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도 꽃이냐
정현수(동화작가)
“어머나, 저기 봐. 어쩜!‘
노란 호박꽃이 눈을 뜨고 두 팔을 쫙 벌려 기지개를 켜다 해바라기를 보았다. 노랗고 환한 해바라기를 본 순간 세상이 온통 빛나 보였다. 처음 세상에 나온 호박꽃은 순간 해바라기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랑 닮은 꽃이야!“
그 노랗고 키 큰 꽃송이가 어찌나 탐스럽고 환하든지 호박꽃은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커다란 얼굴이 실룩거리고 어깨가 으쓱 우쭐해졌다.
’호박꽃도 꽃이냐? 흐흐흐.‘
동네 아이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귀에 쟁쟁 울린다. 상처받았던 생각이 떠올라 얼굴을 찌푸렸다. 허망한 마음에 그날은 꽃 피우기 싫었다. 호박잎에다 얼굴을 처박고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호박꽃은 꽃이 아니란 말이냐, 흥!‘
털어버리면 그만일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 자신과 닮은 환한 꽃을 보았다. 얼마나 환히 빛나 보이든지 얼굴 가득 웃음을 피운다. 언제 서럽게 울었나 싶다. 웃음뿐 아니라 없던 기운이 불끈 솟아난 것이다.
”너도 호박꽃이냐?“
호박꽃은 목젖이 보이도록 목울대를 높여서 해바라기를 향해 반가움으로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하는 거야?“
마침내 해바라기는 호박꽃의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호박꽃에 관심이 생겼다. 숱한 꽃이 핀 꽃밭에 유독 넙데데한 그 꽃에서 달큼한 내음이 해바라기의 코를 찌른다.
”히히, 냄새 좋아.“
이때 벌이 팔랑개비 같은 날개를 윙윙거리며 헤픈 웃음을 웃는다. 뱅뱅 맴을 돌다 노란 호박꽃에 내려앉는다. 호박꽃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왱, 왱, 노란 쟤는 해바라기야!“
”해바라기? 아 그렇구나! 하하하!“
벌의 속삭임을 듣고 호박꽃은 무안해 커다란 웃음소리로 바람을 숭숭 일으켰다. 얼굴만큼이나 큰 입을 한껏 벌리고 커다란 목소리로 털털거린다. 달큼한 향내가 웃음소리로 퍼지며 멀리 보낸다. 해바라기는 흥흥 콧방울을 씰룩거리며 호박꽃에 정 넘치는 말투로 아는 척을 한다.
”세상에, 너처럼 향기로운 꽃이 있구나!,“
해바라기가 엉덩이를 쭉 빼고 허리를 굽혀 호박꽃에 얼굴을 맞대려 했다. 키를 맞추려는 낮은 자세였다. 얼굴 가까이 댄 해바라기에 호박꽃이 말했다.
”난 옆으로 퍼져 기어가면서 덩이 열매를 맺는단다. 내 덩이로 부침개를 해 먹고 죽도 끓여 먹어, 호박죽이라고 그 맛은 일품이야!“
호박꽃의 큼지막한 얼굴이 팔랑거리니 해바라기 노란 꽃잎들이 쫑긋쫑긋 코를 킁킁거린다.
”덩이 열매가 맛있다고? 먹고 싶은데, 나는 고소한 작은 열매를 알알이 가득 품는단다.“
해바라기는 입맛을 쩝쩝 다신다. 고소한 열매의 맛을 음미하는지, 아니면 호박죽의 맛을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해바라기는 유난히 키가 크다. 큰 키 덕에 여러 꽃을 알지만, 노란 호박꽃을 만난 건 오늘 처음이었다. 이때 벌이 해바라기 마음을 알아채고 얼른 해바라기에 다가가 왱왱거리며 말했다.
”재는 너랑 같은 꽃은 아닌데 많이 닮은 것 같아.“
해바라기도 벌이 전하는 이 소리가 어쩐지 예사롭지 않아 처음 만난 호박꽃이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이 같아 슬며시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호박꽃, 나는 너랑 닮은 꽃이라는구나!“
해바라기 말을 들은 호박꽃의 커다란 얼굴에 반가움과 함께 아쉬움이 뒤섞였다. 같은 꽃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이다.
”응,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아, 나는 너도 될 수 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될 수 있다니? 못 알아듣겠어.“
호박꽃은 잘못 들었나 했다. 해바라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호박꽃은 멍해졌다.
”해님을 몹시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있기 때문이야.“
터무니없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인데, 더구나 감히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해님을 사랑한다니, 그 말에 호박꽃의 마음에 잔물결이 일렁거리며 살갑게 들렸다.
”해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호박꽃의 물음에 해바라기는 얼굴을 숙이며 얼굴빛을 약간 흐렸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빳빳이 세우더니 또렷이 말하였다.
”해님이 말해 주었어. 빛남은 빛남을 나누면서 살고, 빛나지 못한 건 기다림으로 산다고 말이야, 누구든 자신의 삶을 나누며 살라고 했어!“
해바라기는 그게 삶의 목표라고 말하고 해님의 말을 가슴 깊이 꼭꼭 새겨 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는다고 하였다. 호박꽃은 해바라기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높이 있는 빛나는 해님을 우러러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다.
”난 말이야. 비 오는 날이면 기도한단다. 해님이 안 보이는 날일수록 기운 잃지 않고 더 빛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이야!“
해바라기는 눈을 감고 마음 깊이 기도하면 해님은 쓱 나타나서 노란 해바라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용기를 준다고 했다.
해바라기의 말을 듣는 순간 호박꽃의 마음은 '쿵' 하고 무너지는 듯했다. 늘 낮은 자세로 살았기 때문에 해바라기의 기도하는 삶을 알지 못했고 해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해서였다.
”나중 시간이 넉넉할 때 자세히 또 말해 줄게.“
커다란 몸체에 비해 해바라기는 상냥하고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호박꽃은 커다란 얼굴을 부채처럼 살랑살랑 흔들어 해바라기의 기도하는 삶에 힘을 보태었다.
이때 벌이 날개를 펄럭이며 오더니 호박꽃에 또박또박 걱정스러운 말로 전해주었다.
”호박꽃, 저 해바라기는 너와 대화하려면 허리와 목을 꺾어야 해, 그러면 목이 부러져 얼마 못 가 죽는다고, 주의해야 해!“
호박꽃은 깜짝 놀랐다. 해바라기가 목이 부러져서 죽는다면 그만한 불행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벌! 내가 가진 달콤한 꿀을 많이 먹으렴.“
호박꽃은 얼굴만큼 덕이 넉넉한 꽃이었다. 벌에게 꿀을 잔뜩 주고 싶었고 해바라기에도 뭐든 해주고 싶었다.
”해바라기야, 난 내 호박덩이로 네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어.“
”고마워 호박꽃, 나는 네가 점점 좋아지는구나. 친구가 생겨 참 좋아!“
해바라기는 호박꽃에 감사하는 시늉으로 샛노란 얼굴을 좌우로 가만가만 흔들며 꽃잎 한 올 한 올 빗질하고, 흔들흔들 어깨춤까지 추었다.
”나는 어제 비 맞고 처음 꽃을 피운 거야, 그래서 너는 나를 몰라본 거지.“
호박꽃은 비를 맞아야 꽃을 예쁘게 피운다는 것, 덩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것을 해바라기에 말해 주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너는 무얼 제일 좋아하니?“
호박꽃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해바라기는 벌써 허리와 목을 아래로 숙였다. 호박꽃 얼굴 가까이 닿기 위해서였다.
”어. 어, 안 돼!“
호박꽃은 깜짝 놀라 노란 얼굴이 새파래졌다. 해바라기가 허리를 숙이면 목이 꺾여 죽을지 모른다는 소리를 벌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말이야, 너에게 달려 있어.“
”나한테 달렸다니. 그게 뭔데?“
해바라기가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말이야, 네가 허리와 목을 아래로 숙이지 않는 거야. 나는 네 말을 다 알아들어, 그리고 네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나는 큰 소리로 말할게. 그러니까 너는 빳빳이 선 채로 말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바로 그거야!“
호박꽃의 큰 소리에 해바라기는 호박꽃이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고마운 마음에 가슴이 찡하고 눈에 물기가 고였다. 해바라기의 얼굴에 빗물처럼 눈물 자국이 그어졌다.
다리를 슬슬 문지르며 잽싸게 기어오르며, 까맣게 변한 해바라기의 얼굴을 보고 깐죽거리던 일, 고마운 줄 모르고 해바라기 몸뚱이를 친친 감아 오르기만 했던 나팔꽃. 나팔꽃이 생각나 해바라기는 얼굴을 잠깐 찡그렸다.
호박꽃이 참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나 자신을 귀히 여기고 고마움을 알아주는 호박꽃.
”호박꽃, 너를 만난 게 내 삶에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해!“
이번에는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호박꽃 말대로 빳빳이 선 채로 말했다.
”고마워, 나도 너를 만나 아주 행복해, 아무도 나를 꽃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어.“
호박꽃은 해바라기가 정말 좋았다. 호박꽃의 눈가에도 이슬처럼 촉촉이 물기를 머금는다.
”아니야, 내가 만난 꽃 중에서 네가 제일 잘난 꽃이야. 그 커다랗고 환한 노랑은 해님이 말하던 그 빛남이야, 그리고 내가 늘 사랑하는 해님과 똑 닮았어!“
”정말?“
호박꽃은 너무 좋아서 무거운 몸채로 펄쩍 뛰어올라 뜀박질하였다. 덩이를 단 호박꽃 줄기가 깜짝 놀라 덩달아 함께 뛰면서 허덕허덕 숨을 가빠한다.
”뭐야, 호박꽃! 너도 뜀박질할 줄 알았어?“
호박 줄기가 호박꽃의 다른 재주에 놀랐다. 서로 함께 살았지만 너무나 무관심한 사이였던지, 호박 줄기는 호박꽃의 뜀박질 재주에 감탄하였다. 늘 멍하던 호박꽃이 이렇게 멋진 재주가 있었다니, 줄줄이 달린 호박 덩이가 무겁고 귀찮았는데 오늘부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나도 몰랐어. 흐흐.“
사실 호박꽃도 자신이 뜀박질에 소질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좋아 힘이 불끈 생겼다.
”호박꽃, 나 오늘부터 널 아끼고 많이 사랑하기로 했어!“
호박 줄기의 고백은 호박꽃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꽃을 피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헤매던 자신에게 호박 줄기의 마음이 따스하게 전해졌다. 이젠 열심히 꽃을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꽃 피우는 일이 별로였는데 이젠 으뜸임을 알게 되었다.
”해바라기야. 네 큰 키가 부럽기도 했지만, 이젠 나대로 빛남을 키우면서 살기로 했어.“
”아이참, 키 큰 게 얼마나 큰 고민이었다고. 친구 생기기도 어려웠어, 마주 보며 얘기할 수 없었잖아. 그렇다고 해님에게 다가갈 만큼도 크게 자라지도 않았어,“
호박꽃이 해바라기를 처음 만났던 때는 자기 땅딸보 키가 싫고 해바라기의 큰 키가 몹시 부러웠지만, 이젠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부족함에 불만을 느끼며 살고 있구나!‘
약점을 가진 게 결코 부족한 게 아님을 호박꽃은 하루 만에 많이 성숙해진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해바라기에 더욱 감사했다.
”얘, 너는 해님을 사랑하니까 해님을 애지중지하잖아.“
그렇지만 해바라기가 안쓰럽다. 누구를 깊이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호박꽃은 벌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나쁜 약을 먹고 힘을 잃어가던 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기다림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은 사랑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난 벌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해바라기 너를 자주 바라볼 거야!“
해바라기의 노란빛이 해님의 빛을 받아 환히 빛났다. 해바라기의 빛남은 해님으로 향하는 그리움이며 또 사랑이었다. 해바라기는 그 빛남을 아까워하지 않고 호박꽃에 나눠주었다.
”사랑해 해바라기야!“
”고마워 호박꽃! 진심으로 너는 내 친구야!“
해바라기와의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받게 된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행복한 호박꽃이었다. 환한 햇살을 이파리에 가득 담아 덩이를 감싸 안았다. 주먹만 한 연초록빛 호박 덩이는 햇살을 털어 담아 황금 덩이로 자랄 꿈을 꿀 것이다.
”호박꽃, 나 기다렸지?“
호박꽃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운 벌을 기다리는 희망, 벌도 기운차게 윙윙 날아와 호박꽃에 살그머니 앉아 맛있게 꿀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