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일본 문서. 오른쪽 첫부분에 흥국사 뇌헌스님이 나온다. 오른쪽 사진은 울릉도와 독도.
300년 전,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문서를 직접 받아낸 안용복 일행 11명 가운데 5명이 여수 흥국사 스님이었고, 타고 갔던 배가 흥국사 선박인 것으로 알려졌다. 순천 송광사 박물관장 고경스님은 지난 21일 “(사)안용복장군 기념사업회로부터 1696년(숙종 22) 3월 안용복장군과 함께 일본을 다녀온 송광사 스님들의 인적사항과 승상선(僧商船) 제원을 확인해 달라는 공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흥국사 스님들 선박으로 渡日
1696년 일본 공식문서 받아내
이와 관련한 문건을 확인한 고경스님은 “안용복과 함께 일본 현지에서 활약한 순천승(順天僧) 뇌헌(雷憲), 연습(連習), 승담(勝淡), 영률(靈律), 단책(丹責) 등 5분의 스님은 송광사가 아니라 흥국사 재적승이다”고 고증했다.
고경스님은 “2005년도에 공개된 안용복 일행의 일본행적을 기록한 17세기 일본 공문서 ‘원록 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마지막 부분에 ‘僧名 興口王寺 雷憲 靈律…’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口王은 國을 다르게 쓴 것으로 흥국사(興國寺)를 뜻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흥국사 행정구역은 순천에 속해 있어 문서에 나오는 순천승(順天僧)은 흥국사 스님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1703년에 조성한 ‘흥국사중수사적비’에 뇌헌(雷軒)스님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일본에 다녀온 뇌헌(雷憲)스님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 의하면 스님들은 염주와 산목(算木)을 지니고 있었으며, 수행자로서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일본 관리들과 만난 자리에서 뇌헌스님과 안용복, 김가과 등 3인이 입회한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가 강원도에 속한다는 조선팔도 지도를 내보이며 조선 땅임을 주장하는 등 외교역할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여수 석천사 주지 진옥스님은 “흥국사는 임진난이 일어난 다음해(1593년)부터 1894년까지 300년 가까이 승군사령부가 주둔했던 호국성지로, 선박을 승군이 직접 관할하기도 했다”며 “뇌헌스님이 선주였던 배는 흥국사 승군이 운영하는 선박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더불어 흥국사 주지 명선스님은 “최근 일본이 중등 사회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기술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있는데,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스님들의 노력이 헛되이 되어서는 안된다”며 “뇌헌스님 일행의 활동자료를 찾아 뜻을 기리고 재조명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숙종실록>에는 뇌헌스님과 안용복 일행은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범에 항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준엽 광주ㆍ.전남지사장
뇌헌스님은…
<조선왕조 숙종실록> 등의 자료에 따르면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 오키섬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확인”받고 에도 바쿠후에게 서계(書啓)를 받았다. 첫 도일에서 받은 서계를 귀국 도중 쓰시마 도주에게 빼앗긴 안용복은 다시 도일을 준비하던 중 뇌헌스님이 이끄는 선단을 만나 서계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상선을 이끈 뇌헌스님은 전국을 돌며 물자매매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빈민을 구제하는 보시행을 펼치고 있었다. 1968년 안용복을 만나 독도와 울릉도의 중요성을 전해듣고 전폭적인 도움을 줬다.
안용복 일행을 ‘울릉도 감세장’이라는 임의의 직책을 사용케 하고, 조선 관복 등을 마련해 입게 하는 등 지략을 발휘했으며 협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귀국 후 ‘허가없이 도일을 해 관리를 사칭한 죄’로 1여 년간 옥살이를 겪었다.
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불교신문 2446호/ 7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