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 제172권 / 묘갈명(墓碣銘)
청송(聽松) 성 선생(成先生) 묘갈 음기(墓碣陰記)
아, 여기는 자(字)가 중옥(仲玉)인 청송 성 선생 휘(諱) 수침(守琛)이 묻혀 있는 곳이고 비석은 선비들이 세운 것이다.
선생은 독실한 학문과 청고한 몸가짐으로 정암 선생(靜菴先生) 조광조(趙光祖)를 스승으로 모시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고서는 그 길로 구원(丘園)에 자취를 묻고 벼슬을 모두 사양한 채 끝까지 도(道)를 지키다가 일생을 마쳤다.
처음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묘지(墓誌)를,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유사(遺事)를 율곡 선생(栗谷先生) 이이(李珥)가 행장(行狀)을 썼으며, 갈명(碣銘)은 퇴계 선생(退溪先生) 이황(李滉)이 짓고 썼던 것이다.
공의 아들인 우계 선생(牛溪先生) 혼(渾)이 그 글들을 빗돌에 새겨 세우려다가 난리 때문에 못하고 말았었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들이 세월이 더 가면 그대로 없어질까 염려하여 서로 의논 끝에 힘을 모아 상국(相國)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쓴 전액(篆額)까지 곁들여 새김으로써 일이 조금도 유감없이 진선 진미를 이루었으니 그 얼마나 잘된 일인가.
나라에서 처음에는 선생에게 집의(執義)를 추증하여 그의 높은 지조를 표하였으나 그후 우계 선생의 관직이 더욱 높아지자 추은(推恩)하여 다시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얼마 후 율곡 선생은 또 다사(多士)들을 창도하여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를 올렸는데 후인들이 또 우계 선생을 그곳에 배향했다.
아, 선생의 고고한 풍도와 뛰어난 지조는 두고두고 후세를 일깨울 수 있을 것이요, 게다가 우계 선생의 학문과 덕의(德義)가 훌륭하여 일대의 유종(儒宗)이 되고 있어 두 대가 계속 현달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전고(前古)에 드문 일이었다. 또 퇴계ㆍ율곡 두 선생이 행장과 비명을 썼으니 그것 역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여기 새겨진 퇴계 선생의 글씨는 그때 초본(草本)을 그대로 새긴 것으로 해자(楷字)와 초서(草書)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나자 모두가, “이퇴계의 수적(手蹟)을 비록 다른 글씨로 바꿀 수는 없지만 글자 획이 너무 가늘어서 쉽게 마모될 염려가 있으니 다시 그 줄거리만을 추린 글을 깊게 새겨 오랜 세월을 두고 읽을 수 있게 한다면 그 또한 영원히 사랑하는 마음이요,
또 끝없이 전하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하여, 내가 감히 그중의 한둘을 뽑아 기록하여 선생의 외증손(外曾孫) 윤선거(尹宣擧)로 하여금 비의 후면에다 크게 쓰도록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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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聽松成先生墓碣陰記
嗚呼。此聽松成先生諱守琛字仲玉衣冠之藏。而多士所樹之碣也。先生篤學淸修。師事靜菴趙先生光祖。己卯禍後。遂遯跡丘園。除官輒辭。卒抱道而終焉。始奇高峯大升誌其墓。成大谷運記遺事。栗谷李先生珥狀其行。而碣銘則退溪李先生滉文及筆也。嗣子牛溪先生渾將刻而樹之難故未就。近者士類懼久而遂廢。乃相議出力。並鐫仙源金相國尙容篆。則事遂盡美而無憾矣。其盛矣哉。朝廷初贈先生執義。以旌高節。其後牛溪先生官益顯。推恩加贈吏曹判書。旣又栗谷先生倡多士立書院以享之。後人又以牛溪先生侑焉。嗚呼。先生高風偉節。可以起數百世。而牛溪先生學問德義。蔚然爲世儒宗。仍兩世大顯。此前古所罕有。而退,栗二先生狀而銘之。此又世所難見者歟。所鐫退溪先生筆。蓋用當時草本。故楷草俱焉。功旣成。咸謂退溪手蹟。雖不敢以他筆易也。字畫頗細。恐易磨漶。請復深刻其大略。使百世可讀。則是亦愛無已而圖無窮之意歟。時烈敢撮其一二。使先生之外曾孫尹宣擧大書于石陰。<끝>
宋子大全卷一百七十二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