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봉선생유고(芝峯先生遺稿)
▲1918년 목활자본 이종영(李宗榮) 지봉유고(芝峯遺稿) 1책 완질.
[표제(表題)] 지봉집( 芝峰集)
[판심제( 版心題)] 지봉유고( 芝峯遺稿)
[판본(版本)] 목활자본
[발행사항] 발행처 불명
[형태사항]
2卷1冊 : 四周單邊 半郭 18.0 x 15.6 cm, 有界, 10行18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29.5 X 20.0 cm
[서(序)] 戊申(1908) 九月黃華節...聞韶 金道和(김도화) 序
[발(跋)] 歲癸丑(1918) 八月下澣 昌山 曺兢燮(조긍섭) 謹識
[발(跋)] 八世孫 [李]圭夏 謹識
[발(跋)] 壬申(1932) 榴花節 從後孫[李]秉灝(병호) 謹識
[소장처]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저자 이종영『李宗榮, 1551년(명종 6)∼1606년(선조 39) / 향년 55세』의 자는 희인(希仁)이고 호는 지봉(芝峰)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 의령에 거주하였다. 그는 1551년(명종 6년)에 아버지 주부 관(寬)과 어머니 인천 이씨 현감 수(守)의 딸 사이에 태어났는데 생애는 다음과 같다.
[강학]
그는 31세(1581년)에 성여신(成汝信,1546~1632), 곽재우(郭再祐,1552~1617), 이대기(李大期,1551~1628), 이대약(李大約,1560~?) 등과 더불어 서로 강마하였다(『부사집(浮査集)』).
[과거]
이종영은 41세(159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47세(1597년)에 복시에 실패한 뒤에는 다시 과장에 나가지 않았다.
[의병활동]
이종영은 42세(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의 창의에 협찬한 공으로 이등훈(二等勳)에 책록되었고, 55세(1605년)에는 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으며,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그는 1642년(인조 20년)에는 최영경의 신원소에 참여하였다.
[향사]
이종영은 1606년(선조 39)에 세상을 떠난 후 1847년(헌종 13)에 도계서원(陶溪書院)에 배향되었다.