:5)
에스라는 말씀을 읽기위해 단위에 섰고, 성경을 읽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일어 났어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모두 일어났다”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일어나서 찬송을 부르다가, 말씀을 들을 때는 정작 앉아서 듣습니다.
그것은 무얼 말하나요? 그들은 모두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정도로 <말씀에 갈급했다>는 거지요.
또 여기의 특징은 일어나서 읽으니까 “조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6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자 온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대답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납작 업드려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느8:6)
이 예배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① 율법 책을 그냥 읽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② 위대한 하나님을 <찬양>했고,
③ 손을 들고 <아멘! 아멘!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 <경배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를 보면, <찬양이 있었고, 말씀이 있었다>는거예요.
찬양을 드린 후에, 말씀이 있었어요. 이것이 <예배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말해요.
찬양과 기도가 다 합쳐져서 예배가 드려지고, 그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 거예요.
한국 교회가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진정한 예배>가 없기 때문에 냉냉한 거예요. 어느 교회에 가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담을 하는 거예요.
설교가 아니고 쑈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깔깔깔 웃고, 박수치고, 좋아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말씀의 내용이 없어요.
하나의 흥행거리로 전락 되었으니까, 말씀을 들었는데도 <변화가 없다>는 거예요.
한국 교회의 문제는 말씀은 들었는데, “열매가 없고, 자신이 변화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책, 곧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그 읽는 것을 백성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습니다.“(느8:8)
여기서 발견한 것은 <에스라>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으니까, <통역해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9절을 보면 “온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학사인 에스라, 백성들을 가르치던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말 했습니다. 이날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느8:9)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순간에 감동이 되어 내가 가슴을 치고, 내 영혼을 <찡하게> 울린 거예요.
그러니까 ①눈물이 나오고, ②감동이 오니까, ③회개를 하게 되지요.
그 말씀을 깨닫는 순간에 거울같이 모두가 다 드러나니까, 울게 되는 거예요.
그러자 에스라는 “이날은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고 백성들을 말립니다.
우리가 회개만 계속하면서 어떻게 살아요?
회개를 하고, 울고 나면, 그 다음에는 ④기쁨이 몰려와요.
슬픈 얼굴이 변하여 <기쁜 얼굴>로 변하니까, 제사장들이 <울지 말라>고 말리는 상황이 온 거예요.
저는 예배를 드리면서 가끔 이런 모습을 보게 되어 감동을 느낍니다.
성가대에서 여러 명이 찬양을 하는데, 유독 어떤 한 사람의 자매가 찬양을 하지 못하고, <그냥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동 하는 거예요. 또 챔버가 바이올린을 켜야 하는데, 그 바이올린을 켜지 못하고 <활만 들고 찬양하는 모습>이 진짜 [예배자의 모습]이예요.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먼저 ①눈물이 나오고, ②감동이 오고 ③회개를 하게 되고
④기쁨이 오면 ⑤춤을 추게 되지요.
이런 [진정한 예배]는 말씀에 울고, 울다가 지치면, 그 다음 단계는 ⑤춤을 추는 거예요.
10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좋은 음식과 단것을 마시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다.“ (느8:10)
그리하여 온 백성들이 가서 먹고, 마시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며, 큰 잔치를 벌렸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들은 말씀을 이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주는 하나님>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찬양이 기쁨으로 바뀌고 그 기쁨이 <기쁜 눈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분도 이상한 거예요.
목사는 언제나 말씀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성도들을 격려하고 회복 시켜서, 다시 일어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 목사는 새롭게 읽은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이것을 빨리 교인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얼른 주일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그리고 교인들은 목사님의 설교가 <연속 방송>을 기다리듯이, 주일 오기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벽 건축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친 몸인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듣기를 원했어요.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의 갈증>입니다.
“건물이 있고 성벽을 쌓았다“고 부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박물관이 되지요.
<진정한 부흥>은 우리 마음속에 [말씀]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 옵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이렇게 귀하고 오묘한 그 주님의 말씀은*** <내 노래>가 됩니다.
느헤미야 8장 14절~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으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달 절기 동안에 초막에서 살라는 것과 산간 지대로 나가서 올리브 나무와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 은매화 나뭇가지, 야자 나뭇가지와 또 다른 활엽수가지를 가져와, 기록된 대로 초막을 지으라“하는 말씀을 그들이 사는 여러 마을과 예루살렘에 선포하고 전하라는 것 이었습니다.“<느8:14~15>
그들은 또다시 모였는데, 성경을 듣다가 <초막절>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요.
모세가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초막 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험한 세월을 40년간 보냈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 갔고, 그렇게 전쟁하다 보니까 초막절을 제대로 지내지 못했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버린 거예요.
광야 생활하면서 <초막절을 지키라>는 말은 지키기 어려워요.
그래서 <초막절>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옛일은 다 잊어버린 거예요.
<초막절>은 어떻게 지키나요?
①초막을 짓고. ③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만든 빵을 먹어야 하고, ③쓴 나물을 먹으며
④7일 동안은 반드시 말씀을 읽어야 하고, ⑤8일 째 되는 날에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해요.
이렇게 <초막절의 의식>을 지키기 어려우니까, 옛날 일은 다 잃어 버린 거예요.
요즘 같으면 겉으로만 지키는 척하고, 무교병으로 만든 빵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니까, 겉으로는 먹는 척하고, 집에 돌아와서 맛있는 음식을 따로 먹기도 하겠지요.
그렇게 가난한 시절의 일들을 모두 다 잊어 버렸기 때문에, 원망과 불만이 쌓인 거예요.
그런 고생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불평이 나온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의 절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니까, 절기를 무시하게 되었으므로
<초막절을 다시 되살리자>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므로 <진짜 부흥>은 전통적인 신앙을 과감히 버려야 가능한 거예요.
<전통 신앙>에 묶이다 보면, 새로운 것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구요? 그대로 전통을 따라 가면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개혁은 뭐예요?
개혁은 전통을 버려야 개혁이 되요, 개혁은 전통을 버리고 [말씀]대로 따라하는 거예요.
전통은 변화를 기대하지 않으니까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초막을 짓고, 그때와 같이 행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예루살렘 광장이 얼마나 가관 이었을까요? 이게 [부흥]이예요.
<진짜 부흥>이 일어나면, 모두 다 기절해야 해요.
[부흥]이란 말씀의 부흥을 의미하고, [개혁]이란 전통과 형식을 바꿔야 해요.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온누리교회 초창기 시절이 생각 났어요.
물론 교회의 건물도 없었고, 지하실 셋방 시절이니까, “전통 교회에서 하던 방식은 모두 다 없애고, 새로 시작하자“고 다짐했어요.
①헌금 바구니도 돌리지 말고, 뒤에 있는 상자에 넣자 ②광고 시간에 “누구 누구가 십일조를 얼마했다”고 발표하지 말자, 헌금은 각자 <은혜 받은대로, 하면 되지> 그것이 형식이 되어서 사람 이름을 알리려고, 일일히 시간을 내면 안 되지요. ③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같은 형제이니, 목사나 장로나 집사라는 호칭을 쓰지 말고, 형제 자매로 통일하자.
④우리 모두 1년 동안은 골프치지 말고, 말씀에 집중합시다. ⑤성직자라는 표시를 내지 않기 위해 나는 가운을 입지 않을 것이고, ⑥그냥 성경책은 가방에 넣고 다니면 되지, 꼭 성경책을 가슴에 끼고 <거룩한 모습>으로 티나게 다녀야합니까? ⑦강대상은 가벼운 탁자로 대신하고, 장의자는 모두 개별의자로 바꿉시다. 뉴욕의 윌로크릭 교회에 가니까, <개별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그래서 장의자를 모두 없앤 거예요. 장의자를 갖다놓으면 다른 것을 아무 것도 못해요. ⑧강단에도 거창한 안락 의자를 치우고, 각자 일반석에 앉아 있다가 자기 순서에 따라서 올라 갑시다. ******* "이에 동의하는 분만 모여서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 했어요.
그러니까 전통교회의 특징이 강대상, 장의자, 까운, 스텐그라스, 대리석, 뾰족탑등을 모두 다 없앴어요. ⑨그리고 우리가 손들고 찬양하는데, 7년이 걸렸어요.
이것은 모두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결국, <진짜 샘물같은 [말씀]을 사모하자>는 것이지요.
결국, 그렇게 하니까 <말씀에 집중하게 되고>, 그런 교회로 만들어 지는 거예요.
결국, 우리는 영적으로 눈을 떠야 해요.
교회의 전통과 형식에 메이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는 예배를 드려야 해요.
그리고 주님의 말씀같이, <땅끝까지> 말씀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느11/ 말씀을 읽고 회개하라/ 느9:1~6/ 말씀: 하용조 목사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해가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열심히 일해서 52일 동안 성벽 공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고향에서 쉬고 있으면서도, 그냥 쉴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말씀의 갈증>을 느끼고,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하루에 6시간씩 성경을 읽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하고 소리를 지르며, 이마를 땅에 대고, 납작 업드려 예배를 드렸어요.
여러분,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훨씬 못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좀 춥다”고 교회에 오지 않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교회에 안와요.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순간에 <예배>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면, 그때부터 예배가 시작되고,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①마음이 움직이니까 울기 시작했고, ②찬양하게 되고 ③내 몸에 진동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면 내가 깨지고, 내가 변합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는 사람들이 너무나 울고 회개를 하니까, 오히려 <울지 말라>고 말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첫째, <말씀의 재 발견>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들으면 뭐해요?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변화가 없고, <깨달음>이 오지 않으면 뭐해요?
[말씀]을 들으면, <깨달음>이 와야 해요.
이렇게 첫째 날에 말씀을 듣고, 둘째 날도 또 말씀을 듣고, 어제 읽은 말씀과 달리, 오늘 다시 들으면 또 다시 처음 듣는 것 같은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들은 일주일간 고난을 겪으며 과거를 돌이켜 보게 하는 [초막절]과 같은 절기를 생각했어요.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중의 하나로, 10월 초순에 <속죄일>로부터 시작하여, 일주일 동안 고난을 겪으며, “과거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도 지켜 달라“는 염원과 <풍성한 수확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기억나게 하기위해 초막절의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과 성읍에서는 성경대로 초막을 다시 짓고, <진짜 예배를 드리자>고 다짐하며,
성전을 꾸미고, 율법 책을 낭독하고, 8일 째에는 광장에 모여 큰 집회를 열었어요.
특히 이방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인 <디아스포라>에게는 더욱 더 <초막절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절기를 지켰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해요. 그것은 겉은 비슷한데, 알맹이가 달라요.
형식은 비슷한데, 실질적인 내용은 달라요. 겉은 기독교인데 속을 드려다 보니까, <가짜>예요.
형식적으로 전통적인 예배를 보는 것과 <진짜 개혁을 하자>는 것과 다른 거예요.
[개혁]은 무엇입니까? [개혁]은 형식과 전통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럼, [부흥]은 무엇입니까? [부흥]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부흥하는 것 같은데,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개혁하는 것 같은데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은 형식이 잘못되다 보니,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성경보다도 전통이 우선시 되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다른 교회에서 온누리 교회로 오신 분들은 “옛날 자기가 드리던 예배와 다르다” 고 불평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제 생각은 개신교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개혁해야 해요.
우리는 앞으로 계속 전진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개혁이 진행되어야 해요.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느냐>는 거예요.
느헤미야 9장 2절을 보십시오. “그 달 24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모여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흙 먼지를 뒤집어 썼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모든 이방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제 자리에 선 채로 자신들의 죄와 자기 조상들의 죄악을 고백했습니다.(느9:1~2)
성벽공사 후 24일이면, “3주가 지났다”는 말이고,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변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일본 교회가 바뀌려면 예배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배가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전통을 지키려면, <진정한 예배가 아니므로> 변하지 않아요.
여기서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흙 먼지를 뒤집어 썼다”라는 말씀은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모든 이방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지냈다”는 말 이예요.
왜 그랬느냐고요? 이방사람들과 교제를 하다보면, 이방 종교가 우리 집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경계하는 거예요.
[회개]는 자기 죄와 조상의 죄까지 <전체를 회개했다>는 거예요.
[회개]는 한번 하면 끝나는 것인데, 이들이 <계속 회개했다>는 것은 이제까지 안 보이던 말씀이 오늘은 보이니까, “또 다시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낌이 다가오니까, 또 다시 회개하는 거예요.
저는 설교하는 사람이니까 성경을 대부분 다 알고 있는데, 요즘 성경을 읽을 때 마다 또다시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또 있어요.
<내 지식만큼> 성경이 보이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내 믿음만큼> 성경이 보이는 거예요.
혹시나 내가 믿고 있던 예배가 <또 다른 전통을 만들지는 않은가?> 염려되기도 해요.
그러므로 나는 매일 매일 변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또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서서, 낮 시간의 4분의 1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 책을 읽고, 또 4분의 1은 죄를 고백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느:9:3)
낮의 4분의 1은 3시간 정도를 의미하므로 <3시간 성경을 읽는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바르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요새 다시 읽어보니, <바르게 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4~5절을 요약해 보면,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나와요.
한쪽 제사장은 하늘을 향해, 또 다른 제사장은 <백성을 향해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모두 일어나서 ”주 너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알려 주는 것은 말씀과 회개가 반복해서 이루어지니까, 나중에는 <신앙고백>이 터져나게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오직 주 만이 여호와십니다. 주께서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과, 그 위에 떠 있는 별무리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짓고 생명을 주셨으니, 하늘의 만물이 주를 경배합니다.(느9:6)
여기에 나오는 <하늘>이라는 설명을 보십시오.
성경의 저자가 현대인이 발견하지 못하는 <우주관>과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어요.
<하늘>과 <하늘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은 “하늘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뜻 이예요.
그 위에 떠 있는 별무리들과 “그 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9절에서 15절을 정리하면 “주님은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홍해에서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어요. 주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여 바로와 그 신하들을 치셨어요.
주는 바다를 갈라 백성들이 마른 땅을 밟고 지나가게 하셨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 했으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가르쳤어요.
그들이 굶주릴 때에는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고, 그들이 목말라 할 때에는 바위에서 물을 내어 그들을 먹이셨으며, 또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회상하도록>만들어 준 것입니다.
미래란 <우리의 과거>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보면 우리의 미래가 확실히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생각하며, 보여준 과거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애굽에서 고통 당하는 사건
2. 둘째,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려 준 사건
3. 셋째, 홍해를 건너게 한 사건
4. 넷째, 40년간 광야에서 뺑뺑 돌린 사건
5. 다섯째,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사건
6. 마지막으로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한 사건들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한 사실을 “이미 이루어 주신 것과 같다”고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해 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교만하여 고집을 피우고, 주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느9:16)
하나님은 그렇게 도와주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을 보면서도 기적을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금 송아지를 만들었고, 딴 생각을 하면서 계속 불평을 했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하나님이 화가 났어요.
광야에서 이스라엘까지 가는데, 실제로 2주일(보름)이 걸리지만, 40년이 지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어요.
어떻게 군중을 움직이지 않게 했을까요?
<구름기둥>이 움직여야 대열이 움직이는데, 하나님은 그 <구름기둥>을 만들어 주지 않아서,
사람들이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구름기둥>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아서,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고생해 놓고도, 또 말을 듣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는 하나님>이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므로 못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았어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 분에게 순종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느12/ 악의 순환과 은혜의 순환/ 느9:23~38/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악의 순환과 은혜의 순환”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늘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만 같아도, 우리에게 평안과 위기가 번갈아 가면서 찾아 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찾아오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을 일으켜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평화가 찾아 오면,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① 이방인의 손에 붙잡혀가게 만들기도 하고 ② 포로생활을 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래야만 그들은 하나님에게 <구해 달라>고 요청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또 하나님은 그런 구원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정도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또 다시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현상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악의 순환인가? 은혜의 순간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기가 조금만 잘해 주면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 참으로 괴롭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축복을 줄 수도 없고, 야단만 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고뇌>를 발견 할 수 있어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52일 동안 성전을 재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안식했으나,
며칠 가지 않아서 어떤 목마름을 느껴서, 그들은 다시 모였어요.
그것은 <영혼의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끊임없이 말씀에 사로 잡혀서 지내지 않으면, 그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모여서 학사 에스라를 통해서 읽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어요.
이것은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밖으로 뛰쳐 나와서 교회로 모이고, 함께 모이면 전도하러 다닙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세상에는 진짜가 있으면, 꼭 가짜도 있어요.
그러나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요.
그래서 속아 넘어간 후에야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요.
가짜의 원조는 <마귀>입니다. 아담과 이브를 속인 것도 <사탄의 짓>입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이고, 유혹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는 순간에 울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자기 영에 부합하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여러분의 <이성>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은 여러분들의 <잠자는 영>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면, <내 영>이 살아나기 시작하여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그러다보면 눈물이 나오고, 통곡을 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오면, 체면 불구하고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건드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충격이 오고, 말없이 눈물이 흐르다가 울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금식하게 되고, 주님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말씀이 들어가면, 체면 불구하고 눈물이 나는 거예요.
“주책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나게 만듭니다.
자기의 죄가 드러나면 <진정한 회개>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불순종과 교만>이고,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들은 죄를 깨닫게 되다 보니까, 연속적으로 회개하게 되어, 옛날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죄까지도 깨달아 지고, 자기 죄뿐만 아니라 <조상의 죄>까지도 회개를 했어요.
그들은 통렬하게 회개를 했으므로 오늘 우리 시대에도 느끼는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원망>과 <불평>은 우리에게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의 몸에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때>가 생기는데, 그것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세수하고 머리를 빠는 이유입니다.
몸에 있는 때는 “한번 씻었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씻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3시간은 말씀만 듣고, 3시간은 회개를 했어요.
이런 집회를 <3주 동안 계속해서 집회를 했다>는 거예요.
그들이 기도하면서 “과거의 4가지 사건을 생생히 기억한다“는 거예요.
① 자기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사건>과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경험했어요
② 광야에서 계속 순종했다면 직통으로 가나안으로 갔을 텐데, 3일이 지나지 않아서 원망했어요, 3일 전에 홍해 기적을 보고도, 3일이 지나 목마르니까 “다시 애굽으로 돌아 가겠다“고 불평했어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쓴물을 <단물>로 바꿔 주시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어요.
③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아서 방법도 알려주고, 성막도 보여 주어서, 그들을 안내해 주는 일들이 계속해서 나타나신 거예요.
④ 마지막으로 회상한 것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으로 진격한 사건> 이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했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도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를 뒤 돌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어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거예요.
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 지고 ② 없는 것이 생겨나고 ③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한량없는 그 은혜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도 예측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는 크게 2가지를 나누어 생각 할 수 있어요.
1. 첫째, 축복을 주면, 악으로 대신 갚는 현상을 보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악의 순환>입니다.
악의 순환이 시작되는 거지요
2. 두 번째는, 그 반대의 경우로, <은혜의 사건>이지요.
이 두 바퀴가 계속 버티면서 교차되어 벌어지며 나타나는 거예요.
만약 계속해서 순종했더라면, <은혜의 축복>이 내려졌을 텐데***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과 원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졌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 <악의 순환>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보면 <악의 순환>의 고리가 깨지고, <은혜의 축복>이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역사(歷史)입니다.
지금 세상은 <악과 선의 싸움>으로 보이고, 이것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악이 승리>하고 <은혜가 패배>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세계는 지금, 전쟁과 폭동과 지진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재앙이 겹치면서 요동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미쳐서 날 뛰고, 자연의 질서가 깨지고, 엄청난 변화가 휩쓸고 있어요.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백두산의 화산이 터지려고 하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많이 실험했기 때문에, 지각이 요동쳐서 백두산이 폭발하려고 한대요.
이것은 <죄의 악순환>을 얘기 하는 거예요.
오늘 읽은 느헤미야 9장 2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셨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면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느9:2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했는데, “이것이 성취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죄의 악순환>이 26~27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주의 법을 저버리고 주께 돌아오라”고 외치는 예언자들을 죽여 주를 모독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환난 중에서 주를 부르자,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큰 자비를 베푸셔서 지도자를 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해 주셨습니다.“(느9:26~27)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불순종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집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전도하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으라>고 얘기했건만, 결국 그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야 “구원해 달라”고 소리 지르는 거예요. 그래서 <노아의 홍수>사건을 내린 거예요.
하나님이 계속 불렀는데도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그들에게 신약을 보면 <주님의 재림>과 <주님의 심판>이 나타난 거예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역사적인 <주님의 심판>과 종말이 오는 거예요.
그때에 <악의 고리>는 깨지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로 간다.”는 거예요.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은혜로 사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제, 그날이 멀지 않았어요.
요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 속에서 요동치고 있어요.
범죄도 아주 심각해 졌고, 이 세상은 안전한 지역이 없어요.
자연도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서, 언제 어느 때에 지진이 날지 모르고, 재앙이 지구를 덮을지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얘기>가 베드로 전. 후서에 나옵니다.
벧전 1:13~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주실 은혜를 간절히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전에는 몰랐어도 온갖 욕심을 따라 살았지만,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답게 하나님께 복종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벧전1:13~15)
여기를 보면, <주님이 곧 오신다>는 거예요.
순종하는 자녀로서 욕망을 본받지 말고, 거룩한 사람으로 사세요.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듯이, 우리는 사탄과 섞여 살수 없어요.
거룩한 자녀로 악한 세상의 한 복판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렵고 힘들지요.
<굴>과 <터널>은 달라요.
<굴>은 나가는 길이 없고, <터널>은 나갈 길이 있어요.
기차타고 <터널>을 지날 때는 몇분이 지나면 터널을 통과해요.
그러나 <굴>속에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어요.
느헤미아 9장 38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일을 생각하며 다시 주를 섬기기로 합의하고, 성명서를 작성하여, 여기에 우리 지도자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서명합니다.“(느9:38)
여기를 보면,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교차해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비전>을 본 거예요.
그들은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고,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배웠어요.
38절에 이들은 “문서로 남겼다”고 했어요.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문서를 만들고 서명했다”는 것은 <법적 효력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무한책임>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문서로 만들고, 서명을 했어요.
이것은 “종말이 가까이 오므로 확실하게 해 두자“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두려움을 갖지 마십시오.
지구에 마지막 <심판의 때>가 옵니다.
심판의 날이 가까이 올수록,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느13/ 순종하고 헌신하는 서약/ 느9:38~10:8/ 말씀: 하용조 목사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성벽을 52일 동안 목숨을 걸고 완성을 했어요.
그동안 많은 방해가 있었지만, 결국은 성벽은 완성되었고, 그것을 끝나고 처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에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 집을 짓는 사람들을 많이 있는데, 집을 짓다보면 서로 싸우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행복하려고 집을 짓는 일인데도, 서로 싸우는 이유는 <서로의 생각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지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들에게도 <만족감>이 없었어요.
여러분은 “새 집을 지었다”고 만족하십니까?
사람들은 갖고 싶은 것을 가져도 더욱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를 통해서 말씀을 듣기를 원해서,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말씀을 다시 들으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고, “말씀의 위선 속에 살았다"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거울과 같은 원본을 들여다 보니, "자신들이 위선과 형식에 치우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결국 거울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본 후에 울기 시작했고, <지나간 과거에 우리들을 지켜주신 사실을 감사하여> 다시 그 때의 생각을 떠올리며 깨닫게 되었어요.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인데, 그래도 그곳에서 40년이란 세월을 지켜 주시고, 도와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광야의 생활에서 얻은 결론은 첫째, <고난>을 이겼고,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회개>했어요.
[회개]는 무엇입니까? <말씀 앞에서 자기를 뒤 돌아 보는 것>이예요.
거울과 같은 원본 앞에서 <자기를 비쳐보는> 거예요.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다시 들어보니까 ”원본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한 것이지요.
회개는 한번 회개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매번 계속해서 회개해야 하므로, 우리는 매주 교회에 와서 회개하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능력을 받아서 일주일을 버티는 거예요.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죄]를 지어요.
성경에는 <하라>는 말과 <하지 말라>는 말이 나와요.
거기에 <하라>는 말보다, <하지 말라>는 말이 더 많이 나와요.
기독교인들에게 진정한 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예요.
그런 이유는 “원본을 보면서 거울에 비쳐 보아야 한다"는 뜻이예요.
“지금 한국 교회나 세계 교회가 다 망하는 단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미국은 다시 <퓨리턴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은 처음에는 일년동안 추수한 곡식을 보면서 감사를 느꼈지만, 점점 문명사회로 변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더니, 최근에는 마약, 매춘, 게이, 레스비언으로 발전하여 그걸 못하게 하니까 난리예요.
과거에는 하나님이 축복했지만, 지금 그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미국은 더 어려운 나라로 망해갈 거예요.
왜? 그들은 처음의 신앙을 포기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그들이 살 길은 처음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의 <청교도 정신>으로 돌아가야, 미국이 살아나요.
지금 미국 교회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이, 낭떠러지에 서 있는 상황과 같아요.
오늘 말씀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루마리 성경을 읽으며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28~29절을 보십시오. "이밖에 그 나머지 백성들, 곧 제사장들, 레위사람들, 성전문지기들, 노래하는 사람들 느디님 사람들, 또 하나님의 율법을 위해 다른 민족들과 스스로 구별한 모든 사람들과 그 아내들과 그 아들딸들, 지각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고,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잘 지키기로 맹세했으며,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달게 받겠다"고 맹세했습니다.(느10:28~29)
많은 사람들이 느헤미야의 [신앙개혁]에 맞추어, <계명과 규례를 잘 지키겠다>고 싸인을 했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떤 그룹들이 눈에 들어옵니까?
10장 8절을 보십시오. "미아시야, 빌개, 스마야로" 이들은 모두 제사장이었습니다.(스10:8)
10장을 자세히 보면 <제사장 그룹>이 나오고, 9절을 보면 <레위사람 그룹>이 나오고, 14절을 보면
<백성들의 지도자 그룹>이 나와요. 그리고 그 후에 성문지기들, 노래하는 사람들 등 여러 그룹이 나옵니다.
인간은 본능대로 살면 짐승이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 하지 말라>는 말씀과 , <***은 하라>고 만들어진 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도 대통령이 있고, 장관도 있고, 도지사도 있어서 각자 자기분야의 영역에 책임을 맡아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리더의 중요성을 발견합시다.
우리들은 좋은 리더를 만나면 행복해 지고, 좋은 리더가 아니면 나라가 시끄럽고 어려워 집니다.
가정에 영적 권위자인 아버지가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가정은 파괴되듯이, 아버지는 가정을 지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와 같이 나라의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종교지도자>입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리더십이 없어지는 것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리더십이 없다>는 것은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9절에 서명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잘 지키기로 맹세>했어요.
그러나 이 맹세는 뒤집어보면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성] 가운데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 [죄] 가운데서 벗어나야 해요.
성경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자"는 간단한 얘기지만, 나머지 여러 가지 얘기들은 “안식을 잘 지키라"는 등 여러 가지 규례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유대인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히브리 문화>를 가르치고 <히브리 언어>를 먼저 가르쳐요.
그러나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요즘은 부모와 자식이 세대 차이를 느껴서 “젊은이들이 부모와 대화를 못하겠다"고 해요.
이런 나이와 세대를 완전히 극복한 민족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그런 세대 차이를 극복했을까요?
그들의 머리 속에는 금요일 저녁시간이 되면 “아버지 집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딱 규정하여 못박아 놓고,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부모와의 세대 차이를 느끼지 않게 제도화 시켜 놓은 거예요.
결국,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나이를 극복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면서도 율법과 규례에 따라 계명을 잘 지키는 민족이 되었어요.
약속이 뭐예요?
안 지키면 안 되는 것이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마음으로 생활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들도 성경대로 살지 않아요.
자기 맘대로 살고, 사람들 눈치를 보며 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게 된 거예요.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저 사람은 예수믿는 사람이니까"라고 서로에게 신뢰가 가는 행동을 해야 해요.
사람에게 전도할 때도 이런 말을 들어야 해요.
"네가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고 싶다.“는 말이 나와야 정상인 거예요.
“저 사람은 그 바쁜데도 예수 믿으니까 교회에 간다"고 소문이 나야 해요.
2. 두 번째로, 이 사람들이 약속한 것은 <자기 자녀들을 다른 민족에게 혼인시키지 않겠다>는 거예요.
결혼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예요.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이예요.
“내가 큐피트 화살을 맞았다“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하겠다"는 원칙에 부합되어야 해요.
그래서 그 당시의 문화로는 <이방인과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이방인과 결혼하면 이방인의 문화가 유입되어, <우상숭배가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방 문화인 우상숭배를 지켜온 딸은 결혼하면 그 우상을 다 가져오기 때문에 금지하는 거예요.
살다보면 여자가 훨씬 더 쎕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여자가 하자는 대로 다 따르게 되어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솔로몬>이예요. 솔로몬은 여자를 잘못 선택해서 망했어요.
여자는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면, 매일 매일 앙앙거려서, 남자는 그 소리가 듣기 싫으니까,
결국에는 "그래, 그래라~"하고 이방 여인들의 말대로 움직여서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여러분~ 얼굴 예쁜 여자!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그 대가를 치룹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을 보고 결정하세요.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이혼하면 뭐해요.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 끝까지 보장됩니다.
3. 세 번째는 "안식일과 희년을 잘 자키겠습니다!! 라는 서약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잘 지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일요일 날에는 E/L의 보튼도 누르지 않아요.
"보튼을 누른다"는 것이 노동이므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 전날에 모든 보
튼을 다 눌러 놓습니다. 그리고 정작 나는 손을 대지 않아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해요.
유대인은 비행기 탈 때에도 "난 코셔 음식을 달라"고 스튜어디스에게 미리 부탁을 해요.
그러나 요즘에 일부 사람들은 <24시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2시간만 안식일로 지키는 얌체족들이 있어요.
가는 시간 30분과 오는 시간 30분, 그리고 예배시간 1시간을 합쳐서 2시간을 안식일로 지키고, 나머지는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 주는 것> 같아요.
우리는 쳇 바퀴 돌듯이 너무 빨리 움직이니까,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만들었어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안식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게 <안식일>이예요.
[희년]은 무엇인가요?
[희년]은 <땅을 돌려주는 것> 이예요.
[희년]은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땅도 쉴 틈을 주지 않아요.
땅을 쉬지 않고 많이 사용하면 비실비실하여 열매가 잘 맺히지 않으니까 <희년을 정하여> 쉬게 만들은 거예요.
아들을 낳으면 첫 자식을 드리고, 동물도 첫 번째로 태어나는 새끼를 바치고, 식물도 첫 열매를 얻게 되면 하나님께 에게 드려야 해요.
여러분, <구약의 말씀>을 무시하지 마세요.
<신약 시대>라도 구약정신을 무시하면 안 되고, 그 <구약의 정신>은 반드시 지켜야 해요.
신약에서 <예수님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지, 그 <구약의 정신>이 더 분명하고, 확실해요.
오늘 기독교인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퓨리턴과 같은 정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4. 그리고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기로 약속>을 했어요.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돈 입니다. 우리는 항상 넉넉한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다 쪼들리지만, 크리스천은 <풍성한 마음>으로 사세요.
돈이 없어도 넉넉하게 남에게 베풀면서 사세요.
돈 문제는 누구에게나 항상 어려운 문제예요.
미국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모두 다 할부로 갚아가며 살아요.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집세, 수도세, 전기세등 그 달에 지불할 것을 다 떼고 남으면, 그리고 그 남은 돈으로 십일조를 내지요. 그래서 헌금이 적어요.
저는 잘 사는 일본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놀랬어요. 그들은 더 적어요.
마치 놀이동산에서 동전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헌금해요.
그러나 우리 교회의 재정이 튼튼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것은 <십일조의 힘> 이예요.
조사해 보니, 교회 재정의 70~80%가 <십일조>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튼튼한 거예요.
그래서 창립이후 교회 재정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거예요.
그들은 <경제생활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소원했어요.
3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과 레위사람들을 자기가 드린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거룩한 물건이 보관되어 있는 방, 곧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성전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는 방으로 가져 가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느10:39)
여기에 “하나님의 집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어요."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게 <서약>이예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 주니까, 잘 돌아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교회의 원리>예요.
성도여러분! 구약을 무시하지 마세요.
구약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배워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얼굴이 빛이 나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느14/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느11:1~3, 말씀: 하용조 목사님
느헤미야가 살고 있던 그 당시의 예루살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훼파되어 사람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무질서한 유령과 같은 성읍으로,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서 살고 싶지 않은 도시입니다.
비록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복구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예루살렘 성안에는 인적이 드물어 썰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요즘 연평도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지금의 연평도는 이북에서 이유도 없이 폭격을 당했고, 언제 또다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그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느헤미야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벽을 재건하므로 외부의 공격은 막게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은 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다시 듣게 되었고, 말씀을 듣다보니까 마치 자기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이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엉엉 울게 되었고, 금식을 하면서 통곡을 하게 된 거예요.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형편입니다.
그 결과는 "가짜로 살아 왔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그 내용들을 조목조목 적어서, 각자 자기 이름을 적고, 서명(싸인)을 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면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외적으로는 성벽을 재건하고, 말씀을 듣다 보니까, <성벽 재건>이 문제가 아니라,
더 구체적인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문제를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첫째로, 믿음의 첫 번째 단계는 내 겉모양인 외형(껍데기)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의 깊숙한 문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단계도 처음에는 겉으로 보이는 <외형>만 보다가, 점점 더 믿음이 깊어지면 내적인 <내면의 문제>를 알게 됩니다.
에스겔서에도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①첫째는 내 발목이 먼저 차오르고
②두 번째는 무릎에 차고 ④세 번째는 허리가 차고 ④네 번째는 가슴에 차고
⑤마지막에는 헤엄칠 수밖에 없도록 물이 차오르는 얘기가 나와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발목신앙>인지, 아니면 <무릎신앙>인지, <허리신앙>인지 잘 몰랐었는데, 예루살렘 사람들도 말씀을 듣다 보니까 그것을 알게 된 것 이예요
그럼, 누가 이런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살 수 있습니까?
여기를 보면 이렇게 어지러운 예루살렘 성에 먼저 들어가서 살려고 노력하는 그룹이 백성들의 <지도자 그룹>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1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살게 됐습니다. 나머지 백성들에 대해서는 제비를 뽑아 10분의 1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살게 했고, 그 나머지 10분의 9는 각자 자기의 성읍에서 살게 했습니다"(느11:1)
<지도자 그룹>은 예루살렘에 먼저 들어가서 살게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서 집도 고치고, 도로도 정비하기 위해서, 먼저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 무질서한 도시에 지도자 그룹이 <먼저 들어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은 "지도자 그룹이 먼저 희생했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는 백성들 보다 앞장서야 합니다.
지도자가 먼저 희생하면, <따르는 자>들이 편합니다.
그러면 고통이 축제가 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여, 도시 전체가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먼저 성안으로 들어갔던 거예요.
2. 두 번째로 발견하는 것은,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제비를 뽑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제비를 뽑았을까요?
이 말은 "성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누구나 사람들은 폐허의 도시에 피하는 것이 정상인데, 말씀을 듣다 보니까,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의 사정은 열악하지만, 그곳에 자원하여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제비를 뽑아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제비뽑기>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제비뽑기>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제비뽑기>는 구약에도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도착하여 땅을 분배할 때에도 제비를 뽑았고,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할
때에도 제비를 뽑았어요.
우리 모두가 다 자격이 있지만, <제비를 뽑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의미는 <선택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들은 고난이 무섭지 않고, 먹을 것도 없는 무질서한 도시이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도시를 깨끗이 청소했어요.
제가 이스라엘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팔레스타인 쪽은 깨끗하지 않은데, 이스라엘 쪽은 아주 깨끗해요.
이것은 무얼 의미하나요?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는 최선을 다해 일을 하니까, 깨끗하고 단정하고, 청결하다“는 뜻이지요.
3. 세 번째로 발견하는 것은, "1/10을 제비를 뽑아 선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이것은 마치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선교사로 가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①아이들의 교육도 포기하고
②가정도 포기해야 하고, 때로는 노부모도 홀로 남겨 두고 떠나야 해야 해요.
③직장도, 친구도,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일할 제직(장로)들을 선정하는 것도 같은 이치예요.
교회에서 직분을 맡으려면 ①다른 교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내서 교회에 봉사해야 하고
②헌금도 더 많이 내야 하고 ③그러나 그 댓가, 보상은 아무 것도 없고, 오해도 많이 받고, 비난도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면, 교회 일을 할 수 없어요.
부름이 없으면, 선교사로 못갑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일도 [부름]이 없으면, 쉽게 지치게 되고, 짜증이 나서, 결국에는 교회 일에 무관심해 집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제직이 된다"는 것을 <명예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직분을 맡았다"는 의미는 “이제부터 고생하는 길로 접어 들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들은 <장로 피택>에서 떨어지면, 1년간 상처를 받아요. 왜 상처를 받을까요?
그것은 상처를 본인 스스로 거절하여 받지 않으면 되는데, 자기가 상처를 환영하니까 상처를 받는 거예요. 상처가 오면, <NO 땡큐>라고 거부하세요.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군가 말하기를 목사는 영광을 보는 게 아니고, <밟히는 것이 목사>라고 얘기했어요.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 그 때부터 욕먹을 것을 각오하고, 교인들한테 짓밟혀도
<그 일을 꿋꿋이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이것은 마치 무너진 이스라엘의 성읍을 보면서 "내가 먼저 들어가서 청소를 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야 겠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으로 파송되어 일 한다>는 의미예요.
선교사들은 자기가 사는 도시를 포기하고, 새로운 선교지로 떠나는 사람입니다.
왜 그들은 그 곳으로 갈까요?
그들은 한 번도 <복음의 소식>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혼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하여 그 곳으로 떠나고, 그 사명감을 주체할 수 없어서 자원하여 먼저 떠나는 거예요.
그들은 “내가 가지 않으면, 저 사람들이 죽는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지요.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을 떠나려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견딜 수 없는
<열병>을 주면서 그를 붙들었고, 그의 환상에는 수 많은 <중국의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그에게 보여 주었어요. 그러니까 그는 중국인들의 영적인 내면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중국을 떠나지 못한 거예요.
4. 네 번째로 발견하는 것은, <제비를 뽑히지 않은 9/10의 그룹>입니다.
제비를 뽑지 않은 나머지 9/10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성 밖에서 살았어요.
어떻게 살았을까요? 11장 2절을 보십시오.
"또 모든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살기로 지원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느11:2)
그들은 "나는 비록 예루살렘 성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성 밖에서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간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게 바로<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무너진 내가 살아나야>합니다.
또 교회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해도 뒤에서 기도해 주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열정과 헌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싸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싸우고, 정작 중요한 얘기는 <말을 꺼내지도> 않아요.
우리는 기쁘게 자원하여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선교사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복음을 들고 나가듯이, 우리들도 그런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느15/ 찬양과 감사의 성벽 봉헌식/ 느12:27-30/ 말씀: 하용조 목사님
우리는 지금까지 느헤미야서를 공부했는데, 오늘 12장을 공부하면 13장 한 장을 남겨놓고 느헤미야 공부가 끝이 납니다.
느헤미야서의 전체를 보면서 <큰 그림>이 그려짐이 보여 집니다.
1.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서 도둑이 날뛰고, 페허가 된 성읍 안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성전건축을 느헤미야의 비전으로 삼게 됩니다.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와서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2. 이런 일들을 하려다 보니까 도비야와 같은 반대세력들이 나타나서 음모를 꾸미게 되고, 그들은 심리전을 전개하고 느헤미야와 대적하게 됩니다.
3.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기득권의 세력을 믿음으로 물리치고, 꿋꿋이 대항하여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 건축을 완성합니다.
4. 공사가 끝나고, 그들은 <영적 갈급함>을 느껴서, 학사 에스라를 통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원본 말씀>을 읽다 보니까, 그동안 자기들의 모습이 가짜임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진짜를 보면 가짜가 보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가짜만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말씀으로 돌아와 보니까 <잘못 살았다>는 것을 후회하게 된 거예요.
5. 느헤미야의 눈에 처음에는 무너진 도성이 보였으나, 그 공사가 끝나고 말씀을 듣다 보니까, 그 다음에는 <내면적인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서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성벽 봉헌식>을 올립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 보니까,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술 마시고, 담배도 피는 것을 후회하고 금주 금연을 하고 나서, 말씀과 가까이 하게 되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절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그걸 알게 되면 그 때부터 성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때에 영적으로 눈이 뜨는 단계가 옵니다.
이것이 <내적 치유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모양> 보다도 <내면의 치유>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그들이 기뻐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을 봉헌식을 하면서 나타납니다.
왜 우리는 교회에 와도 은혜를 받지 못하나요?
① 첫째는, 적당히 살거나, 아무 생각 없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니까, 은혜가 없는 거예요.
② 둘째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잡생각에 사로 잡혀혔기 때문에 은혜가 오지 않는 거예요.
③자기의 <내면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자신의 모습>을 회개해야, 그때부터 기쁨이 오고, 은혜가 오는 거예요.
그들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서 틈만 나면 도로를 고치고, 성전을 청소하고, 기쁨 마음으로 봉사를 했어요.
참 이상해요.
돈도 안 받고 봉사하는 사람은 밤새도록 일을 해도 불평과 불만이 없어요.
그러나 월급을 받고 일하는 우리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을 해요.
신앙이란 변화가 와야 해요.
믿음이 생기면 변화가 와야 해요.
사람은 한 순간에 변할 수 있어요.
외적인 나의 습관, 나의 언어와 나의 사고방식이 변해야, 신앙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야 나와의 관계가 맺어져요.
<성벽 봉헌식>을 하면서 감사와 찬양이 넘쳐서, 그들은 성벽위로 올라가서 찬양을 해요.
찬양을 할 때에는 온몸과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춤도 추면서 영광스럽게 춤을 추지요.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성벽을 올라가서 춤을 춥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①점잖게 왔다가 ②조금은 졸다가 끄덕 거리고, ③설교가 좀 길다 싶으면 화를 내기 시작하고, 불안해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세상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에> 지루한 거예요.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금방 알아요.
억지로 따라 부르는 것과 열정적으로 몸을 던지며 춤추는 모습은 겉으로 보아도 금방 구별이 가는 거예요.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면 그렇게 춤을 출까요?
그들은 너무나 좋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일본 사람들은 조용, 조용히 얘기하는 사람들이라....
“밖으로 소리가 나가면 안된다”는 의식에서 그리 하지만, 신앙은 그런 게 아니예요.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성전에 모여서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큰 소리를 찬양을 했어요.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정말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기다리는 주일 날은 토요일부터 시작이 되어야 해요.
토요일부터 준비를 하면서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기다려야 해요.
그러면서 주일 날, 자동차가 교회 앞마당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은혜가 생기는 거예요.
그럴 때에 <천한 몸>이 변하여 <귀한 몸>으로 변하는 거예요.
어떤 단계를 거치나요?
①얼굴에는 미소가 띄고, ②가슴에는 흥분하여, ③찬양을 하면서, ④춤을 추는 거예요.
2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거행하기 위해 레위 사람들은 그 모든 거처에서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심벌즈와 하프와 수금에 맞춰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찬양하며,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느 12:27)
왜 그랬을까요? 종교적 제사장들이 없으면, 축제가 이루어 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봉헌식은 이렇게 시작하였어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고, 봉헌식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찾아 왔어요. 봉헌식에는 레위사람들과 제사장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불러 모였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이에 노래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외곽지역, 곧 느도바 사람들의 마을과 벨길갈과 게바와 이스마웼 들판에서 모여 들었습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외곽에 자기네 마을을 이루고 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스스로 정결의식을 치른 뒤 백성들과 성문들과 성벽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 (느 12:28-30)
30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은 스스로 <정결의식>을 치뤘다“고 했어요.
교회가 사람 눈만 즐겁게 하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사람들을 의식해서 화려하게만 진행해요.
<진정한 예배>는 [성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몸도 마음도 깨끗해야,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아 줍니다.
우리는 교회 올 때까지 온갖 <잡 생각>에 사로 잡혀서 오기 때문에 은혜가 오지 않는 거예요.
모든 <잡 생각>을 하는 사람은 특징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눈에 초점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눈에 총기가 있어요. 눈에 <집중력>이 있어요.
그래서 축제를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정결의식>을 치루는 것입니다.
몸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먼저 드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헌금하는 것>을 보면 알아요.
<헌금>은 교회에 와서 주머니 뒤져서 있으면 내고, 없으면 안 내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오기 전에 미리 사전에 기도하고, 깨끗한 봉투에 미리 넣어 준비해야 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정성스럽게 헌금해야 해요.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에 아무 준비 없이, 그냥 만나러 갑니까?
우리는 너무 자유스럽게 하나님을 만나니까, 너무나 무례한 경향이 있어요.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의복도 갖추고, 해야 할 이야기들을 사전에 준비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에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벽 꼭대기에 올라가서 행진을 하며, 축제를 벌렸어요.
찬양대가 둘로 갈라져서 서로 양쪽으로 흩어져서 행진을 했고, 그 뒤에 사람들이 따랐어요.
36-4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제들, 곧 스마야 하나니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들고 따라 갔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그 행진에 앞장 섰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성 계단에 올라 성벽으로 올라 가다가 다윗의 성 계단에 올라 성벽으로 올라가다가 다윗의 집을 지나 동쪽, 물문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찬양대는 반대방향으로 행진했어요. 그리하여 두 찬양대는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나와 지도자들 절반도 그렇게 했습니다.”(느13:36-40)
여러분 이 사람들의 행동이 마음에 그림이 그려집니까?
춤을 추면서 찬양대가 노래를 부르고, 큰 소리로 외치며 행진을 했어요.
43절을 보면 “그들은 그날 희생 제사를 크게 드리고 즐거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내들과 어린 아이들도 즐거워 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즐거워 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느 13:43)
나는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너무 크게 떠들고 찬양하여 동네사람들이 항의하여, 쫓겨나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44 절을 보면 “그날 예물과 첫 수확물과 십일조를 모아 두는 창고를 맡은 사람들을 임명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해, 율법에 정해진 몫을 성들의 들에서 거둬 들이도록 했습니다. 항상 준비하고 서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유다가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느 13:44)
그들은 <첫 수확>을 드리며, 헌금했어요.
<십일조>와 <감사 예물>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으니까 하는 거예요.
여러분, 기쁘면 주고 싶고, 안 기쁘면 빼앗기는 거예요.
교회에 나오는 것을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는 최소한 일주일에 3~4번 나오는 게 정상이예요.
교회에 어떤 목적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 이유가 없어도 나와야 해요.
오늘의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봉헌식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1. 첫째는, <하나님 섬기는 일>이고,
2. 둘째는, <정결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애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느헤미야의 마지막장은 13장인데, 13장에서 종교개혁이 오고, 느헤미야서는 끝이 납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느16/ 느헤미야의 4가지 신앙고백/ 느13:1~9/ 말씀: 하용조 목사님
[느헤미야]는 12장까지 이야기가 전개되고, 13장은 책의 부록같이 생각되는 장이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4가지 <종교개혁>과 <신앙개혁>에 관한 얘기가 쓰여 있습니다.
[신앙]은 한번 은혜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10년쯤 지나면 모두 다 변합니다.
잘 믿었던 가정의 전통도 변하고, 신앙의 문제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변합니다.
우리도 한 10년 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변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시험받는 것이 오늘의 4가지 말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로, 13장의 1~9절까지는 <성전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이고,
2. 둘째로, 10~14절까지는 <십일조를 철저히 지켜라>는 말씀입니다.
3. 셋째로, 15~22절까지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라>는 말씀이고,
4. 넷째로, 23~31절까지는 <이방 여자와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신중히 해야 하고, 깨끗하고 정결하게 지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므로, 별로 <새로운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익숙하게 지키는 말씀이지만, 우리들이 소홀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내 스타일 대로>해석하고, <내 방법으로>행동하고, <슬쩍 바꿔서>실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 느헤미야가 실행한 신앙개혁은 무엇입니까?
1. 그 첫 번째의 신앙개혁은 <성전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지만, 신약에서는 예배와 양육과 파송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어요.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형식화> 되고, 굳어져서, 그래서 교회에 와도 감동이 없어요. 그래서 4가지 우(愚=어리석을 잘못)를 범하게 됩니다.
교회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①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고, ②빠진 이유에 대해 변명하고, ③교회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져서, ④<자기 방식대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⑤생활이 흐트러지고, ⑥사고방식이 엉망이 되어, ⑦하나님이 경고를 보내는데도 그 경고를 못 알아 듣고, ⑧나중에는 혼자서 판단하여 문제가 생깁니다.
신앙생활의 주춧돌은 <교회>입니다.
누가복음 2장 36~38절을 보면, 선지자 <안나>얘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결혼하여 7년동안 살다가 남편이 죽고, 84년 동안 과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녀는 84살이 되기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마침 이 시간에 그녀는 성전에서 혼자 살다가 84년째 되는 날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 사건을 생각해 보면, <안나>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죽을 때까지 <안나>처럼, 교회를 섬기는 것이 <신앙생활의 원칙>입니다.
오늘 느헤미야 13장 1~9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성전건축 후 12년이 지난 다음에 왕을 만나러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성전이 무너지고 부패하고 사유화되고 썩어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래서 느헤미야가 화가 나서,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2. 두 번째의 신앙개혁은 <십일조>에 대한 것인데,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재정원칙>입니다.
돈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예민하지만, 돈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원칙이 있어야 해요. 그것이 <십일조의 원칙>입니다.
왜 <십일조>에 원칙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다가 안하기 때문에, <원칙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3. 세 번째의 신앙개혁은 <안식일>에 관한 얘기예요.
하나님은<안식을 지키라>고 당부하는데, 사람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아요.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죄송하니까, 현대인들은 두 시간만 지키려고 해요.
오는 시간 30분과 예배시간 1시간, 그리고 돌아가는데 30분을 합해서 2시간만 지키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자기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맘대로>, <자기 생각대로>사용하고 있어요.
예배드리고 나서 헌신하지 않고, 자기 좋은 사람만 만나고, 자기 좋아 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마치 우리 입에서 충치가 생기는 것과 같이, 신앙이 썩어가고 있는 거예요.
4. 네 번째의 신앙개혁은 <결혼>에 관한 얘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무너지는 것이 <결혼>의 폐해예요.
그렇다고 결혼을 안 시킬 수도 없고, 결혼은 안 할 수도 없지 않아요.
그런데 결혼을 ①<성경의 원리대로> 지키지 않고, ②자기 맘대로 결혼하고, ③세상의 방법대로 결혼을 시키므로, 느헤미야가 개혁하자는 거예요.
또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때까지 드러나지 않던 여자가 섬기던 우상을 맘대로 들여와서, 섬기는 형태로 변형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상 열거한 4가지 문제는 <구약의 문제>이지만, 신약으로 바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어요.
그러므로 <구약의 말씀>이라고 [율법]으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한 쪽 발은 세상에 걸치고, 또 다른 쪽의 발은 교회에 디디고, 위험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십일조>나 <안식일>의 문제가 구약의 얘기라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일이라고 치부하면서, 잘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말씀대로> 교회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어머니>와 같아요.
그래서 교회는 교회를 낳아야 합니다.
[개혁]이란 시대와 문화와 상황을 뛰어 넘어서, 항상 <말씀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13장 1절을 보십시오. "그날 백성들이 듣는 앞에서 모세의 책을 큰소리로 낭독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느13:1)
여기를 보면, 말씀이 그렇게 기록 되어 있었기에 거기 참석한 사람들이 놀란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영원히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일체의 종교집회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따뜻하게 영접하지 앟고, 오히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그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결혼하여 같이 살지 말라”고 했는데, 그 때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함께 섞여 결혼하며 살았기 때문에 놀란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은 쉽게 <자기들끼리의 방식으로> 바꿔서, 해석하고 살았던 거예요.
쉽게 말해서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과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과 함께 결혼했으므로, 서로 혼합하여 살다보니까 문제가 생긴 거예요. 예로써 솔로몬 왕이 부인을 잘못 얻어서 낭패를 본 것과 같이, [개혁]은 처음 정신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벽건축 후 12년이 지나고 보니, 이렇게 서로 결혼하여 엉켜 살고 있는 사실에 놀란 거예요.
백성들은 그 <율법의 말씀>을 듣고 나서, 모든 이방 민족들을 자기들과 분리시켰습니다.
무슨 일이던, 10년이 지나면 이렇게 변해요.
우리나라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어요.
결혼하신 분들 중 10년 이상 지나신 분들은 조심하세요.
오래 살다보면, ①첫 사랑의 감동을 잊어버리고, ②상대방 약점만 보이고, ③딴 여자를 쳐다보면 좋아 보이고, ④권태기가 찾아와요. 그래서 딴 생각을 하면, 문제가 발생해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어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들을 받아 드려서 서로 섞이다 보니까, <보편화>된 거예요.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을 돌이켜 보는 것>이*** [개혁]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듣다보면, 내가 얼마나 틀렸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즉시 회개 했어요.
[개혁]은 <즉시 바꾸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을 들은 백성들은 이방 피가 섞인 사람들을 이스라엘에서 몰아냈습니다."(느13:3)
이 말은<국제결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순결성>과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귀신도 섬기는 일이 <영적간음>이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하나님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맘대로 하기 때문에> 신앙이 헷갈리는 거예요.
신앙은 <다원주의>가 안 통해요.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읽으며 소스라치게 놀란 거예요.
그들은 <자기들이 잊고 싶은 것>, 아니 <회피하고 싶은 것>을 말씀을 읽다보니까 <직통으로 들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즉시 회개를 했어요.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이 우리의 삶이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교회중심>으로 옮겨 사세요.
그렇게 하는 길이 <축복받는 길>입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내 [몸]은 <성전>이므로, 내 [몸]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거룩한 [몸]에 술을 먹어 정신을 혼미하게 하면 안 됩니다.
그 [몸]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세요.
오늘 말씀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도비야의 문제>입니다.
그는 ①모함하고, ②음모를 꾸미고, ③성전을 짓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어요.
그리고 제사장은 창고의 방을 도비야에게 내 주었어요.
4절를 보십시오. "이 일이 있기 전에 우리 하나님집의 창고를 맡고 있던 제사장 엘리아십은 도비야와 가깝게 지내며, 그에게 큰 방을 하나 내주었는데, 그 방은 전에 곡식재물과 유향과 성전의 물건을 두고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과 성전문지기들을 위해 십일조로 거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제사장들에게 주는 제물들을 두던 방이었습니다.(느13:4~5)
성전 안에서 도비야가 개인적으로 방을 사용한 거예요.
하나님 창고의 물건을 밖으로 내 버리고, 도비야가 거기에 살았어요.
그들은 ①형식만 지키고, ②내용을 지키지 않고, ③타협하고 살다보니까, ④암몬 사람과 모합 사람을 받아 들이고, ⑤성전 창고에 도비야를 살게 만든 거예요.
그러므로 10년이 지나면 모두 다 변하므로, 새로 시작해야 해요.
13장 7-9절을 보십시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던 것입니다. 그제야 나는 도비야에게 하나님의 집 뜰에 있는 방을 내준 그 어처구니 없는 사항을 알게 됐습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 방에서 도비야의 모든 살림살이를 밖으로 내 던지고는 <방들을 청결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나서, 하나님의 집의 가구들과 곡식 제물과 유향을 그 방에 다시 들여 놓았습니다.(느13:7~9)
그까짓 “방 하나를 빌려주는 것이라“고 치부하지 마세요.
<작은 일>이라고 해도, 신앙적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쥐를 없애려면 <쥐구멍>을 막아야 해요.
신앙생활에도 <쥐구멍>이 뚫리듯이,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현대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딴 생각을 하니까,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예요.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왜 교회가 생산능력을 잃어버렸습니까?
교회는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부흥하는 게, <교회의 원리>예요.
그러나 현대인들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어요.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는 도비야를 내쫓는 방법으로 해결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하게 지켜 나가야 해요.
세상에는 목회자들도 잘못이 있고, 잘못된 장로님들도, 잘못된 제직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기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오히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은 잘 따라 오는데, 10년 넘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장본인이 될 수 있어요.
오늘 날의 모압과 암몬은 누구입니까?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헌신하지 않고, 교회를 향해 비판만 하고, 거리를 두고 있어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당사자 이므로, 비판하지 않아요.
성가대원 중에서 술과 담배를 먹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어요.
그래서 성가대를 <연애대>라고 비꼬고 있어요. 노래만 잘한다고 하나님이 좋아할까요?
재능을 가졌어도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일은 하지 마세요.
그렇게 이중 생활하는 사람들은 오늘로써 끊으세요. 그래야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똑바로 가요.
오늘 날 도비야는 누구입니까?
①교회를 핍박하고, ②음해 하면서도, ③하나님의 집에서 녹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왜 싸우고 분열합니까?
여러분들은 누구나 한번쯤 교회싸움을 보셨을 꺼예요.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이 많아요.
교회가 왜 싸울까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개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부터 먼저 개혁하세요>.
그들은 처음에는 정의를 부르짖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허물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①내가 개혁의 대상이고, ②문제는 <내게 있다>는 것을 모르고, ③상대방만 비방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문제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자존심 문제>로 싸우는 것을 보았어요.
한참 싸우다 보면 ①약이 오르고, ②"자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 싸우는 이유로 변질되요.
그 자존심 뒤에는 ③또 다른 이기심이 숨어있기 때문에 교회를 분열시키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몸]이 <교회>입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여러분들의 [몸]과 <교회>를 깨끗이 하고, 정결하게 하세요.
그래야 우리의 생각과 말에 하나님의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느17/ 십일조와 안식일, 성결한 결혼/ 느13:10·~31/ 말씀: 하용조 목사님
<느헤미야>서를 간단히 요약하면 1장에서 12장까지는 성전건축과 성벽 건축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이고, 13장은 “종교개혁이 무엇인가?” 그리고 “신앙개혁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각자의 <생각과 몸>이 각각 따로따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베드로에게 마가복음 14장3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한데 육신이 약하구나”(막14:38)
사람은 누구나 생각은 있어요. 그러나 [몸]이 따라가지 않아서, 문제예요.
그래서 괴리가 생기고, 균형이 깨집니다.
우리 <신앙의 갈등>은 무엇입니까?
<생각의 훈련>은 잘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듣고, 소그룹 미팅도하고, 제자 훈련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생각으로는 모두 다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됩니까?
잘 안 되지요. 생각은 하지만, 생각대로 [몸]이 따라가지 않아요.
진정한 <경건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생각과 육체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귀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런 사람들은 “생각은 했다”고 치더라도,
몸이 안 따라가서 거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요즘 새벽 기도에 익숙한 사람은 괜찮은데, 새벽 기도에 처음 오시는 분들은 하루 종일 곤두박질을 칩니다. <새벽기도는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새벽에 일어나려면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몸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교회에 가서 은혜 못 받을 때도 있지만, 졸더라도 교회에 와서 지내며, <몸의 훈련>을 그렇게 만들어야 해요.
이런 사람들은 끝까지 신앙생활을 지킬 수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생각과 몸>이 따로 노십니까?
아니면 아직까지 거기에 생각만 머무십니까?
그래서 느헤미야서는 <경건 생활>을 경건한 사상이나 지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많이 하여 지식이 많아지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 13장에서 “어떤 사람이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들의 [삶]에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① 세상 중심의 삶과 ② 교회 중심의 삶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서양 문화가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에 가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요즘은 세상의 좋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세상에 빠지기 쉬워요.
좋은 게임도 다양하게 있고, 인터넷도 있어서 두 가지 사이에 갈등을 느끼며 지내요.
한 발은 교회에 디디고, 다른 한 쪽은 세상에 발을 담아서 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 적당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들은 신앙생활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일까요?
우리의 조상 세대는 신앙생활을 잘했어요. 그분들은 새벽 기도에 빠지지 않았어요.
우리의 조상들은 자녀에게 성경 암송도 시키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도록 교육했어요.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버팀 몫이 되었어요.
교회에 헌신적이고, 찬양을 많이 부르는 사람의 얼굴은 빛이 나고, 깨끗해요.
그러나 세상에 빠진 사람들은 얼굴이 어두워요.
싸움을 걸거나, 비판하는 사람의 얼굴은 우울하고 어두워서,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우울증에 빠져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집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유태인들이 사는 곳을 가보면, 어디를 가도 깨끗해요.
이스라엘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녀본 사람은 그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이것은 <자기 몸>인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습관이 길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면 너무나 지저분하고 더러워요,
또 유태인의 특징 중에 하나는 세계 어디를 가던지, 자식들에게 모국어(히브리어)를 가르쳐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중심이 <교회>이고, 모국어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국 땅에 살면서 쉽게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 <모국어>를 자식에게 가르치기가 쉬운 게 아니예요.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의 중심이 <교회>예요.
그것이 신약에 와서 좀 지나쳐서, <교회 지상주의>가 되어 피해를 주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구약에는 <성경중심>, 신약에는 <교회 중심>이 되었어요.
우리 교회의 경우 안수집사가 되면 일 주일에 네번 정도는 교회에 옵니다.
예배도 드리고, 봉사도 하고, 소 모임도 하고, 수요 예배도 드려요.
그러면 “언제 사회생활을 하느냐?”고 하지만, 교회 열심히 오는 사람이 더 사회생활을 더 잘 해요.
그것은 중요한 것만 골라서 하는 사람은 <단순하고 깨끗하기> 때문이지요.
2. 두 번째로, 실제적인 신앙생활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지켜야 해요.
<십일조 생활>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해요.
우리에게 제일 큰 시험은 <돈>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는데, 헌금에는 인색한 사람들이 많아요.
세상 일에는 돈을 많이 쓰고 다니지만, 교회에 돈쓰는 일은 인색해요.
혹시 “버린다”고 생각하거나,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십일조>는 하나님 백성의 경제생활의 원칙이고, 기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돈과 재물에 약합니다.
여기에 자신 만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돈>을 주면, 모두 안 통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 만큼이나> 힘이 셉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돈의 시험>에 쉽게 빠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얘기 했어요.
그리고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이 말은 “돈을 배척 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들은 돈 없이 살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말이 아니고, 예수님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다 안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돈 중심으로 살면 안 되고, “물질 중심으로 살지 말라“고 했고, <돈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돈은 목적이 아니고, 수단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목적으로 생각하므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돈을 목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돈은 목적으로 생각하면 욕심을 잉태해요.
제가 생각하기는 제일 욕심 많은 사람은 <재벌>이라고 생각해요.
돈이 많은 사람은 더 돈을 필요로 해요. 그의 인생에는 돈 밖에 없어요.
물질이 없다면 우리는 살수 없어요.
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으로 생각하세요.
나는 돈을 많이 벌어서 <남을 도우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북한은 먹을 게 없어서 어렵고, 남한은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요.
<돈>이란 이렇게 두 얼굴을 갖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잘 알고 있지만, 돈 보다 더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십에 9]는 당신의 것 이지만, [십에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너는 왜 남의 것을 도둑질 해 갔느냐?”라고 질책했어요.
말라기 3장 8~10절을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칠 수 있을까?그런데 너희는 내것을 훔쳤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훔쳤다고 그러십니까? 라고 말하는 구나. 너희가 내게서 훔친 것은 십일조와 예물이다.(말3:8)
그리고 또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나를 시험해 보라”고 말씀했어요.
처음에 십일조를 낼 때는 도둑맞은 것 같고, 뺏긴 것 같아 손해 보는 느낌이지만,
<십일조>를 하다보면 사업이 잘 되고, 수입이 늘어나는 것을 느기게 돼요.
그것은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노력보다 <보이지 않게 돕는 사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 보고 <시험해 보라>고 하신 거예요.
십일조는 작을 때는 쉽게 해요. 10,000원에서 1,000원 내는 것도 괜찮아요.
십만원 에서 만원내는 것도 괜찮아요. 백 만원에서 십만원 낼 때는 손이 떨려요.
그러나 천만원에서 백만원 낼 때는 망서려져요. 그리고는 한참 묵상을 해야 낼 수 있어요.
이것은 왜 그런가요?
남에게 <베푸는 습관>이 없기 때문이예요.
<베푸는 삶>을 산 사람은 쉽게 결정해요.
어려울 때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도와 줄 생각을 하므로 쉽게 결정해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작은 것부터 <베푸는 연습>을 해야 해요.
십일조는 개인이 쓰는 게 아니예요. 교회라는 <공동체>가 사용되어야 해요.
내가 쓰면 내가 하나님이 되는 행동을 하는 거예요. 이건 위험한 생각이예요.
그 기준을 내가 결정하면 절대로 안되요.
그
래서 사도들이 바나바와 바울 앞에 헌금을 갖다 놓은 거예요.
교회로 하여금 공정하게 깨끗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해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수한 것이 무엇입니까?
느헤미야가 보니까, "레위 사람과 찬양하는 사람들을 다 돌려 보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일본의 <무목 교회>와 같아요. 교회를 운영할 돈이 없으니까, 다 돌려 보냈어요.
그래서 “일본에는 <무목교회>가 7~8백개나 있다"고 해요.
이것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았어요.
레위 사람인 제사장에게 줄 돈이 없으니까 그들을 모두 돌려 보내니까,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고,
제사를 안 드리고 사람이 없게 되니까, 성전이 폐허로 변한 거예요.
그러나 교회는 찬송 소리가 넘치고, 기도 소리가 들려와서, 사람들이 북쩍거려야 부흥하는 거예요.
서로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축복을 주는 거예요.
12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백성들도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와 성전창고에 들여 놓았다.“ (느13:12)
느헤미야가 경고를 하니까, 드디어 돈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곡식의 십일조>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돈이 있으니까 제사장을 불러들이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니까, 그제야 하나님이 축복한 거예요.
3. 세 번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중>의 삶을 지키기가 어려워요.
우리들은 쉽게 살다 보니까 <세상 중심으로> 살아요.
탕자는 누구예요? 아버지 집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간 사람을 말해요.
돈이 떨어지니까, 모두 다 자신의 곁에서 떠난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직장을 잡은 것이 돼지치기가 된 거예요.
탕자는 자기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 “종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거기서 탕자는 깨달은 것이 있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안식일을 지키는 일>도 쉽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내 마음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지요.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콩 밭>에 가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 있으면 독수리처럼 나를 수 있지만, 내 마음이 세상에 있으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제가 병에 결려 보니까, <병든 사람은 병만 묵상하니까> 우울해 져요.
그러니까 <병중에라도 하나님을 묵상하세요>
병중에도 하나님을 묵상하면,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버티고 있는 것은 <설교하려는 욕심 때문에> 버틴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죽어도 “강단에서 설교하다 죽겠다“는 각오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15~21절의 말씀을 정리하면, 안식일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안식일에 굶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 소가 웅덩이에 빠졌는데,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어요.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안식일 날, 교회에서, 장사치들이 많이 모여서 <장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주일날 2,500원짜리의 점심을 팔아요.
그것은 어디 가서도 점심을 먹어야 되니까, “싸고 깨끗한 음식을 먹으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주일날 <바자회>도 합니다.
그 돈은 이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리치에 가서 쓰기위해 장사하는 거예요.
우리들은 교회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회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일본에서는 실제로 교회에 와서 명함을 돌리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느헤미야가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 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도록 만들었고, 나라를 흐트려 버렸던 거예요
느헤미야는 그런 일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경고하고, 가르치는 거예요.
“왜 우리가 포로 생활을 하는가?”
“왜 우리가 흩어져서 사는가?” “왜 우리가 망했는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느헤미야가 후회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후손들에게 경고하는 거예요.
4. 네 번째는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장소는 <결혼 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가르쳐야 해요.
이 말을 성경에서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이방인과 결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더 자세히 말하면 ”종교가 다른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면, 이방 여인 섬기던 <이방 문화>가 들어오고, 그 여인이 섬기던 <우상>이 자기 집안에 들여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화>와 <우상을 숭배를 하지 말라> 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교육은 <진화론적인 교육>이고, 교회에서는 <창조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진화론적 교육은 6일간 받고, 창조적인 교육은 겨우 주일 날 하루, 2시간 받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무의식중에 <진화론적 사고>를 갖고 있어요.
“어린 아이 때에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아이들 자녀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결혼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사람과 결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결혼이란 <엄청난 재앙>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영역이 <결혼>이라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은 신이 없으면 못 살아요.
인간은 인간이 만든 신을 의지하고 살아요. Man Made God
인간은 나무나, 돌이나, 태양이나, 달을, 신으로 삼고 의지를 해요.
동네에 큰 나무나 바위를 의지하고 살기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신은 가짜이므로 주의하라”는 얘기입니다.
<진짜 신>은 눈에 안보여요. 그러나 <가짜 신>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어요.
그래서 우상이 있는 거예요. 우리들은 내가 만들어 놓고 “이게 신이다”라고 믿고 있어요.
결혼은 <이방 종교의 혼음을 막으라>는 말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 자식들 가운데 아스돗 말은 해도, 유다 말은 할 줄 몰랐습니다.” (느13:24)
이방인과 결혼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방 여인은 유다 말을 모르니까, 이방 나라의 말인 (자기 모국어)를 자녀에게 가르칩니다.
남자는 직장에 나가니까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언어를 가르칠 시간이 없고, 어머니가 키워야 하니까 어머니의 말과 종교를 배우는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26절에 재미있는 예화가 나와요.
하나님은 솔로몬을 좋아했어요. 솔로몬 왕은 뛰어난 왕이지만, 그러나 솔로몬은 망했어요.
이방 여인을 1,000여명과 결혼했으므로, 그 여인들이 숭배를 하는 <우상>을 들여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방신들이 넘쳤어요. 그래서 솔로몬에게 저주가 따랐어요.
2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죄 지은 것이 아니냐?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같은
왕은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하나님께서 그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왕 으로 세우셨지만, 이방 여자들 때문에 그마저 죄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느13:26)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 안 믿는 여자와 결혼하려면, 그 여인에게 예수 믿게 하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좋아 하는 여인이라도 결혼은 신중하게 하십시오.
개인끼리 좋아도, 좋은 걸 너무나 좋아하지 마세요. “필이 꽂혔다“고 하는 둥, ”큐피트 화살을 맞았다“고 해도, 그것이 <영혼 구원보다도 앞설 수는 없는> 거예요.
결국 그 여인을 전도하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여인의 우상에게 잡힌다>는 것이 오늘의 요점입니다. 솔로몬은 막판에 여인에 끌려 다니며,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자녀들이 복 받고, 가정을 살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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