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는 이런 집도 있다. 작은 방 하나. 창문이 있다. 불투명한 유리창. 창틀은 갈색. 한쪽 벽을 채운 자개장. 민트 색깔의 낡은 나무 문. 청동색의 동그란 손잡이. 방문을 열면 욕실 겸 주방이 나온다. 벽도 바닥도 잿빛 시멘트. 모퉁이에 작은 싱크대. 양철 문의 오른쪽에 수도꼭지가 있고 (...) 꿈인가, 꿈에서 보았나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놀라며 대답했다. 엄마가 신혼일 때 그런 집에서 잠시 산 적이 있다고. 그러므로 네가 그 집을 기억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그즈음 엄마는 나에 관하여 ‘말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때로 나는 그 말을 이해했고 어느 때는 상처받았으나 (사랑하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게 나의 최선이라고 소용없는 사과를 건넸다. 또 다른 때는 지쳐서 대꾸했다. 그만해, 엄마.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는 내가 결정해. 내 삶이고 내 죽음이야.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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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 진단을 받았다. 어진은 혼인신고를 미룬 것을 울면서 후회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후회하지도 않았다.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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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 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죽음 자체로 두기 위해 오래 바라볼수록 두려움보다 슬픔이 커졌다. 두려움은 막연했으나 슬픔은 구체적이었다. 거기 나의 희망이 있었다. 슬픔을 위해서 움직일 힘이라면 아직 남아 있었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3차 재발한다면 화학적 치료는 하지 않겠다고 어진에게 말했다.
(...)
나는 어진에게 살아 본 적은 없으나 기억하는 집에 대해, 기억한다고 말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집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노트를 펼쳐 주택 평면도와 입체도를 그렸다.
이 집도 그중 하나야.
(...)
잠시 그림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이 집에서 죽어.
그 순간, 내 주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미래와 희망을 느꼈다.
그럼 나는?
어진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나와 같이 여기서 살지.
이 집은 어디에 있어?
완치하리라는 희망보다 훨씬 단단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이제 우리가 찾아낼 거야. (26~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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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도 정신도 멀쩡한 내가 어디에서 죽을지를 작가의 방식으로 기억해 본다.
이런 데 그런 데... 내가 정하는 데...
그리고 어떻게 죽을도 기억해 본다.
이렇게 그렇게....
그런데 언제?
……
나로서는 부질없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