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의정 민진장(右議政閔鎭長)
[생졸년] 1649년(인조 27)~1700년(숙종 26)
조선 영조 19년(1743)에 민진장 묘로 가는 길에 건립한, 높이 426cm의 화강암 비석. 옥개석에 여의주를 문 쌍룡을 조각하였다.
비문은 대제학(大提學)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1746)가 짓고 홍봉조(洪鳳祚)가 썼다. 조각 수법이 사실적이고 조각 솜씨가 뛰어
나다.
--------------------------------------------------------------------------------------------------------------------------------------------------------
우의정 민진장 신도비명병서(右議政閔鎭長神道碑銘并序) - 대제학 이재(李縡)
효종대왕에게는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이라는 신하가 있고, 문충공에게는 문효공(文孝公) 민진장(閔鎭長)이라는 아들이 있다. 문충공은 문학과 덕망으로 사림의 으뜸의 되어 마침내 우리 숙종의 정승이 되었고, 문충공이 작고한 지 10년도 못 되어 문효공이 또 정승이 되니, 논하는 자들이 “두 세대에 걸쳐 정승을 지낸 집안이 예전에 더러 있지만 부자간에 충효가 필적한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하였다.
인도(人道)는 충효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임금을 섬기고 부모를 섬김은 그 일은 다르지만 이치는 똑같다.
심지어 국가에 온 힘을 바쳐 죽은 뒤에야 그친 것도 같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또 크나큰 효이다.《서경》에
“너는 오직 너의 가르침을 공경히 밝혀서 선왕을 받들고 따라 너의 선조에게 짝하라.”
라고 하였으니, 문효공이 이런 사람이다.
공의 자는 치구(穉久)이다. 민씨(閔氏)는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고려 때 상의 봉어(尙衣奉御)를 지낸 칭도(稱道)가 처음으로 족보에 나타나는데, 이후 대대로 이름난 인물이 배출되었다.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낸 휘 기(機)와 관찰사를 지낸 휘 광훈(光勳)은 모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맑은 덕과 질박한 행실을 지녔는데, 이분들이 문충공의 조부와 부친이다. 문충공의 계배(繼配)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관찰사 처윤(處尹)의 따님으로, 숭정(崇禎)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 10월 을해에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5세 때에 홍 부인(洪夫人)이 병을 앓았는데, 그 나이에 이미 뜰에서 절하며 하늘에 빌었다.
기유년(1669, 현종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 2)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신년(1680)에 문충공이적적(謫籍)에서 기용되어 재상에 제수되고, 공도 전설사 별검에 제수되었다.
인경왕후(仁敬王后) 국상 때 감조관(監造官)의 공로로 의금부 도사로 승진하였다가 체차되어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
외직으로 나가 지평(砥平)과 양천(陽川) 두 고을을 다스렸다.
병인년(1686, 숙종 12)에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문충공은 관찰사 공이 장원하던 해에 태어났고, 공은 문충공이 장원하던 해에 태어났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또 장원급제하였다. 자궁(資窮)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그날로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어 차례로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병조 참지로 있다가 외직을 구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나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소한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서용되어 다시 승정원으로 들어왔다.
기사년(1689, 숙종 15)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 우암(尤庵) 선생과 상국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연이어 사사(賜死)되었으나, 흉당들이 문충공은 중전의 존속(尊屬)이라 하여 오히려 두려워하는 뜻이 있었다. 4월에 상께서 특별히 문충공을 파직하였고 얼마 뒤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어 사제(私第)로 돌아왔다.
7월에 이원정(李元禎)의 아들 이담명(李耼命)이 복수할 심사로 자신의 사당(私黨)을 사주하여 합계(合啓)를 내니, 마침내 문충공이 서쪽 변방에 위리안치되었다. 중도에 또 가율(加律)하라는 청이 있었다. 임신년(1692, 숙종 18)에 문충공이 배소(配所)에서 세상을 떠나니, 공이 관을 호송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이어 시묘살이하였다.
갑술년(1694)에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자, 상께서 가장 먼저 문충공의 작위를 회복시켰으며, 공이 상기(喪期)를 마치자 특별히 예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문충공이 무함당한 정상을 자세히 진술하니, 상께서 후한 비답을 내려 철저하게 의혹을 풀어주셨다. 도승지와 공조ㆍ호조의 참판으로 옮겼다.
을해년(1695)에 형조 판서로 발탁되었다. 가을에 크게 흉년이 들자, 조정에서 문충공이 일찍이 신해년(1671, 현종 12)에 진휼하는 일을 맡아 자신을 잊고 직분을 다했던 일을 논하여 공을 진휼청 당상으로 삼았다. 공은 매일 새벽에 교외로 나가 진휼을 감독하고 돌아와서는 또 송사를 다스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공이 재주와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아뢰어 한 직임에서 해임되기를 청했으나, 상께서 하교하기를,
“경이 부지런하고 명백하게 일 처리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허락할 수 없다.”
라고 하셨다.
공이 마음을 다해 구휼한 덕분에 백성이 굶어죽지 않았으니, 공의 수레가 시장을 지날 때면 시장의 백성이 모두 손을 모으고서 ‘살아계신 부처님, 살아계신 부처님’이라고 하였다. 2년간 옥사를 관장하면서 대체(大體)를 지키기를 힘쓰고 항상 신중하게 처벌하려는 뜻을 지녔기에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 주전(鑄錢)을 시행하여 몰래 주전하는 것을 엄금하고는 이를 범하는 자를 일체 사죄(死罪)로 논했는데, 공은 죄를 구분하여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대신이 법장(法杖)의 규격을 점점 키워서 위엄을 세우려고 하자, 공이 또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이 혹 너무 느슨하게 처벌한다고 걱정하였지만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성부 판윤을 거쳐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피로가 쌓여 병이 들자 상께서 누차 의원을 보내어 보살피셨다.
대신이 그 직임에서 해임시키자고 아뢰었다. 한성부 판윤, 수어사, 지중추부사, 의정부 참찬,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형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무인년(1698, 숙종 24)에 판의금부사에 발탁되고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대사성 송상기(宋相琦) 공이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제생(諸生)에게 쫓겨나자, 사간 정호(鄭澔) 공이
“이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니, 먼저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 생각하여 마침내 상소하여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죄를 논하고 이어 갑자년의 일을 언급하였다.
이에 상이 몹시 노하여 하교하기를,
“시비를 막론하고 공가(公家)의 문자가 아닌 만큼 당시 대신이 이 일을 확대하여 조정에 아뢴 것은 매우 실착이다. 고요한 평지에 파란을 크게 일으켰으니 내가 지금도 후회스럽다.”
라고 하셨으니, 문충공이 좌상으로 있을 때에 윤증을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말도록 청했기 때문이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당시 문충공의 본의를 모두 피력하고 이어 아뢰기를,
“갑술년(1694, 숙종 20) 초에 전조(銓曹)에서 윤증을 총용(寵用)한 것은 전혀 타당한 이유가 없고 기사년(1689, 숙종 15)의 여습(餘習)을 따른 것입니다. 지난날 임금과 정승이 격의 없이 함께 논의하던 정사에 비하면 변모(弁髦)보다도 쓸모가 없으니, 조정에서 윤증을 대우한 것이 너무 경솔하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애통한 마음이 있었지만 지난 일을 들추어 다시 분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묵묵히 지금까지 주저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가 이처럼 지엄하시니, 이는 세상을 걱정하던 선신(先臣)의 정성스런 뜻이 도리어 파란을 도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슴을 치며 원통함을 부르짖는 신의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윤증의 당여인 조의상(趙儀祥)과 이봉서(李鳳瑞) 등이 번갈아 일어나
“오늘날 윤증을 배척하는 자는 단지 사생(師生)의 의리만 알고 부자(父子)의 윤리는 알지 못한다.”
고 비난하자, 공이 연이어 글을 올려 변론하기를,
“사람은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니 똑같이 섬겨야 합니다. 부자지간은 은혜를 중시하고 군신지간과 사생지간은 의리를 중시합니다. 은혜는 본디 때때로 의리를 가리지만 의리는 또한 끝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신하 된 자가 자신의 아버지가 임금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번에 미워하고 원망하여 공공연히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어 헐뜯는다면 아버지에게 효도했다고 하여 임금에게 불충한 죄를 용서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만약 윤증이 참으로 그 스승의 학문이 순정하지 못함을 알았다면 40년간 문하에 출입하면서 무엇을 공부하였기에왕패(王伯)와 의리(義利)의 설을 개인적인 원한이 드러난 뒤에야 꺼냈단 말입니까. 유현이 유현이 되는 까닭은 의(義)를 봄이 분명하고 의에 처함이 정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어찌 함부로 유현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고는 병장(病狀)을 올리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상께서 온유하게 돈면하셨다.
당시 상께서 이어(移御)하려 하였는데, 비용이 과다하게 많이 들었다. 공이 재이(災異)로 인해 경계를 올려 검약하시라고 청하자, 상께서 가납하셨다. 단종부묘도감(端宗祔廟都監)의 공로로 숭록대부에 올랐다.
경진년(1700, 숙종 26) 정월에 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다섯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상께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면유하셨다. 당시 공의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아 어의가 와서 보살피고 보내신 약물이 이어졌지만 끝내 숙배하지 못하고 3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상께서 슬퍼하시며 조회를 정지하고 규례대로 상사(喪事)를 돕게 하였다. 사대부들은 공과 면식이 있건 없건 간에 모두 애통해하였으며 군민(軍民)이 서로 조문하기를,
“어진 재상이 돌아가셨으니 우리들은 어찌할까.”
하였다. 처음에 여주(驪州) 문충공의 무덤 뒤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광주(廣州)로 옮겼고, 계해년(1743, 영조 19) 4월에 다시 여주 구부곡(具富谷)으로 이장하였다.
공은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기색이 온화하였다. 어려서부터 깊은 사랑으로 부모를 섬겼다. 문충공이 몹시 엄격하게 공부시켜 날마다 회초리를 쳤으나 공은 더욱 공손히 순종하였으니, 계부(季父) 문정공(文貞公)이 참으로 효자라고 늘 찬탄하였다. 저녁마다 손수 문충공의 침소에 군불을 지펴 그 온도를 살펴가며 불을 조절하였다.
문충공이 만년에 풍비(風痹)를 앓아 움직이지 못하자, 공이 좌우에서 부축하여 모두 마땅하게 해드렸으며 십 년 가까이 밤에도 옷의 띠를 풀지 않았다. 배소(配所)에서 모실 때에는 또 부녀자가 곁에 없어 공이 의복과 음식을 모두 살폈는데 온 힘을 다하고 마음을 쓰느라 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하여 거의 실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시묘살이 할 때에는 조석상식(朝夕上食)을 반드시 몸소 돌보셨다. 이웃 고을 부녀자와 아이들도 공이 통곡하며 가슴 치는 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
홍 부인(洪夫人)이 기사년의 화를 당하여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을 앓다가 이어 정신병이 들고 말았다. 공이 문충공 곁에서 처음 그 소식을 듣고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다가 물러나 방 밖에 앉아서는 피를 쏟듯이 눈물을 흘려 삽시간에 소매가 다 젖었다.
그러다 다시 문충공의 곁에 나아가서는 평소처럼 온화하고 유순한 낯빛으로 모셨다. 갑술년 이후로 공무에 분주하였으나 매일 동트기 전에 대부인의 침실에 나아가 살피고, 모친을 위해 직접 얼굴을 씻기고 머리를 묶어주고 미음을 올렸으며 무슨 일로 아무개 관사에 나아간다고 아뢰었고, 퇴근해서는 또 얼굴을 뵙고 난 뒤에 나가서 빈객을 접하였다.
일가의 길흉과 대소사를 반드시 빠짐없이 고하여 대부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여 폐하지 않았다. 지극한 정성이 넘쳐흘러 얼굴빛과 말에 드러났으나 마음속으로는 깊이 애통해하여 남들과 웃고 말할 때에도 미간에 수심이 어렸다. 간간이 취해서 돌아올 때면 모친의 무릎에 누워 젖을 빨면서 갓난아이처럼 재롱을 부리다가는 이내 다시 눈물을 흘렸으니 집안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특별히 부인에게 월름(月廩)을 내렸으며, 연신(筵臣)이 또 공의 지극한 행실을 아뢰어 정려(旌閭)하였다.
공에게는 누이 한 명이 있는데, 문충공의 원배(元配) 신 부인(申夫人)의 소생이다. 누이의 아들이 일찍 부모를 여의자 공이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나의 선비(先妣)는 공의 사촌누이인데, 공의 우애로운 행실을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예전에 머리에 종기가 나서 몹시 위태로웠는데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라버니가 문충공의 장흥(長興) 적소에서 돌아와 소식을 듣자마자 나를 보러 왔는데 당시 이른 아침이었다.
오라버니의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된 것을 보고서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새벽까지 분주하게 의원을 찾아다니느라 서리가 엉겨 붙어 이처럼 되었다.’라고 하였다.”
라고 하셨으니, 이것을 들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친구는 지극히 구휼하여 아무리 자주 찾아와 도움을 청해도 전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죽은 친구는 시신을 염하고 고아를 보살피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으니, 이 때문에 추치(騶直)를 집으로 가져가는 일이 드물었다. 자신의 봉양에는 매우 박하여 귀하게 된 뒤에도 그러하였으니 밥상에 두 종류의 고기가 오르지 않았고 몸에는 갖옷을 걸치지 않았다.
공은 평소에 빨리 말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누가 무도한 짓을 해도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걸음걸이는 차분하고 점잖아서 동작이 법도에 맞았으니, 공적이나 사적인 회합에 나아갈 때에는 멈추고 나아감에 일정한 보폭이 있어서 조금의 어긋남도 없었다.
주량이 매우 커서 친구를 만나면 늘 함께 술을 마셨는데, 종일토록 마셔도 만취하지 않아 취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공경하고 삼갔다. 평소에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한 번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인 적이 없었다. 일용의 행사에 대체로 일정한 규범이 있어 창졸지간이라도 절대 구차하게 지나치지 않았으니, 관직을 맡아 다스릴 때에도 모두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처신하여 과격하게 부딪치지도 않고 무턱대고 따르지도 않았으며, 선헌(先憲)을 굳게 지키고 어지러이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지성측달(至誠惻怛)’ 네 글자를 마음에 보존하고 일에 드러내니, 그 덕행에 감화되어 사람들이 절로 신복(信服)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관리조차도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내외 대소의 관직에 어디서든 마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상께서는 기둥처럼 공에게 의지하고 조정 대신들은 공을 법칙처럼 여겨 비록 세도가 자주 바뀌고 시비가 진실하지 못해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이 공에게 미친 적이 없는데, 애석하게도 하늘이 공의 목숨을 빨리 앗아가 그 뜻과 사업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공의 부인은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판서 장간공(章簡公) 이성(二星)의 따님이다. 총명하고 단정하고 장중하여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다. 집에 괴이한 도깨비가 있었는데, 부인이 볼 때마다 꾸짖으니 귀물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공보다 2년 앞서 태어나서 공보다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모두 5남 3녀를 두었다. 재수(在洙)는 정랑이고, 계수(啓洙)는 판관이고, 안수(安洙), 학수(學洙), 덕수(德洙)는 모두 재주와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사위는 좌랑 홍중석(洪重錫), 판서 박사익(朴師益), 목사 이굉(李浤)이다. 장남의 맏아들 백남(百男)은 지금 선산 부사(善山府使)이고, 둘째 아들 백능(百能)은 사남의 후사가 되었다.
차남의 아들 백붕(百朋)과 삼남의 아들 백징(百徵)은 모두 일찍 죽었다. 오남은 친척의 아들 백헌(百憲)을 후사로 삼았다. 현감 홍채보(洪采輔), 박대원(朴大源), 진사 이명집(李命集), 이명채(李命采), 사인 이명래(李命來), 이명계(李命棨)는 세 사위의 아들이다.
나는 일찍이 문충공은 강엄하고 고결하며 공은 온화하고 너그러워 그 자품이 같지 않은 듯하다고 논하였다. 그러나 공은 음양과 선악의 구분에 대해서는 엄정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일찍이 동춘(同春) 선생의 별집(別集)을 교정하는데, 문집 속에 남구만(南九萬)과 윤증이 지은 제문(祭文)이 들어 있었다.
공은 직접 그 이름을 지워버리며
“남구만은 명분과 의리에 죄를 얻었고 윤증은 윤리를 무너뜨렸으니 모두 그대로 둘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예전에범 충선(范忠宣)이 양쪽을 조정하여 자신을 보전한 일로 군자에게 비난을 받았고, 어떤 이는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의 가풍을 실추시켰다고 하였다. 공이 재능과 지모로 임용되어 언의(言議)를 세상에 다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선악의 변별에 이처럼 엄격했으니, 가령 범충선공이 공을 보았다면 또한 필시 부끄러운 기색이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혹여 공을 단지 장후(長厚)한 사람이라고 지목한다면 이는 공을 아는 자가 아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생민의 큰 윤리는 / 生民大倫
충성과 효도라네 / 曰忠與孝
참으로 문효공은 / 允矣文孝
문충공을 닮았네 / 文忠克肖
자식의 효성뿐만 아니라 / 匪直子孝
신하의 충성도 본받았네 / 臣忠是效
대대로 계승했다 할 수 있으니 / 是謂世濟
그 아름다움이 함께 빛나네 / 厥美並耀
백유의 정성과 사랑이 / 伯兪誠愛
어린 시절부터 있었네 / 粤在幼小
장원급제로 기대에 부합하니 / 嵬科叶望
재주와 덕망이 매우 높았네 / 才德孔邵
양구의 때를 만나 / 陽九之會
육 년을 근심 속에 보냈네/ 六載憂悄
성조에 정국이 바뀌니 / 聖朝更化
먼저 부름을 받으셨네 / 首膺收召
기운 것이 평평해지니 / 旣平其陂
높은 관직을 내리셨네 / 爰畀顯要
충근하고 정직하니 / 忠謹正直
벼슬아치의 의표라네 / 搢紳儀表
양가죽 차림 의젓하고/ 羔皮委蛇
그 용모는 훤칠하셨네 / 有顒其貌
왕께서 말씀하셨네, 흉년이라 / 王曰歲飢
우리백성이 굶주리고 있도다 / 我民有殍
너는밭두둑과 도랑을 내라 / 爾宜疆畎
이미 잡초를 제거하였으니/ 敷菑是了
공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아뢰었네 / 公拜稽首
신이 다행히도 하교를 받들었으니 / 臣幸奉敎
힘을 다하여 왕명을 수행하여 / 奔奏宣力
불속에서 구제하듯 하겠습니다 / 若救焚燎
미음을 먹이고 죽을 먹이니 / 旣糜旣粥
병자들이 이에 치료 되었네 / 病者以療
백성은 배부름에 즐거워 / 民樂乳哺
노래를 부르며 웃었네 / 載歌載笑
문충공의 사업 크게 계승하여 / 述事有大
이어서 정승에 올랐네 / 繼登廊廟
포부를 다 펼치려는데 / 將究厥施
아, 하늘이 돕지 않네 / 嗟天不弔
방아타령 멈춘 슬픔/ 輟舂之悲
만백성이 함께하였네 / 普同庶兆
국사에 온 힘을 바치니 / 盡瘁事國
공과 같은 사람 적다네 / 如公者少
살아서는 순응하고 죽어서는 편안하니/ 生順歿寧
효심에 부족함이 없었네 / 孝心克恔
공이 모친을 섬김은 / 若公事母
온통 충애의 마음이었네 / 忠愛纏繞
옛 효자처럼 / 譬古孝子
태도를 잘 변화시켰네/ 其變惟巧
젖을 빨다가 우는 모습 / 吮乳且泣
보는 자들도 슬퍼하였네 / 觀者色愀
휘황한 정려문이여 / 煌煌棹楔
바라봄에 빛나도다 / 有光瞻眺
범 충선공은 / 如范忠宣
문정공을 계승하였네 / 文正是紹
저한나라 위평을 / 彼漢韋平
어찌 견줄 수 있으랴 / 曷足量較
그러나 충선공은 / 然忠宣公
양쪽을 조정했다는 비난 받았네 / 調娛有誚
공은 시비를 분간함이 / 公辨是非
명백하고 준엄하였네 / 明白峻峭
공의 두터운 덕을 따져보건대 / 原公厚德
사람들이 그 은덕 한껏 받았네 / 人莫不飽
또한 일찍이 / 亦嘗絶去
약삭빠르고 잘난 척하는 자들 끊어버렸네 / 便儇厲皎
오직 그 언의는 / 惟其言議
농조를 통렬히 경계하였네 / 痛戒籠罩
공의 풍채와 품격 날로 멀어지고 / 風猷日邈
훌륭하신 그 모습 날로 아득하네 / 典刑日藐
장래의 후손들을 / 有來後昆
그 누가 가르칠까 / 誰飭誰詔
충효를 권면함에 있어 / 課忠責孝
가슴 치며 그리워하네 / 我思有摽
이에 이 시를 들어 / 爰揭斯詩
무덤에다 새기노라 / 以銘阡垗
[脚註]
[주01] 우의정 민공 신도비:
이 글은 민진장(閔鎭長, 1649~1700)의 신도비이다. 민진장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구(稚久),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02] 적적(謫籍):
유배 중인 사람의 명단이다.
[주03] 자궁(資窮):
당하관(堂下官)으로서는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는 최고의 품계로, 정3품 통훈대부를 말한다.
[주04] 법장(法杖):
법률로 정해진 규격에 따라 만든 신장(訊杖)이다.《경국대전》〈형전〉에서 규정한 신장은 길이 3자 3치로, 윗부분의 1자 3치까지
는 원경이 7푼, 아랫부분의 2자까지는 너비가 8푼에 두께가 2푼이다. 영조척(營造尺)을 기준으로 사용하여 만들었다.
[주05] 대사성 …… 쫓겨나자:
1698년(숙종 24) 송상기(宋相琦)가 대사성에 제수되자, 윤증(尹拯)을 따르는 유생들이 송상기가 일찍이 윤증을 공격하였다는 이
유로 배척하여 대사성에서 물러나게 하였다.《肅宗實錄 10年 8月 21日, 24年 9月 11日》
[주06] 갑자년의 일:
1684년(숙종 10)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윤증을 유현(儒賢)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청하여 숙종이 윤허하였던 일
을 말한다. 정호가 윤증의 죄를 논하는 상소에 “고(故) 상신 김수항과 민정중이 백성의 윤리가 막히고 세상의 도의가 무너지는 것을
크게 근심하여, 유신(儒臣)으로 대우할 수 없다는 뜻으로 탑전에서 아뢰니, 성상께서 특별히 그 뜻을 받아들여 주셨기 때문에, 사문
(斯文)이 거기에 힘입어 실추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였다.《肅宗實錄 24年 10月 20日》
[주07] 왕패(王伯)와 의리(義利)의 설:
윤증은 임술년(1682, 숙종 8) 박세채(朴世采)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고 의리와 이욕을 병행한다.[王伯幷用,
義利雙行.]”라고 하면서 송시열을 거침없이 공격하였다. 이 말은 원래 주자(朱子)가 평소 경계하던 것으로, 윤증은 송시열의 학문
적 태도가 이를 범하여《대학장구》의 성정(誠正) 공부에 어긋난다고 비난하였다.
[주08] 추치(騶直):
관원이 녹봉 이외에 마부의 급료조(給料條)로 받는 금곡(金穀)이나 포백(布帛)을 말한다.
[주09] 범 충선(范忠宣)이 …… 하였다:
범충선은 범순인(范純仁, 1027~1101)으로,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충선이다. 범중엄(范仲淹)의 아들이다. 범순인은 조제보합
론(調劑保合論)을 주장하여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과 원우(元祐) 제현의 구법당(舊法黨)을 조정하려고 하였는데, 당
시에 채확(蔡確)이 원우 제현에게 논박을 받고 유배되자 범순인이 너무 지나치다며 채확을 구하려 하였다.
주희(朱熹)는 이에 대해 “뒷날에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을 쓴 것이니, 이 역시 사심(私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라고 논하
여 겉으로는 조정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후일 보신책(保身策)을 세운 것이라고 비난하였다.《宋史 卷471 姦臣列傳 蔡確》《經濟
文衡 後集 卷14》
[주10] 백유(伯兪):
한(漢)나라 때의 효자인 한유(韓兪)의 자이다. 백유가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았는데 눈물을 흘렸다. 이에 어머니가
“다른 날은 매를 때려도 울지 않더니, 지금은 무엇 때문에 우느냐?”고 하자, 백유가 “전에 회초리를 맞을 적에는 몹시 아팠는데 지
금은 어머니의 기력이 없어서 아프지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웁니다.” 하였다.《小學 稽古》
[주11] 양구의 …… 보냈네:
1689년 기사환국부터 1694년 갑술환국에 이르기까지 6년 세월을 말한다. 양구(陽九)는 음양가(陰陽家)의 술어로, 큰 재액(災厄)
을 말한다.
[주12] 양가죽 차림 의젓하고:
고관(高官)의 검소한 생활을 뜻하는 것으로,《시경》〈고양(羔羊)〉에 “고양의 가죽 옷에 흰 실로 다섯 곳을 꿰맸도다. 조정에서 물
러나와 밥 먹으니 의젓하고 의젓하도다.[羔羊之皮, 素絲五紽. 退食自公, 委蛇委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13] 밭두둑과 …… 제거하였으니:
《서경》〈재재(梓材)〉에 “밭을 다스림에 이미 부지런히 잡초를 제거했으면 그것을 펴서 닦아 밭두둑과 도랑을 낸다.[惟曰若稽田,
旣勤敷菑, 惟其陳修, 爲厥疆畎.]” 하였다.
[주14] 방아타령 멈춘 슬픔:
대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秦)나라의 오고대부(五羖大夫) 백리해(百里奚)가 세상을 떠나자, 남녀가 모두 눈물
을 흘리며 동자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방아 찧는 사람들은 절구질을 멈추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史記 卷68 商君列傳》
[주15] 살아서는 …… 편안하니:
장재(張載)의〈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내가 순응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다.[存吾順事, 沒吾寧也.]” 하였는데, 주희(朱熹)
는 이 구절을 “효자의 몸은 살아서는 어버이를 섬김에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을 뿐이고, 죽어서는 편안하여 어버이에게 부끄러운
바가 없다.”라고 풀이하였다.《近思錄 卷2 爲學》
[주16] 옛 …… 변화시켰네:
《대대례(大戴禮)》〈증자사부모(曾子事父母)〉에 “효자는 어버이의 뜻에 맞추어 잘 변하므로 부모가 편안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앉아 있을 때에는 시동(尸童)처럼 하며, 서 있을 때는 재계하듯이 하며,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며, 말을 할 때면 얼굴빛을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한다.” 하였다.《禮記 曲禮上》
[주17] 한나라 위평(韋平):
한(漢)나라의 위현(韋賢), 위현성(韋玄成) 부자(父子)와 평당(平當), 평안(平晏) 부자를 말하는데, 부자지간에 정승이 된 사람들이
다.
[주18] 농조(籠罩):
새장 속에 갇힌 것처럼 묶인다는 뜻으로,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새로운 설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다
른 사람의 학설을 취하여 자신의 학설인 것처럼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
[原文]
右議政閔公神道碑銘并序。- 李縡
孝宗大王有臣曰文忠公鼎重。文忠有子曰文孝公鎭長。文忠以文學德望。爲士林冠冕。卒相我肅廟。文忠歿未十歲。文孝又入相。論者謂兩世秉匀。古或有之。而忠孝媲美則殆未有也。夫人道莫大於忠孝。事君事親。事則殊而理則一矣。至若盡瘁王室。死而後已。亦未嘗不同。則斯又孝之大者。書曰爾惟敬明乃訓。用奉若于先王。追配于前人。文孝公有焉。公字穉久。閔氏出驪興。自高麗尙衣奉御稱道。始見於譜。世有名人。諱機慶州府尹。諱光勳觀察使。並贈領議政。有淸德質行。是爲文忠公兩世。文忠公繼娶南陽洪氏觀察使處尹之女。以崇禎己丑十月乙亥生公。五歲洪夫人有疾。已能拜庭禱天。己酉司馬。丙辰除英陵參奉不就。庚申文忠公起謫籍拜相。公亦除典設司別檢。用敦事勞陞義禁府都事。褫拜工曹佐郞。外則砥平,陽川二縣。丙寅魁別試文科。文忠公生於觀察公壯元之歲。公之生又在文忠公壯元之歲。至是公又壯元。以資窮陞通政。卽日拜掌隷院判决事。冬爲同副承旨。序陞右副。兵曹參知。求外得楊州。未幾坐微事罷。尋叙復入銀臺。己巳士禍大作。尤菴先生,文谷金相國壽恒相繼有後命。而凶黨以文忠公爲坤宮尊屬。猶有顧畏意。四月上特罷文忠公職。已而仁顯王后遜于私第。七月李元禎之子耼命自託於復讎。嗾其私黨發合啓。文忠公遂栫棘於西塞。中道又有加律之請。壬申文忠公卒於謫中。公扶櫬歸葬。仍廬于墓。甲戌坤位復正。上首復文忠公爵。及公免喪。特除禮曹參判。公上疏悉陳文忠公被誣本末。優批洞釋。移都承旨,工戶參判。乙亥擢刑曹判書。秋大歉。朝議以文忠公嘗主辛亥賑事。忘身盡職。以公爲賑廳堂上。公每晨出郊監賑。歸又聽訟。無頃刻休暇。公自陳才力不逮。乞解一任。上曰知卿勤而詳明。不可許也。公殫心賙活。民得以不死。每軒車過市。市民皆攢手曰。活佛活佛。兩年掌獄。務持大體。常存欽恤之意。民自以不寃。朝廷方鑄錢。嚴禁盜鑄。犯者一切置死。公請區別用法。大臣欲稍大法杖以立威。公又執不可。人或病其太緩而終不撓焉。由漢城府判尹拜兵曹判書。積勞成疾。上累遣醫視之。大臣白解其職。拜判尹,守禦使,知中樞,參贊,大司憲。復爲刑書判尹。戊寅擢判義禁府事。爲戶曹判書。大司成宋公相琦爲諸生異論者所逐。司諫鄭公澔以爲此事關係甚大。當先正其本。乃抗疏論尹拯背師之罪。仍及甲子事。上怒甚。下敎曰。毋論是非。旣非公家文字。則當時大臣之推而上之於朝廷。大是失著。等閒平地。波瀾大起。予至今悔恨。蓋文忠公爲相時。請勿以儒賢待拯故也。公乃上疏。悉暴當時陳奏本意。仍曰甲戌初。銓曹之寵用尹拯。全無曲折。乃循己巳餘套。視前日君相都兪之言。不啻若弁髦。朝家之待拯。可謂太薄矣。臣嘗隱痛在中。而誠不欲提起往事。重惹紛紜。泯默遲回。以至於今。今聖敎之嚴如此。是先臣眷眷憂世之意。反爲推波助瀾之歸。臣之叩心號枉。當復如何。拯黨趙儀祥李鳳瑞等迭起詆詬。有曰今日之斥拯者。徒知師生之義。不知父子之倫。公連章辨之曰。民生於三。事之如一。父子主恩。君師主義。恩固有時而掩義。義亦終無所逃。假令爲人臣者。其父不得於其君而遽自疾怨。彰君之過。公肆謗訕。則其將謂孝於親。而恕其不忠之罪乎。又曰若使拯誠知其師之學欠於純正。則四十年出入門下。所請者何業。而王伯義利之說。始發於私怨旣形之後乎。儒賢之所以爲儒賢者。以其見理明而處義精也。於是而有失焉則何可猥加以儒賢之稱乎。仍呈病不出。上溫諭敦勉。時上將移御。浮費過多。公因災異陳戒。請從儉約。上嘉納。以端宗祔廟都監勞陞崇祿。庚辰正月。進拜議政府右議政。五疏辭。輒命史官勉諭。時公疾彌久。太醫來視。藥物交道。竟不能謝命。以三月十六日卒。上震悼輟朝。庀喪如儀。士大夫無識與不識。莫不衋傷。軍民相弔曰。賢相亡矣。吾其奈何。初葬驪州文忠公墓後。後移卜廣州。癸亥四月。復遷于驪之具富谷。公長身美髥。色溫氣和。自幼事親有深愛。文忠公課讀甚嚴。日加箠撻。而公愈益婉遜。季父文貞公常嘆曰。眞孝子也。每夕躬自爇火於文忠公寢所。視其冷煖而增損之。文忠公晩年患風痺。不能動作。公左右扶持。咸適其宜。衣不解帶者幾十年。及陪往鵩舍。又無婦女之在傍者。公於衣服饔飧之節。靡不管幹。竭力疲心。夜亦不能眠。幾至失明。廬墓之日。朝夕上食。必親視膳。隣里婦孺。聞公哭擗。爲之出涕。洪夫人當己巳之禍。憂畏生疾。仍成心恙。公始在文忠公側聞其報。若未有聞者。旣已退坐戶外。涕流如血。頃刻衣袖盡濕。及復就文忠公側則怡愉如平日。甲戌以後。奔走公務。而每天未明。就省大夫人寢室。親爲之沃盥總髮。進以粥飮。告之以以某事赴某衙。公退又反面而後出接賓客。凡一家吉凶大小事。必一一告知。不以夫人之未能省識而或廢之也。至誠藹然。見於色辭。而隱痛在心。雖對人言笑。眉攢憂愁。間或醉還。輒繞膝吮乳作嬰兒戲。而仍復泣下。家人不能仰視。及公下世。朝廷特致月廩於夫人。筵臣又白公至行。命旌其閭。公有一姊。文忠公元配申夫人出也。姊之子早失怙恃。公視之如己子。吾先妣公從妹也。稱公友于之行而詔之曰。吾嘗患腦腫極危而無救視者。吾兄歸自文忠公長興謫所。聞卽來見。時方早朝。見其髮鬚皤如。恠問之。曰達曙奔走以尋醫者。霜氣凝結而如此云。擧此而他可知也。故舊貧者周恤甚至。雖求丐甚數。而一不見厭色。有死者。殮屍恤孤。視爲己任。以是騶直鮮或入家焉。自奉甚薄。旣貴而猶然。案無重肉。身不衣裘。平生無疾言遽色。雖橫逆之來。未嘗一毫芥滯於心。步履安詳。折旋中度。凡於公私會集。進止有常。尺寸無失。酒戶甚寬。遇知舊輒與之共酌。雖終日飮不至沉醉。恭謹加於不醉時。平居危坐。不一欹側。日用行事。率有一定䂓模。雖倉卒造次之頃。絶無苟且放過。以至當官治職。皆用是道焉。愼始愼終。不激不隨。固守先憲。不喜紛更。常以至誠惻怛四字。存諸中而發於事。德化所孚。人自信服。雖奸猾之吏。亦不忍欺。是以內外大小。無適不宜。上意倚如柱石。朝紳視爲儀則。雖世道累嬗。是非無眞。而疵讁之言。未嘗及。惜乎。天奪之速。不能盡究其志業也。夫人宜寧南氏。判書章𥳑公二星女。聰明端莊。有女士風。家有魍魎之恠。夫人見輒叱斥之。鬼不敢近。先公二歲生。公歿後五年卒。擧五男三女。男在洙正郞,啓洙判官。安洙,學洙,德洙皆有才行。早死。壻佐郞洪重錫,判書朴師益,牧使李浤。長房男百男。今爲善山府使。次百能出爲四房後。次房男百朋,三房男百徵皆夭。季房取族子百憲爲後。縣監洪采輔,朴大源,進士李命集,命采,士人命來,命棨。三壻之子也。竊嘗論之。文忠公剛嚴峻潔。公和厚寬恕。其資稟似若不同。然公於陰陽淑慝之分。未嘗不嚴正。嘗參校同春先生別集。集中有南九萬,尹拯祭先生文。公手抹其名曰九萬得罪名義。拯斁敗倫紀。幷不可存也。昔范忠宣以調娛自全。見譏於君子。或謂之墜落文正家風。公則以才猷見用。言議不盡見於世。而其嚴於辨別如此。使忠宣見公。亦必有愧色矣。世之人或只以長厚目公則非知公者也。銘曰。
生民大倫。曰忠與孝。允矣文孝。文忠克肖。匪直子孝。臣忠是效。是謂世濟。厥美並耀。伯兪誠愛。粤在幼小。嵬科叶望。
才德孔邵。陽九之會。六載憂悄。聖朝更化。首膺收召。旣平其陂。爰畀顯要。忠謹正直。搢紳儀表。羔皮委蛇。有顒其貌。
王曰歲飢。我民有殍。爾宜疆畎。敷菑是了。公拜稽首。臣幸奉敎。奔奏宣力。若救焚燎。旣糜旣粥。病者以療。民樂乳哺。
載歌載笑。述事有大。繼登廊廟。將究厥施。嗟天不弔。輟舂之悲。普同庶兆。盡瘁事國。如公者少。生順歿寧。孝心克悛。
若公事母。忠愛纏繞。譬古孝子。其變惟巧。吮乳且泣。觀者色愀。煌煌棹楔。有光瞻眺。如范忠宣。文正是紹。彼漢韋平。
曷足量較。然忠宣公。調娛有誚。公辨是非。明白峻峭。原公厚德。人莫不飽。亦嘗絶去。便儇厲皎。惟其言議。痛戒籠罩。
風猷日邈。典刑日藐。有來後昆。誰飭誰詔。課忠責孝。我思有摽。爰揭斯詩。以銘阡垗。<끝>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정동면 부구리 산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