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0월 1일 화요일]
『대동야승』 제13권 [權奸 김안로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 박생(朴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염병에 걸려 10여 일을 위독하게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혼이 홀연히 어딘가로 가는데 마치 어떤 아전들이 쫓아와 잡으려 하는 듯하여 도망을 가서 광막한 사막을 지나 한 곳에 이르니 궁전도 아니고 집도 아닌데, 말끔히 소제된 땅이 꽤나 널직한데 단(壇)이 노천(露天)에 설치되어 있고 붉은 난간이 둘러져 있는 것이 마치 창(槍)이 꽂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관리들이 그 안에 줄지어 앉아 있고 머리는 소 같고 몸은 사람 같은 야차(夜叉)들이 뜰 아래 벌려서 있었다.
그들이 박생이 오는 것을 보고는 뛰어 앞으로 나와 잡아서 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물이 끓는 가마 속에 던져 넣었다. 박생이 보니, 중과 여승, 남녀 할 것 없이 끓는 물속에 섞여 있었다. 박생은 가만히 생각하니, 그 사람들이 쌓여 있는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양손을 솥 표면에 대고 반듯이 누워서 떠 있었다. 한참 있다 야차가 쇠꼬챙이로 그를 꿰어서 땅에다 내 놓았다. 그런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 있다 야차를 시켜 상급 관청으로 보내게 하였다. 큰 궁궐에 이르러 겹문을 들어가니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 탁자가 있는 것이 마치 지금의 관청과 같았다. 높은 면류관을 쓰고 수놓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위에 줄지어 앉아 있고 수레와 호위병들의 성대함은 마치 군왕(君王)과도 같았다. 서류 장부들은 구름처럼 쌓여 있고 판결의 도장이 벼락같이 찍혀지고 있었으며 파란 두건을 쓴 나졸들이 책상 아래 엎드려 있다가 문서들을 나른다. 이 엄숙하고 정숙한 장면이 인간 세상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박생을 끌어와 묻기를, “너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였으며 또 어떤 직책을 맡아 보았냐.” 하니, 박생이, “세상에서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직책은 의국(醫局)에 속해 있었으며 방서(方書)를 출납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였다.
심문이 다 끝나니 관리가 관리들에게 두루 이것을 알렸다. 여러 관리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운명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 올 사람이 아니다. 관리들이 저승 명부를 잘못 살피고서 이런 실책을 한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지.” 하니, 그 중에 한 관리가 거동이 점잖은 품이 마치 우리 선대의 왕 같았는데, 그가 사사로이 박생을 끌고 자리 뒤쪽에 가서, “지금 너에게 떡을 줄 것인데 네가 만약 그 떡을 먹으면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박생이 엎드려 절하고 땀을 흠뻑 흘리고 물러났다. 과연 한 상자의 많은 떡을 가지고 와서는 박생에게 먹으라고 하였다. 박생이 거짓으로 먹는 체하고 몰래 품속으로 모두 집어 넣었다.
머리를 들고 귀를 기울여 대전(大殿) 위에서 의논하는 말을 들어보니 모두들, “이 사람을 쓸 만하니 이곳에 두고 일을 맡겨 봅시다.” 하니, 한 관리가, “운수가 아직 올 때가 아닌데 그릇된 것을 기정사실로 굳혀버리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며, 변론이 왔다갔다 반복되더니 드디어 판결을 내리기를,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리고 한 관리가 한 통첩에 도장을 찍는 것을 보았다. 그 통첩에, “박효산(朴孝山)과 윤숭례(尹崇禮)는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에 올려주고, 서복경(徐福慶)은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으나, 박생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박생이 나오려 할 때 우리 선대왕 같은 사람이 비단폭에다 글을 쓰고 구슬함을 열쇠로 잠가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서 박생에게 주면서, “너희 나라 군주에게 전하라. 너희 나라 군주의 소문이 대단히 좋지 못하니 내가 정말 무안할 지경이다.” 하였다. 박생이 하직인사를 하고 서함(書函)을 받들고 나왔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을 물끓는 가마솥에 던져넣던 곳까지 나오니 처음 체포하던 옥졸이 박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박생이 그 옥졸에게 따지기를, “관에서 이미 나를 놓아 주었는데 네가 감히 마음대로 구속하여 방자하게 못된 짓을 거리낌없이 하는가.” 하였더니, 그 옥졸이 독살스럽게 말하기를, “나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관의 증명이 없으면 나가지 못한다.” 하였다. 박생이 서함을 보이며, “이것이 관의 증명이 아닌가.” 하니, 옥졸이, “그것은 문을 나가는 것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관에 가서 물어 보겠다.” 하고 가더니, 한참 있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미 관의 승인이 있으니 너는 가도 좋다.” 하고는 하얀 삽살개 한 마리를 주면서 털이 많은 그 개를 따라 경계를 나가라고 하였다. 큰 강이 있는 곳에 이르자 삽살개는 날아가는 것 같이 뛰어 건너므로 박생도 몸을 날려 뛰어드니 강 복판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무엇이 받아주는 데 마치 수레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였다. 그리고 단지 바람 소리 물 소리만 들리고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자기 몸은 자리 위에 누워 있으며 아내와 자식들이 옆에서 울고 있고 친척들이 모여서 막 자기를 염(殮)하려고 모든 것을 갖추어 놓고 있었다. 박생이 정신이 아찔하여 고함치며 물건을 찾으면서, “나의 옥함서를 잃어버렸다.” 하고, 또, “박효산과 윤숭례는 모두 옥관자를 할 것이고, 서복경은 군수의 부절(符節)을 나눠 받게 될 것이니 내가 가서 알려주어야 한다.” 하면서, 문을 열고 달려가려 하였다. 처자들은 그가 헛소리를 하고 미쳐서 달아나는 줄 알고 뭇사람들이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일주일을 지나서야 비로소 생생하게 자기가 겪었던 이야기를 죽 하였다.
대체로 박효산과 윤숭례는 의원이며 서복경은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서자였다. 나라에서 벼슬길에 서자 출신들은 벼슬하지 못하도록 제정하고 있었다. 박생은 또 평생을 서복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연산주가 특별히 박효산과 윤숭례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직을 제수하였다. 서복경은 궁녀의 연줄로 훌륭한 반열에 끼이게 되어 안악 군수가 되었으니 그 말들이 모두 증험이 있었다. 옥함서는 흡사 연산군의 주색에 빠지고 음란함을 경계한 말 같으나 내내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박생의 이름은 세거(世擧)로 지금은 내의원(內醫院)에서 벼슬하고 있는데, 의술이 아주 정통하다고 세상에 이름이 나 있다.
일찍이 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여 내가[忍性子], “그대의 말은 마치 불교에서 세상을 속이기 위한 말과 똑같다. 괴상한 말과 이단을 말하는 것은 군자가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저 의원들이 관직에 올라 영화를 누리는 것과 서자가 분수에 넘치는 직분을 무릅쓰는 따위는 진실로 혼조(昏朝 연산군)의 문란한 정치였으니, 거기에서 무슨 운수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으리오.
모든 인간의 이득과 손실, 화와 복, 업(業)을 경영하고 구하기를 도모하는 따위는 모두 그 사람의 잘하고 못함, 어리석거나 간사한 데에 달려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생에서 미리 정해진 운수인 것이다. 때가 되어 이 운수가 펴지게 되면, 반드시 신묘하게도 일들이 척척 들어맞아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운수를 타서 성공하게 하는 것인데, 성공해서 사람들은 이러한 것도 모르고 망령되게 그 사람의 지력이 어떠하다고들 하면서 마음을 피로하게 하고 정력을 소비해서 죽을 때까지도 그치지 않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나 성하고 쇠하고 갚고 받는 것이 사람의 선함에 달려있는 것은 정칙이다. 이 정칙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운수라는 것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저 의원과 서자들이 얻었던 것이 눈에 차지도 않았으며 연이어 그것도 잃고 말았으니, 어찌 함부로 엿보고 훔쳐서 자기 분수를 돌아보지 않은 소치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