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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4. 11. 21. 22:16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 발발
남침 3일 만에 수도 서울 함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 · 25전쟁을 영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이라고 불러왔으며, 요즘 우리나라 많은 학자들도 그렇게 부르는 추세에 있다.
한국인들끼리 싸운 내전이면서 동시에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과 여러 유엔 회원국이 싸운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란 국제적인 호칭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각각 자기들 방식대로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운동'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1945년 8월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연합국 도움으로 이룬 해방이었기에 그들 결정에 의한 분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군대는 38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남한과 북한을 나누어 점령했다.
이 인위적 분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은 엄청난 고통과 함께 전쟁 위험성을 안게 되었다.
미· 소 관계가 냉전 상황으로 바뀌면서 38선은 두 개의 한국을 구별하는 영구적인 경계선으로 변해갔다.
러시아인들은 북한을 공산화하고 미국인들은 남한에다 서양방식의 정치제도를 도입시켰다.
1948년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소련군은 북한군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장 및 훈련지원을 한 반면에 미군은 국군에 대하여 극히 제한적인 지원을 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 발발 당시 군사력에서 북한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남한 병력 95,000명에 비하여 북한은 최소한 135,000명이었다.
북한군 가운데는 2차대전 때 소련군에 가담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중국군 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국군의 경우 전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데 비하여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 15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군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쌓아온 북한군의 전투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철의 장막 내에서 이루어진 북한군의 그러한 군사적 능력에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미국이나 서방 측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50년 초 "한국은 미국의 직접적인 방위권 밖에 있다"고 말한 미국무장관 애치슨의 성명으로 북한의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등 공산주의자들은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은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오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한국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북한은 남한과 유엔을 향하여 평화적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들을 연달아 내놓았는데, 그것은 전쟁 준비를 철저히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하여 북한군은 마침내 38선 전면에서 남침을 시작했다.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감행한 기습침략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외출을 나간 그날 한국군의 방비태세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중장비 없이 소총과 맨손으로만 싸워야 했던 국군은 북한군 진격을 막지 못하고 곳곳에서 무너져버렸다. 특히 전차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는데, 보유하고 있었던 대전차화기 2.36인치 로켓포가 적 전차 T-34를 전혀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침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은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은 남침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 자체가 그들에게 중요하여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그대로 두면 동맹국들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또한 일본에 대한 방위도 어렵게 되리라는 우려에서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신속하게 결단을 내렸으며, 6월 27일 유엔 안보리는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의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의 계산과는 달리 전혀 다른 국제전으로 변했다.
3년간의 전쟁에 직접 병력을 보내 참전한 국가는 공산 측의 경우 북한· 중국· 소련(조종사 제공)이었고, 대한민국을 지원한 나라는 미국을 비롯한 유엔 회원국 16개국이었다.
유엔군 가운데 대부분은 미군으로서 사실상 한국전쟁은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작전을 벌여 공산군 침략을 격퇴시킨 전쟁이 되었다.
다른 유엔 회원국 참전병력이 전부 합해 44,000명이었던 데 비해 미군은 최대 규모였을 때는 30만 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에 미군은 전투력에서 한국군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많은 약점을 노출시켰다.
한국에서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 원수도 처음에는 북한군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7월 중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8군 예하 4개 사단 가운데 3개 사단을 투입했는데, 전투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의 부대들이었다. 제8군은 미군들 가운데서 가장 질이 떨어진 군대로서, 약 75%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전투경험은 고사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을 얕잡아 보았으며, 미군과 유엔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북한군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과신했다. 그러나 오산· 안성· 공주· 대평리에서 잇따라 적의 강력한 공격을 당하고, 대전에서는 최초로 투입된 1개 사단이 거의 와해되는 참패를 당했다.
미군도 처음에는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2.36인치 로켓포를 사용하다가 대전전투에서부터 3.5인치 로켓포로 교체해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었다. 7월 말경 낙동강 지역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적 진격을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병력 및 물자를 증강하고 초전의 적 기습에 의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전쟁은 유엔군이 언제 어떻게 반격을 실시할 것인가가 관심사가 되었으며, 북한군이 결국 패배하리라는 데 대한 의문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선을 최초로 시찰한 6월 29일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 상륙작전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그는 북한군의 거칠 것 없는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수단은 적 배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적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선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이 배후를 칠 생각을 한 것은 맥아더가 아닌 다른 장군이라면 참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맥아더가 계획하는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행동을 완료해야 한다.
둘째, 인천항은 대규모 상륙함대가 자리잡기에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다.
상륙작전은 인천항에 앞서 먼저 월미도를 점령해야 하므로 아침에 월미도, 저녁에 인천을 점령하는 2단계를 거쳐야 한다.
셋째,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에는 곧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
미합동참모본부는 육군 및 해군참모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맥아더에게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천을 선택했다.
즉, 아군뿐만 아니라 적도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표를 찔러서 공격하면 전략적 기습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적은 인천을 허술하게 지키고 있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
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병력을 포함하고 있어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인 총병력은 13,000명에 이르렀다.
약 20%에 해당하는 이 병력은 인천시가지에서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냄으로써 지대한 공을 세웠다.
맥아더가 예상한 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이 인천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남쪽의 낙동강 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3일에 전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천 소식이 알려지면서 적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고 도주병이 나오더니 드디어 전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륙작전 개시 후 약 보름 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다. 적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북으로 도주한 자는 3만 명이 채 안 되었다.
맥아더 원수의 걸작 중에서도 걸작인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에서 전통적인 승리의 비법이 되어온 '망치(Hammer)'와 '모루(Anvil)'의 원리를 적용해 이루어낸 것이었다.
즉, 낙동강에서부터 정면공격에 의한 반격은 엄청난 손실이 따르므로 인천에 상륙해 모루를 만들고, 낙동강에서부터 망치를 휘둘러 그 안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개념의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이 작전은 맥아더 원수의 대담한 착상, 결단력, 필승의 신념으로 이루어낸 20세기의 칸나에(Cannae) 전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본국 정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는 마치 승리의 신으로부터 계시라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부하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빛나는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청천강 전투-중공군 인해전술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10월경 한국전쟁 상황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여세를 몰아 북한 지역 깊숙이 청천강 선까지 진격해 들어감으로써 그해 말까지는 전쟁을 끝내고 한국인들의 소원인 남북한 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낙동강에서부터 진격한 제8군은 38선 이남의 적을 거의 섬멸하고, 이제 그들에게는 38선 이북에 대한 군사작전을 어떻게 펼쳐서 김일성의 공산군을 완전히 제거하느냐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일찍부터 38선은 적 남침으로 말미암아 이미 무너졌으므로 여건이 성숙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으나, 미국정부는 38선 돌파에 대해 매우 신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에서 성공한 후 미국정부는 작전을 38선 이북으로 확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만 중요한 몇 가지 사항을 지키면서 작전을 벌일 것을 맥아더 장군에게 당부했다.
첫째, 소련군이나 중국군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만 북진하고 여하한 경우에도 한만 국경선 또는 소련과의 국경선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둘째, 국경 근처에서는 한국군으로 하여금 북한군 잔적을 소탕하도록 한다.
셋째, 군사작전 종료 후 한국의 정치적 통일문제는 유엔의 조치를 기다려야 한다.
맥아더는 제8군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도록 하고, 제10군단은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원산 상륙은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함으로써 그 의미를 잃고 말았다.
이는 복잡한 상륙작전보다는 모든 부대가 38선에서부터 진격했더라면 훨씬 좋은 결과에 도달했으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10월 19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바로 그날 처음으로 중국군이 압록강을 은밀히 건너오기 시작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으로 변했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한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들은 북한 땅에 미국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그들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장차 소련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스탈린으로부터의 참전 요청을 수락해야만 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직접 나서게 되면 미· 소 간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을 염려하여 중국이 대신하여 북한을 지원해주기를 원했었다.
미국은 중국 당국이 경고를 보냈음에도 단순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감히 도전하지 못하리라는 깊은 자만심과 방심에 빠져 있다가 청천강에서 중국군과 충돌했다.
미국 정보부서는 중국군이 한반도에 침투한 지 약 열흘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정보체제가 허술했다.
10월 25일경 중국군과 최초 충돌한 뒤에도 유엔군은 적 규모와 기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격적 공세를 준비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으로 자취를 감춘 중국군에 대하여 유엔군은 적이 겁먹고 전투를 회피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11월 24일에는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25일 밤 청천강 북방과 묘향산 지역 일대에 숨어 있던 중국군으로부터 크게 기습을 당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중국군은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어대고 야수처럼 괴성을 지르며 쇄도해왔다.
야간에 방어하는 측의 불안감을 최대로 증폭시키는 고도의 심리전과 함께 인해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방심하고 있던 유엔군과 국군은 말 그대로 아닌 밤중 홍두깨식 습격을 당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중국군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국군 제2군단으로서, 예하 3개 사단이 거의 모든 진지에서 와해되었다. 미 제2사단도 군우리에서 중국군 포위망에 걸려들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패배로 인한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11월 말부터는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무조건 철수하고 보자는 심리에 빠졌으며, 12월 15일경에는 모두 38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그들은 과연 38선마저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자신을 잃었다.
1951년 신정 때는 다시 중국군 공세를 당하여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까지 물러섰다.
그 후 한참 지난 다음에야 그들은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간신히 38선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는 미국의 명장 맥아더 원수에게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으며, 이로 말미암아 결국 그의 명예스러운 50년 군대생활은 사령관직 해임이라는 불명예로 끝을 보게 되었다.
무려 30만 명이 넘는 적의 침투 사실을 모르고 무리한 작전을 취하다가 기습을 당했고, 또한 전투다운 전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철수만 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더욱이 패배 후에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노골적으로 본국정부 정책을 비판하기만 한 것은 최고위 군인답지 않은 행위로서, 이듬해 4월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해임을 당하는 모욕을 입게 되었다.
맥아더 이후 다행히도 한국전쟁에서는 새로운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훌륭한 지휘 하에 유엔군과 국군은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을 극복하고 전투력을 회복하여 중국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정토웅,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