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만 있으면 체력이 저하된다고
체육활동을 강조하곤 하지만 전 부서원이 모두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운동은 극히 제한이 되어있다. 전에 있던 곳에서는 겨울에
단체로 근처의 스키장에 가기도 했지만 지리상으로 어림없는 일이고 고작해야 근교의 산으로 등산을 가는 정도였다.
어느해 봄에 등산을 갔을때의
일이다.
오랜동안의 취미생활의 하나로 산에
갈때는 다른건 몰라도 카메라 가방은 꼭 챙겨 메고 가곤했다. 간편한 자동카메라도 있었지만 박력있는 셔터소리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수동식 니콘카메라에 광곽렌즈, 줌렌즈, 후레쉬, 각종 휠터에 대형 줌렌즈까지 받쳐줄 수 있는 삼각대까지 구비하면 그 무게만도
장난이 아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화창한 날씨에
진달래 개나리등 봄꽃이 만발해서 그런지 사무실의 노처녀 K양이 화사한 옷차림에 잔뜩 들떠서 따라나서더니 채 30분도 못가서 자꾸만
카메라 가방을 쳐다보다가 어렵사리 부탁을 한다.
“저~ 사진좀 찍어주세요.”
카메라에 줌렌즈 설치하고, 사진빨 잘
받으라고 편광필터 끼우고, 흔들리지 말라고 삼각대까지 설치하고...... 준비를 모두 마치자 갖은 포즈를 다잡으며 잔뜩 기대하는
모습을 보니 아예 등산은 물건너 간듯하다.
꽃속에 숨어서 폼잡고, 꽃가지
잡고서 폼잡고, 바위틈에 기대서 폼잡고....
“에라. 이왕 이렇게 된것 전용
기사가 되어주마. 실력발휘 한번 해보자”
역광으로 찍고, 줌인으로 찍고,
줌아웃으로 찍고, 포커스 촬영으로 배경을 흐려서 찍고...
마음 먹은대로 카메라를 조절하여
촬영할 수 있는것이 수동카메라의 큰 매력이다.
필름카메라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지금도 이놈의 수동카메라의 매력 때문에 어렵사리 필름을 구해서 찍기도 하지만 필름사진 현상소가 드물어 현상도 안하고
버려둔 필름이 지금도 설합 여기저기에 잔뜩 굴러다닌다.
그날 36장짜리 필름 한통을 혼자서
거의 다 잡아먹고 잔뜩 기분이 고조된 K양, 인원수대로 캔맥주까지 한통씩 쏘기까지 했는데....
문제가 터진것은 3일도 못가서였다.
다음날 아침일찍부터 필름을 달라고
하더니 구내 현상소에 맡기고 결과가 궁금했던지 하루에도 몇 번씩 현상소를 들락날락 하는것 같더니 등산갔다온 후 이틀만에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점심식사후 느긋하게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새파랗게 독이오른 고양이같은 모습으로 발기발기 찢어버린 사진쪼가리들을 내 책상에 던지며 대뜸 하는 소리가 “짐승같은
놈. 사람을 뭘로 보고.... 쓰레기 같은자식... ” 어쩌구 하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뛰쳐나가는 것이 아닌가? 눈이 둥그래져
몰려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무실요원들에게 나도 영문을 모르니 그저 살레살레....
그날부터 이건 냉전이 아니고
얼음가루가 펄펄 날리는 빙전(氷戰)이었으니....
틈만 나면 그녀는 죄없이 가련한 한
남성을 [짐승같은 구제불능 쓰레기]로 만들기 위해 동료규합을 위한 전면적 외교전에 나서고....
어쩌다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오면
불쌍한 남자들은 영문도 모른채 눈치보기에만 급급하고....
급기야 견디다 못한 사무실
동료들까지 나서서 사과하고 달래라고 압력을 넣는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나 알아야 사과를 하던지 말던지 하지....
다음날부터 수많은 여직원들의 야릇한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다.
나만 보이면 모여서 소곤거리며 무슨
치한처럼 쳐다보고 지나가면 뒤에서 손가락질 하며 킥킥대고,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던 여직원들에게 까지 소문이 나서 졸지에 영문도
모르고 유명인사가 되버렸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더니 이건 봄철에 송화가루 대신 얼음가루가 펄펄 휘날리는 판이었으니....
급기야 소문이 소문의 꼬리를 물고
번져 나갔으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으니 온갖 상상력이 다 동원되어 온갖 설(設)이
난무했다.
누드사진을 찍어서 퍼뜨렸다는 말부터 내가 K양을 성추행을 했다는 끔찍한 소문까지 퍼져 나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